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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 원조(遠祖)
고려대장군 충청도 도지휘사 판사재시사 임비(林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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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는 고려 충렬왕조 때의 충청도 도지휘사 판사재시사 휘(諱) 비(庇) 대장군공을 원조로 모시고 있다 . 공은 고려 충렬왕이 세자 시절에 원나라와 화의를 위해서 다녀 올 때 호종하셨으며,
원과 화의할 무렵의 혼란기와 무인의 오랜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끝까지 충렬왕을 시종 보좌한 공로로 휘 비 공은 1281년 2등공신이 추록되어 토지와 하인, 철권을 하사 받았으며 벼슬은 대장군 충청도 도지휘사 판사재시사에 올랐다. |
원조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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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는 원래 휘(諱) 비(庇) 공으로 시조를 삼았는데 옛부터 전해오는 말을 들어보면 대장군공 위로도 또 여러 대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있었다했는데 세대가 아주 멀고 문적을 증거 할 수 없어 지금 상고해서 밝힐 수가 없고. 예로부터 전문해오는 말이 이러함으로 이제 맨 머리에 오르는 할아버지에게 곧 바로 시(始) 자를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우선 근세의 다른 성씨 족보 예규를 참고하여 1800년 경신보 때부터 원조(遠祖)라고 썼다. |
고려 통일 대전 충신각
감무공 휘(諱) 탁(卓) 소윤공 휘 봉(鳳) |
9세 감무공 휘 탁 께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굳게 지키시고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으로 들어가셨다. 그후 태조대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으시고 드디어 아들 소윤공 휘 봉, 손자 휘 시소 3대가 낙남하시어 1932년 회진에 은둔하시니 이로부터 자손들이 세거하게되어 본관을 회진으로 하였다. 그후 회진이 지금의 나주에 속하게 됨으로 21세 악정공께서 문중의 결의를 엳어 본관을 나주로 개칭하여 1800년에 펀찬한 경신보 족보부터 본관을 나주로 사용하였다. |
도선묘 -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 임을산- |
도선묘는 9세 감무공 휘 탁(卓)의 묘소로서 나주 임씨의 현존하는 가장 윗대의 산소이며, |
♣나주임씨 (羅州林氏)의 분파♣ |
나주임씨의 분파는 1800년 경신보 때부터 본관지 회진을 근거지로 하여 귀래정공 휘 붕(鵬)의 아드님 4형제로 하여, |
16世장수공 휘 익(益) |
장자 장수공 휘 익을 파조로하여 나주임씨 중 가장 많은 자손을 거느린 장수공파와, |
16世정자공 휘 복(復) |
차자 정자공 휘 복을 파조로하여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
16世절도공 휘 진(晉) |
3자 절도공 휘 진을 파조로한 절도공파, |
16世첨지공 휘 몽(蒙) |
4자 첨지공 휘 몽을 파조로한 첨지공파 |
7世금수공 휘 광수(光秀) |
6세 휘 돈세의 차자 휘 광수를 파조로 한 금수공파와, |
11世도정공 |
10세 소윤공 휘 봉의 차자 휘 유소를 파조로 하여 |
11世가의공 휘 수소(遂巢) |
3자 휘 수소를 파조로 한 가의공파, |
13世진사공 휘 귀량(貴梁) |
12세 시정공 휘 석주의 차자 진사공 휘 귀량을 파조로 한 |
15世생원공 휘 학(鶴) |
14세 참판공 휘 평의 차자 생원공 휘 학을 파조로 한 생원공파, |
15世동지공 휘 안(晏+鳥鷃) |
14세 참판공 휘 평의 3자 동지공 휘 안을 파조로 한 동지공파, |
의 10개 파로 분파 되었으며 인구는 30여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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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는 고려의 충신인 감무공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 벼슬을 나아가지 않아 가문이 한미하여지자 14세 참판공 휘 평께서 처음 관직에 나아가 문호를 열어 중흥조이신 15세 귀래정공이 승지 등을 거처 경주부윤에 오르신 후 이조에서 문과 54분에, 호당 2분, 무과급제 73분, 진사와 생원이 165분이며 음직으로는282분이고 우의정이 한분, 판서가 7분, 문자시호 1분, 은일1분, 공신 6분, 시호 7분이시며, 부조묘사당 1곳, 서원이 4곳, 영당이 2곳있다. ♣부조묘는 14세 참판공 휘 평을 모신 사당이다. 