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03년 9월 21일 09시
만날곳:전철4호선 과천종합청사역구내
행선지: 청계산 (코스: 과천 매봉-석기봉-옛골) 날씨: 맑음
참석자:12명(김부익, 김승기, 김형철, 김호경, 박기환, 서영준, 윤한근, 이명인, 이종원, 최해관, 한경록 그리고 나 윤신한)
지난 달에 일이 있어서 이 동아리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더니 산에 오른 지가 꽤 오래 된 것 같다. 며칠 전에 해관으로부터 이번에는 강남으로 옮겨 청계산에 가기로 했다는 전자우편을 받았다. 먼저 번에 과천까지 가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 애를 먹었던 일이 생각나서 오늘은 일찍부터 서둘렀다. 과천 종합청사역 만남의 장소에 도착하니 08:40. 저 쪽에 해관이와 비슷하게 생긴 등산객이 앉아 있길래 다가가 보니 우리 일행이 아니었다. 좀 일찍 온 것 같다. 잘 되었다 싶어 어젯밤에 늦게까지 앉아 있느라고 모자란 잠을 채우려고 기둥에 기대어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얼마 후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형철, 해관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으로 또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게 눈인사를 한다. 9시 정각에 이미 10명을 넘어섰는데 그 직후에 부익이가 손을 흔들면서 도착했고 모두들 일어서려는데 명인이가 당도했다. 그래서, 오늘은 김부익, 김승기, 김형철, 김호경, 박기환, 서영준, 윤한근, 이명인, 이종원, 최해관, 한경록 그리고 나, 모두 12명이다.
09:15 지하철 역을 나와 청계산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산행 때마다 동아리의 먹거리를 챙기는 호경이가 오늘도 누가 무엇을, 특히 무슨 술을, 얼마나 가져왔는지 꼼꼼히 물어보고는 경록이와 함께 옆에 있는 패밀리마트로 달려간다. 일행은 길 입구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그 동안 주말마다 계속 비가 오거나 흐렸는데, 이번 주말의 맑은 날씨는 무려 11주만이라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모두들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나무그늘에 서서 장보러 간 (?) 동료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오늘따라 여느 때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 보면 무언가 푸짐하게 준비하는 모양이다. 호경이는 15분만에 가게를 나왔다.
09:30 이제 등산이 시작된다. 등산로 초입에는 왼쪽으로 한 길 높이의 둑이 계속 이어지고 그리 넓지 않은 길의 오른 쪽에는 구멍가게와 야채/과일가게가 줄지어 있다. 이곳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가게들이 일찍 문을 열고 조그만 소쿠리에 과일이며 야채를 담아 내놓고 맞은 편에도 비슷한 물건을 한 웅큼씩 배설해 놓아 이를 테면 조그만 간이시장이 열린다.
일요일에 올 때마다 그런 걸 보면, 혹시 등산객을 상대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옆을 지나칠 때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따라 가 보던 시골장을 생각하곤 한다. 일행 중에서 누군가가 귤을 몇 개 사서 배낭에 집어 넣는다.
시장길이 끝나자 산길이 시작된다. 쾌청한 하늘아래 여전히 푸르기는 하지만 빛이 엷어져가는 나뭇잎 위로 가을은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오늘의 햇빛은 그야말로 ‘명랑’하다, 마치 슈- 선생의 세레나데에서 ‘저 달빛’이 그렇다고 했듯이. 우리는 수락산 입구처럼 편편한 길을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형철이는 지난 번에 터어키의 이스탄불 (옛이름: 콘스탄티노플, 터키 최대의 도시)에 갔다 오는 길에 샀다는 민속모자를 꺼내어 머리에 얹는다. 차양이 없고 모자의 밑부분과 윗부분의 지름이 같은 원통형으로 높이는 조그만 화분받침만 한데 짙은 자주색 바탕에 폭 3-4 mm의 진노랑색 띠를 여러가지 형태- 삼각형, 연결된 필기체 e자 등등-으로 박음질하고 그런 도형의 한 가운데에 모조보석을 붙여 반짝거리도록 만들었다. 그곳 촌장들이 쓰는 모자라면서 형철이가 그것을 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걸치니 영락없는 터어키 아저씨이다. 그래서 모두들 이스탄불 패션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산행이 끝날 때까지 이 <유라시아 패션>은 청계산의 골짜기와 등성이를 누비며 주목을 끌었다.
