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창녕조씨
계룡의 25세손 정통(精通)은 과거에 수석합격해 문하시중(종일품벼슬)을 지냈다. 정통은 나주 남평에서 터를 잡아 강진을 자주 왕래했고 다섯명의 아들을 두었다. 다섯명의 아들이 모두 현명하고 극진한 효자로 마을이름이 오룡동이라고 지어질 정도였다.
둘째 응룡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국돼자 집에서 은거하며 고려조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응룡은 후손들에게 벼슬길보다는 부모에 효도하고 학문에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이런 가르침은 후손들에게 학자와 효자가 많은 가문으로 만들어 나갔다.
32세손 의(誼)는 사화를 피해 작천면 행정마을로 찾아들면서 창녕조씨의 관내 생활이 시작된다. 유항제 선생에게 글을 배웠던 의는 유선생의 딸과 결혼하면서 강진에 정착하게 된다. 의의 아들 대남은 5명의 아들을 두었고 후손들이 번창하게 된다.
셋째아들 복흥은 성전면 월남마을로 터를 옮겼고 인근 지역으로 각 아들들이 생활터전의 잡기 시작했다. 복흥의 셋째아들 익송은 통훈대부(정삼품벼슬)에 올라 마량면 원포마을로 이주했다.
복흥의 아들 일상은 통정대부(정삼품벼슬)를 지냈고 8명의 아들을 두게 된다. 8명의 아들이 모두 대구면 계치마을로 터를 잡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8형제중 둘째 몽득과 셋째 몽린은 학문에도 뛰어나고 효성도 지극해 주민들에게 쌍효자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계치마을 입구에 정각을 짓어 부모를 봉양하면서 후학양성에 앞장섰다.
몽득의 4세손 병결은 동학군의 지휘와 훈련에 앞장섰다. 병결은 동학난이 발생하자 용맹함과 뛰어난 학문실력으로 이름을 크게 떨졌다.
강진에서 생활하고 있는 창녕조씨는 저의 후손들인 장양공파와 정통의 후손들인 시중공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창녕조씨의 후손들이 주로 생활하는곳은 대구면 계치마을, 군동면 쌍덕리, 도암면 선장마을등을 꼽을수 있다.
대구면 계치마을에는 효정재가 위치해 있다. 효정재는 응경, 응룡, 한룡, 몽린을 모시는 제각이다. 이곳에는 대학사라는 사당이 위치해 유림들이 매년 음력 9월 20일 제사를 지내는 원사로 가치가 높다.
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효정재는 5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효정재는 임진왜란때 소실됐다. 이에 후손들이 지난 1888년 다시 복원하고 증축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효정재에서 보관된 서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홀기(제사때 순서를 적은글)등이 그대로 보전돼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어 기나긴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도암면 선장마을 입구에는 태계재가 위치해 있다. 성균관 진사를 지낸 태계를 모시는 제각으로 최근 새롭게 정비한 곳이다.
출처:강진 디지탈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