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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미론
그 인식과 미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 석우 겸재정선기념관장
1 미론 형성의 배경
어거스틴은 삶과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누구보다 치열한 자기점검의 과정을 거쳤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앙으로 회심하기까지의 회의와 성찰, 번민과 회심의 역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기독교의 대한 확신 있는 믿음을 갖는데 32세까지의 세월을 스스로 시달려야 했다. 그의 미론 또한 그 같은 속성을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처음에는 고전적인 것을 수용하였으나 다음에는 망설이고 회의하였으며, 끝내는 비판과 수용의 과정을 거치면서 재정리되어 나갔던 것이다.
이 같은 자세는 무엇보다도 그의 정직한 탐구정신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가 태어나고 자란 터전과 시대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희랍·로마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가 살았던 분위기는 매우 신앙적이었다. 시대적으로는 고대에 살았으면서도 그의 사상은 오히려 중세지향적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고대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 거기에 기독교적 발상과 해석을 접목시키는 고뇌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주장과 저술이 각각이 마무리적이라기보다는 완성의 목적지를 가기 위한 과정적 성격을 보다 더 강하게 띠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레프(Leff)도 “어거스틴의 전 생애 저술들은 확실성과 신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미론 전개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미를 논한 최초의 저서는 380년에 썼던 『미와 적합함』(DePulchroetapto)이었다. 이는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로 그때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20세)과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은 후였다.이 책 『미와 적합함』은 망실되어 버리고 없고 그의 『고백록』에 대략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그것으로 유추해 보건대 고대 희랍적인 객관주의적 미론, 특히 플라톤의 미론이 경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미(美)론에 관한 관심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그의 『음악론』(DeMusica,388~391년 사이에 쓰여짐)은 이 분야를 다룬 단행본이기도 하다. 그의 회심 직후 쓰여진 『질서론』(DeOrdine,386년 말경)과 『참된 종교』(Deverareligione,387~8집필, 405년 힙포에서 완성)또한 ‘우주의 질서 문제와 참된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책의 곳곳에서 무엇이 미인가 하는 문제를 통찰력 깊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신앙에 입각한 마무리적인 미론을 정리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미론 전개과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서의 시기는 고전적 미론에의 경사기이고 뒤의 시기는 회심 후의 하나님 중심적 미론 전개의 시기이다. 이들 두 시기를 나누는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385년경 그가 플로티누스의 ‘미론’에 접하던 시기에 왔다. 스토아적-절충주의 미학(Stoic-Eclectic Aesthetics)에 반대하는 플로티누스의 주장은 어거스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가 미(美)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철학과 연결시키는데 깊은 영향을 주었다.이들 고전적 미사상에 심취해 있을 때 그는 미지상주의자에 가까웠다.
『고백록』에서 이 시기를 회상하여 미 외에 무엇을 사랑하겠는가 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 무렵 미를 모든 가치의 상위에 놓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그의 미사상에는 고전적 비례(proportion)와 수(number)개념을 내포하고 있고 미의 구분에 있어서도 감각적 미(sensuous beauty)와 지적 미(intellectual beauty)를 구분하여 논하고 있다. 수(數)개념에 있어서는 피타고라스적 요소를, 플라톤으로부터는 절대미(absolute beauty)에 대한 생각을, 스토아학파들로부터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뢰와 조화의 개념을 전수받았다.
이 같은 고전적 미이론의 토양 위에 플로티누스적 미철학과 성서적 세계인식이라는 나무를 심어 키워 신중심적 미론의 열매를 맺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적 미론과 기독교적 미론의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고 이를 공히 수용하면서도 신중심적 이론을 전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미론은 두 시대가 만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회심 전과 후인 변이된 사상이 교차하고 있지만 그 두 과정 사이에 결코 갈등관계를 발견하기 어렵다. 타타르키비츠(Tatarkiewictz)가 어거스틴의 미론은 그의 전반적인 사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다른 논의들에 비해 훨씬 덜 신중심적 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같은 그의 미사상의 형성과정을 상정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종교적, 초월적, 신중심적 미론”을 전개하고 있으면서도 보다 실제적이고 지상적인 미의 과제들에 대한 여러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예술이론과 미이론 사이의 거리를 좁힌 것이나, 미적 경험의 문제를 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한 점, 시(詩)의 미학과 시각의 미학을 구별해 낸 것 그리고 미에 있어서의 심리적 요인을 부분적으로 인지한 것 등이 그렇다.
어거스틴은 미를 분리, 고립시켜 다루지 않고 그의 우주, 세계관의 구도 속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미(美)의 문제는 세계의 창조와 질서, 선악과 미추의 본질적인 문제와 관계를 맺으며 전개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의 역사이해에 대한 기본적 틀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의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사상이해의 기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 점을 감안하여 그의 미론이 갖는 제특성을 논하고, 그의 미에 대한 인식론을 다루겠다. 이어서 그의 미의 핵심적 구성요소라고 생각했던 수(數)와 형태, 그리고 통일성과 질서의 문제를 점검해 보겠다. 논의의 성격상 논쟁 중심의 전개라기보다는 우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의 미(美)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규명하려고 한다. 이는 결국 『고백록』,『질서론』,『참된 종교』,『신국론』과 같은 그의 기본적 저술에 흩어져 있는 주장들을 끌어 모아 그 내용을 추출해 낼 수밖에 없다.
2 어거스틴 미론의 위치와 특성
그의 미론은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출발하였지만 후기에 갈수록 미학적 측면보다는 윤리, 교육, 종교적 요인들이 우위를 차지한다. 어거스틴 자신의 초기 미사상과 후기의 미사상 사이에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자신의 미에 대한 사유의 변천을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정신은 물체의 형상만을 싸고 돌았다. 그리하여 제 스스로 어울리는 것을
아름다운 것, 딴 것과 어울리는 것을 알맞은 것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물체에서
예로 들었다. 물론 육체적 외모를 너무 중시하였기 때문에 영혼 속에서
볼 수 없었다.
조화와 미를 단순히 사물의 관계에서 현상적으로 파악하였지, 그것이 갖는 창조자와의 본원적 관계, 영혼의 측면을 소홀히 하였다는 고백이다. 그가 『미와 적절함』을 썼던 스물 여섯이나 일곱쯤의 무렵에 그에게 들려온 것은 타락과 범죄의 음성뿐이었으며 찾아오는 것은 불안의 심연이었다고 후회스러워한다.
미를 찬미하던 입장에서 그것을 비난하는 자세로의 전환이 확연히 나타난 셈이다. 그는 이제 시(詩)를 허위적이고 불필요하며 심지어 비도덕적이라고 까지 질타한다. 문학의 허구성에 대한 염려는 검열의 필요성까지 인정하고 있다. 극장에 대해서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했던 입장을 받아들여 연극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정감을 유발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정감(false emotion)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라고했다.
