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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경사로운 도시
BC 57년 신라 건국 후 제 56대(경순왕 935년) 992년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경주의 역사는 곧 신라의 역사입니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있던 여섯 부족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면서 건국된 나라입니다. 676년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합니다. 통일국가 신라는 평화로움 속에서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경주는 세계 역사상 실크로드의 기착지이자 종착지로 거론되기도 한다. 국보만 31개이고 보물이 82개, 사적 및 명승이 78개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212개다.
삼국유사 진한조에 기록된 `수도에는 178,936호가 기와로 지붕을 얹고 숯을 때며 산다'는 내용으로 볼 때 신라의 수도는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입택이 35채 있었다 라고 했는데, 실제는 39채가 기록되었다
경주 문화관광 http://guide.gyeongju.go.kr/deploy/
남산[南山]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2042_3581.html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마당 e뮤지암 신라 왕릉이야기
http://www.emuseum.go.kr/movie.do?action=view&number=269
문화재청 한국의 세계유산 석굴암과 불국사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1.html
영상포엠 한국 100경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80639
영상포엠 한국 100경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39568
감산사(甘山寺)
창건 후 어머니를 위해서 미륵보살상 1구를, 아버지를 위해서 아미타불상 1구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15년 2구의 불상이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절터는 전답으로 변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인 감산사지삼층석탑 1기 외에 별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작은 불당 2채만이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舟) 모양이며,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였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국보 제82호]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감은사지 양북면 용당리 55-1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마당 e뮤지암 감은사지서삼층석탑사리구는
http://www.emuseum.go.kr/movie.do?action=view&number=295
감은사에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 장사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金堂)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금당 앞에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 112호)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하다.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 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태극 문양은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문으로 682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목간의 편년이 7세기 초라고 추정되고 있으니 가장 오래된 태극문의 타이틀이 바뀌는 셈이다.
경상북도산림환경연구원 금오로 52(배반동)
경주 남산자락에 위치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에는 향토 희귀수목과 천연기념물, 야생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도민의 휴식공간과 자연학습의 명소가 되고 있다.
경애왕릉 배동 산 73-1
경주교동 최씨고택 교동 69
경주 교동법주 http://www.kyodongbeobju.com/
기능보유자 배영신은 최국선의 8대손과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법주를 빚어왔다. 3백여 년 동안 제조기법이 철저히 맏며느리에게만 전수되는 집안 내력대로, 장남 최경(崔梗)과 맏며느리 서정애(徐貞愛)가 각각 보유자 후보와 이수자로서 제조기법을 전수받고 있다.
법주의 주원료는 토종 찹쌀, 물, 밀로 만든 누룩인데, 물은 사계절 내내 수량과 수온이 거의 일정하고 맛 좋은 집안의 재래식 우물물을 끓여서 사용한다.
먼저 찹쌀로 죽을 쑤고 여기에 누룩을 섞어 오랫동안 발효시켜 밑술을 만든다. 이 밑술에 찹쌀 고두밥과 물을 혼합해 본술을 담근 뒤 50일 동안 독을 바꿔가며 제2차 발효과정을 거쳐 술을 담는 방법으로 100일 이상을 둔다.
청주는 재료와는 상관없이 맑게 빚은 술을 청주라 하구요~ 법주는 찹쌀로 빚은 청주로 경주법주가 대표적인 술입니다
경주 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
1942년 이 석탑을 수리하다가 제2층 옥개석에서 발견한 사리함 뚜껑 안쪽에 새겨진 조탑명문(造塔銘文)으로, 692년(효소왕 1)부터 706년(성덕왕 5)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석탑의 북쪽에 건물터로 보이는 지역이 있고, 십이지신상이 양각된 석재가 군데군데 박혀 있다. 건립 유래가 분명하여,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점에서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 구황리금제여래좌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坐像) [국보 제79호]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慶州九黃里金製如來立像) [국보 제80호]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나 두 볼에는 살이 올라 있다.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 양식이 아직 남아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옷자락을 잡고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0522_3581.html
세계 최초의 문화엑스포이기도 한 이 축제는 행사 때마다 주제를 정하여 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특색 있는 행사로 펼쳐진다. 1998년의 '새천년의 미소'는 새 밀레니엄을 맞아 갈등의 천년을 마감하고 화합의 천년을 열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2001년에는 3월 30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라는 문화테마공원을 조성하였다. 사이버영상관·동방문화관· 컴퓨터게임관· 사이버캐릭터관· 특별전시관 등으로 꾸며져 전시·영상·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였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의 사이버영상관은 651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세계최대, 한국최고의 가상현실 전용극장으로 최첨단영상기법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영상을 입체로 감상할 수 있다
동양 최대 규모로 세계 30여 개국에서 수집된 3,000여 점의 각종 화석을 전시한 세계화석박물관도 문화엑스포행사장 안에 설치돼 있다.
경주오르골 소리박물관 율동 64-4번지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양동마을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주택의 건축규모는 대략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대지 안에 사당을 모신 대종가와 파종가는 4가구이다. 이들 대규모 주택들에는 원래 한 집안에 데리고 있는 노비들의 주거처인 행랑채와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인 ‘가랍집’을 3, 4채씩 거느리고 있었다.
광복 때까지만 하여도 가랍집이 4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텃밭으로 변하였고, 이따금 잔존하는 초가는 이미 거주자가 바뀌었으므로 과거의 상대적 신분관계는 해소된 셈이다.
2010년 7월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양동마을에서 과거시험 합격자가 200여명, 대학교수가 60여명이 배출되었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다.
