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석의 조명이 꺼지고 극장 안이 어두워졌다.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자, 작은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극을 이끌 연출자가 관객 중 한 여성을 무대로 초대해 빈 의자에 앉혔다. “어떤 문제가 마음 안에 제일 걸리시나요?”라고 연출자가 묻자 그 여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와 편안해지지 않아요. 오랜만의 가족 모임에서도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기분 좋게 식사하지만 결국 어머니와 싸워요”라고 대답했다. 연출자는 주의 깊게 듣더니 “그래요? 그렇다면 어머니와 식사 자리가 어땠는지 한번 볼까요? 자, 나와주세요!”라고 했다.
무대 뒤에서 한 명의 배우가 등장했고, 연출자가 다시 말했다. “자, 이 분을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그날의 일을 한 번 재연해 볼까요?” 관객과 배우는 즉흥적으로 연기를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출자는 대화를 중단시키고 다시 지시했다. “여러분들도 보셨죠? 이번에는 반대로 해볼까요? 어머니의 입장이 되어보는 거예요.”
관객이 어머니가 되고 배우가 딸이 되어 같은 상황을 재연했다. 극 안에서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생각과 감정을 나눴던 관객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한편으로 내면에 숨어 있던 분노와 서운함, 기대감과 실망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는 무대에 올라온 관객만의 변화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 공감하며 극에 참여한 다른 관객들도 뭔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감정적 변화와 깊은 울림을 경험했다.
모레노와 사이코드라마를 하는 참가자들. <출처: PsychotherapyNet , youtube 영상>
이것은 연극의 한 장면일까? 아니다. 연극이자 치료인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한 장면이다. 학창시절 필자는 한 정신병원을 방문했다가 사이코드라마 시설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고풍스러운 병원에 소극장이 있었는데, 조명시설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정신병원에 극장이라니! 바로 그곳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이코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짜여진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훈련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연극보다 생생하고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이코드라마가 끝난 후 환자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확연한 변화는 잊기 어려운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집단치료라는 새로운 기법의 탄생
의사와 환자 간의 일방적 치료관계가 아니라 연극처럼 환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긴 정신과 의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제이콥 레비 모레노(Jacob Levy Moreno, 1889~1974)다. 1889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레노는 어릴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다. 그는 빈 의대에 진학했고, 1912년 대선배인 프로이트를 만났다. 자서전에서는 그와의 이렇게 만남을 회상했다.
“나는 프로이트의 강의를 들었다. 그가 꿈의 분석에 대한 강의를 끝내고 나서 나를 지목하며 질문했다. 나는 그에게 ‘박사님은 진료실이라는 인공적인 공간에서 환자를 만나지만, 저는 길거리나 그들의 집처럼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만날 겁니다. 박사님이 꿈을 분석한다면, 나는 그들이 다시 꿈꿀 수 있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이코드라마의 개념과 체계를 만든 제이콥 레비 모레노
의대를 졸업한 모레노는 1921년에서 1923년 사이 ‘자발성 극장(theater of spontaneity)’을 운영했다. 그는 즉흥성과 자발성, 창조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때부터 전문배우 없이 극장에 온 사람들과 함께 신문기사에 실린 사건들을 즉흥적으로 극화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개인적 문제, 대인관계, 결혼 문제 등에 대한 집단치료적 접근을 시도했다. 모레노는 이 과정에서 사이코드라마의 개념과 체계를 만들었고, 연극에 참여한 사람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심리적 정화와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시에 정착한 후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집단정신치료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1932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인관계 이론에 근거한 다양한 집단치료 방법들을 개발해서 적용했다. 1936년 뉴욕 주에 ‘비콘 모레노 연구소(Beacon Moreno Institute)’를 세워 1974년 사망할 때까지 사이코드라마와 연출자를 위한 전문교육을 지속했다.
이전까지의 심리치료는 암시를 이용한 최면술이나 카우치에 누워 자유연상을 통해 언어로 치료하는 정신분석이 주류였다. 그런데 사이코드라마는 의사와 환자가 일대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참여하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치료법과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정신의학적 접근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치료적 중재로 개인의 심리가 변할 수 있다는 가정은 프로이트의 기본 입장과 같았다. 또한 미리 준비된 내용을 다루지 않고 즉흥성과 자발성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먼저 말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인식하지 못했던 무의식이 의식으로 표출된다는 정신분석의 개념과 유사했다.
