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밤에는 둥그른 보름달, 공기는 상쾌
여행하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다. 아침일찍 일어나 진언을 외우며 혼침과 미망의 안개를 걷고 창문을 연다.
태양이여 밝은 빛을 비쳐다오.
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시간표대로 정확한 시간에 차가 온다. 중앙역에서 빵과 바나나, 사과, 우유를 사서 아침으로 때우다.
어제부터 뜨거운 국물을 훌훌 마셔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여기 음식은 탕(湯)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잘 먹었다 해도 뭔가 깨운치 않고 항상 입안이 꺼끌꺼끌하다.
사과를 먹으며 우연히 올려다본 역사(驛舍)의 천장 - 얼핏보아 철제빔(beam)구조 같은데, 자세히 보면 모두 목재이다.
나무를 깍아 맞추어 저렇게 원형의 천장(돔(dome)형)을 지어내다니, 아마도 바이킹의 배 만드는 기술에서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역사 앞 구석에 왠 물이 흘러나와 보도블록을 적시고 있는데 아마도 밤동안 부랑자들이 오줌을 갈긴 것 같다.
풍요속의 빈곤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척하고, 행복할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심연이 검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 곧 부랑자, 독거노인, 멀리에서 살 길을 찾아온 검둥이 - 모두 소외당한 고독한 사람들이다.
사회가 사랑을 강조할수록 더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이다.
7:52오전.
함부르크행 기차를 타다.
드넓은 평야, 끝없이 펼쳐지는 전원과 숲을 지나다. 기차가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넌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레일도 끝나고 기차는 물을 건널수 없는데.
아, 누구인가. 배안에 레일을 깔아 기차를 배에 실고 바다를 건넌다고 발상한 그 사람은?
상상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한 현실로 창조해낸다.
12:12.
함부르크역에서 내려서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역사의 천장은 엄청 높아 보이며 거대한 실내 공간이 마치 영화에서 본 우주선에 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역 앞 식당에 들러 독일 맥주 홀스타인(Hostein)을 한잔 마시다.
아주 맛있는 소스와 빵 한 조각을 먹고 나니 정신이 아리아리해지면서 사물이 헝클어져 보이기 시작한다. △□이 。○o○ 둥글어져 보이며 형체가 마구 흔들린다.
시간에 쫓겨서 뜀박질로 역에 돌아와 8번 플랫폼에서 기다리다 열차가 플랫폼에 미끌어 오자마자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종종 걸음을 쳐서 지정된 칸에 올라탔다. 명고 스님은 천천히 따라온다.
나는 성질이 급한 놈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곧 바로 행동이 튀어나와 성취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끝장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직성이 풀리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스트레스이다. 그러니 일을 만들기 싫어하고 한 생각 일으키길 꺼려하는 경향이 있어 소극적 방어적이 되며 침잠하는 기질이 있다.
좀 더 느긋해지자. 한 생각 일으켜서 실행하거나 실행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일 없는 상태에 쉬든지 간에 너무 서두르지 말자.
몸과 마음을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자. 그러나 쉽지 않다.
일을 당해서는 온갖 것 다 잊어버리고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습성대로 몸이 움직이고 만다. 아니 생각보다 몸이 먼저 간다.
저기 저 기차를 놓칠세라, 저기 앞에 가는 시간의 목덜미를 붙잡고 늘어져 미끌미끌한 그 몸뚱이에 올라 탈려고 하는 나를 보라. 성질 급한 놈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니? 급할수록 더 급하게 서둘러 그 상황을 짓밟아 뭉개 버려야지. 그 까짓 것을 사정봐줄게 뭐 있나.
한번 쏘아 올린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마음 낸 것 무엇이든 속속 이루어지이다.
급급여율령 사바하(急急如律令 娑婆하)
잠깐 조는 사이에 베를린을 지난다.
개나리가 떼를 지어서 달려와서는 꽃미소를 던지며 달아난다.
봄이?
여기가 독일입니다. 독일인의 사랑입니다.
관점을 차안에 두면 풍경이 뒤쪽으로 달아나고, 관점을 풍경 쪽에 두면 기차가 앞으로 달려나간다.
관점은 어느쪽에나 둘 수 있다.
주관(기차)이 정지되어 있고, 객관(풍경)이 움직인다든지, 객관이 정지되어 있고, 주관이 움직인다든지간에 주관과 객관을 포괄하는 관점(풍경과 기차를 한꺼번에 보는 관점)에서 보면 그 효과는 동일하다.
다만 운동이란 현상만 지각될 뿐 이것이 아이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하게 된 단서가 되었다.
달리는 기차와 풍경은 상대성 운동을 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을 포괄하는 포괄적 관점에서 보면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요(不去不來)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정지한 것도 아니다(不動不定)이라는 中道이다. 이는 아가르주나(용수)존자가 밝혀 놓은 바이다.
구동독 지역이었던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역을 지나는데 양 옆으로 보이는 건물의 느낌이 벌써 으시시하고 생기가 빠져버린 듯하다.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콘크리트 병동을 연상시킨다.
전쟁의 참혹상을 증거하기 위해 보수를 않은 채 파괴된 채로 보존한다는 빌헬름 황제기념교회가 보인다.