경주 양동 강학당[講學堂]
성주봉 언덕에 있는 양동 심수정(중요민속자료 81)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북촌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있다. 건립연대는 1870년경으로 추정되며, 후학들이 계를 모아 건축하였다고 한다. 대사간을 지낸 지족당 이연상(李淵祥)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면 건너편 향단과 그 일대가 잘 보인다. 지금 양동마을에는 이씨 문중의 서당이 두 채가 되는데, 이는 1970년 안계댐을 건설하면서 경산서당(景山書堂)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경산 서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 무첨당 이의윤(李宜潤)공을 봉향 하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 집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휴식, 책 읽기 등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입니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건물의 중심에는 무첨당, 오른쪽 벽에는 흥선대원군이 집권전에 이곳을 방문하여 썼다는 죽필인 좌해금서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좌해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것으로 보아 영남지방을 뜻하고 금서는 거문고와 책을 뜻하는데 영남의 풍류와 학문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서쪽에 별당인 무첨당은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의 호로서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1970년 12월 29일 중요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양민공 손소(孫昭)가 1454년(성종 15)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 종택.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외손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태어난 곳이다
서백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당에 있는 향나무가 눈에 띄인다. 양동의 향나무라고 되어 있는 이 나무는 1456년에 심어진 것이라고 한다
서백당에는 아이를 낳을 때 사용되는 태실이 안채 우측에 있다. 서백당은 예부터 삼현지지(三賢之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온다. 세분의 현인이 나는 땅이란 뜻이다. 실제 우재 손중돈 선생과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났으므로 두 분은 이미 태어난 셈이다. 안채 깊숙한 곳에 있는 산실에선 아직 한 분의 현인이 잉태되길 기다리고 있다.
서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의 대표라 할 수 있으며,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통감속편[通鑑續編] 1995년 3월 10일 국보 제283호로 지정되었다. 1420년(세종 2) 명나라 진경의 《통감속편》을 경자자(庚子字)로 인쇄한 책.
손소영정 보물 제1216호. 현재 전해오는 손소영정은 바로 이 적개공신상으로 믿어진다. 손소 선생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오르고 후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거쳤다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1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이 건물은 마을 전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위치와 모습뿐만 아니라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주생활의 합리화를 도모한 우수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것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준 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경주역사유적지구(한국8경)
문화재청 한국의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6.html
2000년 11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시대(57-935)의 고도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적 지구이다.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의 역사 유적지구로 나뉜다.
남산(南山)지구 첫 번째로는 신라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南山)지구이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신라왕조가 종말을 맞았던 포석정(사적 제1호)과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천룡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188호), 칠불암 마애석불 (보물 제200호),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등 37개의 불교유적이 흩어져 있다.
대릉원(大陵苑)지구 세 번째, 신라 왕과 왕비, 귀족들의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릉원(大陵苑)지구이다. 구획에 따라 노동리 고분군(사적 제38호), 노서리 고분군(사적 제39호), 황남리 고분군( 사적 제40호), 오릉(사적 제172호), 재매정(사적 제162호) 등이 있는데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금관, 천마도, 각종 토기 등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 네 번째로는 신라 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사적 제246호)와 분황사 석탑이 보존되고 있다
산성지구 마지막으로 왕경(王京)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400년 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사적 제47호)이 속해있다. 경주역사유적지구에는 총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향교 교동 17-1
1985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시대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계림 교동 1
계림황엽(鷄林黃葉) : 신라 김씨왕조의 조상이 되는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숲이 아름다운데, 가을이 아니라 여름에도 단풍이 진다고 합니다. 최치원이 이것을 보고 신라의 쇠퇴를 알았다고 한다.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보 제38호]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괘릉[掛陵] 외동읍 괘릉리 산 17
봉분과 멀리 떨어진 전방에 돌사자 2쌍과 문무인석(文武人石)이 각각 1쌍씩 배치되고, 그 좌우에 석화표(石華表)가 서 있다. 능비가 없어 누구의 능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지금의 괘릉 인근에 숭복사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성왕의 능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모습이다.
골굴사[骨窟寺] 양북면 안동리 산304-1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의 알짜배기 유물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국립경주박물관은 경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정보를 쉽고도 가치 있게 알려주는 좋은 안내자로서, 통일신라의 역사와 경주의 매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여행자들에게는 필수 방문코스라 할 수 있다. 소장유물은 7만 9천여 점이며, 1998년 현재 전시유물은 2,400여 점, 그중 국보는 13점, 보물 26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神鐘]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27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명의 주제는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다.
이 종을 '에밀레'라는 속칭으로 부르는 것은 종을 만들 때 아이를 넣었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하지요. 종이 울릴 때마다 아이가 어미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나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인데, 극히 최근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종이 가진 첫 번째 특징은 소리가 널리 퍼지게 할 수 있는 ‘맥놀이 현상’이다. 서양의 종은 귀로 듣고 한국의 종은 마음을 울린다
포뢰 용에게는 아들이 아홉있다. 이들 아들들은 제각기 사는 곳도 다르고 하는 역할도 다른데, 셋째 아들이 포뢰이다. 포뢰는 바다에 사는데, 항상 울음을 그치지 않는 울보이다. 울보 포뢰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이 바로 고래이다. 고래가 나타나면 크게 울부짖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을 치는 나무를 고래 모양으로 만들고 종 위에 고리를 용의 문양으로 만들었다. 고래가 다가오면 포뢰가 무서워 크게 울부짖듯이 부처의 자비가 세상 밖으로 크게 들리도록 말이다.
