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답사 일정
광주교육대학교 앞 (09:00 출발) → 松江亭 솔 숲에서 바라보기 → (창평 남극제) → (담양 대덕면 夢漢閣과 이서의 樂志歌) → (입석리를 지나 무릉도원을 지나다) → (광주호 둑길과 관수정에서) → 勿染亭 소요 → 담양군 남면 무동리 → 화순 이서 영평마을에서 무등의 뒤통수를 보다 → 이서면 인계 마을의 조탑 2기 → 안양산 휴양림 → 수만리를 넘다 → 광주 동구 내남동 육판리 법림사에서의 조망 → 교육대 앞 // (무진고성 장대에서 바라본 무등산 오후) → (임곡 백우산의 氷月堂과 黃龍江의 아침 안개) → (광산 동곡 浩歌亭에서의 思索과 餘裕)
2. 머리말
광주광역시에서는 2003년 시민공모를 통해 8景 5味를 선정하고 외지에서 광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그 멋진 풍광과 남도의 맛을 자랑하고 있다. 8景으로는, 무등산의 四季 ? 사직공원의 해돋이 ? 월드컵 경기장의 달맞이 ? 빙월당과 황룡강의 물안개 ? 포충사와 대촌 들녘 ? 잣고개의 야경 ? 5?18 광장과 충장로 야경 ? 중외공원의 문화 산책로를 꼽고, 5味에는 광주한정식 ? 광주 오리탕 ? 무등산 보리밥 ? 광주 김치 ? 송정리 떡갈비를 선정한 것이다. 광주 8경의 첫 자리에 놓인 무등산을 벗어나 8경에 선정되지는 않은 곳이지만 눈길을 줄만한 그 주변을 한번 찾아 나서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서 산을 보고 산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산에 자주 오르며 산을 즐기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산 속에 들어가 살면서 산을 닮아가게 된다. 결국 우리 나라사람들은 산 멀리서 가까이에서 또는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무등산을 항상 가까이 접하고 그리고 그 속살까지를 자주 들락거리며 겁나게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등산의 그 은밀한 내면을 살피고자 참으로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지만 늘 부족함을 느낀다. 오늘은 시선을 한번 바꿔보자.
자꾸만 무등산의 속내만 들여다 보았으니 산 밖으로 나가 멀리서 무등산을 한 번 바라보기로 하자. 잘 생긴 뒤통수도 살피고, 고운 턱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옆 얼굴도 찾아보자. 해질녘 들판에서 바라 본 무등산은 이마만 외롭게 빛나는 새로운 정경으로 우리 발길을 붙들어 멜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그리워 하거나, 멀리 두고서 보고 싶어 가슴 아파보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사랑이나 우정이란 것도 마치 산길 같아서 자꾸 오고가지 않으면 묵혀지게 마련인 것 처럼, 무등산을 벗어나 다른 지역에서 멀리 바라보고 새로운 면모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 답사 길의 종점이다. 그러다 돌아오면 결국은 무등산의 너른 품이란 걸 다시 한 번 느끼는 여행길이 될 것 이지만, 자 ! 그래도 떠나보자.
3. 踏査地 遺蹟 소개
1) 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인 송강정은 정철(1536~1593)이 서인이던 선조 17년(49세)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4년 정도를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었던 작품의 현장이다. 정자 아래를 흐르는 송강 또는 죽록천을 따서 ‘죽록정’이라는 당호와 ‘송강정’ 이라는 당호가 측면과 정면에 걸려있다. 영조 46년(1770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자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멀리 무등산이 한 눈에 조망된다.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의 전문이 새겨진 詩碑가 있다.
두 누이들이 인종의 귀인이며 계림군 瑠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경원대군(명종)의 동무로 지내던 궁중 생활은 1545년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계림군은 죽음을 당하고, 형은 귀양길에 죽고 아버지는 유배되어 가족들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정철이 16세 되던 해 아버지의 유배생활이 끝나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와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같은 호남 사림의 거두들에게 학문과 시문을 익혔고, 율곡이나 우계 등과 교유하였다.
