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로의 이야기 房 105번째 [나는 양반(兩班)인가? 姓氏와 族譜]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은 나의 부친께서는 온 생애를 전답(田畓)에 묻혀사신 전형적인 한국의 농사꾼이셨다. 생전에 당신께서 흥정을 하시거나 야무지게 돈을 세시는 모습은 보질 못하고 컸다. 워낙 늦둥이 막내아들이라 아버지 보다는 할아버지로 여길만한 격차때문인지 소리나게 잔소리나 엄하게 꾸짖는 일도 없으셨던 당신은 진중한 훈계가 담긴 대화도 나누어 주지 않으셨다.늘 수줍게 웃으시며 사랑만 주셨다. 햇볕을 이고 바람과 비를(風雨) 친구삼아 땅을 일구시고 산(山)에 올라 땔감을 구하시던 일상이 눈에 선하다. 돈거래나 이윤을 따지는 일과는 먼거리에서 재화(財貨)를 모으시는 일에 서투셨던 아버지가 여러번 접어 아끼고 아껴 간직하셨던 지전 (紙錢)을 내손에 쥐어 주실때는 어김없이 하시는 말씀이 계셨고 지금도 귀에 당신의 꾸밈없지만 진솔한 음성이 머물러 있다. “요새는 (요사이의 시골표현) 돈이 양반이야 돈없으면 상놈이고 돈있으면 양반대접 받는단다. 10원을 1000원처럼 써야 돼.돈없으면 죽는다”그렇게 매번 말씀하셨다.쓰고 남을 정도의 금액을 용돈으로 주시며 꼭 변설(辨說)을 보태시는 그분이 이해도 않 되었고 아버지처럼 살지 않고 꼭 출세하리라 얼마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넉넉한 인생이 아니었는데도 아버지 처럼 10원의 귀중함은 생활에 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 나도 막 60의 나이에 가깝게 다가서니 만만치 않은 살림에 4남2녀를 공부시키고 출가시키신 아버지의 근검절약을 통한 뚝심에 고개가 끄덕여 지고 좋아하시던 순대국에 소주한잔 걸지게 대접못해드린 생전의 불효가 참으로 죄스럽다.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시고 창대한 재산을 일구시지도 못하셨지만 오직 양반(兩班)에 대한 자부심 만큼은 늘 사랑채 벽장안에 깊숙히 보관하셨던 족보사랑으로 표현되었다. 어머니가 화로불에 달군 인두로 날을 세운 하얀동정을 입힌 두루마기를 잘 차려입으시고 경기도 수원에서 열리는 종친회를 향해 대문을 나서시던 훤칠하시고 당당하던 아버님의 뒷모습은 속에 담긴 양반의 기개가 잘 우러난 품격있고 빼어난 풍모로 기억한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시고 가진것 없으시나 달랑 양반족보를 무기로 친정오빠 손에 등 떠밀리신 뼈대있는 대가집 막내이셨던 어머님께 장가드신 아버지.양반이란 무엇인지 본질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양반은 일반적으로 귀족 또는 사회적 신분이 높은 계층을 의미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양반(兩班)이란 조선의 왕들이 주로 남쪽을 마주보고 앉아 정사를 돌봤고 왕을 중심으로 동쪽인 좌측을 동반(東班)이라 칭하고 우측이 서반(西班)으로 불려지며 무신(武臣)이 동반은 문신(文臣)이 좌정 또는 기립했다. 남쪽은 당연 남반(南班)으로 잡역직이 부복했다. 동서반(東西班)은 30품계로 나누는 관료사회에서 권세가 있는 우수한 DNA를 가진 지배계급인 이들과 가족.친족및 후손을 함께 아울러 양반이라 불렀다. 힘이있는 양반을 선망 또는 지향하던 민족의 한(恨)이 수단 방법과 원칙을 따돌리고 모두가 양반이 된 오늘날이 참 우습다. 참고 할 만한 사실은 왕의 왼켠에 섰던 동반(東班)은 문신이 우대받던 시대의 룰에 따라 우켠의 서반(西班)무신(武臣) 보다 우선이고 상위(上位)였다. 그래서 영의정 다음서열은 좌이정이 차지하고 오늘날도 줄을 설때 좌우(左右)로 정렬이라고 외치며 좌(左)를 먼저 부르는 것이다. 양반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생물학적으로는 불충분한 이유로 만들어 진것이 족보(族譜)다. 