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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문단' 6호 원고입니다>
<단편소설>
바쁜 저녁
김 광 욱
1
영세민 임대아파트 단지 내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 아가씨가 전화를 한다.
공중전화기는 오래 돼서 숫자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수화기의 손잡이가 깨져서 그곳으로 음성이 샐 것 같다.
아가씨는 핸드백을 어깨에 멘 채 오래오래 전화를 한다.
공중전화 부스에는 전화를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마음놓고 차분히 새실을 깐다. 싱글벙글 웃었다가 새침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전화통에 대고 손짓 발짓 하는 모양이 탤런트 이상이다. 사실 생김새도 그 정도면 어디 가서 기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가씨의 입에서 갑자기 '돈'이란 단어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공중전화가 굉장히 중요한 무기처럼 느껴진다.
핸드폰으로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고 공중전화를 통해서만 할 얘기가 있다. 아가씨의 용건이 그 낡은 공중전화기의 분위기에 딱 어울린다.
남자 친구에게 빌려준 백만원을 갚아 달라는 독촉 전화인데 말씨가 부드러운 걸로 봐서 꼭이 빚독촉이 목적은 아닌 것 같다.
처음부터 돈 얘길 한 건 아니고 시시껍질한(어쩌면 아가씨의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하달 수도 있는) 잡담을 실컷 떠벌이고 난 후에, 버릇처럼 스쳐가는 말투로 그 말을 꺼낸 것이다.
"빌린 돈 좀 갚아 주라. 방세도 밀리고 어머니 약값이 없어 쩔쩔 맨단 말이야. 동생 학비도 내가 댄다는 거 알잖아?"
"미안하다. 그렇잖아도 갚으려고 맘먹고 있다. 오늘 월급 받으면 주께."
"월급 날이야? 좋겠다. 월급 얼마씩 받니?"
"두 군데 아르바이트 합쳐도 팔, 구십만원이야. 그래도 너 갚아 줄 돈은 있으니까 염려 마."
"남자는 월급이 더 많은 줄 알았더니 나하고 똑같구나. 난 월급날이 내일인데 벌써 두 달치를 가불 받았어."
"구두쇠 영감이 가불해 줄 때도 있구나."
구두쇠 영감은 목재소 주인을 말한다. 목재소 주인을 사장이라고 부른다.
아가씨는 지금 그곳으로 출근한다. 오후 여섯 시가 출근 시간이다.
두 시간 동안 컴퓨터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주고 거래명세표와 계산서 등을 정리하는 게 아가씨의 일이었다. 일 년 동안 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전산학과는 레포트도 까다롭고 실기 시간이 많아서 수업이 끝나도 곧장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실습실에 남아 한 시간 동안 과제를 끝내고 시내버스 타고 가게에 출근하면 여섯 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주인 영감은 늦게 출근한 시간만큼 근무 시간을 다 채우고 가라고 했다. 그러면 서초동 할머니 댁에 또 지각을 하게 된다.
그 할머니는 컴퓨터를 배우려고 안달이었다. 오 분만 늦어도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짜증을 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음이 좋아서 한 시간 교습 시간을 다 채우지 않아도 열 시가 되면 어서 가라고 보내 주었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게 신이 나는지 아가씨를 선생님이라고 존칭하며 깎듯이 사부로 예우했다.
할머니는 대학을 나왔다는데 머리가 좋지 않았다. 아가씨는 어제 가르친 것을 또 가르쳐 주고 그저께 가르친 것을 또 가르쳐 주고, 손에 쥐어 주듯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할머니는 그런 아가씨가 고마워서 월급 외에 택시비와 밥값을 팁으로 주기도 한다. 그 횟수는 많지 않았다.
6개월 동안에 컴퓨터에 대한 기초 지식을 마스터해 주기로 약속하고 지금 6개월이 다 됐는데 아직도 깜깜.
아마 6개월을 더 연장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도 자기 머리가 좋지 않단 걸 알고 개인교습 시간을 더 연장해야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아르바이트할 일거리가 계속 있다는 건 아가씨에게 다행이었다. 아가씨는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2
남자 친구는 직장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택배회사에서 퀵서비스 배송과 포장마차 잔심부름이 그의 업무였다. 전자는 하학 후 초저녁에 근무하고 후자는 심야 근무이다.
