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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국악협회하동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추임새
삼채장단에 살아 계신 삼신
박 흥 주(굿연구소 소장)
골목 골목마다 성업중인 영업장 중에서 노래방은 분명 최근에 생겨난 업종이다. 낮에는 낮대로 밤은 밤대로 손님들의 고성방가(?)가 끊어지지 않은 곳이 노래방이라면 과장이라 할까. 일차, 이차를 순례하다 노래방을 거치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뭔가 아쉽게 된 술문화, 그런 밤문화가 정착된 지 이미 오래다. 가라오케에서 노래방으로, 다시 단란주점으로...
막걸리 한 사발, 소주 한 잔을 앞에 놓고 ‘개똥철학’을 풀어내다 술상을 악기 삼아 숟가락장단에 맞춰 목청을 울려대던 왕대포집의 정서는 버얼써 거(去)하고 마이크와 모니터화면의 노래가사 행렬, 그리고 ‘꽝꽈과’ 울려 퍼지며 노래실력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점수판의 노래방이 이미 래(來)하였도다.
음식점, 술집, 그리고 노래방. 이 세 가지가 빠져있는 동네 골목길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 세 가지 업종이 하나로 통일돼 있었던 왕대포집을 평정하고 각각으로도 충분히 장사가 되는 노래방의 출현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다. 노래방에서의 멋진 노래자랑과 높은 점수는 이제 직장생활과 사업상 무시할 수 없는 무기로 자리잡아 음치교정과 더 나은 노래실력을 위한 학원까지 출현시켰다. 이제 노래방은 도시만의 문화가 아니라 면 단위의 지방 골골마다 울려 퍼지는 이 시대의 문화이기도 하다. 그 뿐인가. 집에서 아이들과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방 기계가 넓게 보급돼 있기도 하고, 시골 마을 마을마다 마을회관에 노래방 기계가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지도 이미 오래다.
어떻게든 옆에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점수를 올려야겠다는 굳은 의지와 투지가 손에 잡은 마이크 줄을 통해 번개처럼 노래방 기계로 밀려들어가는 노래방! 잘 부르면 잘 부른 대로, 음치면 음치대로 흥을 돋우고 서로를 즐겁게 할 수 있었던 왕대포집! 기계가 요구하는 음정, 박자, 리듬을 그대로 따라 불러야 높은 점수를 받는 노래방. “음정·박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틀려도 좋아요, 생긴 대로 멋대로만 불러주세요”의 왕대포집. 노래방 기계와 나, 기계와 사람의 합창이 중심인 노래방. 독창도 가능해요, “합창도 가능해요, 중창도 가능해요, 옆 테이블과의 합창·합석도 가능해요”의 왕대포집. 아무리 발광을 하며 고성방가를 해도 경찰이 달려오지 않는 노래방. 조그만 목소리가 커져도 주인장의 제재가 들어오던 왕대포집.
어느 것이 바람직하고 좋은 문화인가는 각각의 취향과 가치 판단이 내릴 문제지만(물론 나는 왕대포집이다) 분명 왕대포집과 노래방에서 일치되는 공통점도 있다. 노래가 있다는 점이다. 노래를 무지무지 좋아한다는 점이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자기를 거침없이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왕대포집과 노래방 사이는 형제나 진배없다. 비록 시대의 변화에 따라 노래부르는 방식과 감각은 달라지고 있지만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양보가 없어 보인다.
노래를 좋아하고 기회만 있으면 불러제끼는 감각과 정서는 왕대포집에서 처음 비롯되지는 않았다. 그 이전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감각이자 문화이다.
우리 민족은 항상 노래와 함께 한 생활문화와 그 전통을 갖고 있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춤과 재담과 악기 다루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놀이가 생활 곳곳에 배어있었다. 아니 생활 자체가 놀이였고, 노는 것처럼 생활하였다. 그런 삶을 지향하였다. 일마저도 놀이였으며, 제사마저도 놀이화시켰다. 노래방과 왕대포집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면면을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고기잡이를 멀리 나가던 전래의 돚단배(그 중에서도 ‘중선배’)에는 구조상 뱃머리 부분에 ‘콧간’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 콧간에 풍물을 싣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일회적으로만 싣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배를 새로 건조할 때 풍물도 함께 마련하여 살림의 일부로 싣고 다닌 것이다. 그물이나 낚시를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풍물이 고기잡이배의 콧간에 자리잡게 되는 것은 그물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풍물도 그물처럼 고기잡이에 필요한 생산도구라는 말일까. 그렇다. 풍물도 그물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무리가 없다.
본시 ‘풍물’이란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나발, 날라리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사물놀이’에 쓰이는 ‘사물’을 먼저 생각하면 유추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풍물’과 ‘사물’은 다르다. 사물이 여러 풍물 중에서 북, 장구, 징, 꽹과리라는 네 가지만 떼어내 ‘四物(네 가지의 물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때문에 풍물에서 파생된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개념과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 다르다. 먼저 다양한 풍물(굿물)의 종류 중에서 네 가지만을 한정하였기에 그 범위에 있어 차별성이 있다. 더 근본적인 차이점은 풍물로 하는 행위와 사물이 하는 행위가 달라 그 미학에 차이가 발생된다는 점이다. 사물은 본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기개념으로 네 가지의 풍물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북, 장구, 징, 꽹과리는 악기가 돼 버리고, 이 네 가지의 악기는 음악만을 연주하지만, 풍물은 궁극적으로 놀이(굿)를 하기 위한 물건(굿물)이기 때문에 굿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풍물도 음악을 연주하지만 음악만이 풍물(굿)의 전부가 아니며 놀이(굿)를 위한 한 요소라는 차이점이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풍물에 대한 다음 이야기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그 용어를 통해 그 의미와 내용을 추론해본다면, 바람 ‘풍(風)’에 물건 ‘물(物)’을 쓰니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때의 ‘바람’이란 사람들의 마음과 몸에 신명을 불러일으키는 신바람으로 이해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마음과 몸에 바람을 설설 일으켜 신바람 나게 일하고 신바람 나게 놀면서 신바람 나게 살다보면, 한 세상 신바람 나게 잘 살다갈 수 있지 않겠는가! 모두가 신바람이 함께 난다면 우리(공동체)가 신바람이 날 것이고, 그 시대가 신바람이 날 것이니 신바람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바람(바램)’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신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 다. 풍물이 그런 방법론을 갖고 있고, 신바람 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 텐데 과연 그럴까?
풍물은 음악과 춤과 놀이를 하도록(play) 계기를 만들어 주고, 놀이판이 지속되고 증폭될 수 있도록 역할 하는 도구이다.(‘악기’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이면 풍물의 용도와 의미는 축소된다. 풍물이란 음악만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춤을 추기 위한 소품이 되기도 하고, 놀기 위한 놀이감·장난감의 기능도 함께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풍물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예술행위를 하기 위한 물건’이라는 속성도 분명 갖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어떻게 예술행위를 하는 물건(풍물)이 고기잡이를 하는 그물과 같은 성질을 갖게 된단 말인가? 예술행위와 밥(고기)을 얻기 위한 생산활동 사이에 동질성을 갖게 된다면 그 접맥지점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기잡이하는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발동기의 힘을 빌어 그물도 당기고 낚시나 통발도 끌어올리는 지금의 어선(동력선)들과는 달리 사공들의 힘만으로 노도 젓고 그물도 당겨야 하는 돛단배에서는 여러 사공들이 그물을 함께 붙잡고 동시에 그물을 당겨야만 한다. 이 경우에는 여러 사공들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하나로 결집시켜 일을 효과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숙제가 대두된다. 힘껏 그물을 당겨야 할 순간에 어떤 사공은 힘을 주지만 어떤 사공은 힘을 쓰지 않는다면 그물이 제대로 당겨오겠는가. 또 육체란 힘쓰는 데 한계가 있는 법, 장시간 억센 파도와 힘 겨루기를 해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솟아나게 할 수 있다면 그 아니 좋겠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우리 민족은 노래와 놀이를 동원하였다. 이를 위해 풍물을 울렸다.
