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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우리독서지도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김구의 백범일지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이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40년 3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제6대, 12대, 1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1876~1892)
김구는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에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당 17세)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자점의 방계 후손 김만묵(金萬默)의 둘째 아들로 24세의 미혼이었던 아버지 김순영은 그의 누이동생의 시누이(매제의 자매)가 되는 현풍곽씨의 딸을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맞이했다 한다. 태어날 무렵 난산이었던 탓에 일가의 권유로 그가 태어나던날 밤 그의 아버지는 지붕위로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흉내낸 끝에 순산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가 태어나던 날은 그의 조모가 사망한 날이었다. 그의 초명은 김창암(金昌巖)이었다. 유년기에 천연두를 앓았다. 이때 그의 모친이 예사 부스럼을 다스리듯이 죽침으로 고름을 짜 얼굴에 얽은 자국이 생겼다고 한다. 4세 때 백부 김백영(金伯永)의 상을 당하였고 5세 때 그의 집안은 강령으로 이사하였다가 그가 7세 때 황해도 해주군 본향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 먹는 등 개구쟁이 행동으로 부모님의 꾸중을 들었다.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9세 때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통감과 사략 등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3] 통감, 사략, 병서, 대학, 당시(唐詩) 등을 두루 습득하였다. 이러한 학문실력은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배움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베를 짜서 번 돈으로 김구를 가르친 덕분이었다.
황해도 산골에 숨어살던 그의 집안은 양반들의 학대를 참아가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김구는 평생의 한이던 상민의 껍질을 벗고 평등하기보다는 월등한 양반이 되어 양반에게 당해온 오랜 원한을 갚고자 노력하였다. 한번은 양반집의 아들들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자 어린 창암 은 집에서 큰 부엌칼을 들고 그들을 찔러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1888년 4월 할아버지 김만묵(金萬默)이 사망했다. 이무렵 김구의 아버지 김순영은 뇌졸중에 걸려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부모는 문전걸식하면서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한 고명한 의원을 찾아 떠돌아다녔는데 이때 큰어머니 댁·장연 재종조 누이 댁 등을 전전하였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를 보여 좀 불편하기는 해도 혼자서 걸을 수 있을 만큼 서서히 좋아졌고, 부모가 돌아오면서 그의 학업은 계속되어 17세에는 임진년 경과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과거시험시 매관매직의 타락상 즉,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관리들의 비리를 보고 분노한 그는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3개월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관상 공부를 하였는데, 당시 자신이 타고난 복은 없지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는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병서를 탐독하며 집안 아이들을 모아 1년간 훈장도 하였다.
동학운동(1893~1895)
1893년 1월초, 그는 포동의 동학교도 오응선(吳膺善)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김창암(昌巖)에서 김창수(昌洙)로 개명하였고 입도 수개월 후 그의 휘하 연비(신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이듬해에는 조직이 급속하게 커져감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수백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팔봉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가을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는 대표자로 선발되어 연비 명단 보고차 보은에 가서 접주 첩지를 받아왔다. 같은해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그의 부하는 700여 명이었으나 왜군 병사들이 쏘는 총소리에 놀라서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김창수의 부대는 조직내 세력싸움에서 같은 동학군인 이동엽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홍역을 치르는 와중에 이동엽 일파의 기습공격으로 김창수의 포수 부대는 패하고, 그는 몽금포로 피신하여 스님의 치료를 받으며 3개월간 잠적해 있었다. 동학군 장수로 있을 때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으로부터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1895년(19세), 동학농민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의려소(義旅所)를 세워 경성의 김홍집 내각에 참여한 김종한의 원조와 황해 감사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해 1894년 12월 접주 원용일의 부대 2,000여 명을 크게 이긴 적이 있을 정도로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던 지역 유력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한다. 안태훈이 김구의 인품을 사랑하여, 동학이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고 생각하여 비밀리에 밀사를 보내 불가침협정과 공동원조계획을 세웠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안태훈에게 의탁하게 된 것이다. 1895년 2월부터 안태훈의 배려로 안태훈의 신천군 청계동 산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을 만나 감화받았는데, 고능선은 청년 김구에게 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있음을 말해주었다. 김구는 그 뒤에도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을 추억하기도 하였다. 20세에는 김형진을 만나 백두산까지 기행하였으며 압록강 근방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그와 함께 청나라군의 원조를 받아 강계성의 관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고 몸을 숨겼다. 이후 귀향하였는데 그의 스승인 고능선의 장손녀와 약혼을 결정하였으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하고 말았다. 1896년 2월 22일 안태훈은 해주군의 집사로 추정되는 인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순검들이 산포를 모아 청계동을 습격하려던 김창수(김구)를 추적했으나 김창수는 도망하고 말았으니, 자신도 김창수의 발자취를 사방으로 추적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오영섭은 안태훈 자신이 청계동에서 김구를 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논란이 일어나자 신천군수의 징계를 피하기 위한 보신적 조치로 보았다.
