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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후루룩 냠, 냠, 냠!
값싸고 맛좋은 삼양 삼양 삼양
가정에서 들에서 직장에서 산에서
영양많고 맛좋은 삼양 삼양 삼양
너도나도 삼양 삼양”
60년대 후반 삼양라면의 CM송 가사에요~
지금 50대를 바라보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아마 청소년 시절에 이 CM송을 한두 번 따라 부른 경험이
있으시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요~
1960년대 말은 이 CM송과 함께 국민들의 입맛을 돋우며 ‘삼양라면’이 여러분의 식생활 속으로
스며들었던 시기랍니다.
창업 초기에 라면이 무슨 옷감이나 실 등으로 오인되어 여러분에게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라면이 간편하고 맛있는 식품으로 인식되면서 판매는 해마다 급성장을 거듭했답니다.
그리하여 엄청나게 늘어난 생산량 덕분에 ‘삼양라면’은 초창기때의
“부지런한 사람이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 에서
“누구라도 간편하게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갔던거죠~
그 결과 식량의 절대부족으로 막대한 외채까지 부담해 가며 식량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당시 한국으로서는 국민들의 주식 대체식품으로 ‘삼양라면’이 단단히 한몫을 했고
경제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답니다.<배우.연기자협회와의 자매결연식>
한편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에 발맞추어 삼양식품은 배우ᆞ연기자협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서울 충무로 2가에서 운영하던 ‘분식 센터’를 이 협회에 기증하여 운영하게 되었어요.
<배우.연기자협회 자매결연식, 배우 신성일> <배우.연기자협회 자매결연식, 배우 남궁원, 신성일>
그 분식 센터의 이름은 ‘월하(月下) 집’이었습니다.
신성일ᆞ문희ᆞ신영균ᆞ최은희등 당시의 톱스타들이 순번대로 당직을 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명물 분식 센터였다고 하네요~
<월하의 집>이란 이름은 한국 최초의 영화 <월하의 복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배우.연기자협회 자매결연식 소속 배우들> <배우들 공장 견학 모습>
당시 톱스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분식센터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답니다.
한가지 에피소드로, 당번에 못나오는 배우에게는 벌금 1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규칙도 있었다고 하네요^^
특히 청소년층의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또한 남는 이익금은 고아원에 기부하여 더욱 화제를 끌었다고 하네요.
이러한 PR방법은 라면 수요에도 일조하였고 건전한 보급풍토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합니다.
◈ 월하의 집 기사 원문 보기 ◈
<삼양라면 수출품 준비하는 모습>
이 시기에 삼양식품은 시장점유율 85%라는 압도적 위치에서 기업윤리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한 결과
“제 7회 단체 경영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었답니다.
이 상은 고려대학교 부설 기업경영연구소에서 해마다 타의 귀감이 될 우수경영자와
우량기업을 선정, 표창하는 것이었다고 하네요,
이때, 삼양식품이 선정된 이유는
“합리적 기업경영으로 단시일 안에 고도성장을 가져왔고 분식장려로 국민의 식생활 개선에 이바지하였으며
아울러 미곡절약의 직ᆞ간접적인 효과로 외화절약에 공이 크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은 모두 삼양식품의 기업정신과 소비자의 두터운 신임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소비자를 위한 한층 심화된 노력을 요구하는
채찍으로 받아들여 1970년대의 성숙기를 위한 디딤돌로 삼았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삼양식품 방문>
‘삼양라면’이 성장가도를 달리며 매출이 차츰 신장되고 있던 1966년 가을 어느 날,
당시 전중윤 회장님은 의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곳은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라면의 생산과 판촉으로 정부의 분식장려정책에 협조하고 있는
전중윤 회장님을 격려한 뒤 자신이 시식한 소감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라면에 고춧가루를 좀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술을 마신 뒤 항상 해장을 라면으로 하시면서
얼큰한 국물 맛이 아쉬우셨다며 한국인의 식성은 아무래도 국물 맛이 얼큰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 전중윤 회장님은 대통령까지 직접 라면에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요,
60년대 후반 우리나라는 고질적인 식량부족이 계속되어 정부에서는 여러 각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대안을 강구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기업의 채산성을 맞출 수 있는 업종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분식장려로 식량난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해 보려는 전중윤 회장님의
라면 생산과 보급을 뜻있는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했고, 반드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가뭄이 계속되던 1963년 여름 밤잠을 자지 못하고 비가 내리기를 고대했을 정도로 계속되는
흉작에 근심을 거듭하고 있었으므로 ‘삼양라면’이라는 이 값싸고 영양가 높은 식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당시 전중윤 회장님도 대통령의 생각과 같은 의견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권고를 받고 전중윤 회장님은 이를 최대한도로 제품에 반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뜻있는 많은 분들이 ‘삼양라면’의 탄생과 보급을 기업적 차원에서보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의미 있는 경사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화였습니다.