그물 당기기의 동작과 움직임이 갖는 그만의 리듬을 추출하여 음악적으로 정리하여 장단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에 맞는 곡을 만들어 그 곡에다 고기 잡는 애환과 희망을 노랫말로 실어 부른 것이다. 그것도 작사자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과 이야기를 그대로 노랫말로 바꿔 부름으로서 ‘나(우리)의 이야기’, ‘그 순간의 진짜 이야기’를 서로 공유하도록 하였다. 즉흥 작사와 전 사공의 작사자화가 이뤄졌다고나 할까. 그렇게 되면 노래, 그물 당기기(일), 그물 당기는 그 상황(생활)이 하나가 돼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힘든 그물 당기기 동작(노동)을 바로 춤으로 바꿔버리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또한 같은 리듬의 장단을 함께 타면서 목청껏 똑 같은 노래까지 부르게 되면 여러 사공들의 동작이 달라지라고 해도 달라질 수 없다. 물론 힘을 주고 빼야될 대목을 일치시킬 수도 있다. 단순하고 지루해서도 힘든 노동에 노래와 춤이라는 예술적인 요소가 동참함으로서, 힘든 노동이 부드럽고 즐거운 춤과 놀이가 돼버린다. 그 힘든 고생이 처자식과 가족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는 신명난 노력이라는 희망과 기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제3의 작사자가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하는 ‘나’와 ‘동료’의 솔직한 심정이기에 더욱 절실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고역스런 노동의 즐거운 놀이화’다.
그물을 당길 때만 노래하고 풍물을 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노를 젓고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고 올 때도 풍물을 울리며 노래를 불렀다. 출어를 하기 위해 고사를 지내면서도 풍물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비나리(기원하는 말이나 소리)를 했다. 출항하기 전에 출어를 용왕님께 고(告)하고, 무사항해와 풍어를 배서낭님께 기원 드리기 위해 지내는 고사에서도 풍물소리와 노래소리는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뿐인가. 풍물이 사공들만의 신명이 아니라 모두의 신명이 되도록 만들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만선의 기쁨과 신명을 가족과 동네사람들에게 알릴 때의 풍물소리였다. 만선이 되어 집으로 뱃머리를 돌리게 되면 풍물을 신명나게 울려댔다. 만선에 대한 기쁨을 표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만선을 주위에 알리는 기능도 하였다.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모든 상황을 즉각 집에 알려 놔 미리 알고 기다리겠지만 그런 수단이 전무하였던 그 시절에는 그 나마 만선을 조금이라도 먼저 알려주는 수단이란 풍물소리였다. 고기를 가득 싣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가족들이 바다 저 멀리 파도를 타고 들려오는 ‘우리배’의 풍물소리를 들을 때, 그 솟아오를 기쁨과 신명은 상상이 가는 바다. 온 동네가 고기 퍼 담을 그릇을 들고 선창가로 달려가는 모습, 신명이 올라 고기를 퍼 담는 모습은 바로 흥겨운 놀이판이나 진배없다. 아니 그것이 진짜 놀이판일 것이다. 물론 만선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풍물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언제 돌아온 지도 모르게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선창에 접근했다던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예술적 감흥과 재미를 적극 활용함으로서 솔직한 감정과 심정을 최대한 끌어내어 일꾼들의 자발적인 의지와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법, 그런 계기를 만듦과 동시에 올라간 신명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계속 받쳐주고, 끌어주고, 증폭시켜주는 역할은 풍물의 몫인 셈이다. 그래서 풍물을 치고 울리는 행위, 앞소리를 끌어가는 노래부르기는 단순히 예술행위에 그치지 않고 노동이라는 성격을 갖기도 하였다. 출어에서부터 이동과 고기잡이, 그리고 귀환까지 끊임없이 울려대는 풍물소리, 그리고 그 ‘쌩음악(풍물소리)’에 맞춰 불러제끼는 노래소리들! 풍물은 그물이나 마찬가지로 생산도구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일)과 놀이와 예술을 함께 비벼서 먹어치워 버리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고기잡이에서만 풍물이 일하지는 않았다. 농사짓기에서도 노래와 풍물이 등장하였다. 우리의 농사는 벼농사가 주종이다. 벼농사는 노동집약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시기를 놓쳐서 벼를 심고 김을 매다가는 흉년 들기 십상이다. 많은 노동력을 일시에 투입하여 한정된 시기 내에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 해결방식은 역시 고기잡이와 같았다. 노래와 춤을 활용한 논일의 놀이화였고, 풍물의 동원이었다. ‘두레’라는 공동노동집단을 조직하여 동네의 일을 공동으로 처리하면서 말이다. 이 때 역시 두레를 짜고 운영하는 데 풍물패와 풍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결국 풍물과 풍물패는 두레패에 없어서는 안될 구성원이었다. 고기잡이의 중요 작업도구로서 역할하던 것처럼 풍물꾼들도 두레작업을 수행하는 일꾼이었던 것이다.
두레패의 우두머리를 좌상, 혹은 영좌라고 불렀다. 그 밑으로 일꾼들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총각대방과 풍장패(논일을 할 때의 치는 풍물을 ‘풍장’이라고 함)를 통솔하는 상쇠와 앞소리를 이끌어 가는 앞소리꾼이 보좌하게 된다. 즉, 일꾼 조직과, 풍물 조직과, 소리꾼으로 두레가 짜여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짜여진 두레패가 두레작업을 수행하였다. 가장 힘들뿐만 아니라 시간을 다퉈야 하는 모심기와 김매기(3회 맨다)를 차질없이 수행해낸 구성이자 힘이었다. 두레작업을 상세히 살펴보면 실감나리라.
일거리가 닥치면 마을 공동회의를 통해 미리 짜둔 두레가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새벽에 두레꾼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풍물(나발이나 북)을 울려 기상시키고 집합시킨다. 집합이 완료되면 일터로 향하게 된다. 이 때 풍장패가 풍물을 울려준다. 이 때 치는 풍물을 ‘질굿’이라고 한다. 길을 이동하되 피곤하지 않으면서도 흥겹게,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딱딱하지 않게 걸어가도록 하기 위한 풍물이다. 일터에 도착하면 두레기를 논두렁에 꽂아놓고 일을 시작한다. 일꾼들은 논으로 들어가고 풍장패는 논두렁에 죽 늘어선다. 앞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 풍장소리가 장단을 맞추고, 일꾼들은 뒷소리를 받으며 몸을 움직이게 된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전속 악단이 들려주는 생음악에 맞춰 일하는 셈’이다.
고기잡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전속악단과 생음악의 역할은 엎드려서 하는 힘든 일을 흥겹고도 즐거운 놀이가 되도록 만들기 이다. 가끔 장단에 맞춰 허리를 펴고 흔들어버리면(춤을 춰버리면) 허리와 근육이 풀어지게 마련이다. 노래와 풍물이 등장함으로서 힘든 일동작은 출렁거리는 율동이 되고 춤이 돼버린다. 피로가 생기자마자 풀어버릴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나아가 정신적인 충만감과 신명을 자극하여 오히려 힘이 솟도록 해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래·풍물의 효과가 미치는 영역이 단지 일꾼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벼와 잡초(피)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니 말이다. 노래소리와 풍장소리가 벼의 기(氣)를 자극하여 벼의 생기를 돋우고 병충해에게는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에 대한 연구가 과학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이완주, “green music에 의한 작물·가축 생산성 증대 및 품질향상 연구”, 잠사곤충연구소, 1996>, 풍물소리를 벼농사에 실제로 활용하는 농부<대표적인 인물로 정읍의 박문기님. 그 자세한 이야기가 “박문기, ‘숟가락’, 정신세계사, 1999”에 소개되어 있다>도 있다)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여하튼 일을 하다 새참이 나오거나 점심 때가 되면 모두 논에서 나와 음식에 대한 경배의식인 ‘밥굿’이나 ‘술굿’을 풍물로 치고 밥을 먹으며, 휴식을 취할 경우 한바탕 풍물을 울려 뻐근한 몸과 마음을 풀어버렸으며, 다시 일을 시작할 경우 풍장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러가며 일을 했다. 해가 져 일이 다 끝나면, 또 다시 ‘질굿’을 치면서 집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였다. 이렇게 하는 두렛일을 ‘두레굿’이라고 하였으며, 풍장을 치면서 김매는 일련의 과정을 ‘김매기굿’이라 했으며, 모심는 것을 ‘모심기굿’이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는 ‘굿’이라고 생각했고, ‘굿’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논에서 일을 하는 모습이 구한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에겐 무척 신기하게 보인 모양이다.
