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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번역극’의 재림
박근형의 연출과 최민식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필로우맨」(2007년5월LG아트센터) 이외에도 2007년에는 탄탄한 희곡테스트를 바탕으로 한 정통번역극의 안정된 무대가 특히나 돋보이는 한해였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2007년 아르코 예술극장 기획 프로그램으로 선보인 에드워드 올비 작, 신 호 연출의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2007년 3월 아르코 소극장), 윤호진이 연출한 아서 밀러의 「시련」(2007년 4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러시아의 류드밀라 라쥬몹스까야 작, 최범순 연출의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2007년 10월, 소극장 축제), 극단 실험극장이 제작하고 구태환이 연출한 카프카 원작, 앙드레 지드와 루이 바로 각색의 「심판」(2007년 10월, 학전블루 소극장)등이 탄탄한 원텍스트의 힘을 바탕으로 연극의 정공법에 충실한 공연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2007년 공연된 번역극 중에서 - 엄격히 말하면 번역 각색극이라고 할 만 하지만 -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공연으로는, 강량원 연출로 ‘극단 동’에서 공연한 카프카 원작의 「변신」(2007년 12월, 대학로 마당세실 극장)을 꼽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번역극이 희곡텍스트와, 희곡텍스트를 재현하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중심으로 하는 번역극 일반의 정통적 스타일을 제시했다면,「변신」공연은 독특하게도 연극 기호의 ‘자기지시성(Selbstreferentialitat)'
에 호소하는 방식을 선택, 무대 기표가 재현적 의미화 이전에 갖는 독립적 물질성을 강조한 표현방식을 선택했다. 가령“눈을 비빈다, 앞치마를 밟는다. 등을 문지른다, 발바닥을 본다, 발을 주무른다, 다리를 떤다. ” 등의 일상적인 동작들이 일상의 맥락에서 벗어나, 공연 「변신」의 극적 맥락 속에서 독립적이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대목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탈의미화와 재의미화가 교차되는 동작들은 재현적으로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면서 전달할 수 있는 의미나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는 특별한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또한 배우들이 대사를 발화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는데, 배우들의 양식화된 동작과 함께 인물과 배우의 몸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시키며 유쾌하나 웃을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만화의 점프 컷(jump cut)처럼 구성된 분절된 장면은 서로 간의 소통이나 접촉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을 드러낸다. 각각의 장면은 장면과 장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과 인물, 그들이 추동시키는 극행동을 효과적으로 소외시키는데 장면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태엽을 감은 인형과 같은 기계적 동작과, 과장되게 정형화된 몸짓은 그 자체만으로 소통을 가장한 소통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인물과 그들의 극적 행위를 표현하는 방식은 일련의 관계망 속에서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개념적으로 의미화 되기보다는 인물들 특유의 자기 지시성을 강화함으로써 인물 간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각각 더욱 단절된 상태 속에 던져져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공허한 독백에 가깝게 들렸고 그들의 대사는 자주 동작과 어긋남으로써 상대인물, 나아가 관객들의 정서적 피드백 작용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듯했다.
나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분절된 장면의 잘라낸 절단면, 피드백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듯한 인물들의 발화와, 과장되어 서로 어긋나는 동작들은 장면과 사건, 인물들의 극 행동의 연속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원작과 각색된 공연, 인물과 배우, 사건과 장면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여 재현의 대상으로서의 원작과 재현된 무대공연물의 차이를 드러낸다. 기대컨대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원작 텍스트와, 그것이 공연된 연극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 번역극 공연과는 다른 표현방식을 선택한 극단 동의 전략은 아직은 생소하고 거칠지만,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시임에 분명하다. 2008년 2월 아르코 소극장에 올리는 극단 동의 입센과 에밀 졸라의 ‘재현 100년 전 展’이 매우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뮤지컬 산업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주목할 만한 창작극의 생산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최근의 현실에서 보면 수준 높은 번역극 공연이 우선은 반갑고 고맙다. 2007년 번역극의 약진이라는 맥락에서 1947년 창단되어 사실주의 계열의 정통 번역극 소개와 공연으로 한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던 극단 신협의 60주년 기념 릴레이식 공연(2007년 10월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 신협의 기념공연은 장 폴 사르트르작, 채승훈 연출의 「더러운 손」,어스킨 콜드웰 작, 잭 커트랜드 각색, 이창구 연출의 「타바코 로드」, 윌리엄 세익스피어 작, 경상현 연출의 「킹 앤 햄릿」등 세 편의 번역극과 극단 신협의 제148회 정기공연이기도 한 극중극 형식의 옴니버스 창작극「스승과 그 제자의 꿈」으로 진행되었다. 기념공연의 내용은 공연의 의미나 의욕에 비해 매우 평이했으나 극단 신협은 최근 몇 년간의 침체기를 극복하고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각오를 다진 만큼 앞으로의 기대해본다.