27세에 출사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수찬, 좌랑, 종사관, 직제학, 승지, 관찰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치면서 당쟁에 휘말려 탄핵과 유배 그리고 복권되는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거치게 된다.
2) 담양 昌平 南極樓
지정별 : 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
삼천리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세워진 남극루는 1830년대 장흥인 고광일을 비롯한 30여인에 의해 지어졌으며, 원래 현 면사무소 앞인 옛 창평 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양로정(養老亭)이라 부르고 있다. 옛부터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이 비치는 곳이 장수한다고 구전되기 때문에 노인정의 명칭을 남극제나 남극루라 칭한다.
현재 정자에는 <남극루>라는 현판은 물론 문기, 중수기 등 아무런 현판도 걸려있지 않으나, 걸려 있던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형 건물로 담양지방의 다른 정자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외벌대의 기단에 높은 누하주를 세웠다. 2층은 누하주보다는 가는 원주를 세웠으며, 창방, 주두를 얹은 다음 첨차와 소로를 결구하였다. 가구는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를 세운 후 판대공을 얹어 종도리를 받친 평5량가이다. 연등천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남극루는 담양지방에서 지어진 누정 중에 후반기에 지어진 정자로 창평동헌(현 창평면사무소)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어 마을 노인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이용되었던 정자이다. 최근까지 2층은 경로당, 1층은 어린이 놀이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1층에 약 30cm 높이로 마루를 두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남극루는 비록 후반기에 지어진 정자이지만 담양지방에서는 보기드문 평지에 건립된 2층 누각 형태로 다른 정자 건물에 비하여 특이성을 가진다.
3) 담양군 대덕면 夢漢閣과 이서의 樂志歌
<夢漢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 담양군 대덕면 梅山리 17번지 소재. 1803년에 초창된 몽한각은 태종의 5세손인 李緖의 재실(齋室)이다. 李緖는 창평에서 14년 동안의 귀향살이 끝에 풀려 났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유배시절에 그가 시었던 漢詩 <述懷>의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 라는 구절에서 ‘夢漢閣’이란 당호가 유래되었다. 경치가 수려한 위치에 배산하고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두 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2벌대의 기산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면5칸. 측면 2칸에 전후 좌우 반툇집으로 쪽마루를 4방에 돌린 아주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다. 덤벙주초에 두리기둥을 놓고, 주심포 형식을 가미한 2익공 형식이다. 기둥머리는 주두와 두공첨차, 소로로 결구하였으며, 장혀받침 팔각도리를 얹었다. 가구구성은 무고주 5량가로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동자주를 세운 다음, 종량을 얹어 종도리를 받치는 형식을 하고 있다. 실(室)의 구성은 중앙 3칸에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 방을 배치하고 있는데 툇마루의 귀마루 부분에서 보이는 호형 처리가 매우 특이하다. 창호는 전면은 띠살문, 배면은 판장문으로 하였다. 대청마루의 창문은 4분합 들어열개로 서까래의 걸쇠에 걸치게 하였다. 문화재도록 : 문화재자료편(전라남도,1998).
몽한각은 왕족들의 싸움과 관련한 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가 이괄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담양으로 귀향을 오게되고 귀향이 풀렸어도 구차한 서울살이를 택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하며 시가를 읊으며 학문을 연마하면서 살아간다. 그가 지은 <樂志歌>를 보면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백성들과의 평안한 삶을 읊은 낙지가는 가사문학이 한글로 된 장문의 시라는 점에 반해 한문으로 쓰여진 담양지역에서 최초로 등장한 한문가사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곳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 이서의 삶을 추모하는 후손들 중 조선 말엽 순조 3년(1803년)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 현령 이훈징이 주축이 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남긴 글을 보관하기 위하여 몽한각을 지은 것이다. 이서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정착하여 근동에서는 일가를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한기 같은 사람을 낳기도 하였다. 오래된 소나무와 석축 기단 위로 지어진 건물의 풍치가 빼어난 재실을 둘러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도 좋은 공간이다.