풍물(악기; 엄밀하게 말하면 ‘굿물’)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였을까? 풍물이 없어도 노래하고 춤을 췄다. ‘지게목발장단’이라는 것이 있다. 산에 나무를 하러갈 때는 대개 풍물을 갖고 가지 않았다. 항상 일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 감각이고 문화이기 때문에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오를 때, 나무를 하다 잠시 쉴 때면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이 때 장단은 지게작대기로 지게다리를 두들겨 맞췄다. 지게와 지게막대기는 훌륭한 풍물(악기)이 되었던 것이다.
풍물이 있건 없건, 일을 하면 노래를 불렀다. 일 뿐인가! 제사를 지내는 데 노래와 춤이 등장한다. 우리의 제사는 ‘굿’이다. 굿은 노래와 춤을 그 속성으로 한다. 술과 음식은 필수품이고... 경건해야 할 제사에서 술을 먹어가며, 웃고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감각이었다.(굿에 경건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엄숙할 때는 칼바람이 일 정도로 섬뜻하고 경건하다) 관속에 들어가 저 세상으로 떠나가는 상여 위에서 마저 노래(상여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노래하면서 일하고, 노래를 들으면서 저승까지 가는 감각이니 놀 때는 말할 것도 없다. 모여서 술 한잔하며 놀려고 작정을 하였다면 노래는 필수품이었다. 노래하다 흥이 오르면 춤이 나오는 것은 자동!
노래와 춤이 없는 놀이판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모여서 놀 때는 풍물을 다 갖추지 못하더라도 장구 하나는 반드시 들쳐 매야했다. 장구가 없으면 장구 대용품을 그 자리에서 찾아내야 한다. 물바가지가 됐건, 솥뚜껑이 됐건, 술상이 됐건... 그 마저도 없으면, 자신의 배나 무릎(장단)이 장구 노릇을 해야 한다. 그 전통은 대포집이나 술집의 숱가락장단으로 이어졌고, 유원지 계곡가의 소주병에 꽂은 숱가락 흔들기로 이어졌다. 플라스틱 물통이 이어받다가, 소풍이나 피서나 MT간 학생들의 통기타로 이어지면서, 관광 가는 아줌마 아저씨들 관광버스의 카세트음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흐름이 종국에는 노래방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처럼 노래를 즐기는 감각과 전통은 그 연원이 깊고, 폭넓으며, 또한 질기다.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 노래를 즐기는 민족, 노래 없이는 못 사는 민족인 연유다.
결국, 이런 문화의 생성과 전통은 술과 음식이 있고, 노래와 춤과 넋두리와 푸념과 짓거리가 있고, 일과 놀이와 제의와 싸움이 있는, 한숨과 눈물과 발광과 웃음과 해학이 있는, 그래서 왁자지껄 제 각각이다가도 한 순간에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기도 하는 굿과 굿문화의 소산이라고 나는 본다.
‘노래를 즐기는 우리의 모습’과 그 토대에 대해 장황하게 들쳐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신바람 나는 인생과 신바람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개발한 방법론이 ‘모든 생활의 놀이화’이며, 이를 ‘굿’이라는 개념과 문화로 정착시켜나갔으니, 이를 위해 노래와 춤과 놀이(연희, 장난, 덕담 등) 그리고 풍물(음악) 등 예술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그 결과 모든 생활방식과 그 현장이 신나는 놀이판으로 엮어지면서 서로 통(通)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일이 예술이고 예술이 일이며, 이를 하나로 보는 견해와 문화가 굿임도 드러났다.
이런 결론이 과연 타당할까. 쉽게 인정할 수 없는 해석이란 평가가 따를 수도 있고… 이런 의문에 대한 좀 더 그럴듯한 설명은 불가능할까? 일과 제의와 놀이와 예술을 하나로 엮어버려 서로 통하게 만들어버리는 매개 장치로서의 풍물(굿)이 도대체 어떤 내용물을 갖고 이를 실현시켜나가는 지를 말이다.
이미 짐작하였겠지만 그것은 바로 ‘장단’이다. 굿문화(굿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체계랄 수 있는 ‘장단’, 굿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단에 대한 자세한 이해는 필요하다. 장단을 통해 이를 구현해나가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에서는 음악의 4대 요소로 리듬(拍子), 가락(旋律), 화성(和聲), 음색(音色)을 든다고 한다. 위의 4가지 요소는 음악 속에서 하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임에 틀림없으나 그래도 최후까지 선택되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는 리듬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선율과 화성이 없는 리듬은 훌륭히 존재할 수 있지만 리듬이 없는 선율은 존재할 수 없다는 데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음악의 태동을 자연발생학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최초의 기원이 리듬이었다는 의미일 게다.
서양음악의 리듬에 대비되는 우리의 리듬패턴을 ‘장단’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 장단의 개념은 서양의 리듬인 ‘박자’ 개념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1894년부터 한국을 4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이라는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 한국의 음악과 자신들의 음악(서양음악)의 차이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보자.
“게다가 한국 음악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한국인들의 기질이나 소양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시간’이므로, 소리가 특이하게도 귀에 거슬리게 된다. 우리와 같은 이유로 우리가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관념이 그들에게 익숙치 않을 터이므로 한국인들도 우리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음악이 귀에 무척 거슬리고 화음이 맞지 않게 느껴지는 한 가지 원인은 한국 음계가 유럽 음악의 그것과 달라서, 화음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음이 흔들려 불협화음이 귀를 엄습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 인화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 194쪽>
비숍여사는 그 차이를 시간의 문제와 음계의 다름에서 찾고 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서양음악에서는 박자를 마디(小節)로 구분하여 음의 일정한 반복형태의 기본요소로 인식한다. 즉 음정치나 음의 시가를 하나 하나 수치적으로 분석하여 박자로 정한다. 그 수치란 시간의 길이를 수량화한 것이다.
박자의 설정 기준은 수학적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서양의 수학은 논리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논리적으로 변화하며 선율을 통해 긴장, 이완, 대조의 미학을 펼칠 때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리듬을 타고 나타나는 선율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음악적 구조를 드러내며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장단은 심령(心靈 : 희노애락과 영의 작용)에 근원을 두고 그 심령(마음)이 변화작용에 의해 저절로 밖으로 외화되어 나오는「울림」으로 본다. 그러므로 서양음악개념의 수치적 박자개념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다른 측면들이 존재하게 된다. 즉 장단은 수치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음의 시가를 물론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단은 전체 음악을 형성하는 기본요소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단 그 차체만으로도 완벽한 자기 완결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 뿐만 아니다. 심령에 기반한 인간의 다양한 희로애락 변화는 그 사람의 호흡에 바로 변화를 가져오고 그 호흡작용의 변화는 장단 속에서 다양한 가락으로 나타나 무수한 변화가락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장단의 변화(가락)만으로도 서양음악이 갖고 있는 화음을 충분히 대신하고도 남을 수 있다. 장단이 호흡작용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장단의 구조도 호흡구조와 똑 같다. 즉, 들숨(‘감고’라고 표현한다)과 날숨(‘풀고’라고 표현하다)의 구조다. 장단이 “감고(긴장) 푸는(이완)”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바로 그 사람의 호흡작용에 담긴 감정과 뜻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사람(연주자, 창자, 감상자 모두 다 포함)의 감정을 현장에서 즉각적이면서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장단은 논리성이 자리잡을 영역이 좁아지는 반면, 감성의 세계를 극대화 시키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들숨(감고)과 날숨(풀고)’으로 이루어지는 호흡의 구조가 바로 장단의 구조라는 점을 꼭 인식하고 넘어가자. 정리를 하자면 “한 호흡 동안에 나타나는 감정의 울림(꼴)이 ‘장단’이며 그 감정의 다양한 변화가 ‘가락’이다”.