국모보수사건(1895~1898)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김구는 살인 이유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8] 한편 자서전인 《백범일지》에는 쓰치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쓰여 있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달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판결을 보류하였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민심[10]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감옥 속에서 간수가 준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사>, <세계지리>를 읽고 개화사상과 신학문에도 눈을 뜨게 되었으며, 감옥안의 재소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897년 강화 사람 김주경(金周卿)이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지만 실패하였는데, 가산을 탕진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잠복하였다.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죄수들은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간수들을 위한 대서를 해주었고 또한 동료 죄수들로부터 노래를 배웠다. 이때 그는 서양의 책인 세계역사와 세계지리 등 중국에서 발간된 서적을 읽으면서 서양인들이 원숭이에서 얼마 멀지 않은 오랑캐라는 사고를 버리게 되었다.
승려 활동(1898~1899)
1898년 3월 동료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한다. 그가 탈옥하자 그 대신 부모가 붙잡혀 투옥되었다. 탈옥 후 삼남지방에서 도피하던 중 그해 가을께에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승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승려들과의 마찰 등으로 후회하던 중 이듬해인 1899년 봄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주지인 하은당은 뜻이 그러하다면 보내주겠다 하고 여비로 쓸 곡식을 주어 보내주었다. 이후 이곳저곳 방랑하며 동료 승려를 따라 평양부에 도착, 1899년 4월 동료 승려를 비밀리에 고향에 보냈다가 그를 따라온 부모와 상봉하였다. 식솔들을 이끌고 방랑중 5월 평양 영천암에 방장이 되어 방장으로 장발승려 생활을 하다가 환속한다. 그가 환속하자 실망한 동료 승려는 그를 떠났고 99년 가을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은아버지 김준영은 농사일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이를 거절하고 얼마뒤 본향을 떠난다.
교육계몽운동(1900~1918)
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기독교에 입교시켜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
1910년 경성의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회의가 열릴 때 신민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안정근을 만났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연루, 체포되어 이에 종신형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1912년에는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13] 1915년 8월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직전 둘째딸 화경이 죽었다. 가출옥후 그는 아내가 교원으로 있는 안신학교(安新學校)로 갔다. 1917년 2월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1919~1926)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간여하였다.[15]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1운동 직후 김구는 경의선 열차편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의 선박을 타고 1919년 4월 중순경 상하이에 도착하였다.[13]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정보 및 감찰,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警務局長) 직을 맡고 이후 내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공산주의 혁명에 참가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김구는 제3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을 들어 거절하였다.[16][17] 1920년 8월 아내 최준례가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18] 1922년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상하이로 건너왔고, 그해 2월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8] 9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차남 김신(信)이 출생하였다. 10월 여운형·이유필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8] 이후 임시정부가 임시정부를 새로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구조만 수정하자는 개조파의 논쟁장으로 변하자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내려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킨다.[19] 이때 청년 오면직, 노종균 등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레닌에게 지원받은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제출하지 않은 고려공산당원 김립 등을 추격, 살해하였다.[19] 그러나 자금을 횡령했다는 주장은 공산당을 적대시하던 정적들의 모함이라는 견해도 있다.[20] 이후 임정은 개조론과 창조론이 계속 대립하였고 김구는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 해산령을 내렸다. 12월 상해 교민단에서 의경대를 설치할 때, 고문에 추대됐다. 1924년 1월 아내 최준례가 상하이 홍구 폐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사망하여 불란서 조계의 숭산로 공동묘지에 장사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 취임(1926~1929)
1924년 6월 내무총장으로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5년 이승만이 사임한 후, 박은식, 이상룡 등 잇단 사퇴와 사망 등으로 임시정부는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다. 1926년 말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으로부터 국무령에 취임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자신이 '김존위의 아들'이라는 미천한 출신 배경을 이유로 사양했다.[13]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7년 김구를 국무령에 선출하였다. 국무령이 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제도를 고치고 주석을 맞았다.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각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 참여하여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다.[22]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1925년 11월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차남 김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9월에는 장남 김인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일본 요인 암살 활동(1930~1933)
1931년 임시정부 내에 일본요인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24] 김구는 청년단원을 모집하였고 1931년말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이 찾아왔다. 초기에는 이봉창을 의심하였으나 신뢰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황제 부의(傅義)와 함께 동경 교외에서 관병식(觀兵式)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입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천황부자에게 수류탄을 투탄하였으나 암살 미수에 그쳤다. 2월 12일 중국인 잠수부들을 고용, 상하이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신형 잠수정 이즈모호(出雲號) 폭파 계획을 세웠으나 선하에 폭탄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머뭇거리다가 실패하였다. 2월 윤봉길이 입단하자 중화민국 정부요인인 왕백수, 진과부 등과 중국군에 복무하던 김홍일의 도움으로 폭탄을 입수, 3월 3일 윤봉길을 상하이로 파견, 상하이 훙커우 공원 부두 근처 비행장 격납고 폭파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상해사변에서 중화민국이 패전하여 비행장 접근이 어려워 실패하였다. 4월초,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투척을 지휘하였다. 윤봉길 의거로 사라카와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4월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의 만주사변을 규탄한 뒤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만주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키로 했다.[25] 일본의 만주철도국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5월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25]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