<樂志歌>
조선 중종 때 이서(李緖)가 지은 152구의 漢文歌辭. 이서의 문집인 목판본《夢漢零稿》에 실려 있다. 이서는 양녕대군의 증손으로 출생, 秋城守에 봉함을 받았다. 1507년에 모반에 연루되어 이서 일가는 참화를 입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이서는 호남의 鳴陽縣(현 창평)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述懷>시는 이 때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1520년에 해배되지만 상경하지 아니하고, 담양 대곡에 거처를 정하여 제자를 가르치면서 한거하였다. 《몽한영고》에는 낙지가 외에 李緖의 漢詩 <述懷>가 한 편 실려 있는데,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 라는 구절에서 ‘夢漢’이란 堂號와 文集名이 유래한다. 後漢 사람 仲長統의 ‘낙지론’을 벗삼아 선현의 도를 받들어 안빈낙도하겠다는 <낙지가>는 4?4조의 정연한 형식에 典故를 바탕한 한문투어로 일관되어 있다.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조선왕조의 문물에 대한 찬양이고, 후반부는 그 세계 안에서의 삶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였다. 즉 전반부는 왕족으로서 건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기 삶의 바탕이 된 수도의 문물에 대한 동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 부분은 조선초 악장의 송축적 분위기와 유사하다. 후반부는 사대부 삶의 이원적인 조건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유가적 규범을 준수하는 修己治人의 삶이 그것이다. 이 양면적인 삶의 중국의 전범에 경우에는 특히 작자 당대의 사화로 야기된 현실적인 조건에 크게 영향받았다고 볼 수 있다. 夢漢零稿 : 한국가사문학의 연구, 이상보(형설출판사, 1974) : 가사일기, 윤덕진(태학사, 1999).
<眉巖日記>
보물 제 260호.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眉巖 柳希春의 친필 일기. 지금 남아 있는 일기는 선조가 즉위한 1567년 10월 1일부터 시작해서 1577년(선조 10) 5월 13일까지 대략 11년 간의 일기인데, 중간에 몇 군데 빠진 곳이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일기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이어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일기에 본인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당시 상류층 학자들의 생활상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희춘이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큼 선조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京外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 1592년(선조 25) 이전의 《承政院日記》가 다 타고 없어져《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사료가 없었으므로 이 책은 李珥의《經筵日記》와 더불어《宣祖實錄》의 첫 10년 동안의 사료가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일기 抄중 제12책에는 부록으로 유희춘과 그의 부인인 송씨의 시문 및 雜錄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판본을 포함하여 일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중 3매를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일시 보관했다가 현재는 담양 모현관에 보관되어 있다. 朝鮮總督府에서 《朝鮮史料叢刊》의 하나로 활자본 7책으로 印刊한 바 있으며 최근에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제10책까지는 작자의 일상생활과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 경외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적 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상세하고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1책은 부록으로 작자와 그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작자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에 의해 방면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후 필자는 홍문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육조 등의 내직과 한때 전라도관찰사 외직을 역임하면서 견문했던 것을 공사로부터 사적인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이 책은 조선시대 개인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한 《承政院日記》의 소실된 부분을 보완하는 사료로 활용되어 李珥의 《經筵日記》, 奇大升의 《論思錄》등과 함께 활용되어 《宣祖實錄》의 편찬자료가 되었다. 작자의 가계는 대개 해남에서 기거해 오다가 작자가 담양에서 서거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등지에 기거하게 된다. 이 책도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사료총간 8 (조선사편수회, 1936~1938)>.
「眉巖日記」는 유희춘이 선조 즉위 년인 1567년 10월 1일 은진에 있던 때부터 시작해 선조 10년 5월 13일 그가 죽기 이틀 전까지 11년간의 일기다. 이 일기의 원본은 본래 14권이었다고 전해지나 분명치 않으며 21권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아무튼 현존하는 것 일부는 미암의 문집인 「미암집」에 초록 기재되어 있고 약자. 속자가 간혹 사영되어 있고 오탈과 연문이 간혹 개재 돼 있으며 중간에는 파손, 마멸돼 자구와 약간 빠진 것도 있다.