사이코드라마의 구성과 진행
사이코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느낌, 환상, 현실을 연기해보는 역할 놀이(role playing), 대인관계에서 갈등이 되는 상대의 역할을 해보는 역지사지를 통해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 바꾸기 기법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거울에 비추듯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mirroring) 기법, 미래의 상황을 현실에 재연해 보는 미래투사(future projection) 기법,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등 뒤에서 들어보는 등뒤(behind your back) 기법 등 수십 가지의 기법이 개발되어 있다. 다루는 주제가 사적인 문제인 경우에는 ‘사이코드라마’, 공적이거나 사회적 문제인 경우에는 ‘소시오드라마(sociodrama)’라고 하며 점점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사이코드라마는 역할 바꾸기, 거울 기법 등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어 왔다. <출처: Getty images>
일반적인 사이코드라마는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진행된다. 무대 위에는 주인공, 보조자, 연출자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둘러앉는다. 첫 번째 단계는 ‘워밍업(warming-up)’이다. 게임 등으로 참여자들이 긴장을 풀고 자발적으로 드라마에 빠질 수 있도록 하면서, 드라마에서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 주인공을 뽑는다.
두 번째 단계는 주인공으로 뽑힌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갈등을 행동으로 옮기는 ‘액팅 인(acting in)’으로 사이코드라마의 핵심 단계다. 이때 연출자는 ‘보조자아(auxiliary ego)’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주인공 마음 안의 두려움, 갈등, 갈망, 불안 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보조자아가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극을 풀어나갈 때 실제 주변인물이나 상상 속의 인물을 대신 보여주고 행동을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보조자아가 그 역할을 한다. 대개 사이코드라마에 능숙하고 연기 경험도 있는 사람이 보조자아를 맡는데, 주인공이 쉽게 상황에 몰입할 수 있게 지원하고 주인공 자신의 상상과 생각, 감정을 재경험하도록 행동으로 돕는다. 총 진행을 맡은 연출자는 주인공의 핵심적 문제를 간파하여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주인공이 무대 위에서 자발성과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이끈다. 지나치게 감정에 휩싸여 현실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충분히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며, 연출자의 직접적 지시나 제안이 아니라 주인공 본인이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적 역할을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마무리로 주인공과 관객, 그리고 연출자 등이 모두 그날 경험한 감정을 나누며 교감하고 공감하는 ‘셰어링(sharing)’이다. 그동안 했던 역할에서 벗어나기, 경험을 나누며 대화하기, 가져가야할 내용과 느낀 것에 대한 피드백을 주인공, 보조자아, 관객들이 나누는 것이다.
힐링과 치유를 위한 사이코드라마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정신과 전문의 김유광 원장(김유광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 국립정신병원에서 처음으로 사이코드라마를 도입했다. 1980년대에는 최헌진 원장(최헌진신경정신과의원)이 사이코드라마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확장·발전시켰고, 1990년대 이후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이 시대에도 사이코드라마는 필요할까?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이코드라마 1세대이자 지금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인 김수동 원장(용인정신과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들의 경제 수준이 높아졌다지만 상대적 박탈감도 커져 작은 스트레스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과거 세대보다 활발하고 표현력도 좋은 반면에, 예전 같은 정과 참을성이 없습니다. 이처럼 뭔가에 지치고 힘든 분들에게 사이코드라마를 권하고 싶어요. 마음의 고통을 가진 이들이 문제를 털어놓고, 해결하면서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거죠. 언제부터인가 ‘힐링’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사이코드라마야말로 힐링이란 말에 꼭 맞는 형식입니다.”
사이코드라마는 이후 집단치료 등 다양한 치료 기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출처: NIH>
사이코드라마는 일방적이던 기존의 치료자-환자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면서 정신의학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두 번째로는 치료가 꼭 일대일의 개인적 방법일 필요는 없으며 여러 사람들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치료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을 알림으로써, 이후 집단치료 기법의 발전을 가져왔다. 세 번째, 일상의 스트레스나 대인관계의 갈등과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일 경우 충분히 드라마적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미술치료, 음악치료, 영화치료와 같은 다양한 예술치료가 발전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행동으로 직접 실행해 보는 것이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는 점을 증명하여 행동치료의 시발점이 되었다.
심리치료에 대한 모레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사이코드라마는 다양한 방향으로 정신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글
- 하지현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심야 치유 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