굴불사지석불상 동천동 산 4
동쪽에는 약사여래,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 남쪽에는 석가삼존불, 북쪽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지만 미륵불과 얼굴이 열 하나, 팔이 여섯 달린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불상이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는데,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을 시켜 땅을 파 보았더니 큰 돌의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짓고 이름을 ‘굴불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금관총
금장대(금장낙안)
금장낙안(金丈落雁) 금장대 부근의 물이 맑고 깊고, 경치가 수려하여 경주를 지나가는 기러기떼는 반드시 금장에 내려 쉬었다가 간다는 뜻이다.
1994년 3월 이곳 남단에 병풍처럼 놓여있는 수직의 암벽에서 사람의 얼굴과 배를 타고 다니는 모습, 동물 발자국 무늬 등이 새겨진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밝혀줄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까지 금장낙안(金丈落雁)으로 더 유명하였다
금척리고분군 건천읍 금척리 192-1
‘금척’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크고 작은 고분 30여 기 대부분이 헛 고분일 터이고, 경주 시내의 큰 고분들과 비교하여 추정한다면 이곳의 고분들은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묻힌 장소로 추정된다. 1952년 도로 공사로 파괴된 고분 2기가 발굴 조사된 적이 있는데, 무덤 내부는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기림사[祇林寺]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
보물로 대적광전(보물 833), 건칠보살좌상(보물 415), 삼신불(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은 후 6차례나 다시 지어졌다는 대적광전은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맞배지붕의 건물로 단아하고 웅장하다.
김유신장군 묘 충효동 산 7-10
김유신장군 진압로의 벚꽃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나원리 5층석탑
2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건립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한 신라석탑의 전형적 양식으로, 경주지역에서는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 다음가는 큰 석탑이라 하겠다. 우리나라 탑으로 드문 5층탑으로 이끼가 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여 나원백탑(白塔) 이라고도 불린다(화강석으로 되었지만 낮에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희게 보인다)
1996년 통일신라시대 석탑인 나원리 5층석탑(국보 제39호)을 해체 보수 공사 중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나원백탑(羅原白塔) : 나원리의 오층탑은 몇백년이 지나도 이끼가 끼지 않고 흰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신비롭다고 하지요. 삼기팔괴(三奇八怪)
나정 탑동 700-1
남산[南山] 산 속의 노천박물관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2042_3581.html
경주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巖石信仰)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의 유물·유적이 발굴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蘿井:사적 245), 신라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유적, 서쪽 기슭의 포석정지(鮑石亭址:사적 1),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랑 김유신의 효와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경주천관사지(天官寺址:사적 340)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서라벌의 남쪽에 있는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아달라왕·신덕왕·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3개의 왕릉(삼릉)부터 계곡이 시작된다. 삼릉을 거쳐 약 5분을 오르면 상선암과 금오산코스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오고 상선암 길로 오르면 목 없는 석불좌상을 제일 먼저 만난다(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석불좌상 뒤로는 마애관음보살상이 있고 붓으로 그린 듯한 마애선각육존불상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반긴다.
아득히 먼 먼 옛날 푸른 벌판이었던 쉬벌이라 불리던 경주땅에 고운 여신과 우람한 근육질의 남신이 찿아왔다. 이때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한 처녀가 두 신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저기 산같은 사람 봐라 해야 하는데 산봐라하고 고함을 지르니 비명에 놀란 두신이 발길을 옮길 수없는 산으로 변하게 되었다 여신은 남산의 서쪽의 망산이 되고 남신은 울퉁불통 억센 바위로 이루어진 남산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국보 312호) :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경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보물 201호) : 북쪽 면에는 마주 선 9층 목탑과 7층 목탑
남산 선각육존불(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지방유형문화재 21호)
동쪽 바위 면에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좌우에 보살이 두 손에 꽃을 받쳐들고, 부처님은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시는 내영아미타여래 (來迎阿彌陀如來)이다
남산 선각여래좌상[三陵溪谷 線刻如來坐像]
이 계곡 안 암벽 여기저기에 여러 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거의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불상만은 고려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어,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如來像)으로, 계곡 안 서쪽을 향한 높이 10m, 너비 10m 정도 되는 암벽에 새겨져 있다. 암벽 중앙에 자연적으로 수평 금이 갔는데, 그 금 아래쪽을 대좌로 삼아 여래좌상을 조각하였다. 몸체는 모두 선으로 그은 듯이 새기고 얼굴만 돋을새김을 한, 독특한 조각수법이다. 아마도 고려시대 작품이 아닌가 추정된다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8각의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안상을 비롯하여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 등으로 보아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광배 상단, 코,입 주위 성형수술하였다
남산 마애관음보살입상(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지방유형문화재 19호)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186호)
이 탑은 1922년에 도괴 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는데 2층 옥신 상부에 방형사리공이 있었다 한다.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 중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보물 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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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터진 바위산 중턱에서 남으로 바위절벽위를 가노라면 아래는 수백길 낭떠러지이다. 바위 낭떠러지를 돌아가면 우뚝 솟은 바위가 있다. 이 곳은 서라벌 벌판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높은 곳이다.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칠불암 마애석불, 제3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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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골은 동남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데 남산의 불교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솜씨가 뛰어난 칠불암
남산 감실부처
이 불상을 흔히 감실부처나 할매부처라고도 합니다. 감실 석조 여래좌상이란 딱딱한 이름보다는 한결 더 마음에 와 닿는 이름입니다. 할매부처라..., 얼마나 포근하고 정감있는 이름입니까?
이 바위 가운데에 높이 2.3m∙너비 3.5m의 굴을 파서 감실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석굴이라기엔 너무 작아 불감(佛龕)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 형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바위는 큰 바위 위에 부처님 머리와 같은 큰 바위가 얹허져 있어 마치 대좌불처럼 보인다. 부처님 머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부석(浮石)이라 부르는 것이다. 경주 팔괴(八怪)의 하나다
내물왕릉 교동 14
이는 무열왕릉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 별도의 호석(護石)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 위치와 일치한다. 초기의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노동리고분군 노동동 261
노동동에는 금방울이 출토된 금령총, 화려한 금동제 신발이 출토된 식리총, 그리고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가 있다. 봉황대는 높이가 빌딩 7층 높이인 23m에 둘레가 250m나 된다.