2007년 한국연극계는 새로운 창작극의 수적인 빈곤 속에서도 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의 극단 미추의「열하일기만보」같은 좋은 작품을 생산했다. 동아연극상과 연극평론가협회가 뽑은 ‘2007년 한국연극 베스트 3’에 뽑힌 이 작품은 진지하고 실존적인 주제가 실종된 지 오래된 한국연극계에 그 소재와 주제 의식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묵직한 감동을 주는 무대가 2008년에도 계속되기를 기대하지만, 이런 보석 같은 작품이 2007년 한국연극계의 전반적인 경향에 편입되기보다는 특별히 예외적인 작품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하다. 번역극의 활성화와 창작극의 쇠퇴가 뚜렷한 연관관계 속에서 연동하여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극의 쇠퇴를 곧 창작극의 활성화로 이해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1980년대 한국연극계는 창작극을 활성화하고 번역극을 극복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 노력의 결과 1990년대는 뛰어난 창작극의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다.
최근 리바이벌되고 있는 창작극의 대부분이 1990년대에 공연되었던 작품들이라는 점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2008년에는 번역극과 창작극이 상보적으로 작용하며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축약된 인물들을 통해
자연주의적 몸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다.
․ 대담자 _ 강량원(‘극단 동’의 연출․대본가) vs PAF
․ 일 시 _ 2008년 3월3일 오후 4시
․ 장 소 _ 삼선교 버팔로 커피숍
PAF : ‘재현 100년 전 展’ 이란 타이틀을 갖고 현대연극의 출발점을 재조명한다는 의욕적인 공연을 지난 2월15일~
3월 2일 사이에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했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입센의 「유령」두 작품을 올렸는데, 특히 졸라의 그 작품은 극단 ‘동(動)’이 아마 국내 초연 작을 올린 것이 아닌가 싶다. 1873년도 작으로서, 졸라가 처음 소설로 발표하고 난 다음 연극 작품으로 각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로서는 135년만의 재현이니, 특별히 주의해 보고 싶다. 졸라의 그 작품은 어떻게 선택했다?
강량원 : 현대 연극사를 배우면서 제일 먼저 듣게 되는 것이 사실주의니 자연주의니 하는 개념들과 이어 졸라와 연출가인 앙뜨완느, 또 그가 활동한 자유극장과 같은 이름들을 듣게 된다. 특히 자연주의와 연관해서 졸라의 그 작품이 시초라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그 공연물을 본 적도, 희곡 대본을 읽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지난 90년대에 불란서에 유학하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졸라의 「테레즈 라캥」대본을 구하려 했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예술 철학자이신 박이문 교수께서 에밀 졸라의 그 소설을 번역해 국내 한 출판사를 통해 내놓았다. 그때 그것을 읽어보고 난 후 대본을 못 구했으니 나름대로 각색해보고 싶어 각색했다. 그런데 연극사 속에서 간략히 읽게 되는 것과 실제 소설은 너무나 달랐다.