그가 잠자는 시간은 언제일까? 사고나지 않게 조심해야 할 텐데.
짐을 그득 실은 오토바이들 몰고 차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질주하는 광경을 보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남자 친구는 그 어려운 일을 대학 일학년 때부터 했다고 한다. 그와 만난 게 일 년 전이니까 아르바이트 선배이다.
아가씨는 어머니가 신경통으로 몸져 눕고 나서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전에는 가난해도 일이란 걸 몰랐다. 어머니는 시장바닥에서 장사하면서 자식들을 귀하게 길렀다. 이제는 어머니가 일을 못하시니까 딸이 대신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게 아르바이트이다.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다. 아가씨는 남자 친구가 어두운 밤길에서 곡예하듯 오토바이를 달릴 걸 생각하면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친구 사이지만 남의 일에 간섭할 수 없어 다른 직장으로 바꾸란 말도 하지 못한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 사람들을 보면 남자 친구가 생각나고 제발 퀵서비스만은 그만두라고 충고하고 싶다. 오늘 밤 만나면 그 이야기를 할까?
남자 친구는 밤 열 시에 일이 끝난다고 했다. 빌린 돈을 갚으려고 열 한 시까지 아가씨가 사는 영세민 아파트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아파트 부근에 그들이 만나는 은밀한 장소가 있었다. 공원 뒷산이었다.
남자 친구를 만날 생각에 공연히 가슴이 부풀었다. 먼저 전화를 건 쪽은 아가씨이고 먼저 전화를 끊은 사람도 아가씨였다. 빚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고 남자 친구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한 달 만에 한 전화였다.
한 달이 넘도록 그한테서 전화 한 번 오지 않는 게 야속했다. 그가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성미란 걸 알지만, 그리고 한가하게 전화할 틈도 없이 바쁘단 걸 알지만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아가씨는 좌불안석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그리워 한두 달 만에 전화하면 변함없이 명랑하게 받았다. 마치 전화 오길 기다렸단 듯이 얼른 전화를 끊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좋은 전화를 왜 먼저 하지 않았을까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솟고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그는 보약 같은 남자였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돈도 없는 가난뱅이인데 그와 만나면 세상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것같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만날 땐 예외 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드라이브도 오토바이를 타고 했다. 신나게 오토바이를 달리면서 그의 품에 안겨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문제는 그 남자의 마음이었다. 아가씨와 만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딴전을 보고 늘 무슨 생각에 골똘히 묻혀 있었다.
그의 그런 태도가 아가씨를 안달나게 만들었다. 오늘 밤도 그럴 것이다. 어서 그 시간이 왔으면.
아가씨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와 시내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나서 오후에 시간이 좀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 끝내고 실습실에서 과제물 작성하고, 병원에 가서 어머니 처방전 받아다 약 사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반찬거리까지 사 놓고 나니 네 시 반.
목재소 출근 시간은 여섯 시. 삼십 분 가량 시간이 있어서 남자 친구에게 삼십 분 간 전화했는데도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맘만 먹으면 그와 전화할 시간을 만들 수 있고, 그와 전화하는 동안에는 그의 목소리에만 생각이 집중되었다. 그와 대화하는 게 즐거웠다.
그 남자도 얼른 전화를 끊으려 하지 않았다. 깍쟁이같이 전화만 받아 먹으면서도 일단 전화하면 끝이 없었다.
그녀가 힘든 일상을 즐겁게 생각하는 건 그 남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3
아가씨가 대차대조표를 만드는 동안 영감은 트럭에서 목재를 퍼서 가게 안으로 날랐다. 백 평 남짓한 가게 안에는 목재와 합판, 스티로폼 같은 건자재들이 통로만 남기고 빼곡이 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것 같았다. 그 물건들은 날마다 실려 나가고 새로 들어왔다. 꽤 잘 되는 도매상이었다.
영감은 비쩍 마른 몸집에 날마다 똑같은 점퍼를 걸치고 똑같은 중절모자를 쓰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돈이 아까워서 종업원을 두지 않고 늙은 아내와 함께 가게를 운영했다.