이런 원리에 의해 형성된 “장단”이기에 장단은 음악적인 울타리에만 가둘 수 없는 성질을 갖게 된다. 솟아오르는 다양한 희로애락의 울림을 장단에 맞춰 목소리에 실어내면 ‘소리’이고, 몸짓으로 실어내면 ‘춤’이며, 악기에 실어내면 ‘樂’이며, 서로 어우러져 갖은 짓거리로 놀아나면 ‘놀이’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노래, 음악(기악), 춤, 놀이, 그리고 예술, 일, 제의, 싸움(전투악)마저도 하나로 통하게 만드는 접점이자 통로, 바로 그것이다.
장단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놀이와 춤으로 장단을 충분히 느끼고 비로소 장구를 만지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이라는 말을 이 대목에서 덧붙이고 싶다. 우리 연행예술행위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것이 장단이며, 이 장단을 짚어주는 장구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왕 내친 김에 좀 더 구체적으로 장단 하나 하나의 음악적인 특성과 그 쓰임새를 통해 이해를 더해보자.
세마치장단이라고 있다. 이 세마치장단과 궁합이 잘 맞는 노래가 있으니 ‘아리랑’이다. 궁합이 맞는 정도가 아니라 찰떡궁합이다. 아리랑은 H.O.T나 클론 같은 십대 대중가수에 열광하는 초등학생들마저도 모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전승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우리다운 노래라는 뜻일 게다. 해외에 나간 한국사람들이 한국의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쉽게, 가장 편하게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에서 한국사람들만의 모임이 있을 때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는 ‘아리랑’인 경우가 다반사이고... 구한말에 조선땅을 찾은 이방인들의 눈에도 아리랑은 가장 한국적인 음악으로 느껴졌다. 위에 소개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여사는 아리랑을 평하길
음식에서 밥을 빼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리랑은 한국사람들에게(어느 장소에서
든 언제나 조금씩 불린다는 점에서) 음악의 밥에 해당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 인화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살림, 1994, 197쪽>
라 하였다. 헐버트(H. B. Hulbert)라는 신부는 아리랑을 오선보로 채보하여 유럽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외국인의 눈에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밥과 같은 음악, 즉 아리랑이란 노래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한국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는 아리랑을 부를 땐 세마치장단을 두들겨 줘야만 딱 맞는다. 그래야 눈물이 찔끔거려 가면서도, 빙 둘러 어깨동무한 몸들이 흔들거리고 들썩거려지면서 흥이 나는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런 아리랑이 있는가 하면 또 이런 아리랑도 있다. 저 서편제라는 영화에서 울려 퍼지던 아리랑이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나았네 에에에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청청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진도아리랑>
또 있다. 나를 보라고 애타게 외쳐대는 밀양아리랑이다.
날좀보소오 날좀보소오 날좀보소오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 좀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낳네에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전국 방방곡곡에 아리랑은 울려 퍼졌다. 정선아리랑에 광복군아리랑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아리랑은 우리와 애환을 같이 하였다. 이 아리랑들은 속도에 차이가 날 뿐 모두 다 세마치장단에 맞는 노래들이다.(정선아리랑만 예외다) 처음에 예를 든 아리랑은 처량하게 길게 빼니 장단을 그에 맞춰 느리게 맞춰주고, 밀양아리랑은 흥겨우면서도 빠르게, 광복군아리랑은 군가처럼 씩씩하게 세마치장단을 쳐주면 된다.
도대체 아리랑은 어떤 음악적 특성을 갖기에 우리다운 정서와 감정이 표출될 수 있을까.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3박자 음악이라는 점이다. ‘세마치’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번 치는’(‘세’는 ‘셋’ 즉, ‘3’을 의미하며, ‘마치’는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망치’라는 용례처럼 ‘두들긴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장단이다. ‘하나 둘 셋’의 시가(時價)를 갖는 3박자다. 그런데 세마치장단은 하나 하나의 박자가 다시 3박자로 분해된다.(이를 서양음악용어로 ‘미분음’이라 한다) 이를 우리는 ‘쪽’이라고 표현했다. 한 박자를 다시 ‘셋 쪽’으로 나눴다는 말이다. 즉,
1 2 3
한 둘 셋 둘 둘 셋 셋 둘 셋
처럼 나뉘게 된다. 세마치장단을 좀 더 정밀하게 표현하면 ‘3박 9쪽’장단이 된다. 이를 첫 번째 아리랑의 노랫말에 실어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2 3 2 2 3 3 2 3 / 1 2 3 2 2 3 3 2 3
아 - 리 라 앙 아 - 리 라 앙
1 2 3 2 2 3 3 2 3 / 1 2 3 2 2 3 3 2 3
아 라 아 리 이 요 - 오 오 오
위에서 확인되듯이 노래의 기운이 변화되는 곳은 반드시 ‘세 번째 쪽’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아-리라앙’의 둘째박 - 세째 쪽의 ‘리’, ‘아라아리이’의 둘째 박 - 셋째 쪽의 ‘아’와 셋째 박 - 셋째 쪽의 ‘이’, ‘요-오오오’의 둘째 박 - 셋째 쪽 ‘오’에서 모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모두 세 번째 쪽이다.
3쪽은 비대칭의 구조다. 불안정 구조라는 뜻이다. 불안정 구조는 흔들거리게 된다. 중심을 두 번째 쪽에다 두든 세 번째 쪽에다 두든 흔들거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번째 쪽이냐 세 번째 쪽이냐에 따라 흔들림의 느낌은 달라진다. 세마치장단은 두 번째 쪽에서 변화를 주지 않고 세 번째 쪽에서 변화를 주고 있다. 직접 두 번째 쪽에다 변화를 주면서 아리랑을 바꿔 불러 보며 비교를 해보면 확연해질 것이다. 두 번째 쪽에서 변화를 주면 전체적인 느낌이 경박해지면서도 밋밋해진다. 세 번째 쪽이라는 여분이 남아있기 때문에 바로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쪽에서 변화를 주면 짓눌러지는 느낌의 폭이 커지며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이 생긴다. 여분이 없기 때문에 불안정감은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다음 박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음 박자의 첫째 쪽을 내 것으로 끌어와 버리니 다음 박자(세 번째 박)는 독립된 기능을 못하고 앞 박자에 복속되어 버린다. 앞 박자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아 첫째 쪽에서 안정은 잡아줬으나 그 여파로 흔들림이 있다. 그 흔들림은 기운이 빠지는 상태로 여운을 갖고 튀어 오르며 마침내 사라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전체적인 기운의 리듬감은 곡선을 그리며 마치 능수버들의 휘청거림이나 하늘로 치켜 올라가는 기와집의 처마와 같은 곡만감과 율동감을 갖게 된다. 즉 춤이 나오게 만드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쪽이 만들어 내는 결과다.