PAF : 그렇다면 재현이란 개념과 그것의 각색 내지 대본 작업은 어떻게 연결시켰나? 함께 공연된 「유령」이란 작품은 여러 방식으로 번역되어 있고 또 얼만 전에도 산울림 극장 같은 곳에서 공연한 것으로 안다. 사실 「유령」은 어느 정도 어렵고 까다롭기도 하지만, 그것의 전체적 윤곽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테레즈 라캥」같은 경우는 참조할 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4명의 인물만 등장시킨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량원 : 우선 재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은 오늘날 현대극의 어떤 ‘토대’에 해당되는 것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후대의 우리가 엄밀히 묘사해서 객관화시키는 작업은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든 새롭게 해석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 어떤 ‘근본적인 틀’은 깨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레즈 라캥」에서 내가 착안한 것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어떤 흐름인데, 이것은 많은 인물을 등장시킬 경우 인물 사이의 긴장관계라든지 그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4명으로 축약해봤고-의가사 제대자로 불운한 부부생활을 하게 되는 까미유(김석주 분)와 테레즈(김문희 분), 까미유의 어머니 라캥부인(김미림 분)과 군인친구(김진복 분)-,그 네 사람의 인간관계는 어떤 언어 혹은 말 보다는 ‘몸’ 으로 통해 교감되고 소통되면서 괴로워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재현화 작업에 있어서 특별히 참조할 만한 외부 텍스트등은 없었고, 중요한 것은 어떤 내면의 것(풍향)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PAF : 여담이지만 1976년도의 일이다. 나도 젊어서 극단 76을 통해 연극 활동을 하면서 J ․ P 사르트르의 「구토」를 연출해본 적이 있다. 그 작품의 각색은 당시 나의 동기이면서 문학도인 한익기 씨(당시 우리 나이로24세)가 했는데, 사르트르의 그 작품은 아주 드물게 전 세계적으로 각색 작업이 이뤄진 것으로 안다. 그렇게 봤을 때 불행히도 그 대본을 찾을 수 없지만(당시 아주 어렵게 ‘공륜’을 통해 수정․통과되었다), 그 이후 이와 같은 강량원 씨의 대본 작업은 나로서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일부 국내의 연극 혹은 각색자처럼 작품을 지나치게 해체하지 않으면서, 그 작품의 분위기(아우라)를 성실히, 때론 시적 분위기 속에서 인상 깊게 전달했다고 본다.
나는 ‘자연주의’란 개념과 곁들여서 한국의 연극계가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개념의 이해는 ‘사실주의의 연장으로서 그것의 현미경적 정밀화’ 정도인데, 사실 그 밑에 깔린 인간의 이해에 대한 것은 훨씬 더 깊은 관찰을 요한다. 막연한 ‘인생의 단면( slice of life)' 제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해 더 연구적이고 심층적이다. 그래서 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도 자연주의적인 연극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보다 세밀한 그의 연구적 태도가 더 잘 읽혀진다고 본다. 그래서 사실주의/자연주의 간의 처음 약 5~10%의 차이점이 이후에는 우리 연구의 발전 방향을 크게 벌려 놓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자연주의적 인간탐구 내지 사회탐구가 우리 연극문화에 필요했었다. 문제는 거듭 그 ’탐구적 태도‘다.
탐구적 태도 내지 정신을 이어받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현대극이 100년이 되어감에도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본다. 공연에 대한 국내 연극평론가나 관객들은 반응은 어떠한가?
강량원 : 관객은 솔직히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특별히 아직까지 어떤 평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연극평론가들은 다수 극장을 찾아온 것 같다. 혹자는 우리의 고답적인 작업이 문예진흥원 지원을 받아서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이 프로그램은 지원금을 못 받았다. 대신, 보름 정도의 극장 대여는 아르코 극장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이번 9월에 있게 될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리바이벌 공연은 지원금을 받게 된다.
