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에 보면 태조왕 69년에 해당하는 121년 고구려왕 궁이 죽었다고 합니다.
늘 마음속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던 것인데, 후한서에 왜 그런 기록이 남아 있는지 고구려사초를 보면서 이유를 찾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태조왕이 아니라 부친이었던 재사(신선명선제)였습니다.
후한이 조문 온 기록이 버젓이 고구려사초에 남아 있으니, 후한서가 소문만 믿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해동고기에 7세에 즉위하여 94년을 재위하였다고 하고, 동복아우인 수성에게 재위를 물려주었다는데...
그런데 재사와 아들 궁에게 희한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재사는 유리왕 혹은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유를 알겠습니다.
재사(신선명선제)는 서기22년생입니다.
유리왕의 재위기에 태어났는데, 당시 무휼의 나이가 19세입니다.
즉, 무휼이 아버지(혹은 양부)의 후궁을 건드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대무신왕의 원년이 서기28년이니 당시 나이가 7세이지요. ㅋㅋ
121년에 죽었다는 궁은 바로 이분인셈입니다.(죽을 때 나이가 100세)
태조대왕 궁은 서기68년생
신선명선제의 재위기가 73-112년까지 인데, 신선명선제 원년이 태조대왕 궁의 나이 역시7세
신선명선제가 왕위에 오를때의 나이가 52세, 즉 자신이 오래 못살줄 알었던 모양입니다.
태조왕 궁은 165년에 사망(죽을 때 나이가 98세)
재사가 무휼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재사의 어머니 만이 알겠지요.
첫댓글 와..비밀을 알아 냈군요. 축하합니다. 한참 생각했습니다. 대단하군요.
유리왕의 처를 건드렸군요. 누구일까요? 그래서 유리왕의 아들도 되고, 대무신왕의 아들도 되는군요.
상후는 재사가 픽업하여, 차례로 재사, 궁, 수성의 여자로 살아갑니다. 나중에 60살에 명림답부의 딸까지 낳지요. 남자 4명을 공유했었죠.
그런 결과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얘기하는 말이 모두 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사학과 교수도 못 풀었던 문제입니다.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