노랫말에 있어서도 그렇다. 위에 예를 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노랫말은 뒷소리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를 못가서 발병난다‘는 앞소리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낳네 에에에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에”는 뒷소리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는 앞소리다. 우리 민요의 구조는 대부분 앞소리와 뒷소리가 짝을 이루며 반복된다. 주고받음의 구조다. 구체적인 말뜻을 갖지 않고 의성어 성격을 갖는 노랫말을 계속해서 되풀이 하는 것은 누구나 다함께 부르게 하는 효과(설사 그 노래를 모르는 사람도 몇 번 되풀이되면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구조다)와 반복이 주는 최면(몰입)효과로 인한 흥겨움의 배가(倍加) 기능이다. 그 뒷소리의 끝은 반드시 비음인 ‘ㅇ’이나 ‘오’로 끝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비음의 효과는 흐름을 부드럽게 만들고 여운을 갖게 한다. 군가 풍이나 행진곡풍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형태다.
앞소리가 구체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면, 뒷소리는 아무 뜻이 없는 소리의 나열을 흥겹게 받아 주는 구조, 즉, 의미와 무의미의 결합, 의미전달을 위한 강한 발성과 무의미한 소리로의 부드러운 아우름과의 결합, 앞소리꾼 한 사람과 뒷소리꾼 전체와의 결합, 바로 음양의 구조다. 이의 반복구조가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흥겨움의 증폭이고, 신명의 발현이다. 흥겨울 수밖에 없고, 춤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으니, ‘좋다’ ‘얼씨구’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음양의 구조는 춤과 신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감정의 절정에서 ‘좋타--’, ‘얼씨구-’, ‘아하-’ 등의 감탄사를 맘껏 발산시키기 위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음양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극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가기 위한 적절한 장치가 음양구조이다. 과연 음양구조가 적절한 장치로서의 구조를 갖고 있을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세마치 장단을 구성하고 있는 기운의 흐름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의 모든 장단은 무조건 ‘합(合)’으로 시작된다. 합은 시작을 의미한다. 모든 시작은 만남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만남이 없으면 시작도 없고, 전개도 없고, 결과도 생길 수 없다.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에게 맞는 직업과 만나야 한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적합한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손을 잡게 되거나 포옹을 하게 된다.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보면 강력한 식욕을 느끼고 군침이 돈다. 그리고 입술이 저절로 만나지며 침이 ‘꼴깍’ 넘어가게 된다. 모든 현상이나 인간사는 만남이 있어야만 그 다음이 있다. 그 만남을 장단으로 표현할 때는 ‘합’이라고 하거나 악기가 사람과 만나 울려나오는 소리인 ‘덩’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첫 박자는 무조건 합이 된다.
합으로 시작된 장단은 어떤 형태로든 전개가 될 것이다. 민밋하게 진행되든,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든... 그러다 결말이 날 것이다. 좋은 결과를 얻든, 안 좋은 결과를 얻든. 우리는 좋은 결과를 염원한다. 이를 위해 땀을 흘리고 온갖 정성을 다한다.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기운을 정형화한다면 그 틀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기운이 담겨 있을 것이고, 그 틀을 익혀 내것으로 만들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기운도 내 것이 돼,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좋은 결과를 도출시키는데 큰 힘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결국 장단을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장단을 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장단은 좋은 결과를 유도해 내야하며, 좋은 결과를 얻게 만들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할 것이며,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구조를 정형화하는 일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만남이 ‘이러쿵저러쿵’ 사연을 갖고 전개되고 변화하다가 만남의 목적이 달성되면 결과를 얻게 되며, 결과는 끝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한 장단 안에는 반드시 처음과 끝이 있게 된다. 장단에서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내고 달아 맺고 푼다’고도 표현한다. ‘내고’는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만남이 전개돼 가는 것은 감정과 사연이 달궈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달아’라고 표현했으며, 마침내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을 ‘맺고’라 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았다. 결과에 대한 만족감은 결과를 얻기 위해 매진했던 기운과 정열은 해소시키지만 충만감이 온 몸과 마음에 젖어드는(음미하는) 평온 상태에 접어들게 만드는데 이를 ‘풀고’라고 했다. ‘풀고’를 마무리로 하였다.
충만감(여운)의 음미! 여운은 또한 ‘여유’와 ‘덤’을 함축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살맛’이다. 우리의 민족예술은 여운과 음미의 미학임을 알 수 있다. 가야금의 농현, 징소리의 여운, 소리의 떨목... 다 이런 미학의 결과물들이라고 나는 본다. 이를 위해 시작이 있었던 것이다. 즉, 좋은 결과를 상정하고 좋은 결과를 획득해 낼 수 있는 기운의 흐름과 이의 철저하고도 완벽한 음미와 나눔을 정형화 해보니 ‘내고 달아 맺고 푸는’ 구조가 되었다. 이 흐름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장단이다.
여하튼, 모든 일이나 현상은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의 과정에는 반드시 만남을 가져다 준 양자간의 감정 · 생각 · 의지가 최대한 발현되면서 변화무쌍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기 마련이다. 장단은 그 감정의 변화에 기준을 맞춰 짚어 가는 방법론이다. 우리의 장단은 “한 호흡 동안에 나타나는 감정의 울림(꼴)”이라고 내린 정의를 환기하고 넘어가자.
만남이란 관심과 관심이 부딪혔다고 할 수 있으며, 관심을 갖게 되면 신경이 집중되고 기운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평소에 열망하던 만남이거나 절박한 만남일 수록 그 집중도와 기운의 정도는 강렬할 것이다. 그 기운의 흐름을 잘 갈무리하면서 좋은 결과를 유도할 수 있는 구조로 가기 위해서 세마치 장단은 어떤 흐름을 갖게 됐는지 살펴보자.
위에서 예를 들었던 아리랑의 뒷소리를 다시 봐 주기 바란다. 한 장단 동안에 이뤄지는 ‘아리랑’의 구조를 살펴보면, ‘아’가 첫 박과 둘째 박의 두 쪽을 차지하고 있다. 첫째 박에서 ‘아’라는 ‘합’소리가 발동하여 첫 박과 두 박에 걸쳐 ‘아’의 기운이 흘러가되 첫 박을 지나고 둘째 박에 접어들면서 ‘아’를 한 번 더 기운을 넣어 굴러줌으로서 힘을 받아 둘째 쪽까지 이어지고 있다. 첫째 박에 모아진 기운<내고>이 둘째 박에서 한 번 더 힘을 얻어 달궈가니<달아> 둘째 박 - 셋째 쪽에서 극<맺고>을 이루게 되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기운은 굴러 떨어지다 셋째 박 - 첫째 쪽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극점에서 흘러내린 기운의 여파가 아직 남아 그 탄력으로 셋째 박의 둘째 쪽에서 튀어 오르게 되나 곧 기운의 쇠진으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풀고> 있다. 호흡의 작용에서 볼 것 같으면 둘째 박의 셋째 쪽까지가 들숨(陽)이고 셋째 박이 날숨(풀고)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그려보면,
1 2 3 2 2 3 3 2 3 / 1 2 3 2 2 3 3 2 3
아 - - 아 - 리 라 앙 아 - - 아 - 리 라 앙
둘째 박의 셋째 쪽에서 극을 이뤄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첫째 박과 둘째 박이 힘을 합했기 때문이다. 감정이 점점 고조돼 상승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마침내 두 힘(기운)이 보태져(만나) 새로운 결과(‘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첫 장단과 둘째 장단은 ‘아리랑’을 되풀이하여 힘을 모으니 세 번째 장단에서 ‘아라리요’라는 변화(새로운 창출)가 만들어졌다. 모두 둘의 만남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국면의 창조다.
만나면 그저 좋고 최대의 상승작용을 하는 만남이라면 ‘남(陽) 녀(陰)’의 만남일 것이다. 남녀가 제대로 잘 만나면 새 생명을 창조해 낸다. 그래서 ‘합’은 결국 음양의 결합을 의미하며, 또한 음양의 구조를 갖으면서도 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흥과 신명(새로운 국면으로의 창조)이 발동돼 나가는 모습임이 확인된다.
