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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8일 새벽, 미군이 경비하고 있던 부산·대구·광주·마산 등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서 갑자기 철조망이 뚫렸다. 그 사이로 쏟아져 나온 포로들을 구출하고 나선 것은 다름아닌 국군 헌병대였다. 당황한 미군은 탱크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수용소 부근의 주민들은 탈출한 포로들을 숨기고 옷을 갈아 입혀 줬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명령에 의한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반공포로' 3만5000여 명 가운데 2만7000여 명이 자유를 되찾았다. 그것은 '이승만은 단독으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1953년, 세계 정세는 바뀌고 있었다. 1월에는 6·25전쟁의 조기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정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오랫동안 휴회에 들어갔던 정전(停戰) 회담이 재개됐으나 이 대통령은 4월 9일 '휴전반대 단독북진'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의 뜻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국민은 대규모 휴전 반대 시위에 나섰다.
이 대통령의 휴전 반대는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고, 반공포로 석방 역시 미국에 대한 압박의 하나였다.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는 전후(戰後) 군사·경제적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따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날 밤 10시를 기해 155마일 전선에서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7월 29일자 조선일보는 '기이(奇異)한 전투의 정지'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이 빠진 채 이뤄진 이 정전협정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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