바쁠 땐 인부를 잠깐씩 사서 썼다. 아가씨에게 시간제로 일을 맡기듯이.
그의 아내는 영감이 없을 때 자리를 지키지만 컴퓨터를 할 줄 몰라서 계산서와 거래장에 기록한 것을 저녁에 퇴근할 때 아르바이트생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노부인은 다음 날 출근해서 아가씨가 전날 작성한 서류를 확인했다.
아가씨는 오늘 노부인이 준 서류들을 전산 처리하여 컴퓨터에 저장하고 출력했다.
장부, 세금 계산, 거래처에 보낼 서류들이 아가씨의 손에 의해 깔끔하고 정확하게 전산으로 처리되는 것이었다.
들고 나는 물품의 수량과 금액, 세액 산출 등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작성해야 한다. 노부인이 외상 전표와 세금계산서, 거래장을 엉터리로 적어서 그걸 맞추느라고 늦어질 때도 있었다.
틀린 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맞출 때까지 퇴근하지 못했다. 그러면 서초동 할머니한테서 빨리 오라는 재촉 전화가 왔다. 그 할머니에겐 대차대조표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야? 자네가 가르쳐 준대로 해도 도통 안 된단 말이야. 어서 와서 좀 가르쳐 줘!"
서초등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오면 아가씨 일에 지장이 될까 봐 주인 영감이 전화를 받았다.
"아가씨 지금 계산이 안 맞아서 맞추고 있어요. 일이 끝나면 보낼 테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 나이에 컴퓨터를 배워서 어디다 쓸 거요?"
"이봐요 영감님, 그런 말 말아요. 밥 먹고 잠 자는 것만 빼고 다 컴퓨터가 하는 세상이예요. 그래서 영감님도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수? 왜 그렇게 뭘 몰라요? 영감님이 내 나이를 아슈? 나 젊어요, 새파랗게 젊다고요!"
"목소리 들으니까 하나도 안 젊구먼. 우리 할망구 목소리와 똑같아."
"뭐가 어쩌고 어째요?"
두 사람이 전화로 싸우는 걸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영감은 입는 것 먹는 것 꾀죄죄하게 살아도 두 아들이 외국에서 의사였다. 딸은 대학교수였다.
영감은 아가씨에게 자식들 자랑을 하며 교육자 집안이라고 은근히 뽐낸다.
그는 늙어도 힘이 억척이었다. 자신이 손수 공장에서 목재를 트럭에 싣고 와서 밤새 혼자 가게로 퍼 나르는 걸 보면 노랭이라고 욕하기에 앞서 그의 근면성에 존경이 갔다.
"이것 좀 먹고 하게."
하고 영감이 책상 위에 갖다 놓는 바나나를 보고 아가씨는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바나나가 시커멓게 말라서 고린내가 풍겼다. 영감은 약간 고린 바나나가 좋다고 하며 맛있게 껍질을 벗겨 먹었다.
저녁 밥 시간이 됐는데도 아가씨 밥 사 주기 싫어서 식사를 시켜 먹지 않는다. 집에 가면 할머니의 따끈한 된장국이 기다린다.
그러나 트럭에 쌓인 목재를 보니 일찍 귀가하긴 틀린 것 같다. 그 목재를 가게 안으로 다 운반하여 정돈하려면 한밤중이 될 테니까.
"볶음밥 하나 시켜 줄 테니 먹고 갈 텐가?"
아가씨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옆에 와서 화면의 깨알 같은 숫자를 안경너머로 들여다보며 영감이 좀체 하지 않던 말을 한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힘든 일을 도와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도와 주기는? 아가씨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런 중노동을 하누? 오늘 세무서 직원이 와서 세금 잘 낸다고 칭찬했어. 아가씨가 세금 계산을 정확히 잘하기 때문이야. 이 다음에 시간 나면 내가 식사 한 끼니 사겠어. 오늘은 바쁜 것 같으니 내 강요 안하지. 자, 또 계속해 볼까? 어흠!"