그는 예술을 그 가치 면에서 영역별로 차등 평가하였다. 음악을 최고의 형태의 예술로 간주하였는데 이는 수(數)와 비례의 완벽성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건축영역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 또한 수적 측면에서 고도의 질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서이다. 반면 회화와 조각은 상대적으로 하위예술로 간주했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눈의 감각, 즉 보이는 면에 치중한 데 반해 수와 리듬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는 또한 각 예술영역이 갖는 고유성을 인지하였고 이를 설명하는 예술이론도 다양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문학과 시각예술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였고 그것을 보는 눈과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였다.그림은 보이는 대로 나름의 이해와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문학은 시간성을 띤 예술로 읽는데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이는 그림에서는 형태(Form)가 본질이 되지만 문학의 경우 내용(content)이 그 핵을 이루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예술 구성요건으로서 지식과 창조성을 강조하였다. 예술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정신활동, 즉 지식에 기초한다고 본 점에서 고대적 전통을 전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새들의 단순한 노래나 개미들이 집을 짓는 것은 전수되는 습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 점에서 예술은 인간영역에만 제한시켰다. 또한 비록 인간의 노래일지라도 그것이 지식이나 창의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모방에 그친다면 그 또한 예술일 수 없다.예술에 있어서의 지식의 역할은 그만큼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미 주관적 입장을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회화와 조각을 단순히 모방영역이라고만 보고 예술이 아닌 모방의 측면에서만 보려던 고전적 자세를 거부하였다. 회화나 조각의 기능도 단순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數)와 조화의 구성요소를 내포하고 미를 창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영역에 포함시키고자 했다.모든 존재의 목적을 신과 연결시켜야 했던 어거스틴에게 예술의 주요 기능이 모방이나 환영이라는 고전적 주장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방이나 환영을 전적으로 배제해 버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끝내 모방성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며, 예술이 눈을 속이는 환각(illusion)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방이나 환영의 요소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들이 예술의 본질적 속성일 수는 없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모방이란 자연주의(naturalism)의 반대편에 서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모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그것을 모방한다는 것은 사물의 모든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미적 특징들을 발견하여 이를 모방하게 된다. 그 같은 모방은 재현적 모방이 아니라 미적 측면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예술성과 무관할 수가 없다. 미술사학자 리글(Riegl)은 어거스틴의 이 같은 입장을 자연적 요소와 관념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논리라고 평가하였다.확실히 어거스틴의 모방론은 아주 현대감각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사실의 묘사도 그것은 재현될 수 없으며 끝내 재구성일 수밖에 없다는 현대적 논리에 버금가는 것이다.
예술의 허위성(falsehood)에 관해서도 그의 진일보된 입장을 취한다. 예술이 진실이 아닌 허위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대인들은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예술작품이란 부분적으로 허위이며, 더구나 예술에 있어서의 허위성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시 말해 예술가가 예술 작품의 허위성 체현(體現)에 실패한다면 이는 곧 예술가로서의 충실한 기능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된다. 예를 들어 그림 속에 그려진 말 그림은 아무리 잘 그려져 있더라도 그것은 실재 아닌 허위일 때 그것을 그린 예술가는 그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림 또한 실재가 아닐 때만 진정한 그림이 된다. 배우가 연기했을 경우도 그가 담당한 역이 진짜 인물이 아니데 진짜처럼 느껴질 때 그 배우의 연기는 가장 충일한 연기가 되는 것이다.바꾸어 말하면 허위성이 가장 두드러질 때 모방의 예술성이 그만큼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허위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예술가와 갖는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허위성이 갖는 자리를 분명히 매김질하여 준 것이다.
어거스틴은 미적 경험에 대해서도 감각기능의 중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간접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intellectual)경험, 지적 판단을 중시하였다. 이 점이 어거스틴을 미학에 심리학을 접목시킨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하는 이유이다.
미적 체험에서 감각은 일차적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지적 역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적 경험은 눈으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함께 한다고 본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절대적 미와 상대적 미를 구분하였다. 물리적 미(physical beauty)는 그것이 신의 미(beauty of God)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과정적이다. 결국 최고의 미(highest beauty)란 하나님에 위해 이미 선재된 것의 반영이며 신의 미는 곧 지상미의준거가된셈이다.
어거스틴은 고대의 미관을 수용하여 자신의 것을 창출하는 진취적 결실을 맺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교량이었으며 그의 미론이 갖는 특성이란 이 같은 위상의 구체적 반영이었다.
3 미의 인식과 판단의 문제
어거스틴의 미사상은 그의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에 대한 인식은 다만 이해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판단을 수반한다. 그래서 어거스틴 자신도 어떤 사안에 대한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인식과 판단을 동시에 수행해야 된다고 보고 이 두 개념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둘(인식과 판단)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인식에는 무엇이 그렇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일로 족하다. 그런데 판단을 하려면 그것과는 달리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첨가하게 된다. 마치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들을 두고 말을 하듯이 이래야만 한다 또는 “이랬어야만 한다” 또는 “이래야만 할 것이다”라는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인식과 판단은 앞서와 같이 이론적으로는 구분이 가능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감각, 이성, 마음 등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한다. 미적 인식과 판단에 있어서 이들 기능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상호관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 어거스틴의 미론에 대한 합당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인식문제에 대한 접근은 아주 단순한 도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우선 자기(self)와 대상(object)을 더 이상 감할 수 없는 필수관계로 설정하였다. 인식에 있어서 자기와 대상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하였으며 그 같은 경험은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했다.밖에 있는 사물(from the thing without)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간 (proceeding within to man)다음 그 상호관계를, 위에 있는 신의 측면(what is above him)에서 조명해 보는 절차를 취했다.
그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밖에 있는 대상이 인간의 내면에 어떻게 감지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밖의 대상을 감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감각(sense)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에게 감각은 인식에 이르는 첫 관문이며 인식의 최저단계는 감각에 의존하는 감각인식이었다.
이 말은 인식에 있어서 감각은 매우 첨단적이고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어거스틴은 감각이 이성보다는 덜 신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식에 있어서 감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 점이 감각을 불신했던 회의주의자들의 입장과 다르다.
그가 감각을 신뢰해는 데는 영혼(soul)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는데 감각이란 형체상의 실체(bodily substance)를 알기 위해 필요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감각이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홀로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다시 말해 감각작용이란 자체의 행위가 아니라 감각기관을 도구로 사용하는 영혼의 행위라고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감각은 신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기실 영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작용은 이성이나 영혼의 도움 없이는 그 기능이 무력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로 동물의 경우를 들었는데 동물들이 감각의 측면에서는 인간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만 그것들이 합리적 사유기능을 갖지 못한 것은 이성이나 영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영혼을 육체보다 우위의 자리에 놓았다. 상위의 것은 하위의 것보다 결코 나빠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영혼이 신체에 복종하는 것은 모순이고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결국 육체가 이득을 보는데 그것을 사랑하는 영혼의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감각만으로는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대상이 감각에 영향을 주더라도 영혼의 관심이 개입되지 않으면 거기에는 아직 감각작용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영혼이 감각에 불러들여지지 않으면 감각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감각작용이란 신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신체를 통한 영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인식의 최고단계란 영원한 예지에의 관상인데, 이 경우는 감각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인식의 상태다.
인식과 감각의 관계 못지 않게 이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거스틴는 모든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완벽한 감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이성을 갖지 못했다고 본다. 인간만이 이성을 소유한다. 이 이성은 감각을 통하여 들어오는 대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감각 그 자체를 판단한다.
비이성적 동물이 생명이 있고 감각이 있음을 아무도 부인 않지만 인간정신
에 있어서 극히 탁월한 점은 감각적인 것을 감지하는 (능력에) 있지 않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판단하는 (능력에 ) 있다.
뿐만 아니라 이성이 감각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눈의 시각은 (보이는) 그것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판단을 전혀 내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감각을 하는 생물이 단순한 물체보다 월등하듯이 이성적인
생명은 그들보다 분명 우월하다.