대릉원[大陵苑] 황남동 53
제 14대 유리왕 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竹葉軍)가 도우러 와서 신라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적이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새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이서국은 지금의 청도 지역으로 그 당시엔 가야의 영향권에 있던 국가였습니다.
천마총 무덤을 발굴·조사할 때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천마도(天馬圖)·유리잔 및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된 문화재의 보고이다.
신라시대의 그림은 하나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었지만,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발굴됨으로써 최초로 신라시대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발굴의 결과 능으로 추정되지만 복원하기 불가능한 11군데에는 고분 발굴지 비석만 세워 두었다.
황남대총 최대 규모의 표형(瓢形) 쌍원분으로 5세기 말경의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으로 추정된다. 남분은 왕의 묘로 먼저 만들어지고, 목관내에서는 착용하고 있던 금동관이나 장신구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경주 노동리 고분군과 노서리 고분군, 황남리 고분군, 황오리 고분군, 그리고 인왕리 고분군을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단일화하는 것을 비롯,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44건의 지정명칭을 변경 예고했다고 말했다.
동강서원[東江書院] 강동면 유금리 148-1
손중돈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손소(孫昭)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2년(성종 13) 사마시에 합격, 이후 도승지 세 번, 대사간 네 번, 경상·충청·전라·평안·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와 우참찬 등 요직을 거친 후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이씨가 옥산에 '옥산서원'을 만들면 손씨는 형산강변에 '동강서원'을 만들다
동리목월 문학관 진현동 550-1
동리목월 영상관은 영상실과 창작교실, 자료실 등으로 꾸며졌으며, 동리와 목월이 생전에 집필했던 작품,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동리전시실에서는 〈등신불〉 〈황토기〉 등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고, 목월전시실에서는 목월의 육성 시 낭송을 감상할 수 있다
명활산성[明活山城]
무열왕릉 서악동 842
신라 태종 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 626 ~ 681]
미추왕릉[味鄒王陵]
경주고분공원으로 조성(造成)한 대릉원(大陵苑)에 있다.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담장이 능 주위에 둘러져 있으며, 전면에는 삼문이 있다.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여겨진다.
성 김씨(金氏). 이름 미조(未照) ·미소(未召). 구도(仇道)의 아들, 김알지(金閼智)의 6대손.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이칠(伊柒)의 딸 박씨(朴氏), 비(妃)는 조분왕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 조분왕의 사위로 왕위에 올랐다. 267년과 283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 ·괴곡성(槐谷城)을 각각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한편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內治)에도 힘썼다.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 신라 제13대 미추왕이 비로소 신라왕 김씨(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 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미추왕릉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유례왕 14년(297) 이서고국(伊西古國) 사람이 수도인 금성을 공격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누군가 미추왕릉에 댓잎을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미추왕이 죽어서도 신라를 도와주었다하여 미추왕릉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른다고 한다.
민속공예촌 하동 201-18
반월성(半月城)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昔脫解王)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2대 남해왕(南解王 재위 4∼24)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후 5대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백률사
이에 왕이 부득이 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는데, 피 대신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천지가 침침해졌으며 땅이 진동하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감히 불교의 전파를 반대하지 못하였고,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깨닫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로 솟구쳤던 이차돈의 목이 소금강산의 중턱에 떨어졌고, 법흥왕은 이차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소금강산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처럼 백률사는 신라 불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
국내 최초의 마애석탑이 경주에서 발견됐다. 경주시는 2004년2월 16일 백률사 대웅전 앞 암벽에 드러난 부조물에서 국내 첫 마애 3층석탑을 발견했다는 동국대 박사과정생 김정화씨(46·미술사학과)의 신고를 받고 정밀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마애석불은 많았으나 마애석탑은 발견된 적이 없다. 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신라 불교조각의 전성기 때는 4~5개였으나 이후 3~4개로 줄어든 것을 감안할 때 9세기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
8세기 중엽의 이상적인 부처의 얼굴에 비해 긴장과 탄력이 줄어든 모습이다. 커다란 체구에 비해 어깨는 약간 빈약하게 처리된 느낌이지만 어깨의 굴곡은 신체에 밀착된 옷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 팔에 걸쳐 흘러내리고 있으며 앞가슴에는 치마의 매듭이 보인다. 앞면에는 U자형의 주름을 연속적인 선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금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후해지며 옷자락들도 무거워 보이는데, 이것은 불쑥 나온 아랫배와 뒤로 젖혀진 상체와 더불어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손목의 위치와 방향으로 보아 오른손은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그릇이나 구슬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릉 효현동 산 63
또한 건원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법흥왕 15년(528)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정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건립하였다.
삼국사기에 ‘애공사 북봉에 장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도 ‘능은 내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
보문관광단지 신평동 375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경주에는 특정 어느 지역에만 벚나무가 많은 것이 아니라 시내 전체가 벚꽃천지인 것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이다. 사방이 꽃 천지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이곳 보문호 주위와 불국사공원 벚꽃이 한층 기염을 토한다.