영감은 밥값이 안 들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트럭으로 엉금엉금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저에게 밥을 사 준다면 해가 서쪽에서 뜰 거예요. 아가씨는 냄새나는 바나나를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
여덟 시였다. 사실은 벌써 작업이 끝났으나 시간을 채우려고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거래장과 계산서의 숫자가 일치해서 기뻤다. 영감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월급은 적지만 직장에서 일한다는 기쁨.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일할 수 있다는 데 뿌듯한 희열을 느꼈다.
영감에게 인사하고 목재소에서 나왔다. 전철을 타고 서초동 할머니 댁으로 가서 한 시간 동안 컴퓨터 개인 교습을 했다.
할머니는 어제 가르쳐 준 것을 또 잊고 다시 가르쳐 달라고 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아, 여기를 잘못해서 안 됐었구나. 수첩에 메모해 놨으니 다시는 안 물어 보겠네."
"할머니, 모르면 자꾸 물어 보세요. 이러다 세월이 가면 다 아시게 될 거예요."
"선생님 볼 면목이 없네. 컴퓨터는 내 체질에 맞지 않아.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가 좋지. 우리, 나이트클럽에 가서 한번 흔들까? 그게 싫으면 노래방으로 갈까?"
"할아버지와 함께 가셔야죠. 저는 약속이 좀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우리 영감탱이는 노래도 할 줄 모르고 멋대가리가 없어. 오늘은 내 기분이 좋아서 택시비를 주지. 택시 타고 가게."
"괜찮아요. 전 전철이 편해요."
"타고 가라면 타고 가."
할머니는 아가씨의 호주머니에 만원짜리를 쿡 찔러 주었다.
택시비를 줘도 돈 아까워서 안 탈 줄 뻔히 알면서 주신다. 할머니에게 더 친절히 잘 가르쳐 드려야겠다.
"돈 아끼지 말고 꼭 택시 타고 가요!"
할머니가 대문간에 서서 당부했다.
4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택시를 타고 영세민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남자 친구를 기다렸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아파트 길 모퉁이에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고 나지 않아서 기뻤다. 항상 사고 날까 봐서 애태우는 그녀였다.
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한 달 만에 만났어도 서먹서먹하지 않고 매일 만난 것처럼 허물없고 다정했다.
"어머니는 잘 계셔?"
"응, 그런 대로 지내셔."
"어서 나으셔야 할 텐데, 걱정이다. 네가 가장 노릇 하려니 어렵겠다."
생각해 보니 두 사람 모두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아가씨가 사 온 빵과 우유로 저녁밥을 대신했다.
그가 바지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어 아가씨에게 내밀었다. 빌려간 백만원이었다.
아가씨는 돈봉투를 받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가 받으라고 손에 쥐어 줘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월급 타서 돈 쓸 데가 많을 텐데 어떻게 가져왔어?"
"택배회사는 오늘이 월급날이고 포장마차는 아직 멀었어. 사십만원은 회사 선배한테 꾼 거아. 어머니가 아파서 급전이 필요하다고 거짓말했더니 빌려주더라. 우리 어머니가 아픈 게 아니고 네 어머니가 아픈 걸 그렇게 말한 거지."
그는 뭐든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기를 좋아한다.
가난뱅이는 가난한 얘기를 지껄여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난이 무기도 아닌데.
만나서 삶의 이야기, 직장 이야기 같은 시시껍질한 소재밖에 말할 것이 없었다.
더 중요한 사랑 이야기는 쑥스러워서 피차 잘 꺼내지 않는 편이다.
"빚 독촉한 게 진심인 줄 알았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던 거야."
"그래도 일단 돈을 받아라."
"요긴한 데 있거든 써. 나도 내일 월급 타."
"방세가 밀렸다면서? 네 어머니 약값이 걱정되어 급전을 마련했다. 가져온 내 성의도 생각해 줘야지."
아가씨는 돈을 받지 않고 그의 몸을 두 팔로 껴안았다.
아파트의 불빛들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불빛 속에 아가씨의 집도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고 먼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그가 고마웠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감정을 끄려고 심호흡을 했다.