어거스틴은 감각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았다. 그 이유는 이성은 감각을 계량하고 판단하나 감각은 이성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들은 그 자체 내에서 조차 서로를 연결시키고 감각 자체를 보관시키는 내적 감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하물며 이성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는데, 이성은 감각을 규제하고 감각작용을 판단할 뿐 아니라 그것의 진실여부를 보증까지 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성보다 더 우위의 실체가 없으면 인간의 이성이 마지막 조정자로서 신적인 자리에까지 오를지 모른다.그러나 진리는 이성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인가 더 높은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성은 마음 속에서 영혼과 접촉하고 이 영혼은 신으로부터 조명됨으로써 지성에 이르게 된다.좁은 의미의 영혼을 anima rationalis, 즉 이성적 영혼이라고도 쓰고 있는데 이성(ratio)과 오성이 영혼과 결합되었을 때 지성(mens, nous)세계와의 접목이 이루어진다.
이 지성상태의 근원이 바로 진리이며 하나님이다. 이 같은 지성세계(intelligible world)는 인간의 감각이나 영혼의 산물이 아니라 이들보다 먼저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감각이나 이성에 의해서 계량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량 받아야 한다.같은 맥락에서 진리는 불변이며 감각이나 영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발견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善)이라는 것도 감각적 사무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미나 선이라는 것은 감각의 산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위로부터, 위의 완전함으로부터 빌려온 지적 파악에 의해 발견될 뿐인 것이다.
시나 음악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소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려오지만 그 소리가 갖는 의미와 형태 등에 대한 인식은 영혼의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이성이 이해를 위해 영혼을 돕지만 이성의 현재가 곧 바른 추론에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지식이 되는 데는 영혼과의 작용이 필요하다. 감각과 이성이 다르듯이 이성과 지식이 다르며 지식과 영혼이 가까운 것이더라도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감각적 인식과 지적 인식의 차이는 이런 데서 이유를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감각과 영혼과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로“감각이란 육신이 감수한 것을 영혼이 지각하는 과정이다”라고도 말해진다.그러나 모든 대상이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영혼은 감각과 구별되어 있는 독자적 자율 영역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감각하는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대상물을 감수(感受)하는 것이다.즉 눈은 대상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데도 대상물을 본다.예를 들어 연기는 보이는데 불이 직접 보이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에서 연기의 인식은 감각적인 데 반해 불에 대한 추론은 지적 인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감각과 이성, 영혼의 관계는 결코 상치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 물론 이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어거스틴 자신도 답을 못하고 있다.
영혼은 짐승의 혼처럼 육체를 살아 움직이게 하지만 그것은 비물질적 원리
이며 영혼의 존재는 바로 생명이다.그래서 죽을 수 없다. 또 가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라 육신의 성장과 관계없이 진보한다.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방법은 불가사의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이들을 구태여 위계별로 나눈다면 신체, 이성, 영혼이나 지성의 순서로 이어진다고 보겠다. 이성은 판단력을 갖고 있으나 신과의 교감에 있어서는 영혼에 미치지 못한다. 궁극적인 신과의 통로는 영혼을 통해서이다. 영혼의 본성은 그것이 신과 접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 본성은 신성의 반영이라는 것이다.이 때 영혼의 본질은 “지성(intellogentin)”과 “사랑(amor)”이다. 이는 성부의 본질이 말씀과 성령의 근거가 된다는 원리와 동일하다.영혼은 또한 명상을 통하여 보다 고차원적인 진리와 접촉하게 되는데 이 때에 영혼은 진리를 배운다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인식케 한다고 했다.
짐승의 혼은 신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야수에게 있어서 우월한 것은 지성적 인식이 아니고 습관의 도움을 받은 감각적 인식이다.이에 비하여 인간의 영혼은 감각보다 훨씬 우월한 이성과 결부되어 지성적 인식에 도달하도록 한다. 영혼의 판단은 지성적 판단이라 할 수 있는데 감성과 이성의 도움을 받고 자기 일을 수행한 셈이다.
이 같은 인식 과정을 고찰해 볼 때 미를 미로 인식하는 것은 감각보다 우위에 있는 이성과 영혼의 작용이다.그래서 그가 『고백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미는 사물의 인식에서 비롯되지만 그 미의 기준은 인식이나 감각에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리적 수준에서 마련된 준거를 발견하는 데서 미가 인식되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신에 의한 준거적 조명이 중요한 요체가 된다. 미의 구성체인 수(數)나 비례, 조화나 통일성 같은 것은 감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지성으로 파악되는 것일 따름이다.
이 지성의 작동은 하나님의 조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지식이란 밖으로부터 배워진 배움이 아니라 조명을 통하여 안으로부터 발견된다는 논리이다. 이 말은 곧 영혼 안에 지식과 진실이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영혼은 스스로 있을 수 없으며 피조물이므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존재의 주관자신 신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진리(Truth)는 신(God)이고 이는 바로 모든 것을 알게 하는 선생이다. 우리의 지성(intellect)이란 인간성을 길들여 온 신적인 조명 외에 다름 아니다.그래서 신은 마치 빛에 비유되는데 어두움이 걷히면 빛이 눈이 볼 수 있게 해 주듯이 신의 조명도 그렇다는 뜻에서 이런 역할을 조명이라 부른다.
미의 인식에 있어서도 그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어거스틴의 미 인식은 직관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을 다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선험적이라는 면에서 직관이 허용되며 감각이 지식의 선결 요건이요, 이성이 작용한다는 면에서 경험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4 미(美)의 구성요소
미(美)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시대를 통하여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어거스틴 이전의 고대인들에게도 어떤 것이 아름답고 그들이 왜 아름다운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어거스틴 또한 이를 과제로 넘겨 받은 셈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질서론』(Deordine)에서 아름다움의 객관적 구성요인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며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형상들이, 형상들에
있어서는 비례가, 비례에 있어서는 수가 즐거움을 준다.
이 같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미를 우선 객관적 구성요소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름다움은 형상에 있고 형상의 아름다움은 비례에 따르며 비례는 수를 기반으로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 같은 그의 주장들은 고대 사상가들의 미관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부분들이 서로 유사할 때 그들간의 관계는 조화(harmony)와 비율을 낳는다. 조화는 적절한 비율에 기초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고 이 같은 조화와 비율은 통일성(unity)을 필요로 한다.