내용은 무려 11년 동안 위로는 조정의 공적?사적인 일부터 아래로는 미암 개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의 일, 견문한 것 등을 빠짐없이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기재해 놓았다. 또 명종 말 선조 초의 여러 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내면생활, 본인이 홍문관 전라도감사 사헌부 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사실들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상태와 풍속 등을 기록해 놓았다.
「미암일기」는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이며 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해 그 사료 가치가 매우 크다. 따라서 임진왜란으로 모든 기록이 불타버린 이후로 선조실록을 쓸 때 선조 초년부터 11년까지의 사료는 이이의「경연일기」와 기대승의「논사록」과 함께 기사 사료로 사용됐는데「미암일기」가 가장 많이 참고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의 동향과 사림의 동태,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중앙관료와 지방관리와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써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실록이 주로 정치에 관한 것만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미암일기」에는 선조 초년의 조정에 대한 대소사와 일반 백성의 사회?경제?풍속?습관?문화 등을 면면이 적어 조선중기의 정치사?사회사?경제사?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자료라 할 수 있다. 이후 1936~1938년에「조선사료총간」으로 5권에 두주, 방주를 곁들여 간행한 바 있으며, 해방 후 국보 401호로 지정됐다가 1963년 보물 260호로 지정돼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모현관은 1959년 4월에 준공했는데 모현관이 건립되기 이전에는 미암의 14대손인 고 유대수씨가 家寶로 간직해왔다. 창평서 2km쯤 가다보면 큰나무들로 둘러싸인 장산리가 나오는데 이 곳에 미암의 후손 15가구가 살고 있다. 미암은 해남 출신이지만 담양의 송씨 집안으로 결혼한 후 이곳에 옮겨와 처가살이를 한 셈이다.
연못 한가운데 자리 잡은 모현관은 붉은 기와, 돌집으로 되어있어 언뜻 별장같은 느낌을 준다. 2백여 년 전 이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미암의 유물 등 저서들이 많이 유실됐지만 3백60여 년 전에 지어졌다는 고 유대수씨 집 뒤 사당에는 미암이 전라감사 때 타고 다녔다는 가마의 잔해와 미암일기 중에 나오는 선조대왕의 어의가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미암의 가계는 담양 ? 곡성 ? 전북 등에 1백50여 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며 그의 처가인 송씨 집안은 장산리에 조금 떨어진 창평면 장화리에 30여 가구쯤 살고 있다.
을사사화로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정치가 어지러웠던 틈을 타 경제가 균형을 이루지 못해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백성이 늘어가더니 인심조차 흉흉해졌던 시대. 그 사회를 중간관리 입장에서 안타깝게 지켜본 미암이 19년의 귀양살이 동안 써낸 일기는 조선 중기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지식인의 최소 양심 표현이었던 것이다. (王이여! 전라도 남자를 보시오 - 남성숙에서 인용)
<柳希春>
本貫은 善山. 字는 仁仲이며 號는 眉巖 또는 寅齋. 별호는 漣溪 이고 시호는 文節이다. 1513 (중종 8년) 12월에 해남군 해남읍 해리에서 태어났다. 미암의 탄생과 관련된 說話 하나 :
하루는 미암의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형상을 한 이가 치마 속으로 들어가더니 매일 찾아오더라는 것. 고민 끝에 명주실을 발에 묶어놨더니 그 괴이한 이는 뒷문을 통해 미암산 두 바위 사이로 사라지더라는 것. 그래서 잉태한 이가 유희춘인데 과연 미암산의 정기를 받은 탓인지 어려서부터 모든 면에 출중했다는 얘기.
미암의 가계를 보면, 고조부 文浩는 감포만호를, 증조부는 진사를 지냈으나 부친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에만 열중했으며, 어머니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유배되고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한 錦南 崔溥의 둘째딸이었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수업하고 16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최산두, 김안국에게 사사했다. 특히 김안국에게 큰 영향을 받고 그를 존경했는데 너무 영리했기 때문에 제자로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 토론을 폈다고 전해진다.
성격이 매우 소탈해 집안살림은 전혀 할 줄 몰랐다. 의관이나 수건, 버선같은 것이 때가 묻고 해어졌어도 개의치 않았고 거처하는 방도 책상 위에 책을 펴놓은 것 이외에는 아무리 지저분하고 먼지가 쌓여도 소제할 줄 몰랐으나 학문에 대한 것이나 정치하는 도리에는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으로 남들이 도저히 생각 못한 것을 토로해 주위를 놀래 키곤 했다.
