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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일제유적지 1.구룡포공원 구룡포신사(神社)가 세워진 시기는 1913년 5월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구룡포 신사참배는 다른 지역보다 다소 일찍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구룡포에 신사가 있었다면서도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용왕당 건물이 신사일 것이라거나 일본절로 사용하던 구천주교 건물이 특이한 모습으로 볼 때 신사였다는 등 소문만 무성할 때 케이뉴스가 지난해 단독으로 취재해 신사가 아님을 처음으로 규명한 이후 다시 새롭게 밝혀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의 용왕당은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찾아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를 대충 묻고 그 위에 특별한 기초 없이 콘크리트를 타설해 용왕당을 세웠다. 이 때 주변에 있던 일부 돌을 비롯한 쵸우즈야까지도 같이 묻어 버렸으나 옆에 있던 신사의 담장은 그대로 이용됐다. 하지만 지난 6일 용왕당을 철거하던 포클레인에 의해 땅바닥에 묻혀 있던 쵸우즈야를 찾아내면서 최근 신사의 건립연도가 밝혀진 것이다.이처럼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제는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했다. 또한 일제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상징조작에서 나온 국민의식 통제책으로 특히 1930년대에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기만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실시하면서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서울 남산을 비롯한 전국 요소요소에 건립하고 참배를 강요했다. 특히 일제 말기엔 아주 심했다. 웬만한 면 단위 이상엔 하나씩 세웠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엔 소위 '황민화(皇民化)정책을 실시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신사를 세워 참배를 강요하게 했다.조선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면서 1936년에는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듬해는 기독교회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유명한 서울 남산의 조선신사는 1919년 7월에 시작해 1925년에 완공했다. 게다가 1936년 신사제도 개정에 관한 칙령 5건이 공포되면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신사제도가 확립됐지만 1913년에 세워진 구룡포신사는 타지에 비해 다소 빨리 세워진 경우다.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6월에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2천2백29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해 각급학교 등에는‘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했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백15만 9천명, 1942년에는 약 2백64만 8천명에 이른다. 특히 일부 신사의 경우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특정 지맥 위치에다가 일부러 세워놓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제는 카톨릭, 개신교, 불교신자 구분없이 모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일부 민족주의 성직자들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다가 일제에 의해 투옥되는 등 적지 않은 탄압을 받았으나 대부분 탄압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사 불태우기였다. 이 때문에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 철거되어 버렸다. 그나마 남은 것도 6.25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 파괴되었다. 또 돌계단 같은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신사 터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이중으로 된 특이한 담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구룡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던 곳이었으나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최근 용왕당 공사로 헐린데다 인근에 있던 구룡포천주교의 아홉번째 공소까지도 철거되면서 구룡포의 일제 흔적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출처] 구룡포의 일제 신사(神社)는 1913년에 건립돼 |작성자 케이뉴스 2.구룡포 일본골목 구룡포는 대게와 청어가 잡히는 포항 지역 최대 항구다. 항구 뒤로 ‘일본 골목’이 숨었다. 포항시 문화관광과의 김필호씨는 “1920년대 구룡포가 어업 전진기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집단 이주해 형성된 곳”이라며 “이렇게 일본 가옥이 집단적으로 남은 곳은 흔치 않다”고 설명했다. 삼각 지붕을 얹은 반듯한 목조 건물들은, 지금은 살림집으로 이발소로 복덕방으로 쓰인다. 이국적인 왜식 건축과 한국의 근대적 풍경이 기묘하게 결합돼 독특한 골목길을 만들어냈다.골목을 헤매다 가파른 계단 길을 마주했다. 일제 때 신사 터로 이어지는 계단이다. 계단 양쪽으론 공덕비 수십여 기가 일렬로 섰다. 원래 공덕비 앞면에는 신사 건립 기부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구룡포 사람들은 아마도 일본인이나 ‘친일파’였을 이름을 시멘트칠로 덮은 뒤, 공덕비의 앞뒤를 바꿔 다시 세웠다. 그리고 새로 나타난 앞면에 지역 발전에 이바지한 한국인들의 이름을 새겼다. 출처 : Tong - 애플스마일님의 여행통 3.