미의 객관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개념화는 피타고라스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제기된 비율과 조화의 개념은 후기 고대사회에서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쓰여지게 되었다. 하나는 미를 단순히 양적인 의미(quantitative sense)로만 해석해서 수리적 미학으로 이끌어 갔는데 자연히 이는 비율 등을 강조하게 된다. 반면 스토아학파들과 키케로 등은 질적인 측면에서 해석을 시도했는데 미를 부분들 간의 적절한 관계도 파악함으로써 조화에 역점을 두는 유파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수리적 미론에 경사된 듯하나, 부분들간의 관계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질적 해석의 편에도 서는 양자 공유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초기 미론은 다분히 수 개념에 의존하였는데 음악의 경우에서 균등(equality), 수적 균등(numerical equality)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신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급기야 크리스천으로 회심한 이후에는 고전적 객관주의만으로는 미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물의 객관성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절대 기준, 즉 신의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사물의 조화나 비율, 질서, 통일 등은 그들보다 우위에 있거나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기준에 의하여 종합되고 추상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미를 보다 더 광범위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요컨대 다음 장에서는 이들 미적 구성요소들을 수(Number)와 형상(Form), 통일성(Unity)과 질서(Order)로 분류하여 이들의 성격과 관계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5 수(Number)와 형태(Form)
어거스틴은 모든 형태와 존재 그리고 행위의 근본은 수라고 보았다. 그는 수의 근본성을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십시오. 모든 것들은 그 안에서 또는 그 위
에서 빛나고 기어 다니고 날아 다니고 헤엄쳐 다닙니다. 모든 것들은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를 제거하면 존재가 없
어질 것입니다. 수를 만드신 분이 아니라면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부여 받았
겠습니까? 수를 가진 범위 안에서 존재를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수는 질서와 형상의 근본이며 아름다움과 완전성 그리고 비율과 법칙의 원리가 된다. 변하지 않는 수를 이데아 또는 신으로 상정한다면 피조물인 수는 시간적인 수이며 시간 속에서 나타난다.작품제작이나 인간의 행동, 춤을 추는 것도 수에 기초한다. 수가 없으면 형태도 질서도 통일성도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수와 제반 예술 행위 등과의 관계도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모든 유형적인 형태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수를 따라서 형체를 만들고 수에
의해서 그것을 조절합니다. 그들은 손과 기구들을 사용하는 작업과정을 거쳐
형체가 외부 세계에 드러나게 하는데 이 과정은 수의 내면적인 빛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완전하게 만드는 과정이거나 또는 감각들의 보고를 통해 초
자연적이고 관념적인 수를 바라보는 내적 판단자를 기쁘게 하는 과정입니다.
형체를 제작하는 사람, 사람의 손발을 누가 움직이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것
은 수입니다.
이어서 춤추는 것, 육체미, 예술품이 왜 아름답고 즐거움을 주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손으로 만드는 실제적인 작업이나 그것
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아니라 손발의 움직임입니다. 당신이 춤을 출때
무엇이 나를 이처럼 기쁘게 해주는가 하고 묻는다면 수가 말하기를 “보라,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육체미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수
에 따라 적절한 시간에 어울려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 모든 예술
품을 살펴보노라면 그것에 시간이나 공간은 없어도 그것이 오직 수로 더
불어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의 영역은 공간이나 시간에 해
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기법을 배우려고 하
는 동안에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의 몸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의 영원한 영역은 화가의 마음보다도 더 높이 있습니다.
수에는 숨겨진 수와 드러난 수가 있다. “종자적인 형상”을 숨겨진 수라고 한다면 물체들은 드러난 수이다. 드러난 수는 감각적인 수이며, 보이지 않는 수는 이성에 의해 인지되는 것으로는 지적인 수(intelligible number)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는 외적 사물로부터 감지되어 오지만, 그것은 안에서 이성적 수로, 즉 지적 수로 변하며 끝내는 신에 이른다. 이러한 수를 인지하는 데는 역시 신의 조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수는 즐거움을 줄뿐 아니라 모든 것에 걸쳐 있다.
수는 소리, 가시적 운동, 형태에서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모든 것 속에서 발견된다. 수는 모든 사물에 부여되었으며 가장 하위의 존
재로부터 가장 상위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어 있다. 그러나 수로 헤
아려진 사물들은 수는 아니다. 사물에서 발견되는 수(number)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적인 수(intelligible number)가 발견되는 보다 깊고 은밀한 영
역으로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궁극적인 수는 보이지 않는 수이며, 이를 형이상학적 수라 할 수 있는데 이 수는 지혜와 신의 조명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수와 지혜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그 차이는 그들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는 대상에 있을 뿐이다.
어거스틴에게 수는 모든 존재에 내재하며 기초가 된다.그 근원은 물론 창조자에게 두고 있으며 그 인지는 감각과 지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수란 미적 대상인 동시에 인식론적 구성요인이기도 하다. 사물이란 헤아려진 만큼 존재하며 만일 이 존재의 숫자가 박탈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 Nothingness)로 돌아간다.유형적 사물(material thing)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지적 수(intelligible number)에 참여함으로써만 실재(real)하며 이 지적인 수란 지혜(wisdom)와 동일한 것이고 어거스틴에게 결국 이 지혜란 바로 신(God)과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눈에 보이는 수란 다만 존재의 가시적 형태일 뿐이며 그 근원은 신에 있고 그 인지는 신에 의해 주어진 지적 수의 조명으로 가능한 것이다. 신적 숫자란 판단 받는 수가 아니라 판단기준이 되는 수를 말한다.
그래서 판정의 수에 가깝게 따를수록 조화와 질서에 가까워지며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만큼 불균등과 어색함이 생긴다. 예를 들면 발걸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뒤뚱거리게 되고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도 판정수에 맞추려는 데 있다.
수의 원리를 가장 분명하게 적용하고 있는 분야가 음악의 경우다. 음악에서는 소리 그 자체가 수를 갖고 있으며 비록 듣는 자가 없더라도 수는 존재한다. 소리의 수는 소리가 지속되는 한 지속되며 소리 중간의 쉼 기간에라도 그 쉼은 수의 고리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소리 없음 조차도 수에 들어간다. 그들 수들은 조화없이는 언제나 거부감이나 불쾌감으로 느껴진다.
그 때문에 어거스틴은 아름다움의 기조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우선 형태(form)이며 형태가 아름다운 것은 그 비율 때문이며, 그 비율이 적합한 것은 적합한 수에 의존한다. 물론 수가 질서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말하는 수는 “수적 균등numerical equality)”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수는 불균등이나 차이(difference) 그리고 대비(contrast)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들 차별적 요소들조차도 사물의 아름다움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인간의 아름다움(human beauty)이나 역사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history)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믿었다.세계의 아름다움(saeculi pulchritude)은 대비(contrast)로부터 생기며 역사적인 사건의 질서(order of historical events; ordo saecuorum)란 안티테제(antitheses)로 만들어진 한편의 시(詩)라고 어거스틴은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수에는 동질의 또는 동등의 수만이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차별과 대비, 대립이 공조하는 요소가 된다고 볼 때 여기에서 부분들간의 관계가 또한 중시되는 것이다.
형태(form)와 수는 또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수는 곧 존재이며 존재는 어떤 모양으로든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형태가 무너지면 수를 이를 수 없고 수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형태 없는 존재는 불가능하다. 반대로 수가 헤아려지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신체가 만들고 있는 것은 먼저 물질이 아니라 형태이다. 형태가 먼저 있고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창조물도 형태가 없을 수 없으며, 그것이 창조자의 속성을 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형태인 한은 아름다움을 지닌다.모든 존재가 신으로부터 유래하듯이 모든 형태 또한 신 속에 내재한다.
…그러므로 존재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모
든 것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조형된 모든 것은 조형되었다는 점에서, 아직
형상을 갖추지 못한 것은 형상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일체 하나님께로
부터 유래한다.
변하는 형태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형태(form), 즉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말씀(Word)에 근거한다.그 때문에 어거스틴에게 존재와 형태 그리고 선(善)함은 동일선상에 있다. 무릇 존재하는 것이 아무리 미소하더라도 어떤 형태(형용)를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어떠한 존재도 선을 분유하며 형용은 그 분유의 정도에 있어서 차등이 있다.