인생살이가 힘들면서 힘들지 않는 것은 이렇게 따뜻한 체온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내일 헤어지더라도, 이렇게 함께 있다는 건 행복이야. 축복이고.
함께 있다고 해서 소유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소유는 자유로운 단어가 아니고 구속의 의미가 더 짙었다.
어떤 이유로 해서 그를 구속하고 싶지도 않고 부담 주는 행동을 하기도 싫었다.
지금 이 순간, 이 행복으로 족하지 않을까?
돈 백만원을 그에게 빌려준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돈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간다면 돈이란 괴물을 만든 사람들의 잘못이다. 두 사람의 뜻이 아니다.
어떻게 그의 마음을 달래 줄까? 아가씨의 뇌리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는 멋쩍게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이따가 헤어질 때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항상 만났던 밀회 장소로 갔다. 아파트 뒤에 숲이 있었다.
그들만의 동산에서,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되어 마음껏 사랑의 실과를 따먹었다.
에덴의 내부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쳤다. 이브는 아낌없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바쳤다고 생각한다. 수치도 체면도 잊은 채……
숲의 바람소리에 눈을 떴다. 숲 사이로 아파트의 불빛이 어른거려서 주위는 어둡지 않았다.
그 불빛으로, 새근거리는 가슴이 보였다. 땀이 식어서 한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그래도 두 개의 체온이 있어 춥지 않았다.
함께 한 시간은 항상 짧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대고 걱정스럽게 소근거렸다.
"오토바이 타지 마. 걱정돼 죽겠어."
"나도 안 타려고 한다. 나 여기 오다가 하마터면 트럭에 부딪쳐 죽을 뻔했어."
"어마나, 그랬어? 하마터면 이 얼굴 못 볼 뻔했네."
"이 예쁜 얼굴 못 보고 죽을 뻔했지."
"나같이 못 생긴 여자, 뭐가 좋다고 그 먼 길을 오토바이로 달려오셨수?"
"나도 모르겠어. 나같이 못난 놈에게 가불해서 백만원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네 마음을 모르듯이, 그냥 좋은가 봐."
"내일 헤어져도 좋아. 그냥 이렇게 있는 게 좋아서 만나자고 한 거야. 돈 때문이 아니야, 절대로."
"나도 알고 있다."
"제발 다른 건 다 좋으니 퀵서비스만은 하지 마 응?"
"알았다. 누구 명령이라고 내가 거역하겠니?"
그들은 작별의 키스를 하고 숲에서 나왔다. 다시 개체로 돌아가서 에덴과 안녕했다.
그는 포장마차에 출근해야 된다며 서둘렀다.
그의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했다. 밤길로 오토바이를 달려가는 남자가 안쓰러워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너무 서두느라고 아가씨가 흘린 눈물을 보지 못했을 게다.
5
남자 친구를 보내고 아가씨는 터벅터벅 영세민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올라가서 현관 차임벨을 눌렀다.
남동생이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딸이 들어오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생했다고 딸을 위로했다.
"밥통에 밥 있으니 먹어라. 시장하겠다."
"저녁 먹었어요."
"어디서?"
"친구와 빵을 배부르게 먹었어요."
"남자 친구?"
"네."
"어쩐지 늦게 오더라 했지. 남자는 뱀이야 뱀. 죽은 네 애비도 뱀이었어. 뱀 중에서도 제일 독한 독사였지. 그러니까 젊은 나이에 날 두고 떠났지. 무정한 사람."
어머니는 또 팔자타령이었다.
아버지와 아기자기한 사랑도 못하고 일찍 사별한 걸 가슴 아파한다. 병들면 슬픈 일만 생각하나 보다.
병든 어머니라도 옆에 계셔서 행복했다. 어서 병도 낫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오후에 너 나간 뒤로 수원 고모가 고길 사 가지고 왔어. 그분은 간호사 출신이지. 속도 모르고 내 혈색이 전보다 좋아졌대나. 좋아지긴 뭐가 좋아져? 낫지도 않고 맨날 그 팔자인 걸."
"제가 보기에도 더 좋아지셨어요. 약값도 더 싸졌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이 방에 눠 있지 말고 자주 운동을 하셔야 된대요. 내일부터 저랑 함께 산책을 해요."