중종 32년 생원시에 합격, 그 이듬해에 별시 병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보임된 후 춘추관 ? 기사관 등을 거쳐 1544년 賜暇讀書한 다음 수찬?正言 등을 지냈다. 중종 37년에는 세자강원설서에 임명돼 동궁을 보도하였다. 그는 동궁에게 성리학이 학문과 정치의 근본임을 훈도하여 당시 관료들에게 ‘동궁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종사의 경사로 있는 유희춘의 공이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 사직을 요청하자 중종은 특명을 내려 무장현감에 임명됐다. 전라도 무장현감은 당시로선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으로 평을 받았던 곳인데 탁월한 지도력으로 민중교화에 힘쓰고 폐단이 많은 요소를 제거해 지혜로운 현감으로 존경을 받았다. 뒤에 무장현에 그를 봉축하는 서원이 세워진 것도 이때의 치적과 관련이 있다. 이후 인종 원년 송인수의 추천에 의해 입경. 사간원 정언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인종이 죽고 정치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해 세력을 얻게 된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숙인 윤임과 그 일파인 좌의정 유권, 이조판서 유인숙 등을 제거 하기 위해 교지를 내려 대간으로 하여금 탄핵케 한 사건이 났다. 그러나 당시 대간을 구성하고 있던 송희규?민기문?유희춘 등은 이들의 교지가 ‘不正하다’ 하여 발론할 것을 거부했다. 다음날. 윤원형은 같은 당파인 임백령?허현 등과 짜고 위 세 사람의 죄를 고하고 이어 교지를 거부한 유희춘 등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미암은 파직 당하고 이리에 칩거했다. 雪上加霜일까. 이듬해 9월 소위 良才벽서사건이 일어났다. 전라도 良才驛에서 ‘여자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는가’ 라는 벽서가 발견된 것, 이를 접한 문정왕후는 이는 죄인들을 가볍게 처벌할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의견을 내 미암을 제주도에 유배했다가 고향인 해남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시켰다.
종성에 닿은 미암은 여기서 장장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밤낮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저술을 계속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여 반경지역 주민의 교화에 힘썼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세력이 쇠퇴하자 을사파 죄인들의 사면복권 의견이 일어나 미암은 충청도 은진에 이배됐다가 2년 후에 풀려났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선조는 임금이 되기 전에 미암에게 배웠으므로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많다’고 이르며, 자신의 정확하고 해박한 것을 좋아하며 질문하면 미암은 곧 대답했는데 반드시 옛날 사실들을 입증해가며 설명. 명백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
미암은 1577년 정2품 자헌대부로 승계한 5월 15일 서울에서 죽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景廉은 하서 김인후의 사위가 됐다. 선조는 미암 사후 그를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했고 인조 ‘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주?전남의 조선조 인물, 유학사를 일별해 보면 여러 가지 장점과 특징, 그리고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문제로 귀착된다. 지금 우리는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전통적인 인식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까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변혁이 급격하면 할수록 사상적 근본과 우리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 조명은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이 지역 선배 지식인들이 이룩했던 정신과 그 시대에 맞게 새로움을 잉태하고자 했던 사상적 의지,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 어려움을 스스로의 어려움으로 자임하여 일어섰던 구국의 정열과 의리를 숭상하고 인도정신을 실현하려했던 정신의 맥은 오늘 어디에 닿고 있는가. 지금 만나는 미암의 사상과 학문에서도 정신적 지표가 될 만한 면면을 뽑아낼 수 있다. 그의 부인 宋德峰 여사도 당시 시문에 능숙한 유일한 여류문장가의 한사람으로 유명한데 오늘날 전하지 않으나 시집 1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교하면서도 고아한 맛을 풍긴다는 평을 듣고 있다. 미암이 종성 귀양살이를 떠났을 때 혼자 수천리를 걸어 남편을 좇아가던 송씨 부인이 마천령을 넘으면서 지은 詩가 현재 남아 있다.
