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의 중립론에 들어가기 전에 당시 제기되었던 조선 중립에 관한 국제적 논의들을 먼저 일별해 보겠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 중립론은 임오군란 후 일본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서울에 파견되었던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는 <조선정략>을 저술하여 조선 중립화를 제기하였습니다. 이노우에 고와시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일급 참모였으며, 이후 메이지 헌법, 교육 칙어 등 일본 국가의 핵심 문서의 기초작업을 담당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노우에 고와시는 조선에 대한 다른 열강들의 침략, 특히 러시아의 진출을 가장 우려하고, 또 청에 의한 조선의 보호는 만전(萬全)의 도(道)가 아니며, 청의 속방론을 넘어서는 방책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조선 중립화가 그 귀결이었습니다. 이노우에 고와시의 조선 중립화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청 일 미 영 독 5개국이 공동으로 보장하는 벨기에 혹은 스위스 형의 중립국을 규정한다, 둘째, 5개국 가운데 약속을 파기하는 국가가 있으면 타국들이 그 죄를 묻는다, 셋째 5개국 이회의 국가가 조선을 침략하면 5개국이 동맹하여 이를 방어한다, 넷째, 조선은 청의 증공국(贈貢國)이지만, 속국(屬國)은 아니며 하나의 독립국이며, 청은 다른 4개 국가와 함께 보호국의 위치에 있고, 4개국의 동의없이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수 없다(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연구. 40쪽).
이는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경계하며, 청의 관할을 약화시키고, 조선 진출에 진일보하려는 명석한 방책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도 이에 공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1884년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임오군란으로 물러나면서 이노우에 가오루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후임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다케조에는 청불 전쟁을 기화로 조선의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하였고, 이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의 희망하는 바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조선의 중립화에 대하여 역설하였습니다(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 연구, 49쪽).
그러나 이에 대하여 고종은 청과 프랑스의 화호(和好)가 절실하다고 하면서 전쟁 발발 시 국외 중립은 곤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서광범 등 개화파는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자주독립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으나, 민영익은 청국에 의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민영익이 고종의 부름에 따라 알현하여 풍문에 의하면 일본은 청국과 개전하기로 결정한 모양인데 그때에 우리나라는 어느 편에든지 의뢰하지 않고서는 독립은 불가능할 것인데, 국왕께서는 청과 일 어느 편을 택하실 거냐고 묻자, 국왕은 아무대답이 없고, 왕후가 옆에서 영익은 어느 편에 붙는 것이 위태하지 않다고 생각하냐고 되물음에, 영익은 ‘청국은 지금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신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청국에 의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하였고, 이에 왕후는 ‘그대는 도저히 일본당에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니 원세개한테 우리가 잘 부탁한다는 뜻을 통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신기석. “안전보장과 한말정국”, 국제법학회논총, 제11권 제1호, 대한국제법학회, 1966, 290쪽). 머지 않아 터지게 되는 갑신정변의 비극을 예고하는 듯한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와 독일 외교관 부들러도 조선 중립화 방안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들 독일인들의 방안은 일본의 중립화론과 유사하지만, 그 초점은 사뭇 달랐습니다. 일본의 중립화 방안이 러시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면, 묄렌도르프와 부들러의 방안은 러시아를 개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래에서는 먼저 묄렌도르프의 중립화 제안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조선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는 원래 리훙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외교와 세관 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는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의 중립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청의 의도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묄렌도르프는 조선 안전보장을 위해 러시아를 제1의 중재자로 꼽았습니다. 청과 일의 대결을 러시아가 완화해 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묄렌도르프 부인은 남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청국이 자기의 예속 국가[조선]가 위급한 상황에 놓일 때, 과연 일본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당시의 정세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매우 회의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조선이 청국 이외에 어떤 다른 힘에 의지해야 한다고 남편은 처음부터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 상황을 감안하면 그것은 러시아가 틀림없었다[러시아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세력은 중국과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국경이 태평양까지 뻗은 이래로 일본과는 스스로 적대관계가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가장 큰 관심은 조선이 자주국이 되어 자기 나라와 일본 사이에 하나의 완충국으로 존재하게 하는 데 있었다. 열강들 가운데 그 어떤 국가도 이 역할을 떠맡을 수는 없다. 미국이 아마 그것을 기꺼이 할지도 모르나, 거리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충분치 못하다. 프랑스는 인도지나로의 팽창을 기도하고 있으므로 중국과는 적대관계에 있다. ... 독일은 아직도 국제 정치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영국은 서남 아시아 문제에서 러시아의 적대국으로서 일본과는 본래부터 동맹국이었다(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 자서전, 한말 외국인 기록 05, 집문당, 개정판, 2019, 75쪽)
묄렌도르프가 어째서 청의 이해관계와 꼭 일치하지 않는 러시아 중심의 조선 중립화를 제안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조선에서의 묄렌도르프의 사명감이었다는 견해도 있고, 묄렌도르프는 독일 외교관 출신으로 당시 비스마르크 친러 외교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이에 대하여는 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침략, 184쪽). 또한 앞서 보았듯이 묄렌도르프는 갑신정변의 수습을 위해 전권대신 서상우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는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를 만나 러시아의 조선 보호의 방법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묄렌도르프는 첫째, 러시아 중재 하의 청, 일, 러 3국의 조선 중립화 보장, 둘째, 러시아 단독으로 군사적 보호를 하는 방법, 셋째, 조선을 러시아의 일반적 보호통치 하에 두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묄렌도르프 자서전, 97쪽).