"산책해서 나을 병이 아니야. 고질병이 하루 이틀에 낫겠니? 고모 말이, 너희 둘을 낳고 산후 조리를 안해서 그렇대. 가난한 시절에 산후 조리가 어디 있겠니? 지금도 그 가난 면치 못하고 살지만, 너 결혼해서 자식 나으면 산후 조리만은 이 에미가 책임지겠다. 그래야 자식들 고생 안 시키지."
어머니는 훌쩍거렸다.
옆방에서 공부하던 고교생 아들이 울음소리가 청승맞다고 투덜거렸다.
방이 두 개여서 하나는 남동생이 쓰고 어머니와 딸은 한 방에서 잔다. 자리에 누워서도 팔자타령.
"애비가 병났을 때 약 한 첩 제대로 써 주지 못한 게 한이 되는구나. 나는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약값이라도 대 주지. 왜 나는 그때 그런 능력도 없었을까? 식모살이라도 해서 애비를 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엄마가 아빠 몫까지 다 하셨잖아요? 저희 남매 기르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죠. 이제는 제가 갚겠어요. 내년에 졸업하면 큰 회사에 취직할 거예요. 성적이 좋으면 졸업과 동시에 큰 회사로 갈 수 있대요. 엄마가 저를 잘 낳아 주셔서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고 예쁘니 얼마나 좋아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해요. 나더러 예쁘다고. 다 우리 엄마 덕분이죠."
딸은 어머니의 목을 껴안고 젖통을 만지며 어리광을 부렸다.
어머니의 젖통은 딸의 젖통보다 싱싱하지 않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했다.
"그 남자한테 함부로 몸 허락하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마."
"좋은 사람이예요. 졸업하면 엔지니어가 된대요."
"좋은 사람이래도 여자가 몸을 쉽게 허락하면 안 돼. 널 어떻게 키웠다고. 가난해도 금지옥엽같이 키웠어. 네가 남자에게 버림받으면 나 죽어도 눈 못 감아."
"몸 허락하지 않았으니 염려 마세요. 저는 언제고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용감하게 살 거예요. 그게 제 사랑법이죠. 어머니 딸 현명하죠?"
"네 얼굴에 이미 허락했다고 써 있는데 그래? 네 옷에 흙이 묻어 있더라. 풀이 짓이겨졌어. 얼마나 남자놈과 시시덕거렸으면 풀이 다 죽이 됐을까?"
딸은 양심의 가책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으려니까,
"좋아하면 만나야지. 내 말은 사내들 조심하란 뜻이야. 그 누구도 믿지 마. 하느님도 믿지 마. 우리가 믿을 것은 이 현실이야. 내 말 알아들었지?"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품도 그 남자의 품 못지않게 넓고 따뜻했다.
남자를 믿지 말고, 그 남자가 날 사랑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말고, 허황한 미래를 믿지도 말고 현실을 직시해라. 나는 언제나 내 한 몸이다. 그 누구도 날 도와 주지 않는다.
현실의 내 몸이 금지옥엽처럼 소중하단 걸 잊어선 안 된다. 발정한 암캐처럼 함부로 내둘러선 안 돼.
항상 하시는 어머니의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그 남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예요 어머니. 세상 모두가 믿지 않아도 나는 그 사람 마음을 믿어요. 그 사람 마음이요.
발정한 암캐처럼 함부로 내두르지도 않았고 내 몸을 가치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엄마의 딸은 그렇게 현실 감각이 없고 멍청하지 않아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사회 생활에서도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잠결에 귀익은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가씨만이 아는 신호이다.
오토바이 소리는 아파트 앞에서 멎었다가 다시 멀어졌다. 필경 그 남자가 찾아왔으리라 예상했다.
말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녀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사내.
그래서 숲에서 헤어진 다음에도 떠나지 못하고 영세민 아파트 주위를 배회했을 거야. 밤하늘 별만큼이나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백만원 빚 때문에 오늘은 어제보다 더 가까워진 그들.
그와 다시 만나는 꿈을 꾸며 아가씨는 내일의 행복을 설계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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