나의 단원들은 10개월 정도의 연습 기간을 가지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최대한 ‘몸에 익히려’ 했다. 두 작품을 같은 날 동시에 올리기 때문에 장치도 어떤 공통분모를 뽑아내어 상징적 공간성을 고안했다. 최대한 ‘경제적으로 하는 것’ 이 이번 공연의 목표 중 하나였다. 방금 전 언급하시 사실주의/자연주의의 간의 개념화나 그 양자 간의 간극을 사전에 어떤 해답을 가지고 도식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어떤 상징적 느낌에 따라가려했다. 자연주의를 사실주의 디테일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말씀하신대로 오늘의 연극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더 많이 이해된다고 본다. 그래서 「테레즈 라캥」의 경우는 즉물적인 몸의 이미지 재현에 포커스를 두었고,「유령」과 같은 경우는 문자 그대로 그 제목에서 풍기는 어떤 의미 있는 이미지를 매우 느린 몸짓 등을 통해 공간 속에 그리려 했다. 「테레즈 라캥」에서 두 인물과의 거듭되는 무대 앞 섹스 장면, 「유령」에서 목사이기도 한 만데르스(김석주 분)의 느린 움직임과 금욕적인 태도 등도 그런 시각에 보게 된다.
PAF : 「테레즈 라캥」에서 무대 앞 두 인물간의 반복되는 섹스 장면은 관객들보다 오히려 배우들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웃음) 특히 여성 연기자의 경우는 곤혹스러웠을 것 같은데‥‥. 그 같은 반복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 보이려 했나?
강량원 : 시간의 지리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테레즈 라캥」에서는 많은 것이 반복된다. 작은 ‘암전’도 그렇다. 암전을 통해 마치 우리가 흑백 무성영화를 볼 때와 같은 어떤 소멸의 느낌을 주려 했다. 섹스도 처음엔 호기심이 동하지만 거듭 볼수록 인간의 동물스러운 행위와, 그 결과 인간의 반성 없는 행동의 매커니즘이 드러난다. 다행히 그 역할을 감내해준 여성 연기자 김문희 씨는 러시아 연극 유학파이기도 해서 성실하게 그 역을 수행해주었다.
덧붙여 특히 「유령」에서 인물들이 택한 이색적인 ‘제스처’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느린 마임 같기도 한 그 제스처가 어떤 문맥에서, 또 어떤 필연성에서 나왔는지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물들 각 행위의 행간을 읽으면서 그렇게 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에서 나왔다. 이 부분은 나와 연기자들 간의 공동작업이기도 하다.
PAF : 「유령」에서 그 제스처는 그렇다고 어떤 연기적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면서 그 고안은 흥미롭다. 나로서는 제스처의 고안 내지 창안을 처음 말한 그 ‘재현’이란 개념 속에 적용시키고 싶다. 즉 문자 그대로, 엄밀한 행동의 모방이 아니면서 그러나 현대 관객에게 독특하게 어필해야 할 필요성에서 그것이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 그러면서 그것은 어떤 양식화된 표현은 아니다. 오늘의 맥락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데레스의 「유령」과 같은 느린 동작, 그것과 대조되는 하녀 레지네(곽은주 분)의 통통 ‘튀기는 듯한 즉흥적 움직임-그 대조 속에서 각 인물들의 위치가 인상적으로 읽혀졌다. 거듭 그 같은 것도 ‘유령’이란 이미지속에서 다시 재배치되고 읽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거기에 비해서 「테레즈 라캥」은 그 같은 상징적 모호함이 없다. 거듭 여러 방향에서의 반복 때문에 1시간 50분간의 전체 공연의 길이가 마지막 10~20분간은 매우 힘들었다. 10분만 줄여도 좀 나을 것 같다. 두 공연의 무대장치 내지 디자인은 누가 했는가? 철 막대기를 이용, 간략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났다. 무대 중앙 후면의 연한 녹색 내지 푸른색의 조명도 객관성과 함께 신비로움을 줬다.
강량원 : 무대미술이라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 골격은 모두 내가 디자인했다.
PAF : 자신과 단원들에 대해 좀 애기해 달라. 그리고 계속 이와 같은 고전의 재해석 내지 문학작품의 새로운 각색에 주력할 것인가?