봉황대(鳳凰臺)
신라가 저절로 망하기를 기다리던 왕건은 어느 풍수가로부터 신라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풍수가는 신라의 지형은 배 모양과 같아 바람이 불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형세로, 배를 완전히 침몰시켜야 신라를 무너뜨릴 수 있다며 자신이 직접 신라에 가기를 청한다. 신라에 닿은 풍수가는 신라의 임금 앞에 나타나 신라의 지형이 봉황처럼 생겼는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 한다고 말한다. 마침 나라 형편이 기우는 것을 걱정하던 신라 임금은 그 대책을 묻고, 이에 풍수가는 서울 장안에 봉황의 알처럼 생긴 산을 만들면 봉황이 알을 두고 떠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라 임금은 그 말이 그럴 듯하여 수없이 많은 고분을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배
봉황대가 에밀레종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조선 중종 초에 그곳 비탈진 자리에 종각을 세우고 에밀레종을 매달았기 때문입니다. 남문 밖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그리고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이 종을 쳤다고 한다.
분황사 http://www.bunhwangsa.org/
신라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꽃 중의 왕’인 모란은 임금을 상징한다. 당나라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도 석 점과 모란 씨 석 되를 선물했다. 지혜로운 여왕은 그 선물들이 배필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희롱하는 것이란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림의 내용이 향기 없는 모란(여왕)엔 벌과 나비(남자)가 찾아들지 않는다는 걸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자신이 ‘향기 없는 왕’이 아니라 ‘향기 나는 왕’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보란 듯이 경주에 분황사(芬皇寺)를 세웠다. 분황사란 ‘향기 나는 왕의 절’이란 뜻이다
분황사의 분(芬)은 향기롭다는 뜻이고, 황(皇)은 황제 황 그래서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란 뜻이 됩니다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 지금도 관광객의 목을 축여주는 분황사의 우물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다. 우물의 겉모양은 팔각이고 내부는 원형이다.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하며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서 빼앗아왔다고 한다. 그 뒤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부터 천 년 전에 만들어졌던 신라시대의 우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불국사[佛國寺] http://www.bulguksa.or.kr/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26호]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27호]
불국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국보 제21호]
다듬지 않은 자연석은 실제로 돌이 많은 영축산(靈鷲山) 위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탑 주위에는 장대석으로 탑구(塔區)를 마련하고 설법할 때 불국토(佛國土)의 부처님이 와서 앉는 각기 다른 모양의 연꽃을 조각해 놓았다.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 [국보 제20호]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불국사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 [국보 제22호]
불국사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국보 제23호]
사마소[司馬所] 교동 89-1
사마소는 설립 초기에는 각 고을의 교화와 지방 행정에 기여하였으나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하여 문제가 생기자 1603년(선조 36)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폐지되었다.
삼릉 배동 73-1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1764_3581.html
상서장 인왕동 274
서악서원[西岳書院] 서악동 615
서출지[書出池] 남산동 973
21대 소지왕 때 이 못에서 나온 노인이 왕에게 편지를 바쳤는데, 겉봉에 “열어보면 두 명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명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둘이 죽는 것보다 한 명이 죽는 것이 낫다 하며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그 한 명이 왕일 수도 있다며 열어보도록 간청하기에 겉봉을 열어보니 “거문고 갑을 활로 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니, 거기에는 궁에서 분향 수도하는 중과 궁주(비빈을 이름)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되었다. 이 연못의 이름이 ‘글이 나온 연못’ 곧, ‘서출지’가 되었다고 한다.
석굴암(石窟庵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 [국보 제24호]
문화재청 한국의 세계유산 석굴암과 불국사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1.html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경덕왕 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은 실존인물이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석빙고
이 빙고는 입구가 월성 안쪽으로 나 있으며,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면 성의 경사를 따라 안이 깊어지며, 내부는 길이 12.27m, 폭 5.76m, 높이 5.21m 규모로 모두 가공된 석재로 되어 있고, 굴은 다섯 개의 아치형 기둥 사이에 장대석이 걸쳐 있다. 이 장대석을 친 위치 세 군데에 외부와 통하는 환기공이 뚫려 있다. 바닥 중앙에는 배수로가 있어 경사를 따라 성 밖으로 흘러나가게 되어있고,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초를 닦아놓았던 인물.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으로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낭산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여 그 뒤에 거기에 장사지냈다. 과연, 여왕을 장사지낸 지 10여 년 후인 문무왕 때 능 밑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서 말한바 사천왕 위가 도리천이라는 가르침을 실증한 것이 되어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고 한다.
신라 24대 임금인 진흥왕(540~576)이 죽고 진지왕(576~579)이 뒤를 이었어요.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태자인 동륜이 일찍 죽고 조카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진지왕은 즉위한 지 3년 만에 신하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뒤를 이어 동륜태자의 아들인 조카가 임금이 되었어요. 26대 진평왕(579~632)이지요.
마침 당나라에 불교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이 제안을 하나 해 왔어요. 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황룡사에 거대한 탑을 세우자는 건의였어요. 황룡사는 진흥왕 시절에 세워진 절로, 원래 진흥왕은 궁궐인 월성의 위쪽에 새 궁궐을 짓고자 했어요. 그러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황룡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자 계획을 변경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 했어요. 자장은 이 사찰에 9층 탑을 세우자고 했어요. “왕이시여! 황룡사 마당에 9층짜리 탑을 세우면, 중국과 왜를 비롯한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 모두가 감히 신라 왕이 여자라고 깔보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모두 항복해 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덕여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29대 무열왕 춘추의 아버지)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거대한 탑을 세우게 했어요. 용춘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불러와 2년 만에 높이 80미터 정도 되는 목탑을 완성했어요
신라 제29대 왕 김춘추(金春秋, 604∼661, 재위 654~661)는 제25대 진지왕의 손자이며 이찬 용춘(龍春:용수, 龍樹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제26대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곧 나중의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성덕대왕신종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마당 e뮤지암 성덕대왕신종
http://www.emuseum.go.kr/movie.do?action=view&number=185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성덕왕릉 조양동 산 8
삼국 통일 이후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 문화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이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성덕왕릉은 괘릉과 마찬가지로 봉분 주위에 둘레돌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으로 장식하였다. 둘레돌 사이에 삼각형으로 된 기둥받침돌을 놓은 것이 눈길을 끈다. 능 주위 네 모서리에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앞쪽으로 문인석과 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각각 1개의 석상만 있다. 괘릉과 더불어 통일신라 왕릉의 격식대로 갖추고 있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송대말등대
감포 송대말등대 앞 바다에는 암초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사각형 모양의 돌기둥들로 이루어진 주상절리로 이곳 사람들도 잘 모를 정도. 주상절리 위에 만든 시멘트 구조물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보관하던 곳.