09:50 문원동 5-6호 약수터에 도착하여 배낭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쉬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이 약수를 마셔야 한다고 누가 아는 소리를 하여 모두 한 번씩 마셨다. 후미에서 오느라고 뒤늦게 도착한 친구들이 목구멍으로 채 물을 넘기기도 전에, 선두는 벌써 출발한다. 일행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실개천 위로 놓인 장난감 같은 다리를 건너 몇 가지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을 옆으로 하고 사면을 따라 난 비탈길로 올라 간다.
발 밑으로 흙의 부드러운 촉감이 와 닿는다. 청계산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토산(土山)이라는 점이다. 특히 관절부위의 부담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나이에 든 우리들에게 말이다. 처음부터 경사가 매우 급해진다. 산에 오를 때에 첫 머리에서 만나는 언덕길은 항상 만만치 않다. 식식거리면서 10여분을 올라가 소나무를 잡고 바위를 돌아 위로 올라서니 나무 사이로 난 등산로가 동굴마냥 빠끔하게 올려다 보인다. 10:05 중간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래쪽을 바라본다. 구부정한 소나무가 아치처럼 드리워진 밑으로 승기, 명인, 그리고 호경이등이 차례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몽마르뜨의 언덕도 정작 가 보니 이곳처럼 그저 밋밋한 평지였다는 얘기를 나누며 숨을 돌린다.
잠시 후 다시 걷기 시작한다. 계속 오르막길이 이어지다 보니 후미와의 거리도 조금씩 벌어지는 것 같다. 눈 앞에는 소나무 터널의 천정 사이로 한 줄기 햇볕이 뚫고 내려와 서칠라이트 마냥 그늘 속을 비춘다. 바람이 일렁거릴 때마다 그 서칠라이트도 따라 움직이고 나뭇잎도 그 빛깔도 함께 춤춘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을 한 가지의 색으로만 고정하지 않고 일정한 크기의 광점을 이용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고 한다.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이 점묘화법은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광점들이 서로 작용하여 처음부터 팔레트에서 색깔을 섞어 칠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 내 눈앞의 나뭇잎들은 찾아 든 햇빛에 푸른 빛과 노랑 그리고 알 수 없는 빛깔로 번갈아가며 물들면서 반짝인다. 그러나 이 자연의 유희도 오래 가지 못하고 막이 내린다. 천정이 나무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10:20 그런 구경을 하며 가파른 짧은 <깔딱고개>를 올라오니 과천 매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잠깐 배낭을 내려놓고 주위 경관을 살피는 사이, 우리 일행 몇 명이 능선에 올라 서더니 쉬지 않고 계속 오르막길을 내닫는다. 나도 서둘러 메모를 끝내고 수첩을 집어넣은 다음 그 뒤를 따른다. 갈림길이 나타난다. 바위가 많은 능선길과 그 밑으로 돌아가는 우회로가 갈라지는 곳이다. 앞에 가는 일행이 어느 쪽으로 갔을까 둘러보니 저 만큼 위에 있는 능선 길 중간에서 씩씩하게 오르고 있는 영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바위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오르막길을 따라 그 쪽으로 올라간다. 봉우리가 눈 앞에 있다.
10:25 봉우리에 올랐다. 과천 매봉(369.3M)이다. 선착한 우리 일행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정표에는 아까 물을 마신 약수터에서 여기까지 600M라고 쓰여 있다. 누군가 아까 산 귤을 꺼내어 하나씩 나누어 준다. 이렇게 비오듯 땀을 흘릴 때에는 즙이 많은 과일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 나도 가지고 간 사과를 꺼내어 12쪽으로 나누어 일행에게 하나씩 돌린다. 모두 돌리고 난 뒤에도 이상하게 두개가 남는다. 알고 보니 종원이와 기환이가 도착하지 않았다. 아까 올라올 때 만났던 갈림길에서 밑으로 우회하는 길을 따라 간 것이 틀림없다. 이윽고 해관이가 휴대전화로 두 사람을 찾아 통화해 보니 짐작대로 두 사람은 매봉을 우회하여 제법 멀리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 지점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우리도 모두 일어서 이수봉으로 향했다(10:35). 일어나기 전에 해관이는 상대 홈페이지에 올리겠다며 이스탄불 촌장님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사진을 찍히는 형철이의 표정이 몹시 행복해 보인다.