공의 자는 균보 이시며 1462년에 태어나서 무관으로 진출하여, 종3품직인 병마우후를 역임하고 1522년에 돌아가신 분이시다. 부조묘란 불천위 사당을 뜻한다. 원래 돌아가신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묘를 설치하는데 5대가 되면 묘제로 바꾸게 된다. 그런데 공적이 크거나 도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영구히 신위를 모시는 관행이 있었다. 이를 부조묘라하는 바, 나라의 승인이 내려서 행하는 경우와 가문에서 특별히 정해 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 부조묘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조묘로 정한 것은 바로 참판공의 아들 귀래정공의 발의에 의해서다. "공 은 우리 가문으로 보면 공(功)이 조종(朝宗)을 빛내고 업(業)이 후손에 드리웠으니, 마땅히 영세불천의 주로 삼아서 그 거룩한 업적을 길이 잊지 말도록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장묘우문'을 지어 유훈으로 남기셨다. 이 후로 자손들은 유훈을 지켜서 오늘에 이르도록, 참판공의 기일 인 음력 12월 5일과 참판공의 배위 언양김씨의 기일인 음력 1월 12일에는 여기 모여 제사를 성대하게 모시고 있다. ♣본관지 회진에있는 영모정은 15세 귀래정공 휘 붕을 위한 정자이다. 귀래정공은 1486년에 태어 나셔서 1553년에 돌아가신 나주임씨의 중흥조 이시다. 공의 자는 충거요, 호는 귀래정으로 문과에 급제, 벼슬이 승지를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셨으며 , 기묘사화 때 명신 정암 조광조를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던 태학의 주동자였으며 문학과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공의 부친 참판공 휘 평께서 돌아가심에 이 자리에서 거려를 하시고, 이 곳에 정자를 세울 뜻을 가졌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시자, 그때 장자 장수공은 돌아가신 뒤라 차자 정자공께서 아우 두분과 이곳에서 3년 거려를 마치시고 1556년 이 정자를 세워 어버이를 길이 추모 한다는 의미에서 영모정이라 한 것이다. 건물은 누차 보수하여 오다 2004년에 대폭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 대종중의 삭회가 열리고, 도 문화재 112호로 지정되어있다. ♣도정공파는, 도정공께서 그의 맏아들 휘 상재를 데리고 함양군 유림면 회곡에 터전을 마련하여 이로부터 경남 함양땅에 후손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형성 세거하게 되었다. 12세 휘 상재의 호는 만회이시며, 벼슬은 교수관을 지냈고 인재 양성에 전념하셨다. 공의 묘소는 갈마음수 형국으로 자손들이 묘앞에 800평의 못을 팠다고 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 수동면 화산리에 14세 회헌공 휘 대동, 15세 한림공 휘 종인, 17세 남계공 휘 희무를 모신 화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회헌공은 1432년에 출생하셨고, 호는 회헌이시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늦게 사마시를 보아 급제하여 임실 현감을 지내시며 선정을 베푸신 뒤에 번잡하고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조정을 떠나 젊은 문사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함께 배향되어있는 15세 한림공 휘 종인은 호는 회암이시며, 1488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승무원 정자를 역임하신 후,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산청군 모고리로 낙향하셨다. 귀전원시, 자경시가 세전되고 있다. 17세 남계공 휘 희무는 호는 남계이시며,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생으로, 1588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능주부사 등에 오르셨고 함께 배향되시었다. ♣옥산서원은 9세 감무공 휘 탁과 18세 기암공 휘 억을 모신 서원이다. 공의 호는 기암이시며, 감무공의 10세손이고 도정공의 8세손이다. 공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진양성에서 순절하시니, 사림에서 숭모하기 위하여옥산서원을 창건하고 매년 3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린다. ♣백호공 휘 제의 탁월한 문장과 천재적 시인 및 자주사상을 경모 존중하는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92년 국비로 건립한 기념관이다. 