숭덕전 탑동 77
숭덕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인 맞배집이다. 왼쪽에 상현재(象賢齋), 오른쪽에 동재(東齋)가 있다. 영숭문의 왼쪽에 시조왕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숭덕전 옆에는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뒤에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다.
숭신전 동천동 350-7
해마다 춘분과 추분에 이들 세 곳에서 동시에 향사가 봉행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본래 왜국 동북 1천여 리에 위치한 多婆那國(다파나국) 출신으로 그 나라 왕비가 알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어 보냈다고 한다.
처음에 金官國(금관국, 김해)에 닿았으나 아무도 거두지 않았으며, 계속 표류하던 궤는 진한의 아진포(영일)에 닿았고, 한 노파가 거두어 키웠는데 처음 궤짝이 떠올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鵲(작)자에서 조를 떼어버리고 昔(석)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어 나왔다하여 이름을 脫解(탈해)라 하였다.
숭혜전 황남동 216
처음에는 월성에 사당을 짓고 경순왕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위패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가 인조 5년(1627)에 관찰사 김시양이 동천촌에 새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정조 18년(1794)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고종 24년(1887)부터 미추왕의 위패를, 그 이듬해에는 문무왕의 위패도 모시게 되었다.
고종 때 숭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곳에는 경순왕 유허비와 석조물들도 함께 전한다.
<사진:참봉(종9품)은 한 달에 2주 동안을 숭혜전에서 숙식을 하시면서 임금님들을 받드셔야하는 일은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신라밀레니엄파크 신평동 719-70
신라라는 확실한 테마를 중심으로 운영요원들이 신라시대 의상을 입고 활동하고 최첨단 기술을 통한 초대형 야외공연, 대가들의 고증이 끝난 신라가옥 체험, 문예마을 체험 등을 통해 1200년 전 신라를 경험한다.
신라문화체험장 황남동 99
전통문화 체험 욕구가 높은 학생과 가족 관광객, 외국인 등을 위한 공간이다. 공연. 상영관. 문화 체험장, 전시장 등을 갖춘 종합 문화 체험 공간이 천마총과 첨성대 중간에 있다.
신라문화체험장에서 국악공연 및 또 가족끼리 왕과 왕비복을 입고 촬영을 한 후 추억을 액자 속에 남길 수 있다. 문화재모양을 활용한 초코릿만들기, 탁본, 금관 만들기, 클레이 와당 만들기, 한지 체험 등 경주의 특징을 아름답게 살린 체험물을 기념품으로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신라역사과학관 하동 201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숲이 어우러진 도심공원으로 숲머리길(보문단지 가는 길 우측) 입구부터 강산면옥까지 조성되어 있다. 시는 2007년까지 1차 사업으로 천군로변 구황네거리에서 숲머리마을 입구까지 4만570㎡에 왕경 숲을 만들었다. 갈참나무 등 수목 12종 4천194그루와 각종 꽃 2만3천800본, 잔디를 식재했다. 또 2008년부터는 소나무 등 16종의 수목 1만4천848그루를 심는다. 3차 사업으로 2만9천500㎡, 이후에는 5만3천여㎡에 추가로 왕경 숲을 조성. 한편 2007년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 33만㎡에도 왕경 숲이 조성됐다
신문왕릉 배반동 453-1
설총이 아첨하는 신하를 ‘화왕(모란)’, 충언하는 신하를 ‘할미꽃’에 견주어, 간신을 조심하고 충신을 가까이 두라는 내용의 〈화왕계〉를 지어 바치자, 신문왕이 충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둥근 봉분 둘레를 벽돌처럼 다듬은 돌 5단을 쌓고, 갑석을 덮은 뒤, 석축을 지탱하기 위한 삼각형의 돌 44개를 기대어 놓았다.
아트선재미술관 신평동 370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현장 프로젝트에 주력하는 아트선재센터와 현대미술 대표 소장품과 중견작가들의 회고전에 주력하는 아트선재미술관은 차별화된 미션으로 국내 미술계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아트선재미술관의 소장품은 1960년대 이후 유럽, 미국의 조각, 회화, 사진 작품들부터 1970년대 한국 모더니즘 대표작에 이르기까지 총 450 여점에 달한다. 특히 동구 유럽 미술과 생활환경 속에 들어온 장식미술 분야의 소장품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예로 꼽힌다.
안압지[雁鴨池] '내 이름은 월지궁'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임해전지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월지(月池·달못)라 칭하였으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여 기러기(雁)와 오리(鴨)가 날아다니는 한가로운 못'이라는 뜻으로 시인묵객들에 의해 '안압지'라 불렀다. 안압지는 통일신라 말기엔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한 비운의 장소이다
압지부평(鴨池浮萍) 신라의 동궁인 임해전 앞에 인공가산을 만들고 삼신산을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안압지에는 부평초(마름풀)가 많이 떠 있어서 바람이 불면 마치 푸른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듯 떠다니는 모습이 신비롭다고 합니다. 삼기팔괴(三奇八怪)
양산재 탑동 693
여근곡 건천읍 신평리
영지[影池]
불국영지(佛國影池) : 불국사 마당의 영지에 모든 것이 다 비쳐도 석가탑(무영탑)의 모습은 비치지를 않는 것이 신비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 나와있지요.