존재는 제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선한 것이니, 최고선이란 최고유(最高有)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상의 형태들이 곧 최고의 선이기 때문에 최하의
형태는 최하의 선이라는 말이 된다.
형태의 위계와 선악의 차등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피조물이 쇠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최고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최고유가 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은 그것을 만든 존재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추(醜)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이 소유하여야 할 형태의 무엇인가를 결(缺)하고 있는 상태이다. 신체의 경우 신체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더욱 신체다운 형태를 취했을 때이며 추하다고 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한다.이는 형태가 가장 충일할 때 그만큼 충일한 미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형태가 아름다울수록 거기에 신의 선함을 더욱 분유했다고 할 수 있다. 형태의 아름다움은 선의 비율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6 통일성과 질서
어거스틴이 논한 미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사물이 갖는 통일성과 그들간에 내재하는 질서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본란에서는 통일성의 문제를 먼저 얘기하고 다음으로 질서를 논의하려 한다.
어거스틴은 통일성과 존재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존재는 통일성을 가지며 통일성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하나됨이며, 사물이 통일성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 사물은 더 많은 존재를 소유한다고했다.
어거스틴은 존재와 형상, 형상과 통일성, 그리고 미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해하려 하고 있다. 존재는 형상을 결하고 존재할 수 없듯이 존재는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통일성 속에는 미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들은 그 존재하는 정도에 따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통일성의 충일함이 아름다움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통일성은 존재의 근원이 되기도 하지만 미의 기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미의 근본은 통일성에 있으며 일체의 미는 통일화의 소산이라는플로티누스의생각을공유하고있는셈이다.
그러면 그 통일성은 어디로부터 연유하는가? 그 통일성은 진리인 일자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들은 일자를 모방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은 일자가 아닌 한은 진리와 합일될 수 없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자를 성취하지는 못한다. 일자를 향하려는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자에서 멀거나 가까울 수밖에 없는 간격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 좋고 아름답다는 것은 일자와 비슷해질 때이며, 일자로부터 달라질수록 그것을 거부하는 정도도 증가한다.
존재도 진리인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듯이 통일성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근원을 얻는다. 그래서 사물들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갖출 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통일성의 속성을 띨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느 피조물도 절대적인 하나일 수는 없지만 하나가 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점에서통일지향적이다.
그 때문에 하나의 전체는 그것의 부분의 그 어떤 것에 비해서 보다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통합력과 통일성의 힘은 대단히 커서 부분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전체로 통합되었을 때는 그만큼 아름다움을 더하게 된다. 부분이 모여서 하나의 사물을 이룰지라도 그 부분들을 시간차를 두고 보는 것보다는 동시에 전체를 일별하는 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거기에 통일성이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원인인 일자, 즉 진리인 하나님은 “절대유사(類似)이고 동시에 이미지(Absolute Likeness and Image)”이며 “완전한 균등과 형태(Perfect Equality and Form)”이다. 이는 지금 있거나 있을 수 있는 모든 사물에게 수와 형상, 그리고 통일성을 부여한다. 수와 형상과 통일성은 그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이 필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 통일성이 나타나는 외형은 유사성(likeness), 대칭성(symmetry), 비율(proportion), 조화(harmony) 그리고 균등성(equality)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채프맨(Chapman)이 지적한 대로 이러한 예는 음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유사성(likeness)이란 균등성을 의미하기도 한다.음악의 경우 들려오는 소리와 그것을 감지하는 기관 사이에 균등성이 있을 때만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듣고 있는 음악소리가 균등의 법칙에 따랐을 때이고 사람들이 듣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들려지는 소리가 사람의 성품에 맞추어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즉 조화되었을 때다. 그래서 소리가 유사하고 균등할 때 거기에 즐거움이 있으며 그 즐거움 속에는 수(數)가 있다. 유사와 균등이 있는 곳에는 역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음악에서의 박자나 시의 운율(韻律)같은 경우에도 소리가 나누어 배정되기 때문에 거기에 수에 따른 계량(measure)이 개입되고 이 계량은 곧 “균등성의 합의(agreement in quality)”에 기초하고 있다.이 계량성이란 통일성의 계속되는 반복에 대한 수적 헤아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통일성에 대한 인간들의 요구는 아주 강렬한 것이어서,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반(反)에 해당되는 것을 끊임없이 제거해 간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는 자 사이의 통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두 대상 사이의 간격이 제거되고 하나가 될 때, 즉 통일성을 이룰 때 가장 정수의 사랑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볼 때 사랑이란 통일지향성이며, 고통이란 곧 통일이 아닌 분리성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유사상은 통일성의 핵심적 요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사물의 속성은 그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흙이 흙인 것은 그 흙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이 가장 흙과 유사할 때이다.이처럼 각 사물에서의 부분들의 내적-유사성(inter-likeness)이 곧 개체들의 상대적 통일성의 기초가 된다. 불이 불인 것, 물이 물인 것은 그 구성체부분들의 내적-유사성이 겹쳐질 때 가능하다.
종(種 species)이 갖고 있는 통일성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들의 유사성(likeness)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부분들의 조화를 통해 통일성을 서로 닮아가려 하는 데서 하나의 개체 또는 하나의 종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겠다.유사성에 있어서 조화(harmony)와 비율(proportion)이란 유사성의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데 조화란 균등한 부분들의 경우 유사성에서, 불균등한 부분들의 경우 비율에서 그 통일성을 구한다.그 점에서 조화와 비율의 경우에도 통일성이 그 원리가 된다. 부분들의 조화, 비율, 대칭성, 균등성 같은 것은 개체가 소유할 수 없는 구성체 사이에서 통일성이 이루어질 때 표출되는 현상이다.모든 예술에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 하나에 의해 모든 사물이 아름답고 온전한 것이 된다. 그리고 조화는 균형과 통일을 요구한다. 균형과 통일은 대칭된 부분들의 상합으로나 상이한 부분들의 연계적 배열로 달성된다.
그런데 균등과 통일성은 인간이 임의로 자기 기준에 의해서 제멋대로 만들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형태의 공간적인 크고 작음, 운동의 공간적인 크고 작음은 언제나 동일함이나 유사함이나 비례 같은 여일한 법칙에 의해서만 판단”된다. 어거스틴은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이 법칙은 불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물들은 각기 다르나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한 곳에서 온다.
비율, 대칭, 조화, 균등에서 보여지듯이 사물들은 이 현상에서 저 현상으로,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변전하면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은 또한 부분마다 다르게 공간들을 점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거기에서 통일성이나 조화를 추출해내는가?다시 말해 기준이 되는 통일성은 공간 안에서 분산되거나 시간 안에서 변천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예를 들면 굴렁쇠가 둥글다고 하는 척도나 항아리가 둥글다고 하는 척도는 둥글다는 같은 척도로 판단되는 것이며, 사각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불변하는 기준의 출처에 대해 그 근원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제시한다.
따라서 (예술의 척도가 되는 이) 법칙은 우리 지성을 초월하는 것임이
분명하며, 이 법칙을 일컬어 진리라고 본다. 이성적 영혼 위에 있는 불변
의 본성이 곧 하나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하나이며 그래서 절대적 존재이므로, 기타 피조물들은 그것에서 유래하는 유사성을 분유 내지는 공유하지 않으면 그 존재가 상정될 수 없다. 그래서 그 유사성이란 절대적 통일성인 하나님과 그에 의해 피조된 사물들의 상대성 사이에 위치해서 연결시켜 주는 중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절대 유사성(likeness)은 신(God)에게만 속해 있는 것으로 피조물들이 갖지 못하는 완전한 통일성에의 대치물이기도 하다.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볼 때 유사함(likeness)이란 두 가지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그 구성체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신을 닮으려는 성향이다. 그래서 유사함이란 절대적 정체(絶對的 正體)와 다른 사물들 사이의 중앙적 관계(middle term)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유사함이란 사물을 신적 이데아들과 연결시켜 주는 기본적인 결속체이다.