기차가 달리는 왼쪽 차창 가득히 동물원 풍경이 실려온다.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동물원이라 한다.
나도 지구라는 동물원에 갖힌 한 마리 동물인 호모사피엔스에 불과 하지 않은가?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어디인가?
새가 울고, 소가 웃을 뿐 누가 대신 말해 주리오.
그대 스스로 자문해 보라.
꽃이 붉고 보들이 푸른 것은 어디서나 매일반, 4월은 강인한 달. 푸른 혼이 딱딱한 대지를 깨치고 솟아 나온다. 만물은 갱생하며 생명은 무궁하다. 다만 유한한 개아의식에 갖힌 인간만이 죽어 갈 뿐이다.
높이 300미터의 TV송신탑 손을 높이 쳐들고 지나간다.
중세기에 지어진 고건축물이 보수중이다. 과거와 현재가 갈등하며 화해하고 있는 중이다.
엘베(Elbe)강을 지나다.
봄문이 내리듯 소담스레 피어있는 하얀 매화 꽃송이, 울타리마다 정원마다 늘어지게 피어있는 살포시 내린 봄비에 젖어 더욱 빛나는 집, 집, 집
조용히 관조하며 명상에 잠긴다. 여기가 엘베강변의 도시 드레스텐이다. 인공과 천연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눈이 편안하고 귀가 즐거우리라.
기차는 체코 국경을 넘었다. 역무원이 그냥 여권만 보여 달라한다. 국경을 지나니 자연 풍광이 달라졌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단애(斷崖) 아래는 물이 오르는 숲, 숲 아래는 마을이요, 마을 앞에는 강물이 흘러......
그 강물 건너 이쪽 편엔 마을과 들녘, 그리고 달리는 차창 속의 관조자.
숲 사이에 다소곳이 않아 있는 집들이 모두 좌선을 하고 있는 듯... 강물을 바라보며 선정에 들어 있다.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벌써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터이니... 거리에 오가는 사람이 보일 만도 한데...강을 따라 철길을 달린다.
장강대협을 지나듯, 운무에 젖어드는 산수(山水)가 저문 강에 잠긴다. 집들이 모두 별장 같다. 강을 바라보기 위해 발코니를 내고, 굴뚝에 연기가 모락 모락 피어 오른다. 그 집안에는 누군가가 따뜻한 찻잔에 입술을 대고, 감미로운 생(生)을 음미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랑이 있는 벽난로 옆에서.
데친(Deccin)이라는 도시를 지난다. 체코 승무원이 와서 유레일패스는 체코에서 통용이 않되므로 프라하까지 가는 운임을 내라한다. 21유로.
아직도 강을 따라 달리는 기차.
강물은 수량이 풍부하고 흐름이 빠른 편이다. 유람선이 떠간다. 이 강이 바로 도나우강(Donau, Danuve 다뉴브강이라 하기도 한다)이다.
밤 9시에 프라하 중앙역에 내리다.
이메일로 미리 예약해 놓았던 숙소로 전화해 보니 모두 만원이라 한다. 주말이라 모든 유스호스텔이 예약만료란다.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중급 호텔을 알아 보았으나 너무 비싼 편이다.(1,000KC(코루나)약 3만 8천원), 체코화폐 1KC(코루나) 약 38.7원) 피씨(PC)방을 찾아 나의 이메일을 확인해 보니 모두 응답이 와 있는데 체코 알파벳으로 씌어져 있어 해독불능, 할수 없이 역사를 그냥 맴돌다가 죠지(George)라는 아저씨(53세)를 다시 만났다. 사실 이 아저씨는 우리가 역에 내리자마자 처음 만난 분인데,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니며 좋은 숙소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으나 일부러 외면하고, 우리 손으로 찾으려다가 이제 난관에 부딪혔다. 별수 없이 그 분을 따라 나섰다. 얼굴이 맑아 보이고 지성인 같아 보여 믿어 보기로 했다.
지하철(메트로 metro)를 타고 한참 걸어서 비노흐라스카(Vinohradska) 71번가에 있는 고급 아파트로 데려온다.
바비체크(Babicek) 부인네 집이라고 한다.
방이 아주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 체코의 귀족집에 온듯한 기분이 든다. 욕실과 부엌이 모두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품새에서 이 집의 살림맡은 부인의 품성을 보는 듯하다.
사흘밤에 2,200코루나(약 10만 4천원)로 계산하고 방값을 건네준다. 죠지가 프라하시내 관광 포인트를 대충이야기 해 준다. 체코식 영어 발음이라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낮선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미리 예상했던 것들이 모두 어그러져 버리고 밤은 깊어가는데 짐은 무겁고 갈 곳을 찾지 못해 서성이든 그 시간, 외딴 곳에 내던져진 털 빠진 짐승처럼 끙끙대다가 이제 잠잘 곳을 찾았다. 가시 수풀을 헤치고 나와 어둠속에서 빛나는 궁전을 찾은 기분이다. 하얀 타일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온 몸을 녹이고 나니 육신에 생기가 돌고 홍삼차를 한잔 하니 눈이 뜨진다.
오늘 하루 유틀란드 반도에서 발트해를 건너 체코까지 달려온 나그네여, 이제 동유럽의 보석이라는 여기 프라하의 밤에 빛나는 꿈을 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