본래 경주김씨 이던 고려말 안동 도호부 김현사령이 위기에 처한 왕건을 견훤으로 부터 구해 싸운 공으로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은 (賜姓改名) 안동권씨가 처음 성화보를 만들었다 고도 하고 완본을 첫 출간한 것은 경주이씨문중이라는 비교적 공식적인 기록이 있으나 최근 문화유씨의 성락보가 더 먼저라는 이론(異論)도 만만치 않다.그래봐야 겨우 1-2백년 상간(相間)이라 논박(論駁)은 피하는게 좋겠다. 족보는 이조시대에도 계급과 신분을 입증할 자료가 되고 과거시험 응시자격이 부여되는 양반의 ID였다. 현대사에는 방치된 조상의 토지나 재산을 환수하는 근거로 삼거나 독립유공자 후손을 입증하여 혜택을 누리고 보훈을 기리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족보의 중요성이 이렇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족보를 위조하거나 내용을 오기(誤記)하여 사회적 신분세탁이나 각종 정부혜택을 사취하려는 범죄행위도 빈번하다. 족보에는 본관(本貫)이 명시되고 서양의 족보 (Family Tree)처럼 가계의 순차가 적혀있어서 조상과 자신의 정체성과 혈통을 대외적으로 밝힐수 있다. 우리의 족보는 시조(始祖)로 부터 현재의 나까지 상하고금(上下古今)나열식인데 반해 서양은 나로 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어서 역시 개인주의가 발달된 의식의 차이를 훔쳐볼 수 있다.이제 양반과 족보의 정의(定意)는 이해를 확보(確保)한듯하다. 족보를 가진다는것은 성씨를 만든 창성(創姓)과 씨족의 원류가 시작된 지리적 위치의 창관(創貫)이 있어야 가능하다.풀어 말하자면 경주이씨라든가 김해김씨라든가 하는 디테일이 존재해야 하는데 서양의 Surname과 같다.우리가 흔히 보는 족보에는 이와같이 본관.성씨와 친족의 계보가 앞뒤에 맞도록 정렬되어 있다. 한국은 김.이.박씨 성이 전체인구의 거의 절반이다. 뒤를 이어 최.정.강.조.윤.장.임이 10대성씨 순서인데 전인구의 64%나 된다.같은 김씨라도 본관이 김해가 있고 금녕이 있슴은 전주.여주.경주등으로 갈리는 이씨들의 본관처럼 각각의 시조(始祖)가 출발한 지리적 위치가 다른 이치다. 6세기 북한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 내용을 풀어봐도 6세기 그때까지 한반도에는 성씨가 없었다. 7세기나 돼서 중국의 영향으로 성씨가 시작됐고 이전에 이사부 거칠부로 불린 이두식 이름은 훗날 소급하여 성씨를 앞에 붙여 부른게 진실이다. 고려시대는 노비와 천민은 백성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양민 이상만 성씨와 이름을 붙여 사용했다. 백성(百姓)이란 백가지 성씨를 가진 다양한 대중을 일컫는 함의어(含意語)이며 사회적 약자나 피지배 계급을 업수이 여겨 부른 말은 아니다.존중된 언어였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성씨가 없는 천민.노예는 아예 백성의 범주에도 못드는데 조선시대의 갓바치나 노비.백정이 여기 속함을 알 수 있다.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지방토호를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세력을 가진 자기 지역을 이름으로 (土姓)하사한데서 부터 본관은 유래한다. 삼국시대의 골품제도가 완전 붕괴되고 사회대통합이 이루어진 과정으로 본관과 성씨가 자리 잡았다니 아이러니다. 한국의 본관(本貫)을 말하는 성씨는 믿기 어렵겠지만 현재 5600개를 상회한다.그중에서 성씨가 한문으로 표기 가능한 것은 1500개가 조금넘고 나머지 4000여개는 한문표기가 불가능한 성씨라는 말이다. 1985년 공식 성씨가 272개 이던것이 1970-80년대 다문화 가정의 증가로 불어난 귀화 및 순한글식 성(姓)을 희망하는 새로운 성씨가 늘어나면서 증가추이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린다. 