이미지와 유사성은 서로 구별된다.유사함의 한 류(類)인 이미지는 필수적으로 표현된 유사성이어서 모든 이미지는 유사성을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유사성이 곧 이미지는 아니다.
통일성만큼이나, 중요한 미적 구성요서는 질서이다. 미와 관련된 질서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이를 위해선 질서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어거스틴에게 질서란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이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어서질서에게벗어난것은전혀존재하지않으며”“질서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질서에 반대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질서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질서의 밖에 있는 것은 없으니까 질서에 반대되는 것은 오류가 아니라 질서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오류가 질서의 반대가 아닌 것은 오류도 질서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오류도 원인계열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 원인계열 또한 질서 속에서 일어난다.
질서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유래하고 하나님 자신과 함께 존재한다. 질서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밖에 구할 수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질서의 범주 안에 있다.선과 악, 미와 추, 충만함과 부족함, 실패와 성공 모두가 질서 아래서 행해지고 동시에 질서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악도 최고의 선인 하나님에게서 유래하며 하나님은 악도 사랑하는가? 그러나 어거스틴은 『질서론』에서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악을 사랑하는 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을 이유로 들어 앞서의 의문에 반대의 의견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질서를 몹시 사랑하는 하나님이 선을 멀리 하고 악을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며,악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악은 존재의 결함이거나 의지의 불충실일 따름이며, 악도 그 자체로서는 악의 한 질서이기 때문에 악도 질서라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해 악도 질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에 있으며, 악조차도 전체의 조화에 기여한다.
그 같은 질서관에서 어거스틴의 미에 대한 논의도 전개된다. 선한 것도 아름답지만, 추함 그 자체도 미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미의 완전성에 기여한다. 어거스틴은 이 같은 미와 추, 선과 악의 관계를 창녀, 사형집행인, 추해 보이는 동물의 어떤 부분, 닭싸움과 같은 것들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창부, 매춘 주선인들은 사람들보다 추하고 품위가 결여되며 해독스러운 존재이지만 창부를 없앤다면 세상은 정욕으로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기혼 부인들과 동등하게 대우한다면 이는 후자를 모욕한다 할 것이고 사회적 통념상의 구분을 혼동시키고 말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그 때문에 이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보면 불순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적 조건에서는 나름의 역할이 있고 질서의 맥락에서 보면 나름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물의 경우도 어떤 동물의 사지(四指)가 역겨울 정도로 거부감을 주는 것도 있지만 질서는 그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기에 두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추한 것들도 자기 자신의 속성을 통하여 좋은 것들에게 자신을 양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 닭싸움의 경우도 싸움과정의 잔혹함이나 싸운 후의 패자의 참담해 보이는 모습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 패자의 추하고 불쌍한 꼴에도 불구하고 그 추함으로 인해서 승자를 돋보이게 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보다 완전성에 가깝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추는 미를 돋보이게 해주며 양자가 상호 보완하면서 비로소 완전한 조화가 일어나게 한다. 미와 추는 조형예술의 경우 명암과 같은 것으로 서로 조화를 이룸으로 질서를 형성한다.
질서는 일정한 정형의 상태 속에서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변화와 지나감 속에서도 유지된다. 더 약한 쪽이 더 강한 쪽에게 길을 내어 주고 힘이 덜 있는 쪽이 더 있는 쪽에게, 더 깨지기 쉬운 족이 덜 깨지기 쉬운 쪽에게, 그리고 지상적인 것이 천상적인 쪽에 길을 내어 주는 것이 곧 질서를 이루는 일이다.이것은 전체적인 조화를 낳게 하며 이 조화란 바로 아름다움과 통하는 것이다.
자연질서 속에서 사물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짐은 다음의 것이 등장할 자리를 마련해 주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성(variety) 또한 아름다움의 기본적 특성이 되어 있다. 생멸(生滅)의 변화가 지속되더라도 그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나 계량(計量), 그리고 전체적 질서를 결코 흩트러뜨리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또한 비교와 대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낮은 밤으로 인하여, 흰색은 검은 색으로, 신체의 추함은 보기 좋은 부분에 의해, 창녀와 사형집행인은 그 사회적 필요성에 의해 질서 속에 있고 그러므로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고양시킨다. 전체라는 통합적인 힘은 대단히 큰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선한 것이 아닐지라도 다른 것과 함께 연대를 맺는 때는 즐거움을 주는 현상으로 바뀌기도 한다. 정복자나 피정복자, 선한 자나 악한 자, 억울한 자나 가해자, 패배나 영광이 모두 대조를 이룸으로 전체의 우주적 질서에 합일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해야 되는 사악함이나 고난 그리고 징벌까지도 질서 속에서 미학적 정당성을 갖는다. 질서를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답기 대문에 죄에 대한 징벌이라도 그것이 질서 속에 있는 한 아름답다.
사실 모든 존재는 질서를 내포한다. 질서를 얻는다는 것은 존재를 얻는다는 것인데 이는 피조(被造)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질서를 수락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질서일 경우 존재를 확보하나 비-질서는 비-존재(non-being), 즉 존재의 전도(顚倒)가 된다. 비록 전도가 될지라도 그것은 사물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의존하고 또 분류(分類)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존재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서는 또한 선(善)으로부터 나오므로 질서는 선을 함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사물도 어느 정도의 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어떠한 존재도 질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등식이 성립된다.이를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이 선인 곳, 즉 선의 결핍이 없는 곳에는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최고의 평등상태에 있기 때문에 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절대선(絶對善)이라는 신의 경우에 대비시키면 신은 질서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지배할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선과 미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듯이 미 또한 질서와 떼어 놓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단순한 형태의 불형평성이나 비율, 숫자간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들이 질서에 위배되느냐 아니냐 에도 달려 있다. 즐거움은 질서와 연합될 때 가능한 것이므로 그 반대의 경우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질서가 되며 질서가 있을 때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들은 각자의 역할과 목적에 준하여 우주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질서란 곧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만 보면 질서가 깨어지는 것 같지만 전체를 보면 조화 속에 질서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건축물에서도 그것을 판단할 적에 한 구석을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며, 멋진 사람을 두고
머리카락만 따질 것이 아니고, 훌륭한 연사를 두고도 손가락의 동작만 볼 것이 아니며,
달의 운행도 초사흘의 모양만 가지고 판단할 것이 아니다. 저 사물들이 저급하고 부분적으
로는 불완전하지만 석상이나 동작에서 보듯이 전체로는 완전하고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에 속한 것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 이 질서는 또한 하나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에 유사성이 있고 통일성이 있으며 통일성은 질서 속에 내재한다. 우주(universe)라는 말이 하나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도 그 때문이다.원(圓)을 예로 들면 원주 전체는 무수한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일체를 동등하게 계측케 하고 모든 부분을 일종의 평등법에 의해 지배하게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중심점에 있을 뿐이다.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통합된 능력으로부터 유래한다. 영혼은 이성으로 모아진 것을 종합하여 평가한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모든 기능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데 영혼이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분산을 막아야 된다고 했다.왜냐하면 영혼이 보다 많은 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되고 미에 대한 인식도도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질서가 갖는 아름다움은 통합된 영혼, 잡다한 욕구를 제거한 빈 마음의 영혼만이 제대로 감식할 수 있다.