가고 가다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렀다.
동해는 끝이 없고 겨울의 얼굴 같구나!
만리의 길을 부인의 몸으로 어찌하여 왔는가?
三從의 뜻 중한 줄만 알고 이 한 몸 돌아보지 않았네.
미암은 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眉巖日記》《續諱辨》《朱子語類箋解》《詩書釋義》《獻芹錄》《歷代要錄》《綱目考異》등의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어 潭陽의 義巖書院, 茂長의 忠賢祠, 鍾城의 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861년 노사 기정진이 쓴 서문과 9세 손 유경집이 쓴 발문에 의하면, <眉巖集>은 철종 1년(1850)에 유경집의 仲兄 경심이 초고를 편집하여 기정진의 교정을 거쳐서 고종 10년(1869)에 그의 祀孫인 유정식의 주관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重刊本은 그의 후손 병찬, 상기가 이를 다시 간행한 것이고 이때 淵齋 송병준이 跋文을 썼다.
5) 勿染亭
금성 나씨 담양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 물염정은 16세기 중엽에 세워진 건물로 화순군이 향토문화유산 제 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勿染 宋庭筍이 1566년에 창건하여 1591년 외손자인 창주 羅茂松과 羅茂春 형제에게 물려주었다. 이 세 사람을 물염정 三賢이라 칭한다.
대과 급제한 나무송은 기개가 곧았는데, 병자호란 화친 소식을 듣고 ‘수양산과 동해수는 예전과 같은데 이 세상 풍진 속에 내 인생이 부끄럽네.’ 라고 읊었고, 동생 나무춘은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天無二日이요 國無二母’라 하여 삭관폐출 되어 낙향길에 오르면서 읊은 시 한구절을 보면, ‘푸른 풀 연못가에는 꿈길만이 오고 가는데, 흰구름 하늘가에 고향집이 그립구나. 가도 가도 서울 남산이 멀기만 한데, 해 저문 석양 길에 발길이 더디도다.’ 라고 노래하였다.
물염정 입구에는 2002년 三伏之節에 세운 창립 5주년을 기념하는 비를, 東江 柳漢相이 짓고 雲菴 趙鏞敏이 쓰고 勿染會長 裕堂 崔相玉이 세운 勿染會紀念碑가 있다. 물염 적벽이 보이는 언덕에는 문병란의 <삿갓송>이 새겨진 蘭皐 金炳淵의 詩碑가 세워져 있다.
물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주변의 풍광이지만 건물 자체도 아름답고 또한 호남 사림의 내노라 하는 시인 묵객들의 편액 또한 눈에 띄인다. 정면의 자연스런 기둥 하나는 거스르지 않는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두어칸 茅屋을 동쪽 언덕에 지었으니 門巷은 의연하여 謝陶와 같도다
강비가 밤에 내리니 고깃배가 젖었고 마을 구름 아침에 거두니 玉峯이 높구나
동자는 낙엽을 모아서 붉은 밤을 굽고 아내는 국화를 따다가 흰 술에 띄웠어라
숲 아래 일찌기 이러한 즐거움을 알았더라면
靑袍의 신세로 어찌 찾아오지 않았으리오
<金麟厚> 大醉鳴陽酒 歸來三月春 江山千古主 人物百年賓
鳴陽 술에 크게 취하려 三月 봄에 돌아 왔으니
강산은 천고의 주인이오 인물은 백세의 손님이라.