강량원 : 계속 그 방향성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작업에 도움이 된다. 많은 국내 연극단체들처럼 이번 경우에만 불연속적으로 그 같은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해야겠다고 느낀다.
본 극단의 다수 단원들은 러시아 연극 유학생이다. 「테레즈 라캥」의 주역인 김문희씨. 「유령」에서 주역인 김석주씨, 또 「유령」에서 아들 역의 강세웅 씨를 비롯 그 외 몇 명이 더 있다. 이른바 ‘러시아 연극 유학세대’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돌아오기 시작 한 것이 1997년도 경이다. 90년대 초반에 가서 그 시기부터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동인들 모두 연극예술에 대해 진지하고 순수한 감정으로 일했었다. 우리가 연극 전공으로서는 1세대 인 것 같다. 그전에도 일부 연극인이 러시아에 갔지만, 대부분 정식 아카데미리즘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나는 연세대학교 신학교를 다니다가 동국대 연극과를 갔고, 이후 90년대 초 러시아로 다시 유학을 떠났다. 모스크바에 있는 슈킨 연극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 연극대학은 스타니슬랍스키에서 그 수제자인 박탄코프로 이어지는 연극전통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서 배운 스타니슬랍스키 이론을 갖고 활용하면 보다 현대적인 ‘비사실주의적 연기’도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나 우리 동인들이 그 방법을 더 심화시켜서 국내 연극계에서 보다 다양한 연기스타일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올 연말에는 그 결과물(워크숍 시연 물)을 보여주고자 한다. 많은 관심 바란다.
PAF :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다. 앞으로도 진지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많이 이뤄내길 바란다.
‘극단 동’의 「테레즈 라캥」과「유령」
현대극의 두 출발점에 대한 흥미 있는 조명
김 유 / 편집부
한국연극문화의 그 내실이 실하지 못한 것은 고전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 극단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불연속적으로 , 때론 어떤 유행에 편승하여 그 같은 작업을 할 때가 많다. 그런 중에 대부분 나름대로 하기 편한 작품만 한다. 또 그런가하면 이른반 재해석이나 해체란 개념 아래 작품이 너무 작위적으로 해석되고 연출되어 질 때가 많다. 그 결과 스튜디오에서 발표해야 할 습작 수준의 작품이 버젓이 한두 달 극장을 장기적으로 대관해 올려지곤 한다. 상당수의 연극이 그 같은 관행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현장이나 비평현장에서는 그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따르지 않고 있다. 모두 힘들게 하는 활동인데 잘못되었어도 눈감고 지나버리거나, 못 본 척하는 것이 너무 짙게 습성화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을 제때에 따끔히 질책할 수 있는 어떤 비평적 권위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갈수록 문제제기식의, (리차드 길먼 식의 표현으로) 파괴적 비평이 드물어간다.
최근 극단 동이 ‘재현 100년 전 展 ’이란 기획 타이틀로 올린 두 연극,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입센의 「유령」(아르코 소극장.2월 15일~3월 2일)은 일단 그러한 관행적 연극 제작법을 택하지 않아서 믿음이 갔다. 2주 정도의 대관으로 공연을 끝내는 것 같고, 애써 연장 공연을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히려 이 공연이야말로 연장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두 작품 중 졸라의 작품이 더 그런데, 내 연극사의 지식 안에서 이 작품은 135년 만의 ‘국내 초연’인 것 같다. 1873년 졸라가 동명의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했으니까, 정확히 그렇다.
따라서 현대연극에서 에밀 졸라가 차지하는 그 특이한 위상만으로도 신문 지상에서 화제가 될 법도 한데 사정은 전혀 그렇질 않아 보인다.