질서는 또한 평화와 일치한다. 사람의 경우 신체의 평화란 각 조직의 균형된 질서가 형성될 때 가능하며, 동물은 그들의 욕구를 질서 있게 조정할 때 삶의 평화가 온다. 영혼의 평화도 지성(知性)과 의지(意志)의 합의에서 가능하며, 한 가정이나 도시의 평화도 그 구성원들간의 의견 일치와 조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평화란 안정된 질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질서란 물질적인 것이건 비물질적인 것이건 간에 모든 존재 속에서 침투되어 있다. 덕(德)이란 사랑의 질서이며, 선(善)이란 질서에 부합되는 사물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사물에 대한 사랑을 느낌은 그 대상으로부터 즐거움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미(美)와 통한다.
어거스틴의 질서론으로 볼 때 지상의 모든 존재는 그 존재가 정당화된다. 추함도, 아름다움도, 실패와 승자도, 기쁨과 아픔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신비로울만큼의 끝없는 아름다움을 발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7. 어거스틴 미론의 의미
어거스틴의 미(美)에 대한 생각은 그의 사상의 전반적인 변화와 맥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었다. 그의 신관이나 인간관이 그의 사상의 변화에 따라 변해갔던 것처럼 미사상에 관한 부분도 그 같은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고대의 미사상을 종합적으로 받아들인 젊은 시절을 거쳐, 번민하고 갈등하는 조정기를 지나며, 끝내는 회심을 결정적인 시기로 하여 자신의 미관을 창출해가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그로 하여금 고대와 중세의 미사상을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케 하고 이후 근대와 현대의 미학사상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그의 미론(美論)은 그 자체만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전체적 맥락의 한 구성부분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의 미관은 본원적으로는 신관과 연결되며, 우주만물에 대한 질서론과 특히 인식론과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형성 전개되었다. 또한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 창조관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며, 선악의 문제는 아름다움의 속성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어거스틴의 미관은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는 고대인들에 비해서 미를 보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란 우리들의 주관적 태도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며 그것이 주는 즐거움(pleasure)의 독립된 영역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미는 관조하고 발견하는 것이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내 자신의 미의 인식태도에도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 같은 인식의 규준은 임의적이 아니다. 그것은 불변하며 항구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것으로 객관적인 규준은 그것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내가 객관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낳게 하는 객관적인 규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규준들, 즉 숫자나 형태, 통일성이나 질서, 조화 등은 사물의 변화나 그 형태의 다양 다변화와는 무관하게 지속적이며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외부의 조건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들은 또한 영원하고 불변하기 때문에 물질세계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마저도 초월한다. 이들의 근원을 파고 올라가면 신에 이르게 되고, 이 때문에 신은 미적 규준의 내적 주인이라고 말해진다. 이 내적 주인이 우리의 영혼 속에 진리를 조명해 주듯이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인지할 수 있는 지성과 지혜를 주는 근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미(美)란 절대적 미와 진리가 대상 안에 축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대상도 아름답다거나 진실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통일성과 미에 참여하는 한 아름다운 것이다. 형식들이 시공간 속에 흩어지고 진리와 통일성에서 멀어지며 저급하게 물질화된 사물일지라도 거기에서 미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미의 근원을 철저하게 초자연적인 원인에서 구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물과 그들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존재의 개별성과 개체가 갖는 합당한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상에 있는 사물 현상에 대한 미적 인식과 감상의 폭을 제한 없이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미론을 읽으면 깔때기를 생각케 한다. 주둥이 부분에서 고대의 미사상을 수용하고 신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좁은 길목을 통과하면 다시 사물들이 자유로워져 개별적 자유 영역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미론이 아주 권위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융통성 있는 탄력을 갖는 것도 그에 연유한다.
사물은 분명 객관적 미의 요소를 확보하고 있지만, 인식의 주체적 대응이 없이는 미의 발견이란 어렵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미론에는 심리적 요인이 있다고 지적되는 근거이며 결과적으로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고 보이게 하는 측면이다.
어거스틴은 미의 범주에는 아름답고 선한 것만 포함된다는 제한적 한계를 철폐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선성(善性)을 분유하고 있고, 그 존재의 정당성을 갖는다. 그의 질서론의 요체는 밝음과 어둠, 승자와 패자, 슬픔과 즐거움, 미와 추가 모두 다 공존적 관계에 있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적대 관계가 아니라 다만 대비 갈등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H. 리드는 예술에 추도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거스틴은 이 점에서 선구적이었고 아주 현대적 감각을 갖는다. 그는 미의 근원을 초월적 존재에서 구했기 때문에 역으로 세상의 모든 존재를 미(美)의 영역에 끌어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한 것이다. “죄(罪)라도 그 미(美)를 앗아갈 수 없는 거룩한 교향곡”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마치 역사 안에는 시련과 아픔과 고통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오히려 질서 안에 있는 것처럼 역사 안의 악은 전체의 아름다움에 기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역사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어거스틴의 미론은 현대미술의 위기적 상황에서 볼 때도 몇 가지 시사를 준다. 두 차례의 대전을 치르면서 미인식은 지나치게 주관화되고 “체계적 전체성”(organic whole)을 잊은 채 산산조각 난 느낌마저 있다. 이성이 비이성적인 부분에서 분리해 나가고 마치 미론이 단순한 회화나 조각에 제한된 듯이 협소해져 버린 상황, 그리고 예술이 도덕성이나 초월성과는 전혀 무관한 듯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어거스틴의 미론은 그 점에서 이들을 종합하고 재조명해 보는 하나의 준거 틀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앞으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미적 경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 탐구와 어거스틴 미론이 미친 영향 및 역사 해석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미론의 현대적 적용 문제가 더욱 천착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G.Leff, 「어거스틴과 그의 후계자들」, 『서양중세역사가와 역사서술론』(上), 고대서양중세사연구편, (법문사,1983), p.488.
Cofessiones,3,4,7(이하 Conf.라 한다)
Conf.4,15,24.
Porphyry의 The Enneads를 직접 읽었다기보다 Plotinus의 글들을 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Conf., 4, 15, 24.
Conf.,4,13,20.
Ibid.
W. Tatarkiewictz,HistoryofAesthtics(2)(Mouton1970),p.48.
Ibid.,p.57.
어거스틴의미관(美觀)을가장광범위하게다룬책으로는K.Svoboda, LesthtiquedeSt.Augustineetsessources,(Brno,1933)이 있고 논문으로는 H. Edelstein, DieMusik,AnschauungAugustinsnachseinerSchriftDemusics,Diss.(Freiburg,1928/29)그리고 L. Chapman, St.AugustinesPhilosophyofBeauty,(NewYork,1935)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Chapman의 논문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힌다.
Conf., 4, 15, 24.
Conf.,3,2,2.
W.Tatarkiewictz,op.cit.,p.57.
Ibid.,p.56.