<도봉공장 기공식> <기공식 전 고사지내는 모습>
라면의 폭발적 수요증가를 당시의 하월곡동 시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다른 곳에 시설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1963년 9월 라면제조기 2대를 설치하여 국내 최초로 라면 생산에 들어간 삼양식품은
그 동안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1966년 9월에 라면제조기 2대를 추가 도입하고
이듬해 3월 2대를 또다시 추가 설치함으로써 하월곡동의 공장은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67년 1월 삼양식품에서는 서울도봉공장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증대되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1차적인 시설증설의 필요성 및 장래 식품공업의 전망을 검토하면서
신규공장의 건설을 세밀히 조감해 보고 미래의 종합식품회사로 가장 적합한 공장부지를 선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라면문화의 창달지이자 미래 종합식품개발의 진원지로서
서울도봉공장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의 도봉동은 도심에서 24km 떨어져 있고, 앞에는 병풍처럼 드리운 도봉산이 그 위용을 드러낸 채
서울시내를 굽어보고 뒤에는 수락산과 불암산이 의좋게 산자락을 펼쳐 도봉동을 평화롭게 감싸고 있었답니다.
<60년대 당시 현대식 설비의 실험연구실>
이 평화로운 마을에 공장건설의 첫삽이 꽂힌 것은 1967년 3월이었습니다.
공장건립 작업과 함께 실험연구실을 현대식으로 설비하여 자체연구 및 외부 교수를 초빙, 연구를 의뢰하여
신제품 개발과 품질관리에 선진기술을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1967년 11월, 창업의 깃발을 꽂았던 월곡공장에서 서울도봉공장으로 이전을 하면서
삼양식품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라면 생산업계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꾸준히 발전해 온 서울도봉공장은 수요증대에 부응하고
미래의 식품을 개발하며 계속해서 종합식품회사로 착실히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명실공히 단시일내에 국내 최대의 라면생산공장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0년대 삼양식품 공장 전경>
그렇다면, 많고 많은 공장부지 후보 중에 왜 하필 도봉동이었을까요?
하월곡동에서 도봉동으로 새 공장부지를 정할 때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공장 후보지로는 영등포가 물망에 올랐었다네요,
영등포는 당시만 해도 공장지대가 형성되어 공장부지로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아리 삼거리까지와 창동 일부에 인가가 있었고, 미아리와 의정부 사이는 밭과 논뿐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의정부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상ᆞ하계동을 관류하는 하천변 일대는
서울시에서 흘러온 이재민들이 4~5평짜리 천막을 치고 기거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삼양식품이 이와 같이 인가도 없는 허허벌판을 새로운 공장부지로 선정한 데에는 남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삼양식품은 이곳에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도, 희망도 없는 이재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계를 해결해 주려는 뜻에서 입지조건이 좋은 영등포를 버리고 도봉동을 공장부지로 선정한 것이었습니다.