이쯤되면 족보니 전통있는 가문이니 혈통운운 하는 각 문중의 자부심이나 권위의식은 장차 무의미(無意味)한쪽으로 시간과 비례하리라 짐작된다.정작 중요한것은 성씨를 가진 인구분포가 17세기까지만 해도 55%에 불과하고 1909년이 돼서야 민적법(民籍법)이 제정되어 전국민이 호적과 함께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된 연혁을 살피건데 양반이라 제 각각 주장하는 작금의 호적.양반타령은 한참 잘못된 통계적 오류고 실제 상황의 왜곡이다. 상위지향의 양반애착심 때문에 전 국민이 다 왕족(王族)이고 벼슬아치 후손이 되어버린 부잡한 현실은 바로 잡아야 마땅한듯 하다.440만 김해김씨와 310만의 밀양박씨가 다 왕족의 후예라는건 아무리 계산해도 무리다. 일제가 민적법을 실행한 1909년 당시 성(姓)이 없던 사람들이 왕족을 흠모하여 전주이씨로 등록한 이유와 흥선대원군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전주이씨 대동보에 기재해 준 탓에 전주이씨 인구의 급증을 부추켰다고 황현이 쓴 매천야록은 전한다.살펴 본 여러모양의 역사속 자료를 되짚어 본 결과 우리민족이 자랑하고 자부하는 동방예의지국에 걸맞는 양반의식과 양반계급사이에는 괴리가 크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많은 양반은 위조되고 급조된 허구이며 무가치한 정신적 자기기만의 과소비라는데 자신감을 잔뜩 싣는다. 1592년 처참한 임진왜란을 겪고도 채 50년이 않돼 미련한 선조들이 다시 겪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나라의 주인은 왕실이 아닌 민중이라는 주인의식이 자리잡으며 양반신분으로 약30%까지 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불과 4-5백년이 지난 오늘날 국민모두가 양반의 후손을 주장한다면 그많던 피지배계급은 어디갔는지 어불성설이다.오늘날 족보의 의미는 자기만족(內心滿足)이요. 집안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반듯한 선대의 유훈(遺訓)을 받드는 토대가 되어 준예신독(遵禮愼獨)의 교사로 삼는 순기능에 절대동감하지만 지나치게 족보를 신봉하여 타인과 가족을 평가절하 하거나 폄하 하는 도구로 사용함은 금물(今勿)이다. 현대는 자유경제 자본주의시대이며 자산의 다소(多少)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한다.작고하신 선친의 말씀처럼 돈이 양반과 그반대신분을 가름하는 다림줄인가 솔직히 가끔 믿어진다.돈이 사람대접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실제로 무척 차이가 난다.그게 이시대 상식이라는데 거의 대다수가 동의하리라 믿어진다.그래서 가끔 우울하기도 하지만 물질을 향한 맹렬하고 야무진 경쟁에서도 기꺼이 땀도 흘려 보지만 그래도 인격의 진리를 믿고 싶다. 사람은 누군가의 말처럼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말에 무게를 싣는다. 품격있는 삶이 물질의 무소유로 지켜지기에는 어림없는 시대에 산다하여도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다. 어릴적 부터 족보에서 보아 자부하던 여흥이씨 춘천공파 29대손 내이름이 뼈까지 양반이 아닌 어느시절 만들어진 허구라 해도 품격있는 행동과 깊이있는 지식이 잘 버무려진 신사(紳士)의 또다른 이름 양반답게 살아보고자 하는것은 나의 주장이자 소원이다.. <한국예능프로를 시청하다가 개그맨의 지나친 양반타령에 살펴본 글/ 잎보다 먼저피는 자목련이 흐드러진 던다스밸리에서 이장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