□ 해설
옛 同福 二西에 물염정이 있으며 宋正郞 庭荀이 비로소 세워서 그 외손 羅滄洲 휘 茂松과 九萃 휘 茂春 형제에게 주었다. 亭을 세운지 대개 三百餘年인데 그 중간에 몇 번을 중수한지 알 수 없다. 그러나 風雨를 헤아릴 수 없어 조석에 우려가 있을까 두려워 후손된 자들이 각각 성금을 내어 지난 丙午년 봄에 重修의 役을 거행하여 役事를 마치고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몇 번이나 중수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이에 우리 문헌이 부족함이라 이제 또 만약 기록한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후인에게 증거하랴. 이에 龍根 炳煥 두 분이 나에게 기문을 물으니 丁○이 그윽이 생각하건데 滄洲 九萃 二公은 名家의 逸才로서 함께 문과의 영광에 올랐으니, 한 분은 丙子호란에 義州로 호종하여 上寵을 특몽하였다. 그러나 화친이 이뤄짐을 분히 여겨 벼슬을 버리셨고, 한 분은 光海 昏朝에 廢母의 議를 疏斥하였다가 마침내 廢錮를 당하였으니 그 충의는 가히 日星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고 海嶽과 아울러 중하도다. 바야흐로 二公에 前後에 이 정에 退居하여 北窓에 淸風이 불어오면 스스로 羲皇때 사람이라 이르기를 율리에 도정절과 같고 손수 周易을 잡아 분향 묵좌하기를 王黃州의 竹樓와 같았고 날로 杞菊을 먹어 용모가 풍부하기를 蘇長公의 凌虛臺와 같아서 이에 道있는 君子가 은거하여 근심이 없는 뜻이 아님이 없으니 당시에 賢土大夫들이 蒲輸하여 追逐하지 아니함이 없고 후세에 文人韻士들은 歌詩로 贊美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어찌 홀로 亭으로써 南州에 山水의 명승으로 삼을뿐이냐 실로 또한 淸德 高節로써 세상에 重한바 되는 二公이 그 主人 되었다. 세상에 부호하는자 왕왕히 園亭을 다스림에 그 一時의 기쁨과 百世의 계획을 도모하여 굉장하고 화려하며 견고하여 가히 움직이지 못할 자 과연 어떠하였던가 마는 數世를 못가서 혹 그 주인이 바뀌고 혹 헐어져 다시 일으키지 못하거든 하물며 이에 兀兀히 數間의 亭은 능히 三百餘年의 오래도록 無恙히 보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직 百世토록 잊지 못할 덕업이 있어서 이에 百世에 가히 보존할 亭이 있음이라 그런즉 亭은 어찌 사람마다 두리오 宋正郞은 가히 사람을 잘 보았다 이를 것이요 二公은 가하 裕後를 잘하였다 이를지로다 이에 중심에 느낀 바를 써서 이것으로 記를 삼노라. 勿染 두 글자의 뜻에 이르러서는 前賢이 이미 자상히 기록하고 또한 泉石雲林의 아름다운 것은 등람한 자 스스로 얻을 것이니 구구히 언급할 것 없다. <단군기원 四千三百十四年 辛酉(一九八一) 冬至節에 坡平 尹丁○은 記하고 從後孫 承汶은 씀>
6) 義兵長 김태원의 戰跡址 무동마을
2004년 5월 18일에 <담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운 김태원 의병장 전적지가 무동 마을에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단기 4241년 무신년 정월 초하루 (1908년 2월 2일) 창평군 외남면 舞童村 (현 담양군 남면 茂洞里) 바로 이곳에서 당시 구국의 일념에 불타던 우리 김태원 의병장이 항일 의병 탄압에 악명 높았던 일본군 요시다(吉田勝三郞) 부대장을 격살했다. 우리는 김태원 의병장의 구국의 충정과 의로운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자 이 곳 격전의 현장에 표지석을 세워 그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7) 이서면 인계마을의 조탑
화순군 이서면 인계리 3구 松溪마을 입구 좌우에 2기의 원뿔 형태의 조탑이 있다. 무등산권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기드문 전통적인 수구맥이 조탑이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조탑 상단에는 30센티미터의 선돌이 세워져 있고 전체 높이는 2미터, 둘레는 6미터 정도이다. 조탑은 장승과 솟대 그리고 입석과 함께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돌탑’ 또는 ‘탑’ 이란 명칭으로 도서 지방인 남해에서 강원도에 이르는 전국에 두루 남아 있지만, 주로 산골인 전남 곡성과 전북 순창 ? 장수 등에 많이 남아있다. 이곳 송계마을의 조탑 또한 풍수상 마을의 재물이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고 동네 입구의 경계표로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8) 안양산 휴양림
독림가 진재량씨가 1961년부터 길러온 삼나무와 측백나무 조림지 20만평을 중심으로 1997년부터 개장한 안양산 휴양림은 화순군 이서면 산 168번지에 있다. 최근에 화순 온천과 연계되어 휴양림을 가로지르는 포장도로가 나고 부터는 옛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광주 인근의 최근거리 휴양림이며 최고의 철쭉 군락지로 전문가들은 다 알고 있는 명소이다. 무등산의 장불재에서 백마능선을 거쳐 안양산(853M)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국토순례코스로 이용되고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주둔지로 널리 알려진 둔병재(屯兵峙)는 호국 유적으로도 기억할 만하다. 매년 5월 초순이면 만개한 철쭉꽃이 장관을 이뤄 봉화산이나 인근의 백아산 철쭉보다 한 수 위라는 평을 받고 있다. 안양(安養)이란 용어가 불가에서 몸과 마음을 편안케 한다는 뜻이니 한번쯤 마음을 버리고 쉴 만한 곳이다.