매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몹시 가파르다. 200여 미터의 비탈길이 끝나자 길 오른쪽으로 원의 1/4분면 모양으로 시야가 깨끗하게 열리면서 산모퉁이에 가려진 외곽순환도로의 일부가 보인다. 모처럼 맑은 날을 맞아 모두들 밖으로 나가는지 자동차들의 흐름이 몹시 답답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가히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셈이다. 종원이와 기환이의 모습이 아직 안 보여 걱정을 하자 이곳 사정에 밝은 경록이가 지금 어디쯤 앉아서 기다릴 거라고 한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람은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경록이는 앉아서 천리를 본다(坐見千里)고 할 만하다.
이제 길은 흔히 보는 능선길로 바뀐다. 다시 시야는 나무에 가리고 햇빛은 그 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넘나든다. 추분이 내일 모레이니 벌써 가을이 오고 있다. 초가을 햇볕. 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국어책에서 읽었던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정원 한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주검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서려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이 생각난다. 지금은 그 때처럼 들썩들썩한 감정의 기복은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사무실에서 동료와 함께 창밖을 내다 보다가 맞은 편 허름한 건물의 한쪽 벽에 비스듬히 매달린 <폐업한 어느 일식집의 철거되지 않은 낡은 간판>을 보면서 이것도 <우리를 슬프게……>에 추가할 만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길이 조금 밋밋하다 싶었더니 승기가 요즈음 한국의 여인열전을 읽고 있다면서 성(姓)은 알 수 없고 이름만 전해 온다는 삼실(三實)네, 즉 강실, 이실, 그리고 최실이라는 처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옆에서는 누군가가 <신용카드가 딱…> <능각능원(能角能圓)>등의 알 수 없는 가사가 섞인 최신 가요를 흥얼거린다.
10:55 숲속 군데군데에 10명 정도는 설 수 있을 만한, 나무들을 베어낸 듯한 공간이 이따금 나타난다. 저런 곳이 바로 <숲속의 빈터(glade)>일까? 아니면, 우리 국토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적어도 몇 에이커 (acre: 4,046.8 m2; 약 1,224평)는 되는 면적을 말하는 것일까? 70년대 초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 스칼라극장 맞은편 부근으로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숲속의 빈터>라는 맥주집의 간판을 보곤 했다. 그때 그 이름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 전에 우연히 거길 지나가다가 그 간판이 아직도 붙어있는 것을 보고 몹시 반가왔다. 그러나 정작 그 맥주집에 가본 기억은 없다. 한근이도 그 집이 생각난다고 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기억을 하고 있음은 기분좋은 일이다.
이제 이수봉이 얼마 안 남았다. 원래는 이수봉에서 간식을 하고 옛골로 내려가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는데, 이제 11시도 채 안 되었으니 요기(療飢:시장기를 면할 정도로 음식을 조금 먹음)하기도 어정쩡하다고 해관이가 걱정을 한다. 그리고 이수봉에서 옛골까지는 거리가 짧아 바로 점심을 먹는 것도 마땅찮을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중간 경로를 수정하여 이수봉 대신 석기봉 –망경대를 거쳐 매봉-옛골로 가기로 했다. 이정표가 나타난다. 우리는 청계사쪽이 아닌 석기봉 쪽으로 나아간다.
이제 대체로 평탄하던 능선길이 끝나고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전체 거리도 긴 것도 힘들지만, 이처럼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 산행이 더욱 힘들다. 호경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호경이가 지도를 보자고 하기에 봉우리 바로 밑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11:10)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씻는 사이 후미의 일행도 도착했다. 그 때, 누군가가 “선생님” 하면서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 일행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 형윤 교수님이 거기 계셨다. 마침 제자들과 함께 우리가 거쳐 온 바로 그 길을 따라 등산하시는 길이었다. 지난 6월 관악산에 오를 때 뵙고 석 달만이다. 함께 기념촬영을 한 뒤 선생님은 먼저 출발하셨다.
곧추선 암벽사이로 난 가파른 길을 따라 2-3분 오른 뒤, 우리는 눈 앞이 탁 트인 능선위에 섰다. 끝없이 높고 넓으며 푸르디 푸른 하늘. 그러고 보면 <가을하는 공활한데>로 시작되는 애국가 제3절의 가사는 우리의 산천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악산의 정상을 비롯한 연봉들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그 너머로 인천시가지는 물론 바다까지 보인다. 관악산을 화산(火山)이라고 하는데 그 봉우리의 모양도 불꽃같지만, 오늘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내 눈에 비친 그 산은 검은 색이어서 마치 불탄 산등성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다시 능선길이 이어진다. 삼일 전에 청도에서 돌아온 부익이는 어제 고등학교 동문들과 북한산의 상장봉 능선을 올랐고 오늘 다시 여기에 나왔다.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그곳에 주재원들로 구성된 일요 산악회가 있어서 랴오산(魯山)을 자주 찾는다고 한다. 산동성 출신인 공자님이 그 옛날 가끔 올랐을 지도 모르는 그 산에 오르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520봉에 이르렀다(11:45).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는 음료수 장수가 아이스박스에 맥주와 마실 것을 가득 채워놓고 길손을 부른다. 이정표에는 석기봉까지 똑바로 600M(12분), 왼쪽으로 가는 옛골까지는 4Km(50분)로 표시되어 있다. 메모를 하는 사이 선두는 바람처럼 내닫고 후미도 뒤질쎄라 그 뒤를 좇아간다.