동봉공장이 건립된 후 삼양식품은 하천 일대 천막촌의 이재민 600~700여명을 파출소에 의뢰하여 선발했습니다.
막상 사원을 뽑아놓고 보니 교육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장교출신을 데려와 선발된 사람들을 훈련시키기로 했습니다.
기본 태도에서부터 청결까지, 전부 목욕탕으로 출근시키고 옷과 신발을 제공하며 한달 정도를 교육하자
상황은 굉장히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 후 비로소 공장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떠돌던 이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갖게 되자 절망을 딛고 일어서 열심히 일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는 천막촌이 판자촌으로, 판자촌이 어엿한 가옥으로 바뀌어
안정된 주거환경을 형성해 갔답니다.
이는 삼양식품의 공익을 앞세우는 경영철학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서울도봉공장 이전 이후 삼양식품은 직원들의 후생복지시설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져
하월곡동과 도봉동에 2층 건물의 직원 기숙사를 지어 각종 문화시설을 골고루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두 기숙사의 수용인원은 570여 명이며, 기숙사 생활을 통하여 올바른 사회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한편
문화시설을 갖추어 교양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하였고 생활 자체는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하여
자립정신을 육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직원 식당 및 탈의장ᆞ목욕탕을 갖추어 식당은 600여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영양사를 채용하여 영양과 기호, 계절 등을 감안한 메뉴로 영양급식에 만전을 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식사는 점심과 석식에 격일제로 밥과 라면을 급식하고, 간식으로는 우유, 빵 등을 무료로 제공하여
종업원들의 건강유지와 생산성 향상에 힘썼다고 하네요.
이밖에 전체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탈의장과 200여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을 갖추어 직원들의 청결생활에도 관심을 두었답니다.
<60년대 당시 꽃꽂이 배우는 여직원들>
또한 직원 통근버스 운행, 구내매점 운영, 문화ᆞ오락시설 운영, 의무실 운영 등으로 직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직원들의 인격수양과 자질향상을 위한 도서실을 설치하고 4,000여권의 식품관련 도서를 구입ᆞ비치하여
점심시간이나 일과 후 이용하도록 하며 도서대출 편의도 제공하여 기숙사 등에서
차분히 독서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을 위한 각종 운동기구와 영사기 등을 갖춰
정서함양과 명랑한 생활풍토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현재 원주공장 전경>
1960년대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은 “경제성과우선주의 정책”으로 직원들의 후생복지에는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고, 정부 당국에 의한 정책적인 지도 역시 없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삼양식품은 전중윤 회장님의 자발적인 의지로 기업이익의 상당부분을 직원복지에 투입함으로써
이익배분의 측면에서 앞서가는 모범기업의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삼양식품의 성장기부터 번영을 가져다 준 이 서울도봉공장은
원주 삼양식품 타운의 건설에 따라 1989년부터 이전하기 시작하여 1991년 말 완공하였습니다.
서울 도봉공장이 원주로 이전하게 된 주요 이유는 도봉공장 주변에 고층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땅값이 치솟고
주거지역에 생산공장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것이 합리적인 기업운영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장을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소개시키려는 정부의 정책에 부응하여 자진 이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원주의 삼양식품타운은 서울도봉공장보다 월등한 작업환경과 복지시설을 갖추고
서울도봉공장의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흡수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첫댓글 와우 ~~ 글로 읽으니 실감이 납니다
저ㅡ는81-83년도 까지 근무 한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글쓴 분은 저보다 한참 후배인거 같아요
저는 85년부터 89년도 에 근무했어요....
랑이님 카페 가입을 환영 합니다...많은 활동 기대 할 께요......정회원으로 등급 조정 했습니다.....
피자..성금..수덕이 누님...성환. 형님.. 그리고 저는 스넥부에서 근무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 성함은 남상철 입니다 1986년 까지 삼양라면에 근무하셨습니다
아시는분이 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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