9) 判書 배출의 明堂 : 六判里
육판리는 광주광역시 동구 내남동 내지 마을의 옛 지명이다. 6백 년 전에 개촌한 이 마을에는 광산김씨, 나주 나씨 ? 임씨 ? 정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달성 배씨, 수원 백씨, 밀양 손씨, 평산 신씨, 풍산 홍씨 등이 80여 호 500여 명이 살고 있다. 풍수상 육판서가 배출될만한 명당으로 알려진 이 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 여덟 곳은 다음과 같다. 菊秀寒雪 ? 聾岩歸雲 ? 桂峰明月 ? 玉橋玉笛 ? 金亭瀑布 ? ? 嶝落照 ? 鷗山暮雨 ? 硯池漁火
10) 全新民의 獨守亭
담양군 남면 산음동 기슭에 전라남도 기념물 16호로 지정된 瑞隱 전신민의 독수정이 있다. 원효계곡의 누정과 달리 덜 알려진 탓에 주변은 조용하고 풍광 또한 그윽하다.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한양에서 이곳으로 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독수정을 짓고 숨어 지냈다. 그는 이태조가 수차례 불렀으나 두나라를 섬기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침마다 조복을 입고 哭拜하였다고 한다. 누정의 명칭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노래한 이백의 싯구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기개가 담긴 것이다.
11) 못 가봐서 더욱 서운한 瑞鳳寺址
전남대 강당 앞에 야외 전시된 석탑과 석종형 부도는 원래 무등산 뒤쪽의 서봉사터에 남아 있던 유물들이다. 폐사지인 서봉사의 중심구역으로 생각되는 지역은 광주 진내과 소유 감나무 밭이다. 조선 세종 때 전라도 지역을 선교양종으로 정리하고, 교종사찰은 창평 서봉사, 선종사찰은 구례 화엄사를 꼽았다. 현재의 절 터에는 서봉사의 유물로 보이는 석조 부재가 산재되어 있다.
4. 남은 말
멀리서 보고, 가서 느끼며, 안에 들어 살면서 관찰 하는 것이 문화인류학적 관찰방법이다. 어떤 대상을 넓고 깊게 보고자 한다면, 망원경적 시각도 필요하고 현미경적 접근도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답사는 무등산의 일부를 멀리서 바라보고 온 주마간산격의 기행일 수밖에 없다. 무등산이 안고 있는 그 넉넉한 풍광과 흔적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자리였다면 그만이다. 그래도 한 번 쯤은 멀리 두고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5. 참고 서적
광주광역시 홈페이지
담양군 홈페이지
호남가단연구 : 정익섭
한국가사문학의 연구 : 이상보, 형설출판사, 1974
김현주 :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세계, 효형출판
광주의 누정과 원림 : 광주민학회 시티투어 자료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1991.
『王이여 전라도 남자를 보시오』남성숙, 도서출판 민, 1994.
『다시 쓰는 전라도 역사』이해준, 금호문화, 1995.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호남 인물 100』남성숙, 송원백화점, 1996.
『全南圈文集解題 (Ⅰ)』전남대 인문과학연구소, 1997.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전라남도,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2002.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사계절,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