내가 갖고 있는 에밀 졸라의 각색대본은 총 일곱 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각색자이자 연출자인 강량원 씨는 핵심 인물 네 명으로 그 규모를 줄였다. 많은 해외 희곡 번역 중 유독 에밀 졸라의 이 희곡만 소개되지 않은 상화(몇 년 전 박이문교수가 동명의 소설을 번역했다)에 대해 나는 그 원인을 모르겠다. 불란서를 유학해 들어온 이들도 적지 않고, 또 영문판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졸라-스트린베리의 그 라인은 입센-고골리-아서 밀러의 라인에 가려 빛을 잃었다. 그 결과, 현대연극의 출발점과 맥을 모두 후자와 같은 일괄 사실주의의 맥으로 보고 그 시각에서 우리의 현대 서구의 연극사는 기록되면서, 또 그렇게 설명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형식적인 사회 비판적 연극만 늘었고 ‘사회의 인간을 함께 탐구해 들어가는’ 연극은 희소해져갔다. 대신 그것을 우화나 알레고리를 통해(최인훈, 이강백, 오태석등) 우회적으로만, 또 삽화 적으로만 다루려 한다. 보다 직접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분석적 시각을 우리 연극은, 특히 현대극은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량원이 각색하고 연출한 이 공연은 보다 특별한 시각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의가사 제대자인 까미유(김석주)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테레즈(김문희), 까미유의 어머니인 라캥 부인(김미림), 까미유의 군대친구인 로랑(김진복) 그 네 명의 캐릭터를 쇠막대를 이용, 매우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설계된 공간 속에서 조소적 물성과 같이 효과적으로 배치, 그 넷의 관계를 침묵과 무성 흑백영화와 같은 주기적인 암전을 곁들여 묘사해보려 한 이 공연은 얼마간 내게는 심리적 무용극과 같이 시적(詩的)접촉을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또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길 좋아한다. 아들의 죽음 후 아들의 친구인 로랑의 등에 기대어 로랑과 테레즈가 나왔을 법한 애욕을 자신의 유방이나 엉덩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보며, 또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는 듯한 제스처와 같은 것이 그 한 예다. 그 같은 접촉의 정점이 로랑과 테레즈의 애욕 장면이다. 무대 앞에서 다소 창백하며 찌들고, 병든 듯한 얼굴표정을 한 테레즈 역의 김문희와, 누런 군복 차림의 로랑 역 김진복이 반복적으로 관객 앞에서 보여주는 애욕의 장면은 김진복이 지퍼를 내리는 등 과감한 행동들을, 그러나 매우 진지한 과정 속에서 반복하면서 특히 그 행동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동물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점점 그들 사이의 애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관객들로 하여금 리얼하게 느끼게끔 했다. 공연의 끝, 그 모든 것을 즉 남편의 익사까지도 그들 둘이 공모가 아닌 모두 로랑의 탓으로 돌리려는 테레즈의 항거는 그래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내가 알아온 우리의 현대극의 연출에서 이같이 진지한 태도로 리얼하며 집요한 성적 장면이 그려진 것은 드물었던 것 같다. 공연 중 그것은 극장 앞줄 관객의 눈앞에서 4~5회 반복된 것으로 아는데, 특히 김문희는 ‘시체처럼 산’ 그녀의 인생을 그것을 통해 잠깐 애처롭게 보상받으려 했다. 여기서 떠돌이로 산 로랑은 다소 어눌해 보이면서 매력적인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연출가 강량원은 테레즈와 로랑의 기차여행 신과, 그들의 공모에 의한 까미유의 익사 장면, 그리고 공연의 끝 그 둘만의 이뤄질 수 없는 애욕의 관계를 푸는 녹색 톤의 조명을 곁들여가며 차가운 가운데, 어떤 신비로운 인간 정서의 심연을 거기에 투과하려는 듯 단편의 영화장면처럼 그렸다. 그 결과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려 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적 색채가 자연스럽게, 또 효과적으로 형성되어졌다.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을 인간행동의 디테일한 묘사나, 객관적 사실주의의 또 다른 말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모두 너무 피상적이다. 오히려 졸라의 자연주의는 현실을 제시하되(재현보다는), 그것을 더 심층적으로 , 곧 인간의 자연성의 적나라한 측면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않더라도, ‘현실’,‘비극적인 인간성의 심연’,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그 세 축을 묶는 조리개의 개폐작업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봐야 한다.