광복군 조직 활동(1933~1937)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하였다.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임정 해소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0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정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주장이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중일전쟁 직후(1937~1939)
중일 전쟁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돈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33]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은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거동의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1939년 모친 곽낙원여사가 폐렴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수 없다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1940~1945)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에 선출되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그해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1940년 9월 김구는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 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6월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3년 7월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주석에 복직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9월 그는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김원봉 등 좌파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광복초기 정치활동(1945~1946)
1945년 4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8월 섬서성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고 11월 상하이를 거쳐 임시정부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이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1945년 9월 3일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의 집단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38]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하여 지주 최창학이 기부한 죽첨정(경교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 송진우와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 하지 사령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소환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위원회는 반탁시위를 주관하였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의 포고령이 떨어지자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이 파업을 선언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다시 김구를 소환하였고 미군정청에 불려갔다 온 김구는 파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3일 갑자기 조선공산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지지로 돌변했다.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가 좌익세력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자 김구는 조공의 표변을 들며 조공은 반민족적 집단이고 신 사대주의자라고 낙인찍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김구는 김성수, 조소앙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신탁통치반대운동(1946)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총리에 선임되었다. 2월 14일부터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46] 원래 김구는 이승만이 빠른 시일내에 미국으로부터 정부수립에 대한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하에 이승만의 도미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의 생각과는 달리 3.1절을 전후하여 정부수립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아이들 장난으로 조소하였고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미숙한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46] 3월 5일과 3월 6일 미군정에 의해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과 함께 주한미군 사령관실로 불려가 잡아넣겠다는 협박을 받고 굴복, 계획은 불발로 끝나게 됐다. 그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되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론을 말할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가 찾아와 3백만원의 수표를 정치자금으로 건넸으나 국사에 쓰일 돈이라면 이박사(이승만)에게 드려서 쓰게 하라며 돈이 필요하면 이박사에게 얻어쓸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6월 11일 독립촉성중앙회 국민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될 때 참석하여 이승만의 연설에 대하여 답사를 발표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부총재에 선출됐다. 19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임정법통과 건국운동(1947)
1947년 1월 18일 김구의 주도로 우익진영은 전국반탁학련 반탁궐기 1주년을 기념, 대대적인 반탁데모를 계획하였다. 몇사람의 희생도 불사하는 소요를 일으키겠다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의 만류와 하지의 경고로 김구는 반탁시위를 보류하였다. 1월 18일 우익진영의 반탁행사는 천도교당에서 열린 학생들 주도의 매국노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로 축소되었고, 김구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50] 2월 14일~2월 17일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민족통일총본부, 비상국민회의, 독립촉성국민회 등을 통합하여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김구는 만약 이승만이 조속히 미국측으로부터 확약을 받지 못한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실천에 옮길 것을 전제로 하여 이승만의 도미를 찬성하였기 때문에 이젠 자기 길을 걷겠다고 나선 셈이었다.[46] 김구는 임정 계열과 함께 이승만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3.1절 전후로 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구와 임정 계열의 3.1절을 전후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신문에서조차 '아이들 장난'으로 조롱하였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했다. 미군정은 김구와 이시영, 조완구, 유림, 조소앙 등을 호출하였고, 군정의 호출을 받고 3월 5일 임정 요인들을 데리고 주한미군사령관실을 방문하였다. 