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까지는 꿈이 실현되는 듯 순탄해 보였다. 시유지와 사유지를 서너 개를 잡았고
월급쟁이가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붙어서 조만간 자그만한 빌딩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흥분을 했다.
무엇보다도 배우지도 배경도 없는 무식한 싸움꾼인 서하진이 그토록 땅1평이 없어 어엿한 집 주인이 되고 또 그 집을 금융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는 임원들이나, 학계의 교수님들 같이 덕망 있고 사회의 유능한 박사님들이 집을 살 때 보다 뿌듯해 했고 부동산만큼은 좋은 물권을 먼저 잡는 자가 박사이고 선수라는 깨달음으로 희열을 느끼곤 했다. 탄탄대로를 달릴 줄만 알았던 작년 초부터 뉴스에서 이상한 기류를 접했다.
1997년 1월 23일, 재계 자산순위 14위 규모의 대기업 '한보철강'이 자금난에 부도 처리되고, 한보철강의 부도로 계열사는 물론이고 수천 개에 이르는 하청업체와 거래업체, 또 한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까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며 부도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을 선두로 굴지의 기업들이 악하고 쓰러지는 일이 일 년 내내 일어났다.
대한민국 외한위기 사태에 첫 신호탄을 한보철강이 쏘더니 3월 18일, 재계의 26위인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철강 경기가 좋았던 때는 12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17위까지 올랐던 그룹이었다.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나 되는 삼미특수강 하청업체도 연쇄 도산할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들을때까지도 설마 imf가 오리란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 imf 란 용어도 알지 못했다.
4월 21일, 자금난을 겪던 진로그룹의 부도를 막기 위해 정부는 급히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을 내린다. 하지만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이 급박하게 추진되면서 제2 금융권 등 자금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진로 문제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며 부도를 막겠다는 방안이었지만 이로 인해 다른 기업의 부도는 되려 앞 당겨지고 말았다.
이후 5월 대농그룹, 6월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줄줄이 부도 처리되며 무너졌다.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 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며 사실상 부도를 내고 말았다.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했고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 업체 또한 비상에 걸려 기아의 부도는 한국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부도 발표까지 했다가 가까스로 부도를 면했던 쌍방울 그룹이 10월 15일, 결국 자금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법원에 화의 신청을 냈고 다음 날 최종 부도처리 되었다.
쌍방울과 함께 태일정밀 그룹 또한 10월 16일 부도를 맞는다.
열흘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할 때는 조금은 안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 → A+, 단기 : A1+ → A1로 하향조정했다. 그러자 주식 값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10월 27일,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괴가 우려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했다.
10월 28일, 결국 하루 만에 종합주가지수 500선 마저 무너지며 증시 붕괴의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다.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웠으며 강경식은 정부에 외환시장개입중단 지시했지만 재판에서는 불인정되었다.
10월 30일, 환율은 1달러에 천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폭등세가 주춤해 졌고, 주가는 다시 폭락해서 외환시장과 증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져 버렸다.
10월 31일, 환율의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로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1월 1일 해태그룹이 끝내 부도처리 되었다. 당시 재계 순위 24위였던 해태그룹은 30대 그룹 가운데 5번째로 부실기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말았던 것이다.
11월 4일 재계 순위 25인 뉴코아 그룹이 화의 신청을 한 데 이어 최종 부도가 났다.
11월 7일 주가가 사상 최대 폭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다시 급등하며 조금씩 안정세를 보이던 금융 시장이 다시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11월 10일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미화 1달러에 천원을 넘어선다. 물가는 오르고, 또 외채를 갚아야 하는 기업의 부담은 그만큼 커지게 돼 가계와 기업 모두 먹구름이 끼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전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했다.
11월 17일 외국 언론은 한국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알렸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 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뻔뻔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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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정부는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며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