이 점은 M. Schapiro가 그의 논문 “On the Aesthetic in Romanesque Art”, in Art and Thoughtm issued in honour of A. K. Coomaraswany,ed.,K.B.Iyer(London,1947),p.152에서 밝히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요한복음 주석에서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눈에 띄지 않았었다.
W.Tatarkiewictz,op.cit.,p.27.
Ibid.
Ibid.
A. Riegl,DieSpartromischeKunstindusrie,(1904),p.211ff.(W.Tatarkiewictz,op.cit.,p.55에서 재인용)
W.Tatarkiewictz,op.cit.,p.56.
Soliloquia,2,10,18.
Demusica,4,10,28.
De vera religion, XXXI, 58. (본고에서는 우리말 역은 성염 역주, 아우그스니누스, 『참된 종교』, 분도, 1989본에 의존하였다.)
E . Chapman, Saint Augustine’s Philosophy of Beauty,(SheedandWard, 1939), p.1.
E. Gilson, “The future od Augustinian Metaphysics,” pp. 302, 306 in A Monument to St.Augustine,(Toronto;LongmansGreen,1930)
F. Copleston, 박영도역, 『중세철학사』, (서광사, 1988), p. 89.
Auguatine,은 감각에 속는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회의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각을 믿는 것보다 불신하는 데서 더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Copleston, op.cit.p.89.
Demusica,6,5,8.
Dequantitateanimae,32,71.
Copleson, op. cit. , p. 89
De vera religion, & 53.
Ibid.
M. D’Arcy, “The Philosophy of St.Augustine,”inSaintAugustine(WorldPublishingCo.,(1961
Ibid.
어거스틴은 혼(psyche)은 지성(nous)으로부터 발생하여 고등사물에서 하급사물에 이른다고 플로티누스적 발사에 따르고 있다. Anima를 인간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식물, 동물 등에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spirit에 가까운 셈이다.
Deordine,2,2,6.
M. Darcy , op, cit., p. 168
Ibid.
Ibid.
G. Leff,op.cit.,p.495
Dequantitateanimae,24,45:25,47:27,52.
Ibid.,29,57.
Ibid.,13,21.
Ibid.,23,32.
Ibid.,23,42~44.
Copleston, op,cit,pp.113~114.
Dequantitateanimae,28,54.
Ibid,15,26:16,27.
DeCivitateDei,XXI,10(이하 DCD라 한다.)
G. Leff., op,cit.,p.495.
Ibid.
Ibid
Dequant.Animae,26,49.
이성과 영혼을 구별하여 썼으나 어거스틴은 “이성은 분명히 영혼전체이든가,
혹은 영혼 속에 있다”고도 쓰고 있다.(Deimmortalitateanimae2,2)
Conf.,10,14,21.
D’Arcy,op,cit.,pp.178~9
Ibid.,pp.189~181.
DeTrinitat,IXXV,24.
Deordine,2,15,42.
W.Tatarkiewictz,op.cit.,p.49.
Ibid.,p.50.
이 같은 네 가지 요소들의 구분은 E. Champman의 구분에 따른 것임을 밝힌다.
Deliberoarbitrio,2,16,42(본문 해석은 어거스틴, 박일민 역, 『자유의지론』, 풍만, 1985를 참조하였음, 이하 De lib로 한다.)
Copleston,op,cit,.,p.113.
Delib,2,16,42.
Ibid.
DeLib.,6,13,37.
Ibid.,2,11,30~35.
Coplestone,op.cit.,113.
DeLib.,2,11,31.
Demusica,6,18,57.
Chapman, op.ct.,p.24.
Chapman은 수의 종류를 5개로 나누고 있는데 판정수(Judical or juging number; iudicales ), 활동적이고 진보적인 수(active or progressive number; progressores), 대결 또는 생기의 수(confronting or occurring numbers; occursores), 기억수(remembering; recordabiles), 소리수(sounding number; sonantes)로 구분하고 있다. (Chapman,op.cit.,p.16)
Chapman, op.ct.,p.114~15.
Deordine,2,15,42.
DCD,XI,7,18.
Deorder,1,7,18.
Delib.,2,16,42.
Chapman, op.cit.,p.26
DeverarelidioneXVIIIione,35.
Chapman, op.cit.,p.27.
DeverarelidioneXVIII&35.
Ibid.
Ibid.
Deimmortalitateanimae,8,13.
DeMoribusManichaeorumII,VI,8.(Chapman,op.cit.,p.29에서 재인용)
Enneades,I,VI,3.
Deverareligione.,XXXVI,66.
Chapman, op.cit.,p.30.
DeGen,Cont.Manic,I,XXI,32(Chapman,op.cit.,p.37
Chapman, op.cit.,p.37.
Ibid.,p.35.
Ibid.
Ibid.
Ibid.,p.36
Ibid.,p.27.
Ibid.,p.30.
Ibid.
Deverareligione,XXX,55.
Ibid.,XXXII,59;60(Chapman,op.cit.,p.31.)
Ibid.,XXX,55.
Ibid.,XXX,56.
Ibid.
Ibid.
Deverareligione,XXX56,XXX57.
Chapman, op.cit.,p.32.
Deverareligione,XXXII,59.
Chapman, op.cit.,p.33.
DeGenesiAdLit.Lib.Lib.ImperfectusXVI,57(Chapman,op.cit.,p.34).
Ibid.
Deordine,1,10,28.
Ibid.,2,1,3.
Ibid.,1,6,15.
Ibid.,1,6,15.
Ibid.,1,6,16.
Ibid.,1,7,17.
Ibid.,1,7,18.
Ibid.
Ibid.,2,4,12.
Ibid.,1,4,12.
Ibid.
민주식, 「리이글의 미술사학」,조요한외,『미술사학』(민음사, 1989),p.33.
DCDXII,4.
Chapman, op.cit.,p.44.
Ibid.
DeMorib,Manich,II,VI,8.
Deordine,2,7,23.
Ibid.
Chapman, op.cit.,p.39.
Deverareligione,XI,76(어거스틴, 『참된 종교』, 서염역, (분도), p.151)
Deordine,1,1,2.
Ibid.
Ibid.
Ibid.
Chapman, op.cit.,p.41.
Deverareligione,XXXII,59.
De Trinity, 9, 6, 9-11.
G. Leff, op.cit.,p.493
D’Arcy, op.cit,p.185
오병남, 『미학강의』, (서울미학과, 1991),p.22.
J. Figgis,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철학자인가?」,『서양중세역사가와 역사서술론』(上), op. cit.,p.534.
이석우 약력: 현 겸재정선 가념관 관장,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인문학의 전문영역과 의식 있는 대중 사이의 소통공간을 넓혀가는 새벽들의 산책자 같은 집필인이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이석우는경희대학교대학원역사학과에서문학박사학위취득.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장, 언론정보대학원장, 대학사학회회장 역임, 옥스포드댈학교, 버밍업대학교, 더블린 트리니티대학교 연구교환교수 역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 A)정회원,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가람문학연구회고문
저서: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 예술 혼을 사르다간 사람들,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새롭다. 대학의 역사,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사관과 역사이해,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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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 경희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시고 지금은 강서에 있는 겸제 정선 기념관장으로 수고 하시는 이석우 박사닝의 논문입니다. 깊이있고 해박한 논문에 감동했습니다.
끝까지 읽기는 읽었습니다. <질서에 속한 모든 것은 아름답다>.
고맙습니다. 글이 상당히 어려운데 다 읽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