12:00 석기봉(608.3M)에 이르렀다. 한 시간 전에 행로를 바꿀 때는, 석기봉에서 요기를 할 요량이었는데, 석기봉의 봉우리 전체를 평평하게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만든 탓에 햇볕을 가릴 곳이 별로 없었고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몇 군데에는 이미 선착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정상인 망경대 쪽으로 올라가면서 괜찮은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 헬리포트까지는 승용차로도 올라올 수 있도록 포장도로가 나 있다. 아름다운 산의 허리를 잘라 정상인근까지 포장도로를 내는 일은 숙고하고 또 숙고할 일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칼등을 걷는 것 같다.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서 철조망이 쳐져 있고 오른쪽도 상당히 가파른 비탈이다. 한 동안 오르막길이 계속되더니 이내 내리막길로 바뀐다. 응달이라서 습기가 많아 아주 미끄러운 길을 내려가면서 쉴 곳을 찾는데 승기가 지금 생각났다면서 길에서 십여 미터쯤 벗어나더니 10인용 텐트 두 개는 충분히 칠 수 있는 좋은 자리로 일행을 안내한다 (12:10). 승기는 이곳에 전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12:10 자리를 펴고 각자 준비해 온 먹을 것을 내어 놓는다. 항상 그런 편이지만 오늘은 인원이 12명이나 되다 보니 그 내용이 다양했고, 부익이가 청도에서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산피엔주(三鞭酒)를 꺼내 놓았다. 인삼, 녹용, 당귀, 구기자 등 좋다는 약재는 다 들어가 있는 약술이다. 지난 달 학교 OB팀들과 북한산에 올랐을 때에도 이 술을 마셨는데 맛이 괜찮았다. 우리 식구들도 모두 그 맛을 칭찬하며 바닥을 볼 때까지 마셨다. 해관이는 오늘 가게가 쉬는 날이라서 돈까스 대신 다른 것을 가져왔고 요즈음 사정이 생겨 식구들의 식사를 직접 챙기고 있는 승기가 직접 만든 요리를 내놓아 모두를 감동시켰다.
산길을 걷는 시간도 즐겁지만 정상을 지난 다음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우리끼리 하는 이 시간은 참으로 즐겁다. 아직은 좀 이르지만 여기에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고 낙엽이 하나 둘 바람에 날리면 그 운치 또한 비할 데 없다. 흥이 도도해지니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어느 집에서 남편이 하도 비실비실 하기에 그 흔한 x아그라를 사다 주었는데 부작용이 생겨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에 그 부인이 울며 소탐대실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씨의 부인이 가로되 그건 대탐소실이라고 했다나. 어찌 같은 일을 두고 큰 것과 작은 일을 구분하는 기준이 이리 다를 수가 있는가? 지금부터라도 우리 회원들은 大小를 잘 구분하도록 식구들에게 일러둬야 할 것 같다.
그런 중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니 오후 1시가 다 되었다.마침 우리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여창(1450-1504)이 이곳에서 은거했다는 안내문이 있다. 허름한 비닐봉지에 넣어 고무줄로 말뚝에 매달아 놓아서 처음에는 주말 산악회의 등산안내문인 줄 알았다. 성리학의 대가였다는 그 분에 대한 대접이 말이 아니다.
13:05 옛골을 향하여 출발했다. 오른 쪽 옆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쪽으로 올라간다. 길이 몹시 험하다. 가파르고 좁은 데다 미끄럽기까지 하고 더구나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하산하는 행렬이 뒤엉키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내려가는 중이라서 그래도 나은 편인데 지금 올라오는 사람들은 무척 힘들어 보인다. 마침 맞은 편에서 오던 다른 일행 중 한 여성 등산객이 탈진했는지 올라가야 하는 데도 자꾸만 밑으로 내려간다고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등산로는 쉬운 길이 아니다. 10분 뒤 망경대를 옆으로 통과했다.