정리를 하자면 ‘우리다움’을 발현시키는 음악적 구조는 바로 3박자에 있으며, 특히 세 쪽으로의 쪼갬(미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리라. 그와 아울러 음양구조를 통해 목적하는 바를 달성해 나감도 알았다. 그 음양구조는 생명체의 호흡작용의 구조에 입각하여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는 모든 짓거리(일, 놀이, 싸움, 제사 등등)의 기본을 이뤄 다 통용되며, 사람이 아니더라도 호흡작용을 모든 생명체하고도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3박자 장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4박자 장단도 있고, 5박자 · 6박자 · 7박자 · 10박자 · 12박자 · 24박자 장단도 있다. 그러나 각 박을 쪼개가는 경우 몇 박자의 장단이든 거의 대부분 세 쪽으로 나눠간다는 사실이다.(정악의 경우는 2박 장단이 많으나 민속악의 경우는 대부분 세 쪽으로 나눈다. 정악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외부의 영향없이 대대로 이어온 감각은 민속악에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2쪽과 3쪽이 한 장단 안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혼합박자도 존재한다) 또한 세 쪽으로 나눴을 때 더욱 더 우리다운 리듬감과 율동감이 나온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여타 다른 박자의 장단에서는 3쪽으로의 쪼갬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를 좀 더 살펴보자.
여러 박자의 장단 중에서 가장 종류가 많으면서도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장단이 4박자 장단이다. 그 중에서도 굿거리장단과 삼채장단을 꼽을 수 있다. 이 두 장단은 전국적인 분포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노래와 춤과 기악, 풍물굿, 무굿 등 모든 영역에서 다 쓰이는 장단이다.(‘삼채장단’은 풍물굿에 쓰이는 용어이고, 이 장단꼴이 소리반주, 춤반주, 기악음악으로 쓰일 떄는 ‘자진모리’라는 명칭으로 쓰인다. 물론 삼채장단과 자진모리장단 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굿거리장단’(‘굿을 걸판지게 친다’해서 굿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음)은 어떠할까. 능청능청거리는 것이 이 장단의 특징이다. “휘늘어 졌구나 흥 흥”하는 분위기를 연상하면 된다. 이 장단은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들썩거려지며 손이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음악적 구조는 3쪽으로의 쪼갬에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박을 3쪽으로 나눈 후에 나눈 각 쪽들을 다시 3쪽으로 나눴다는 사실이다. 즉, 한 박을 9쪽까지 쪼개서 논다는 말이다.(이 경우의 굿거리는 ‘4박 36쪽’ 장단이 된다) 한 박을 3쪽으로만 나누는 것보다 한 번 더 3쪽으로 나눠줌으로서 3쪽으로 나누는 효과를 한층 더 배가시키고 있다. 유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또한 더욱 섬세하고도 흥겨운 춤과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굿거리장단에서 박을 쪼개 나가는 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박 - 3쪽 - 9쪽으로의 변화과정이다. 이는 1 - 3 - 9 의 수리체계를 이룬다. 이는 바로 천부경의 원리와 완벽하게 부합된다. 천부경 81자는 9 x 9 = 81이며, 9는 다시 3 x 3 = 9 로 이뤄진다. 3은 1 x 3 = 3 에서 도출된다. 즉 천부경 81자는 가로 9자 세로 9자가 되는 정사각형으로 배치한다. 정사각형을 이루는 9는 그 기본이 3인데, 천부경에서는 3을 1과 3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인식한다. 천부경은 다음과 같은 첫구절로 시작되는데,
一始無始一 析三極(일시무시일석삼극)
그 뜻은 “하나가 시작되기를 무(無)에서 했고, 비롯한 하나가 셋으로 나뉘니”가 된다. 천부경에서 말하는 ‘一’은 ‘無’임을 알 수 있다. 그 무는 세 개의 극으로 나뉘는데 그 세 극은 하늘(天), 땅(地), 그리고 사람(人)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편 굿거리를 춤장단이 아니라 이동을 위한 질굿(길굿)장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한 박을 일단 3쪽으로 나눈 후에 다시 각 쪽들을 2쪽으로 나눠 사용한다. 즉, 한 박을 6쪽으로 나눈 ‘4박 24쪽 굿거리’ 장단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으로는 9쪽으로 쪼갰을 때보다 밋밋해지지만 내면적으로는 3박이 갖고 있는 흥청거림이 살아남게 된다. 자동차나 자전거로 이동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세월, 무조건 자신의 두 발로 해결해야만 하는 장시간의 걷기, 너무 흥을 내 기운을 빼버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밋밋하게 가도 쉬 피곤해지니 흥청거림을 살리면서도 적절하게 억제시킬 필요성이 대두됐겠지. 그 필요성이 만들어 낸 음악적 구조가 3쪽으로 나눴다가 다시 2쪽으로 나누기이다. 너무 절묘하고 지혜롭지 않은가!
삼채장단도 무척 흥미롭다.
삼채장단도 각 박을 반드시 3쪽으로 나눈다. 나눈 3쪽을 다시 3쪽으로 더 나누는 경우도 있고, 2쪽으로만 더 나누는 경우도 있다. 2쪽으로 더 나누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이다. 3쪽으로만 나누거나(1박 3쪽), 3쪽에 3쪽, 즉, 1박을 9쪽으로 나누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굿거리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삼채장단도 춤장단으로 쓰인다. 굿거리춤은 삼채춤(자진머리춤)에 비해 어깨춤의 성격이 강하고 삼채춤은 굿거리춤에 견주어볼 때 오금춤에 가깝다. 다리의 굴신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이다. 놀이판이 벌어졌다 하면, 시간상으로나 사용빈도수로 보나 제일 많이 치는 장단이 바로 삼채장단이다. 장단의 변형도 가장 많다. 늦은삼채, 된삼채, 중삼채, 당산삼채, 중리삼채... 삼채가 12가지나 있다고 자랑하는 마을이 있을 정도다. 굿거리장단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 노래 역시나 굿거리장단에 맞는 노래와 삼채장단에 맞는 노래가 단연 많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흥청흥청거림이 계속 이어지는 놀이판. 들썩들썩거림이 계속 이어지는 놀이판이 될 수밖에 없다.
여하튼, 굿거리장단이나 삼채장단이나 모두 4박장단이고, 박을 쪼개는 방식마저도 같다. 그런데 두 장단은 다르다. 명칭만 다른 것이 아니라 느낌과 색깔도 다르다. 그것은 속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굿거리장단은 삼채장단보다 더 느리다. 늦은삼채장단이 굿거리장단 속도와 비슷하다. 굿거리장단보다 빠른 삼채장단은 그래서 활달하고 힘차다. 삼채장단을 들으면 몸이 들썩거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높이 뛰어오르게 된다. 겅중겅중 뛰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된삼채(간장보다 밀도가 높아 ‘된’ 장인 ‘된장’, 삼채보다 기운이 더 격해지고 진해져 ‘된삼채’, 기운이 진해지고 격해지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격해지고 빨라지기 마련이다)로 넘어가면 숨이 더욱 가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달리기와도 다르다. 춤을 추면서 뛰는 상태이기에... 기운을 빼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3채장단에 맞춰 놀면 기운이 더욱 솟아오르면서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직접 경험을 해보면 증명될 일이다. 3쪽으로의 쪼갬이 만들어내는 마력이다.