삼기팔괴(三奇八怪)
오릉 탑동 67-1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1961_3581.html
옥산서원[玉山書院]
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서원 앞의 너럭바위에는 그가 새겨놓은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가 아직도 또렷하다. 이언적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될 정도로 이름 높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이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을 기리는 서원이다.
독락당은 이언적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이곳 골짜기에서 7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가 살던 집의 사랑채가 독락당이다. ‘옥산정사’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이 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문고 가운데 많은 책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 두 곳에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에 있는 어서각(御書閣) 소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언적의 사저에 있는 독락당에 있는 소장본이다. 사림오현(士林五賢)'으로 칭송되던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홀로 즐긴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회재는 이곳에 홀로 은거하며 자연을 벗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경청재는 회재의 손자 두명이 1601년경에 세운 건물로 화의문을 작성하며 세웠다. 내용은 위 땅을 우리 집안에서 영원히 보존하고 관리하자는 것이다.총7칸의 집이다. 경청재뒤엔 가려진 안채가 있다. 경청재 옆엔 담장에 가려진 공수간이 있다. 경청재는 숨방채라고도 불리며 바깥마당에 위치해있다.
경청재는 후손둘이 화의문을 작성하며 세운 건물이다. 선생은 1538년 중종시절 청백리에 올랐다. 화의문의 내용은 이 땅을 우리가문이 영원토록 보존하고 땅문제로 다툼하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 논단할 것이라고 한다.
<사진 : 계정은 1532년에 지어졌으며 계곡의 암석위에 기둥을 세우고 쪽마루를 덧대어 계바난간을 둘렀다. 계정은 전형적인 경주지역의 정자이다. 경주지역의 정자는 대부분 축대를 쌓고 그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계정이 그 예이다>
용담정 현곡면 가정 3리 363-1
경주시는 또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으로 용담사 주변지역 정비로 탐방로 조성, 동학사상·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문화행사 개발, 동학예술제를 비롯한 문화축제 개최 및 동학연구 전국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했다.
용담정 일대는 인내천 사상으로 동학을 이끈 수운 최제우가 태어난 곳이자 인간 간 절대 평등의 가르침을 담은 '용담유사'가 저술된 곳이다.
용산서원[龍山書院] 내남면 이조리 659
1711년(숙종 37) 권대규(權大規) 등의 진정소(陳情疎)에 의해 숭렬사우라는 묘액을 내렸는데, 이때 경주의 유림들이 원호를 용산서원이라고 하였다. 묘액의 글씨는 이익(李瀷)의 형 이서가 썼다. 이후 1870년(고종 7) 금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24년에 중건, 복향되었다.
월성 나원리오층석탑(羅原里五層石塔) [국보 제39호]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청신한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이견대[利見臺] 감포읍 대본리 661
초석을 발굴하여 1979년에 다시 세웠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문무대왕릉을 그나마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견대 아래쪽에는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시를 쓴 우현 고유섭(1905~1944, 미술사학자)의 기념비가 서 있다.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 있는 부왕인 문무왕의 해중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는 곳.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재매정 교동 89-7
집 앞을 지나온 뒤 김유신은 집의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뒤, “물맛이 그대로구나”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재매정택(財買井宅: 김유신공의 조상집)은 금입택이다
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 [국보 제40호]
주상절리군
우리나라에서 주상절리가 발견된 지역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제주에 가장 많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포항 달전리 외에 한탄강과 울릉도에도 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화산 폭발 때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어 굳으면서 굳는 속도에 따라 수축되고 서로 당기는 힘이 생겨 단면의 모양이 사각 또는 오각, 육각형의 장주상(長柱狀: 긴 기둥 모양)으로 굳어진 암석을 말한다. 암석이 쪼개지는 방향에 따라 판상(板狀)절리와 주상절리로 나뉘는데 이곳의 주상절리는 누운 형태여서 '판상절리(板狀節理)'로 불리는게 맞다.
지마왕릉 배동 산30
무덤의 위치와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무덤 앞에 최근에 설치한 작은 석상이 놓여있다. 자그마하지만 보기 좋은 소나무 숲 속.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다.
천관사지[天官寺址]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1979_3581.html
신라의 화랑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과의 전설이 얽혀 있는 천관사는 김유신의 효(孝)와 충성심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유적지로서, 그 전설의 시기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에 이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과처럼 천관의 집을 찾아간 김유신은 어머니의 훈계 한 마디에 천관과 왕래를 끊었다. 그런 김유신의 결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김유신의 말은 버릇처럼 술에 취한 김유신을 천관의 집까지 태워서 갔고, 김유신은 그의 결심을 헛되게 하였다 하여 말의 목을 베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천관은 그런 유신을 사모하다 못해 목숨을 끊었고, 훗날 김유신은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천관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천마총 황남동 53
http://guide.gyeongju.go.kr/deploy/divide/08/08_02/1191903_3581.html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금관, 금모자, 새날개모양 관식, 금허리띠, 금동으로 된 신발 등이 피장자가 착용한 그대로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첨성대 [국보 제31호]
이는 1년의 날짜 수와 같다. 둥글게 쌓은 몸통은 27단이고 그 위에 쌓은 우물 정자 모양의 돌까지 합치면 28단이다. 27이라는 수는 첨성대를 건축한 선덕여왕과 관계(선덕여왕이 27대 신라왕)가 있고, 28이라는 숫자는 동양의 기본 별자리 28수 또는 불교의 28천을 상징한다.