공은 1549년 태어나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 관직은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 평안도사에 이르렀으며, 천재적 시인으로 주옥같은 시를 지어 문성공 이율곡 선생과 백사 이항복, 상촌 신흠께서 공을 두목지에 비유하여 절찬하였다. 저술로는 한문소설 창시자로써 수성지, 화사, 등 수십편을 의인화하여 부패관료와 망국적 붕당을 규탄하였고, 탐라기행문 남명소승을 썼으며 원생몽유록을 지어 사육신의 충절을 찬양, 충의정신을 고취하였다. 특히 애국적 자주사상은 39세로 임종할 때 자여질에게 "사방의 나라마다 황제라 일컫는데 오직 조선만이 왕이라 하니, 내가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살아 무엇하며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시며, "내가 죽더라도 곡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 물곡사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창계서원은 창계공 휘 영을 모신 서원이다. 공의 호는 창계이시며, 일찍이 문과에 급제, 벼슬은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일생을 학문 연구에 힘써 큰 업적을 남기신 호남이 배출한 빼어난 학자이기에 훌륭한 스승으로 길이 추모하고 사표로 삼기 위해 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창계서원은 1711년 회진에 세워졌었는데,1767년 중건시 신걸산 아래로 옮겨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전국적으로 단행했던 서원 철폐로 훼철을 당하고 말았는데2003년 원래의 위치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계사와 건순문이 중건된 것이다. ♣나림에서 한분의 정승인 22세 휘 한호의 자는 경소요, 시호는 정간공이시다. 1792년에 식년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우빈객을 지냈으며, 1821년 우의정에 올랐다. 1823년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어 서얼들의 등용을 주청하여 서자도 벼슬을 할 수 있게 했다. ♣18세 충익공 휘 담의 호는 청구로 1635년 증광 병과에 급제.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2년 우참찬, 예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에 승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로 의주에 갔을 때 정승으로 낙점 받았으나 돌아오는 도중 가산에서 병사하였다.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공이다. ♣18세 휘 타의 호는 몽촌이며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상주목사에 오르고 록권이 있다. ♣18세 휘 한의 호는 동리이며 김장생의 문인으로 항상 이이 선생의 학문을 연구했으며. 여러 차례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심취하였다. ♣25세 휘 긍수의 호는 현거이고, 1825년에 진사, 1837년에 식년갑과에 급제, 이조참판, 전라관찰사를 역임, 이조판서에 오르시고 시호는 문헌공이다. ♣21세 휘 상덕의 호는 노촌이며, 역사학자로 저서에 노촌집 4권, 역사서인 동사회강 27권이 있다. ♣23세 휘 시철의 자는 성종이고, 1766년에 생원, 1771년 식년병과에 급제, 경기관찰사, 강화유수에 이르고 시호는 간헌공이다. ♣25세 휘 영수의 자는 영지이며, 1825년 식년을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공이다. ♣25세 휘 한수의 호는 송석이고, 1846년 식년병과에 급제 공조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효정공이다. ♣25세 휘 최수의 호는 동양이며, 1895년 국모시역의 변을 당하여 시종으로서 의분을 참지 못하고, 격문을 내외에 발하고 정부관료 및 동이 수백과 군관 천 여 명을 규합, 지휘하여 역적괴수와 친일당을 소탕하고 왜인을 축출하여 내각을 혁신하려고 하였는데, 밀고로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칙명으로 관작이 복귀되고 충민공이라 시호를 내렸다. ♣26세 휘 용상의 호는 중호이시며, 1882년 성균관 생원이 되고 1905년 을사보호 조약 때 창의군을 편성, 의병활동을 하고 대동단을 조직한 독립지사 이셨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대구 앞산공원에 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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