군정청은 그들을 잡아넣겠다고 협박했고 이들은 이에 굴복하여 정부수립 계획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정해구는 김구의 이같은 시도에는 '이승만 부재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의한 김구의 의도도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국민회의를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려던 김구의 이같은 시도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대처와 여타 세력의 지원부족으로 제대로 성공할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김구의 반탁노선에 반발한 한독당 내의 안재홍,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이승복, 장지필, 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반탁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한독당을 이탈하기도 했다.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여러 단체간 이견이 존재하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53][54] 서울 시위를 주도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는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55]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친필로 6.23 반탁데모에 장군 남이가 지은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후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라는 시를 선사하여 격려하였다.[56][57] 그러나 그러나 김구와 이승만의 격려에도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9월 17일 미군정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고 밝혔다.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에 민주적 독립국가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소련은 반발하였고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1월 30일 번복하여 이화장의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시간을 회동, 자신과 이승만의 근본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성명서 발표후 이승만과 함께 서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하였다. 1947년 12월 장덕수가 피살되자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군정청 경찰은 김구가 이끄는 국민회의 간부 10여명을 연행하는 등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용의자들은 재판에서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할것과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가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이 암살 동기라고 주장하였다.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
남북협상(1948~1949)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68]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의 결별을 결심했다.
1948년 1월 UN 한국위원단에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발송하였다.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2월 10일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공동으로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에 보냈다. 3월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남한총선거 불참을 표명하였다. 1948년 3월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 1948년 4월 김구는 김규식 등과 함께 북행을 결정하고 4월 19일 북행길에 올랐다. 이어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남한의 주요 정치인사들은 북행하였으나 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김구는 4월 22일 회의에만 참석해 형식적인 인사말만 하였다.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열린 '4김 회동'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김일성 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하면서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하였다. 1948년 5월 다시 돌아왔다.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
김구의 노선변경과 함께 그를 지지하던 세력이 떨어져 나갔고 조선일보도 김구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김구와의 결별이 괴로웠던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가 직접 나서서 <김구선생의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바 태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해 8월 김구는 어머니 곽낙원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정릉에 안장했다. 이어 차남 김신을 시켜 상하이와 쓰촨성 충칭에 있는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천장식을 기독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고 정릉 가족묘지에 안장했다. 어머니 곽 여사의 유골을 정릉 뒷산에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 장대 역할을 맡아 운구차를 호송해주었다. 경마 경주를 좋아하였으나 이때 운구를 호송해 준 기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기도 했다.[76] 이승만도 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이때부터 경마대회 시상 중 이승만상, 김구상이 즉석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말년(1949)
1948년 11월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69] 1949년 1월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하였다. 같은달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웠고, 3월 마포구 염리동에 창암학교를 세웠다.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같은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사망 당시 김구의 나이는 만 73세였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저서로 《백범일지》《도왜실기》 등이 있다. 2007년 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만원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현재 10만원권 지폐의 발행은 전면 취소되었다.
퀴즈
1. 백범의 어렸을 때의 일화에 대해서 말해보자.
2. 백범의 인간적 면모를 알려주는 일화는 어떤 것이 있는가?
3. 백범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전의 활동을 정리해서 말해보자.
4.인류의 행복은 인의(仁義)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을 피력하면서 자식의 이름까지 인(仁)과 신(信)으로 붙였다. 만약 셋째 아들을 낳았다면 어떤 이름을 붙였을까?
5. 백범은 다양한 종교생활을 하게 된다. 어떤 종교를 믿었었는가? 왜 시기마다 바뀌었는지 말해보자.
6. 복역 중에 독립정부의 문지기를 소원하면서 임시정부의 일을 시작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자신이 주도한 것임을 상해신문에 당당하게 발표하였다. 왜 이렇게 자신이 배후에 있었다고 알린 것일까?
7. 해방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을 포기하고 일개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으면서도 끝까지 통일정부에 대한 소망을 갈구하다 같은 민족의 총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왜 같은 민족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었는가?
8. 가족과 제대로 된 가정생활을 하지 못했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들에게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글로 남겼다. 백범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9. 상해임시정부를 맡았을 때의 어려움은 어떤 것이었는가?
10. 백범이 1949년 죽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김구 선생님께 편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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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 한현정의독서논술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