가운데 나 있는 창문을 기준으로 위, 아래 12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하며, 첨성대 꼭대기 우물 정자 모양의 돌은 각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리킨다.
또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사라져 춘하추동을 정확히 나눌 수 있게 한다.
탈해왕릉 동천동 산 17
용성국 왕과 적녀국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졌는데, 아진포에서 한 노파가 발견하여 길렀더니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탄생 설화가 전한다.
한편 신라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7일 동안 서라벌을 관찰했다고 하는데, 반월 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그곳이 살기 좋다고 여겨 내려왔는데,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집을 차지해버렸다. 이 과정을 눈여겨본 남해왕이 지혜롭다 하여 탈해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통일전 남산동 920-1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인 듯하다. 특별히 볼 것은 없으나 삼국통일 당시의 전투장면 등이 여러 개의 액자에 그려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며, 남산 답사 도중 잠시 호국영령을 참배하고 다리쉼을 원하면 너른 잔디밭에서 쉬는 것도 좋을 듯하다.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1호
석조구조물은 전복(鮑)의 구불구불한 모양을 닮았으며, 여기에 있던 정자를 포석정이라 하였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49대 헌강왕(875~886)이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다고 하며, 55대 경애왕(924~ 927)이 이곳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다 견훤이 쳐들어와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경애왕[景哀王] 신라 제55대 왕(재위 924∼927). 아버지는 신덕왕. 경명왕의 아우. 경명왕 때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된 뒤, 신라 말 혼란기에 즉위했다. 왕건·견훤 등의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하였다.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했다.
신라의 제 56대 왕 경순왕은 마지막 조정 회의를 열어 사직을 고려에 바치겠다는 것을 결의하고 935년 정말 고려에 나라를 바쳤습니다. 이것이 992년 동안 이어진 신라의 멸망입니다.
한국광고영상박물관 뮤지엄 큐 조양동 646-1
허브랜드 양북면 장항2리 589-1
‘향’과 ‘쉼’. 그 얼마나 여유 있고 매혹적인 말인가. 장항리사지에서 감포 방향으로 내려오면, 허브 향에 매혹당할 만한 곳이 나선다. 규모는 자그마하지만 한겨울에도 봄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실내 정원과 좀 더 넓은 야외 허브 정원이 있다.
허브캐슬 외동읍 모화1리 38-4
황남대총(大塚)
조사 결과 남분(南墳)이 먼저 축조된 남자 무덤이고, 북분(北墳)이 뒤에 추가된 여자 무덤이었음이 밝혀졌다. 남분과 북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각 약 2만 4천여 점과 약 2만 6천여 점의 막대한 분량인데, 남분의 경우 비교적 마구(馬具)류가 많고 장신구류는 적었으며, 북분의 경우는 그 반대 현상을 보였다. 특히 북분의 부장품에는 금관과 금제 과대(과帶)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많은 금제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부장품 중에서 부인대(夫人帶)라는 침각명이 있는 은제(銀製) 대구(帶具)가 출토되어 여자의 무덤임을 증명하였다.
황남리 고분군
황룡사지
창건설화(創建說話)에 의하면 새로운 궁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황룡(黃龍)이 나타나므로 신궁건축의 계획을 바꾸어 황룡사를 지었다고 하는데, 황룡사가 호국 · 호법의 신인 용과 관련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솔거가 이 절의 벽에 노송을 그렸다. 명실 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이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율사가 태화지 옆을 지날 때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 또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자장은 귀국해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 만에 신라는 3국을 통일하였고 후에 수많은 현철들이 신라 삼국통일은 이 탑의 영험이라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황성공원 황성동
경주시 북쪽에 있는 공원으로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공원 안에는 공설운동장, 충혼탑, 높이 16m의 김유신장군 동상, 박목월 시비 등이 있으며, 공원 주위는 온통 숲으로 덮여 있다. 2년마다 10월 초순이면 신라문화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효소왕릉 조양동 산 8
효소왕의 본명은 김리홍(金理洪)이고 신문왕(재위 681∼692)의 아들로서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서시전과 남시전 등 시장을 열어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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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술과 떡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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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국보 제87호]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금관총과대및요패(金冠塚銙帶및腰佩) [국보 제88호]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
경주신라도자기축제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예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11회 경주 신라도자기 축제'가 28일부터 5월 8일까지 11일간 경주시 황성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경주신라문화제
신라 1000년의 문화를 되새겨 옛 조상의 참된 얼을 개발하고, 한민족만이 간직한 예술적 슬기와 민족적 용맹 정신을 일깨워 새 시대의 문화창조에 기틀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 신라문화제의 취지이다. 신라의 불교정신과 화랑 ·원화(源花) 등의 설화를 재현한다.
경주황남빵
황남빵은 대한민국 경주의 빵으로, 최영화가 개발했다. 1939년에 지금의 경주시 황남동에서 처음으로 밀가루 반죽에 팥을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황남빵이라고 부른다. 경주빵도 황남빵과 같은데, 경주빵은 최영화의 가게에 있던 장인 김춘경이 1978년에 독립하여 차린 가게의 브랜드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또 최소한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을 그 하한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770년 인쇄)보다 20년이 앞서는 셈이고, 지질(紙質)이나 인경의 형태를 보더라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조판(雕板)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직지심체요절(1377년)”는 금속활자 인쇄본 중 세계 최고이고 “다라니경”은 인간이 인쇄한 것 가운데 세계 최고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혁거세[朴赫居世]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서 말이 알려준 큰 알을 얻었는데, 깨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BC 53년 1월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C 37년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4년 73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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