주한 독일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ler)도 조선 중립화안을 제안하였습니다. 부들러는 갑신정변으로 청일 사이 전쟁을 우려하며 조선의 안정과 평화의 제안을 제출하였습니다. 비록 이는 부들러 개인의 제안이었지만, 독일의 동아시아에서의 하나의 역할로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부들러는 갑신정변 이후 조선이 다시 쇄국정책으로 회귀하고 대원군이 집권할 가능성을 우려하였습니다(정상수, ”부들러의 한국 중립론“, 서양사연구 제57집, 한국서양사연구회, 2017, 199쪽).
부들러는 갑신정변 후 한성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에 온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를 수차례 방문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이노우에도 임오군란 발발 이후 조선의 중립화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들러는 이노우에의 동의를 확인하였고(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8, 59쪽), 그의 중립화안을 조선의 김윤식에게도 제안하였으며, 청의 리훙장에게도 제안하였습니다. 김윤식에 제안된 부들러의 권고안에는 묄렌도르프의 중립론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부들러와 묄렌도르프 모두 독일인이며 독일 외교관 출신으로 서로 상의하였던 것입니다. 묄렌도르프는 벨기에 모델을 얘기하였고, 부들러는 스위스 모델에 기초하고 있지만, 양자의 뜻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부들러는 1885년 2월 7일 조선 외아문 독판 김윤식에게 <청일 교전에 조선이 중립 방관하기를 권고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윤식을 이를 거부하고 그 의견서 원본를 반환케 하고 그 사본은 청의 리훙장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김윤식은 “청이 까닭 없이 군대를 증강하여 이웃나라의 의심을 짙게 만들이 않을 것이며, 일본 역시 평화유지를 위주로 하여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박희호, 앞의 논문, 61쪽). 당시 김윤식은 조선의 중립화는 조선과 청의 전통적 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쉬완민, 중한관계사, 86쪽).
앞서 보았듯이 부들러의 제안은 텐진 조약의 협상을 벌이고 있던 리훙장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리훙장도 조선 중립화 방안을 고려하였던 것 같습니다. 조금 뒤의 일이긴 하지만, 1886년 러시아 주재 중국 공사 류루이펀(유단분: 劉瑞芬)이 조선 중립화안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류루이펀은 조선을 중국의 행성(行省: 중국 변경 통치의 한 단위, 고려시대 몽골이 설치한 정동행성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으로 삼고,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공동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습니다. 리훙장은 영국과 러시아의 공동 보장은 주도면밀한 발상이라면서 찬동하였으나, 청국 총리아문은 그 방안을 취하지 않았습니다(쉬완민, 중한관계사, 87-88쪽).
이렇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조선의 중립에 대한 논의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고, 마침내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도 벌어지면서 조선 내에서도 중립화에 대한 논의가 수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텐진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중립화에 대한 부들러의 제안을 거부하고 청에 대한 사대의 질서를 중시하였던 외아문 독판 김윤식의 생각도 변화하였습니다. 김윤식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소식을 전해들은 후 1885년 5월 주조선 독일총영사 쳄프쉬(Zembsch)를 찾아가 묄렌도르프가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온 바와 같이 조선을 유럽의 벨기에와 같은 지위로 만들고자 한다는 뜻을 피력하였습니다(김우현, “묄렌도르프의 조선중립화 구상”, 평화연구, 제8호,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 1983. 76-77쪽).
독일 외교관 쳄프쉬는 김윤식이 벨기에 식의 영세중립국 방안을 얘기하였다고 합니다. 1885년 외아문 독판 김윤식은 독일 영사를 비롯하여 조약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 다른 나라들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조선은 중립을 지켜야 하며 또한 조선은 어떠한 국가에게도 국토를 빌려주든가 일시적인 점령을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일은 국제법에서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귀하에게 이 글을 보내오니 ... (... 如諸國有事,則本國應守局外之分,不可以地借人,准其暫住,此公法所無,斷不能行爲此備文照會...)”. “巨文島事件에對한政府態度闡明”, 舊韓國外交文書 제15권: 德案 1, 고종 22년 5월 13일(서기 1885년 6월 25일), 아세아문제연구소(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출판부, 1966, 73쪽; 번역과 설명은 박희호, 구한말 한반도 중립화 연구, 앞의 글, 68쪽.
원문의 ‘공법(公法)’은 당시 ‘만국공법’ 즉 국제법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외아문독판 김윤식이 말하는 국제법(‘공법’)의 법리란 영세중립국론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적으로 영세중립은 열강들의 승인을 요하는 것인데, 당시 선행하는 국제적 승인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김윤식의 주장은 유효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는 하나의 자주 혹은 독립국의 주권과 영토 불가침의 원리로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취지는 결국 묄렌도르프가 제안하였던 벨기에 식의 중립 방안을 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