1시간 50분 동안 진행된 이 공연은 최대한 절제된 언어와 함께 경제적인 장면성, 둔탁한 듯하면서 동물적인 감각을 자아내는 캐릭터들의 독특한 동작성과 헌신성, 흑백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반복되는 암전, 마임적이고 상징적인 시적 효과의 연출기법의 사용, 또 작품의 역사적 중요도 때문에 보다 반복해서 올려질 필요가 있고, 해외에서도 공연되어도 그 소통성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함께 공연된 입센의 「유령」은,「테레즈 라캥」과 같은 무대디자인을 쓰면서 무대 뒤 반투명의 공간을 더 설정해 공간을 넓혔다. 사실주의 연극 특유의 실내성이 효과적으로 배분된 가운데, 연출은「테레즈 라캥」에서와 같은 일종의 미니멀적 연출로서 캐릭터들의 행동성을 곧이곧대로 서술적 ․ 나열적으로 갖고 가지 않으면서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오히려 자신들이 내세운 재현의 개념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입센의 「유령」은 사실상 인간의 종(種)과 사회를 이뤄가는 두 양극에 대한 미니멀적-맥시멀적 관점이 다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방탕생활로 인해 아들이 매독에 감염된 비극성과, 그런 가운데 그의 부인인 헬레나와 목사 만데르스에 의해 어떤 가치관 내지 이념에 대해 세우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사회성(社會性)의 건축-일종의 사회복지관 - 모두 현실적 감각에의 지각되는 보이지 않는 흡사 ‘유령과 같은’ 현상과의 쟁투를, 입센은 그 특유의 개인과 사회를 투시하는 복합적 시각을 통해 보여주면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내재된 금욕관과 이상주의가 사실은 그리 황금빛 속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더 어둠 속에 묻혀가는 듯한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겠다.
남편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 헬레네의 이상(理想)은 사실은 그가 남몰래 연모하고 있는 목사 만데르스를 향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상황과 겹쳐지고, 또 아들의 매독 감염을 아프게 지켜봐야 하는 상황과 합쳐진다.
또한 금욕주의자 만데르스는 그가 무엇 때문에 사회복지사업을 이루려 하는지, 그 욕망에 유령처럼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린 걸음걸이와 움직임 등을 공연 내내 줄 곧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아들 오스왈드는 그나마 마음에 두고 있던 레지네가 사실은 이복동생임을 알게 된다. 시인적 낭만성은 여기서 여지없이 또 한번 상처 입게 된다.
헬레나 역 유은숙의 과장되지 않으면서 절제된 연기, 목사 만데르스 역의 김석주의 유령과 같은 느린 걸음걸이와 무거운 무표정으로 이동하는 모습, 곽은주의 어떤 돌발성과 희화적 행동성은 전체적으로 무엇인가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가운데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완고한 프레임 속에 안치도리 수 없는 - 엄숙한 사실주의적 가치관의 틀을 벗어나는 - 우울한 인간들의 초상과 어떤 인간적 생동감을 함께 뒤섞어 보여주었다. 일부 어떤 측면은 다소 이지러진 바로크적 장면성을 띠기도 했다. 이 공연은 특히 만데르스역 김석주의 특이한 해석과 동작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판에 박힌 사실주의적 연기 아니라, 마치 독일 무르나우(Murnau)의 표현주의 영화 장면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 그 역할의 해석과 소화는 향후 여러 해석과분석이 가해질 필요도 있어 보인다.
나는 이 연극적 기획이 ‘재현’이 가진 사실주의적 묘사성과 표현성 내지 상징성 사이에서 좀 더 폭넓은 왕복을 해주었으면 싶다. 다시 말해 재현을 향한, 즉 대상에 대한 엄밀한 분석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 그것의 표현에 있어서는 좀 더 넓은 - 너무 넓지는 말아야겠지만-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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