결국 우리 장단은 3박자 장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쪽나눔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하나 하나의 박을 3쪽으로 나누니 3박자가 갖는 성질을 기본적으로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4박자로 되어 있는 장단에 왜 3채라는 장단이름이 붙었을까?”라는 좀 수준있는(?)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삼채장단은 분명 네 박장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채’라는 이름이 붙고 있다. ‘삼’은 ‘3’이다. 세 번 친다는 말이다. 분명 불일치다. 뭔가 아구가 안 맞는다. 그렇다면 ‘3채’라는 명칭에서의 ‘3’의 의미는 박자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 때의 ‘3’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풍물을 치는 사람들은 보통 12채를 이야기한다. 12채가 있다는 주장이다. 즉, 12가지의 채가 있다는 말이다. 그 12가지의 채를 식별하는 방식이 1채, 2채, 3채, 4채, 5채 ...... 11채, 12채로의 이름붙이기다. 이름표에 숫자를 붙여 구분하고 있다. 한 장단에 징을 한 번 치면 ‘1채’, 징을 두 번 치면 ‘2채’, 징을 12번 치면 ‘12채’라고 풍물의 원리에 자신감을 갖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주장한다. 이제 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다. 결국 장단이나 가락이라는 뜻을 갖는 ‘채’ 앞에 붙는 숫자는 징점(징을 치는 지점)을 나타내는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징을 치는 횟수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즉, ‘3채’장단이란 장단을 한 번 두둘길(이를 ‘한 장단’이라고 표현한다. 두 번은 ‘두 장단’이라 하고...) 동안 ‘징을 3회 쳐줘야 하는 장단’이라는 뜻이다. 1채장단은 징을 한 장단에 1회 치는 장단이고, 2채장단은 한 장단에 징을 2회 치는 장단이고, 7채장단은 한 장단에 징을 7회 치는 장단, 이런 식이다.
풍물굿에서는 장단을 나타낼 때 고유의 이름보다도 1채부터 12채까지의 장단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를 즐겨했다. 9채는 질굿으로 사용하고, 3채는 춤굿이나 젯굿(제사용 굿 ; 의식용 굿)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그만큼 징이 중시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징의 용도와 그 쓰임새는 풍물굿에서 무척 중요하다. 풍물굿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악, 삼현육각, 등등에서도 중요하다.
징이 중시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징이란 원박(기본형의 장단)을 정박으로만 쳐주기 때문이다. 풍물굿에 있어서 가락을 넣어 징을 치는 경우란 상상할 수가 없다. 항상 징은 원박의 첫머리(박)를 쳐줘야 한다.
풍물은 엇박으로 치거나, 치는 사람 기분대로 멋대로 변화를 시켜 치거나, 아예 안쳐버리고 춤을 쳐버리거나, 악을 쓰거나, 그 어떤 짓거리라도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단, 장단의 한배(‘한배’란 장단의 처음과 끝까지의 간격)를 지키면서라는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장단의 한배를 기준으로 넘나들면서 ‘지 멋대로’ 하면 할 수록 잘치는 것이고 잘 노는 것이다. 정해진 숫자대로 장단 수를 맞추고 가락을 통일하면 연주는 잘될 지 모르지만 거기서 멋과 맛을 찾기란 어려워진다. 이처럼 장단이라는 최소한의 틀거리만 서로 맞출 뿐, 그 한배 내에서는 ‘내 개성껏 멋대로 장단을 가지고 노는’ 시나위구조가 역시 풍물굿에서도 적용된다. 그것이 굿(풍물굿)의 미학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지 멋대’로 쳐서 안되는 풍물이 있으니 바로 징이다. 전부 다 ‘지 꼴리는(멋대로)’대로 놀아버리면 중구난방이 되 ‘서로’를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풍물굿이란 애초부터 혼자만으로는 절대 이뤄질 수 없고, 같이 치도록 만들어진 방법(굿)이다. 중구난방이 되는 상황은 절대 막아야 하니, 그 안전장치가 꼭 필요할 수밖에. 징이 바로 안전장치다. 그러니 기분 내키는 대로 칠 수 있겠는가. ‘서로’를 맞출 수 있도록 징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장단의 한배를 지켜줘야만 한다.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개인(멋대로)과 전체(서로)가 다 존중되면서도 조화를 이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가 「장단」이니 그 통로가 무너지거나 막히지 않도록 지켜야 하며, 개인과 전체가 만나는 접맥지점인 원박의 첫머리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그 지킴의 소리가 징소리인 것이다.
한편 시나위구조는 음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풍물을 울리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만을 위해서가 절대 아니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그 굿판에 모인 사람들{놀이판에서는 구경꾼이나 놀이꾼들, 일판에서는 일꾼들, 싸움판에서는 싸움꾼들, 제사 판에서는 제관들이나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 그 어떤 판(놀이판·일판·싸움판·제사판 등등)이든 구경하는 제3자들이 있게 마련, 그 제3자들까지 포함한 사람들}이 남의 눈치 안보고 자기 의지와 뜻을 발현시켜 신명을 멋대로 부릴 수 있게 만드는 데에 있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춤과 놀이, 나아가 굿판의 구조와 형성원리에서도 시나위구조는 지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기에서만 나는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3자들에게서도 터져나오는 ‘사람소리’가 중요한 것이다. 악기를 다루는 광대들의 춤과 놀음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3자들마저도 움찔움찔 몸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터져나오는 ‘그들의 춤과 짓거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광대나 쟁이들만 노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장애자, 정상인, 男女, 老少, 집주인 · 머슴, 경찰서장이나 도둑놈이나...) 모두가 한 자리에서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놀 수 있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굿판, 그런 ‘세상 만들기’가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풍물을 치며, 그런 놀이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풍물을 울리며, 그런 살림살이를 만들려고 풍물을 뚱땅거린다. 물론 이를 실현시켜나가는 방법론은 음양구조임을 말해 무엇하랴.
풍물소리는 북, 장구, 소고, 벅구 등의 가죽소리(陰聲)와 꽹과리, 징의 쇳소리(陽聲)로 대비가 된다. 그 상대적인 두 가지 성질의 소리는 굿을 통해 조화를 이뤄내게 된다. 풍물 중에서도 주로 소리를 내기 위해 쓰이는 풍물을 들라면 꽹과리, 징, 북, 장구로 압축될 것이다. 가죽소리가 둘이고 쇳소리가 둘이다. 가죽소리는 또 다시 양의 소리(북)와 음의 소리(장구)로 대비가 되며, 쇳소리 역시나 양의 소리(꽹과리)와 음의 소리(징)로 대비가 된다. 그런데 이 소리들이 전체적으로 울릴 땐 각 소리의 성질상, 꽹과리는 강한 남자의 소리(太陽聲)가 되고, 북도 남자의 소리(小陽聲)가 되며, 장구는 간드러진 여자의 성질(小陰聲)이 될 것이며, 징은 가장 강한 여자소리(太陰聲)가 되어 각각의 몫을 담당하게 된다. 풍물을 구성함에 있어 음양의 원리에 맞춰 배치를 하고, 징이 끝까지 그들의 조화가 잘 이뤄지도록 원박의 첫머리를 제대로 때려 장단을 지키는 것은 바로 판에 모인 모두(소리, 사람, 모인 목적)를 하나로 엮어 통하게 하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다.
더 나아가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산천초목, 모든 짐승들과 다른 세상에 있는 신들까지도 그 소리가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흥미가 동하겠는가, 아니면 콧방귀를 꿔버리겠는가. 우리 조상들은 그 ‘하나됨’에 강한 흥미를 느꼈으며, 그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제주도에 ‘삼승할망본풀이’라는 것이 있다. 애 낳는 신에 대한 신화(産神신화)를 담고 있는 제주도 무가다. 아직 산신(産神)이 없을 때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인간들이 이 징과 바라를 울리며 자식을 내려주도록 기원을 했는데, 그 소리가 하늘에까지 울러 퍼져 옥황상제가 그 소리를 듣고 ‘삼승할망’을 산신으로 하명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떤 민속학자는 “이 소리는 천신(天神)을 감동시키는 기능이 있는 악기라고 관념하고 있슴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기원(祈願)악기로 쓰는 것이라 하겠다”<현용준 ‘제주도 무속자료’ 신구문화사 1980> 란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기냐고 피식 웃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징소리의 파장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고 어떤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가 된 적이 없어 단정을 내릴 수 없지만 참고가 될 만한 연구결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징소리와 비슷한 성질을 갖는 한국의 범종소리에 대한 연구가 그렇다. 음향이란 100Hz미만은 땅속으로, 100-250Hz는 지상의 인간에게로, 그 이상은 하늘로 전달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에밀레종소리에는 세 가지 주파수대가 다 있다고 한다. 67Hz(땅)대와 171Hz(인간)대와 283Hz(하늘)대가 에밀레종소리에는 함께 나타나고 있다.<진용옥 경희대교수, 1996> 이 사실에 대해
하늘, 땅, 그리고 지상의 인간 등 천지인(天地人) 삼재사상(三才思想)을 음향공학적으로 실현시킨 고도의 범종기술
이란 평가들을 내린다.