13:20 혈읍재에 닿았다. 해발 490 미터. 이정표에는 석기봉까지 900M, 매봉은 700M로 표시되어 있다. 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울었다는 고개인데 정여창과 관련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아까 본 설명문에 따르면, 그는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되었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했다. 예전의 형법은 실질적인 처벌 말고도 죽은 이를 다시 처벌하는 등 상징적인 면이 강했다고 생각된다. 증형(蒸刑)도 그 한 예이다. 말 그대로 물에 쌂는 형벌인데, 조선 후기에는 실제로 하지 않고 그런 흉내만 내었다고 한다. 형 집행이 결정되면 큰 길 한 가운데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을 준비한 다음 형리가 죄인을 솥 안으로 인도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장작에 불이 붙는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그 죄인은 필경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형의 집행은 여기서 멈춰지고 죄인은 솥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이다. 그 죄인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죽은 목숨이다. 어디 가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설사 대접을 해준다 하더라도 체면 때문에 나돌아 다닐 수도 없으니, 죽은 것만도 못하다. 정말 무서운 형벌이 아닐 수 없다.
혈읍재에서 옛골로 내려오는 길은 계곡과 나란히 나 있다. 동그란 돌멩이가 발에 차인다. 한 개를 주워 들었다. 동글동글하게 닳아 강변이나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자갈이 한 두개도 아니고 왜 이런 등산로에 있을까? 지난번 폭우에 계곡물이 넘쳐 등산로로 흘러 들면서 돌멩이들도 휩쓸려 들어왔거나 아니면 예전에는 계곡물이 이쪽으로 흘렀는지도 모른다. 물소리가 요란하다. 이 산을 몇 년 동안 다녔어도 오늘처럼 시원스런 물소리는 처음인 듯하다. 모처럼 청계산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물가에 앉아 쉬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우리 일행들도 모두 물가에서 쉬었다 가자고 한다.
13:40 사람들이 조금 뜸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 내린 비로 수량도 풍부하고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맑다. 손을 담가 세수를 하고 등산화를 벗고 지친 발을 쉬게 한다. 와중에도 해관이는 여기저기 다니며 여유로운 모습들을 사진기에 담느라 바쁘고, 호경이는 한 손에 플래스틱 소주병, 다른 손에는 통조림 안주를 들고 가가호호(?) 찾아 다니며 권일배(勸一盃)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회장단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발에 물기가 마르자 모두들 양말과 등산화를 챙겨 신고 일어설 채비를 한다. 옆 친구와 이야기 하느라고 그런 줄도 모르고 그때까지 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누구(나무에 가려 얼굴을 못 보았음)에게 호경이가 갈 준비하라며 웃는다. 마지막 남은 한 잔은 호경에게 따라 주었다.
14:00 물가를 떠났다. 여기저기 벌어진 밤송이 사이로 알밤이 보인다. 이따금 길에 떨어진 것도 있다. 가을은 이렇게 소리없이 익어가고 있다. 14:30에는 옛골로 오는 마지막 세갈래길을 통과했다.
15:00 옛골에 도착했다. 그곳의 개울 또한 맑은 물이 철철 넘쳐 흐른다. 금방이라도 피라미떼가 나타날 것 같다.
묵사발집으로 몰려가 자리를 잡았다. 항상 붐비는 집인데 오늘은 자리가 넉넉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다른 때보다 늦게 내려왔기 때문인 것 같다. 09:30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전부 5시간 반이 걸렸는데, 간식시간 50분을 빼더라도 4시간 40분을 걸은 셈이다. 상산회에서 산행을 시작한 이래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긴 산행이었다. 간식을 한 지도 두시간이 지났고 목도 마르고 해서 우선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따라 건배를 했다. 뒤이어 나온 묵과 막걸리를 들면서 우리는 힘든 산행을 마쳤다는 뿌듯함을 함께 나누었다. 식사도중 명인이가 북알프스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일행에게 돌려가며 보여주었다. 다음 달 행선지를 두고 의논하다가 해관이가 오늘 참석자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기환이에게 선택권(?)을 주자고 했고, 기환이는 소요산을 택했다.
16:15 다음 달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애달픈 사연이 어린 자취를 다시 살펴 볼 생각을 하며 묵사발집을 나섰다. 아직도 초가을 해가 한 발은 남아 우리들 앞으로 긴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끝> <윤 신한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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