토가와야스부로十河彌三郞 (오마이뉴스) 이러한 구룡포 항의 정수리에 일제 때 항만건설에 몸담은 한 일본인 업자의 공로를 기리는 ‘공덕비’ 탑이 아직도 산등성이에 턱 버티고 있다. 이 탑은 구룡포 공원에 있다. 폭 1.5미터, 높이 5미터나 되는 탑신은 구룡포 항을 향하고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자연석(나무화석(化石) 2기로 ‘ㅗ’자 형으로 세운 탑이다.탑의 앞과 뒷면은 시멘트로 덧칠해 비문은 볼 수 없지만 보는 이들에게 예사로운 탑이 아닐 것이라고 금방 짐작하게끔 한다.이 탑의 주인(?)은 누구일까? 왜 비문을 지웠을까? ‘ 일본 공덕비‘가 아직도 이 땅에 있단 말인가? 다른 곳도 아닌 호미곶 근처에! 저 탑은 구룡포 항 개발업체 회장인 ‘도가와 미사부로(十河彊三部) 공덕비‘다. 비석 앞면에는 이 일본인의 이름이 뚜렷하게 들어 간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리고 현재 충혼탑이 있는 곳에는 ’일본 육군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지.” 당시는 일제가 신사참배와 더불어 각종 기념일을 만들어 한국인들에게 강요하는 등 극성스런 황민화정책으로 조선민족 정신말살에 혈안이 된 때다.할아버지들이 언급한 일본 육군 기념일(3월 10일 : 일본군의 중국 봉천 입성일)이 1938년에 제정되고 그 후 본격적인 창씨개명 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된 역사를 더듬어 보니, 구룡포에서 자행한 일본인 만행이 단지, 한 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누가 왜, 탑과 비석에 시멘트를 덧칠 했습니까?” 질문을 하자, 네 분 할아버지들 사이에 약간의 긴장감이 돈다.“저 양반이 시멘트를 발랐어. 비석을 몽땅 뽑아버리든지 아니면 그냥 놔뒀으면 후세에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했을 텐데”라고 혀를 차시며 서아무개 할아버지를 쳐다보신다.“이 양반아! 해방이 되어 동네 청년들이 밧줄을 걸어 신사의 도리문을 부수고 시멘트로 왜놈 이름을 없앤 것이 잘못이냐? 당시에는 애국심으로 했어! 그런데, 오늘날까지 탑이 저렇게 흉하게 서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할아버지들의 신경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바로세우기에 대한 또 다른 각성을 촉구하는 채찍질로 다가온다. 친일잔재는 도처에 깔려 있다. 관련기관들 공적비 존재 알았으나 방치상태포항시의 문화 관련 기관들이 구룡포 공원안에 ‘공적비’ 존재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포항시 관광과 관계자는 “구룡포공원이 일본 신사 자리고탑이 일본인 공적비란 것도 알고 있다”며 “그러나, 구룡포 공원부지가 ‘적산토지’로 분류돼 포항시가 제대로 관리 못했다. 좀 더 실태파악을 한 후 대책수립에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포항시청 홈페이지에는 ‘구룡포 개척자 유공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포항문화원 관계자는 ”공덕비의 존재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역사적 기록으로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산도 많지 않다“며 "공덕비와 관련 된 별도의 대책은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비석이 뭔지 알 수있는 표지판조차 없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자 “검토해 보겠다”고 답했다.작년 12월 말에 ‘탑 주인공(?)’의 후손 30여명이 탑 앞에 경배했다 한다. “기자 양반, 저 탑과 비석에 새겨진 글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할아버지, 친일 극복의 마음을 모으면 방법은 찾을 수 있겠지요.“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 저 탑은 철거해야 해! 시멘트 칠한 장본인으로서 비문을 꼭, 보고 싶네. 그래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야.87세 할아버지께서 반드시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적어 주신다. 덧붙이는 글 | '지역 사회와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신 분들과 공동으로 연속 기사를 쓸 예정입니다. 관련 정보를 가지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016-815-2194
이들 주민들은 용왕당이 있던 구룡포공원 아래쪽에 위치한 약 3백m의 거리에 이르는 적산가옥 거리를 근대문화재로 등록하고 일제시대 때 부흥했던 항구도시 구룡포를 의미있게 재구성해 복원을 해도 시원치 않을 역사적 흔적을 아예 작정하고 오히려 뭉개는 발상은 또다시 지역민들의 의식을 의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일반주택의 수백 배 가치가 있는 신사유적이 있는 담을 철거하면서 일제시대 역사문화거리 조성을 한다는 것은 앞뒤 논리가 맞지 않게 됐다고 강조했다.이에 구룡포리에 사는 이 모 씨는 “구룡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깊은 심장인 신사(神社) 흔적을 뭉개면서 일본인가옥만을 복원해 관광자원화 한다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 관광개발이 될 것”이라며 이날 철거를 추진한 수산관련단체를 질타했다. 용주리 김 모 씨는 “추진위가 그동안 고생한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 지역주민과 호흡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몇 사람이 주관적으로 나서서 추진하다 교감이 없어 벌어진 것 같다”며 “지역민들이 공감하도록 많은 지역민들이 동참해 설득하고 홍보를 못한 게 아쉽다“며 추진위도 나무랬다.한편 지난해 8월 16일구룡포수산단체 대표를 비롯한 구룡포 5리와 6리에 거주하는 주민 10여명이 구룡포수협 2층 회의실에서 용왕당 개보수에 관한 의견을 개진할 때, 철거를 하면 건축법상 신축허가가 불가능한 공원지역이니 전면대수선을 하자고 결론을 내렸으나 최근 갑자기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케이뉴스=정태현기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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