그래서 징은 징을 치는 징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성질도 중요하다. 소리가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성질이 징의 특성이다. 강하고 높은 꽹과리 소리와 대비를 이룬다. 징이나 꽹과리는 모두 금속성이다. 꽹과리 소리만 오래 들으면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여 평정심을 잃게 된다. 충동적이고 전투적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치고 들을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꽹과리를 너무 오래 치면 가는 귀가 먹기도 한다. 몸을 상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 꽹과리 소리를 부드럽고 포근한 징소리가 중화를 시켜버린다. 특히 징의 긴 여운은 어떤 꽹과리소리라 하더라도 어머니의 품처럼 싸안아 버린다. 용도와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징울음 소리는 세 번 꺾이며 퍼져나가야 제대로 만들어진 징으로 여겼다. 세 번 꺾여 나가는 사이에 모든 소리는 징소리에 스며들게 마련이다. 꽹과리 소리뿐만 아니다. 북소리든, 장구소리든, 악쓰는 소리든, 싸우는 소리든 징소리는 넓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허물을 묻지 않고 품에 안아 녹여버린다. 시나위성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서 멋대로 돌아가는 소리와 짓거리들의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이들을 하나로 엮어내 버리기도 한다. 그런 힘이 징소리에는 있다. 그러면서도 웅혼하다.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징은 물론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그러나 그 쓰임새나 역할은 악기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힘든 자신의 책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모습, 그 임무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의 세계이며 절제와 엄격함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세계다. 그러면서도 어떤 소리(불협화음까지 포함)나 모습까지도 넓은 가슴으로 싸안아 서로를 인정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포용력과 친화력을 갖고 있다. 그것도 앞에서 끌어가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항상 뒤에서 받쳐주는 낮은 자리에서다. 이런 징의 덕목 때문에 일찍이 선조들은 징을 ‘풍물의 왕이다’라 했다.
삼채장단은 이처럼 중요한 징소리를 반드시 ‘세 번’ 울려야 한다. 왜 하필 3회인가? 음악적으로는 한 번을 치든, 두 번을 치든, 세 번을 치든 상관이 없다.(네번을 치면 음악이 깨진다. 4박자이기 때문에 네 번을 쳐버리면 1박자 장단이 돼버리거나 소음처럼 돼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음악 외적인 의미부여가 숨어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삼채장단의 용도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삼채장단을 춤굿이나 놀이굿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젯굿’으로도 사용한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의식을 행하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치는 굿을 젯굿이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젯굿을 들라면 ‘당산굿’을 들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밥굿’이나 ‘술굿’도 젯굿의 일종이다. 밥굿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술이든 밥이든 음식이다. 굿을 하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실려면 반드시 먼저 음식에 대한 경배의식을 행하는데 그 의식이 밥굿이다. 두레를 하다가 밥 때가 되어 밥과 술이 도착하면 남보다 많이 먹으려고 우루루 달려들어 경쟁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먼저 밥굿이나 술굿을 해야 한다. 우선 가져온 음식에서 상을 간단히 차려 영기 앞으로 간다. 그리고 영기에 술을 3잔 올리기도 하고 1잔 올리기도 한다. 영기(영기는 3신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굿물로서 굿패들이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표상이다)에게 먼저 음식을 올리기 위해서다. 상을 영기에 받치고 절을 한다. 그냥 할 수도 있고, 풍물을 울리면서 할 수도 있다. 절은 반드시 3배이며, 풍물소리는 반드시 3채장단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고사반(고사소리)을 외치게 된다. 전라도에서는 “밥먹세 밥먹세 빨리치고 밥먹세”라든지, “밥먹세 밥먹세 조밥국에 짐나간다” 혹은, “술먹세 술먹세 빨리치고 술먹세”를 외친다. 그리고 땅에 굳건히 세운 영기의 대 뿌리에다 술을 3회 뿌린다. 영기에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가져온 밥과 술을 밥 먹을 자리에 놓고 굿꾼들이 빙 둘러선다. 그리고 삼채장단을 울리고 절을 3배 한 다음에 고사반을 한다. 이것이 ‘밥굿’이며 ‘술굿’이다. 이처럼 밥굿을 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꾼들이나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반드시 기도를 한 후 십자가를 긋고 식사를 하는 기독교 식사예법이 연상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밥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을 고양시키는 영양분이다. 밥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밥은 생명 그 자체다. 술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생명활동을 촉진시키고 고양시키는 음식이다. 곡물의 정기를 뽑아논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밥에 대한 경배의식을 항상 잊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밥을 만들기 위한 일터에서, 밥을 만들기 위한 일굿에서의 밥에 대한 경배의식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뿐만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는 창조행위에 대한 경배의식이 살아 숨쉰다. 배가 고파 막 먹으려고 하는 밥, 바로 그 밥을 만들려고 애쓰다 보니 고파진 허기(虛氣)이지 않은가! 지금 막 뿌린 씨가 마침내 열매를 맺어 밥(돈)이 될 것이며, 그 열매를 따서 허기진 배를 채워 원기를 북돋을 것이다. 열매(생산물)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도 아주 풍성하게 말이다.
그 새로운 생명창조는 세 번째의 결과물이다. 3의 원리이다. 술 석잔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처음 잔은 하늘이 감응하시라는 뜻이며, 두 번째 잔은 땅이 감응하시라는 뜻이며,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교합으로 새로운 알곡을 얻어 빚은 술을 세 번째로 ‘나(사람)’가 모두 나누어 먹고 하나가 되라는 뜻이다. 절 3배의 의미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게 절을 3배하고 술을 3잔 올리는 행위의 자리에 징을 세 번 울리는 삼채굿을 치는 것이다. 첫 징소리는 하늘에 울려퍼지고, 두 번째 징소리는 땅에 스며들고, 세 번째 징소리는 나(우리)를 감싸고 돌아가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이 때 치는 삼채장단이 삼채굿이라는 젯굿이 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하나로 엮어버려 통하게 하는 징소리기에 징을 만들 때는 세상이 모두 잠들고 고요한 자시(밤 11시 - 다음날 새벽 1시까지)가 돼야 비로소 작업에 들어가며, 징을 만드는 징점(징공장)의 대문에는 소나무 가지를 셋 걸어서 징을 만들고 있음을 상기시켜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2박2박하여 좌우대칭이 맞고, 자연스런 걸음걸이와 호흡활동에 맞는 4박장단이 장단의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으나, 각 박을 3쪽으로 쪼갬으로서 흥겹고 부드러운 맛을 만들어 내며, 이는 결국 3의 원리(三神思想, 三一思想)를 구현해 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음악적 장치로서 작용한다. 4박장단에 굳이 3채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3채장단이 삼신사상을 구현해나갈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장단이기 때문이리라.
세 쪽으로의 쪼갬(미분음)이, 즉 삼채장단이 궁극적으로 이룩해내려고 하는 음악은 ‘얼씨구’ ‘좋다’는 바로 그 소리, ‘추임새’라고 하는 그 소리, 그 환희의 울림이다. 중구난방 제 멋대로인 것 같지만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뤄내는 ‘시나위소리’이다. 이는 곧 그 음악으로 이룩해 내려고 하는 살림살이 또한 신나게 추임새소리를 해가며 밥을 해결하면서, 천지인 그리고 이웃이 시나위적으로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임이 분명하다. 다 삼신사상이 추구하는 음악이고 춤이고 놀이판이자 세상살이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