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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춤
탱고, 女心을 차지하기 위한 몸짓… 아르헨티나 하층 이민자들이 발전시켜
'패셔니트·센슈얼·탠털라이징(passionate, sensual, tantalizing)'
이 세 단어는 탱고(Tango)라는 춤의 특성을 절묘하게 집약한다.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그리고 끝없이 ‘목마르게’ 하는 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탄탈루스(Tantalus)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물을 바로 곁에 두고도 마실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그 순간 물이 줄어들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안타까운 고통에서 파생된 단어 ‘탠털라이징’의 의미대로,
탱고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같은 커플 댄스이면서도 왈츠의 밝고 사교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는 춤, 탱고.
완벽한 합일의 기쁨은 없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춤으로 잠시 하나가 되지만, 음악은 그들이 결국 헤어져 각자의 길로 떠날 운명임을 들려 준다.
이처럼 이별이 전제된 만남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탱고에는 다른 어떤 커플 댄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비장미가 흐른다. 탱고 명곡들의 가사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잃어버린 사랑이나 이루지 못한 인생의 꿈에 대한 회한이 가득하다. 탱고라는 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탱고 음악이 남다른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애달픈 이별과 패배의 정서, 달리 말하면 가슴 속에 쌓이고 쌓인 ‘한(恨)’의 정서에 있다.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고, 원하지만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과거의 실수와 어긋남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기에 이 음악은 서양의 것이면서도 이처럼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정서를 지니게 됐을까?
탱고 음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이 춤이 아르헨티나의 항구 도시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뒷골목에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 19세기 말에 유럽이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황폐해지면서 경제가 불안해지자, 이 무렵부터 1차대전이 일어나기까지 엄청난 수의 유럽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구하러 남미로 건너왔다.
그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는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럽인이 이 도시 총 인구의 4분의 3에 달했다. 이 도시는 당시 경제적으로 번영일로에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민자들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며 좌절과 고달픔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유럽인의 남녀 비율은 50 대 1이었으니, 청년들은 몇 안 되는 처녀들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춤을 추면서 상대를 멋지게 리드하는 것.
그래서 청년들은 본국에서 추던 유럽식 사교 댄스에 나름대로 연구 개발한 다양한 스텝과 테크닉을 접목시켜 ‘유혹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탱고 역시 그처럼 냉혹한 ‘적자생존’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차츰 그 틀을 갖췄다.
'탱고'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이 흥미롭다. 첫 번째는 ‘만지다’, 두 번째는 ‘맛보다’, 세 번째는 ‘가까이 다가서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뜻.
왈츠 또는 예전의 어떤 춤보다도 몸을 밀착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 당연한데, 물론 당시의 젊은이들이 기대했던 것은 이런 ‘신체적 교류’가 처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의 교류’로 이어져 총각 신세를 면하게 되는 것이었으리라.
탱고의 본향으로 알려진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보카’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온 하층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지역. 부두 노동자와 도살업자, 매춘부들이 거칠고 고단한 일상 속의 위로로 밤마다 술집과 거리에서 어울려 추던 춤이 대체 어떻게 해서 전세계를 매료시켰을까?
2. 교황과 황제도 탱고를 막지 못했다
유럽에서 발전한 콘티넨털 탱고… 아르헨티나 해군악단이 전파
탱고에 관한 기사나 공연 광고를 보면 ‘탱고-불의 입맞춤’이라는 표현이 흔히 눈에 띈다.
이 말은 1950년대에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키스 오브 파이어 Kiss of Fire’라는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인데, 이 노래의 원곡은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의 선구자인 앙헬 비욜도(Angel Villoldo)가 1903년에 작곡한 ‘엘 초클로 El Choclo’라는 곡이다. 이 노래가 탱고의 명곡이 된 것은 ‘유럽에서 연주된 최초의 탱고곡’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1905년, 아르헨티나의 해군 훈련함이 유럽에 왔다가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 탱고 악보를 전해 주었는데, 이때 이 훈련함의 악단이 유럽인들 앞에서 연주한 첫곡이 바로 ‘엘 초클로’였던 것이다.
1912년에 ‘보통선거법’으로 참정권이 대폭 확대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자유를 만끽하게 됐고, 이와 함께 탱고 역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초기에 하층 이민자들의 춤이었던 탱고는 이때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의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탱고의 중심지는 빈민들의 생활 공간을 벗어나 나이트 클럽과 캬바레가 밀집해 있는 도심의 유흥가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원래의 어둡고 가난한 이미지를 벗고 화려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얻게 됐다.
유럽에 전해진 탱고는 파리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1912년 무렵 프랑스 신문과 잡지들은 탱고와 탱고 음악에 관한 기사로 문화면을 도배했다.
너나할 것 없이 탱고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리 사람들은 온갖 상품에 ‘탱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수·음료수·‘도빌’(도박장으로 유명한 도시)로 가는 기차·여성 란제리 등, 이름이 ‘탱고’ 아닌 것이 없었다.
파리의 살롱들을 점령한 탱고는 유럽 대륙을 매혹시킨 최초의 라틴 음악이자 라틴 댄스였다. 뉴욕과 런던 역시 탱고의 융단폭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탱고를 추고 싶어했는데, 탱고가 이처럼 열정적인 유행을 타게 된 유일한 이유가 ‘이제까지의 다른 어떤 춤보다도 몸을 밀착시키는 춤’이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드높았다.
탱고의 인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지만, 대담하고 타협을 모르는 이 춤은 권위주의적인 사회와 즉각 충돌을 일으켰다. 이즈음 파리의 대주교는 “선한 양심을 지닌 크리스천이라면 그런 일에 동참해서는 안된다”라는 선언으로 카톨릭 신자들에게 탱고를 금지했다.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파괴하는, 이처럼 음란하고 야만적인 춤이 교황청에까지 침투해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탱고를 “일반의 품위와 예의범절을 모욕하는 도발적인 춤”이라고 비난하며, 장교들에게 제복 차림으로 탱고를 추는 일을 엄금했다.
이런 권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 1차 대전이 일어나 시대가 어수선해졌음에도 탱고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구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예전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탱고는 자연스럽게 1920년대의 황금기로 접어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뒷골목에서 태어난 좌절과 ‘한’의 춤에서 프랑스 상류 사회의 사교 댄스로 변신해 가는 동안 원래의 아르헨티나 탱고는 그 모습이 상당히 달라졌다. 그래서 유럽으로 건너간 뒤의 탱고는 본고장인 아르헨티나의 탱고와 구분하기 위해 ‘콘티넨털 탱고’ 또는 ‘유러피언 탱고’라고 부른다.
1920∼30년대에는 유럽에서도 탱고음악이 많이 작곡되면서 이 콘티넨털 스타일이 확립돼 갔다. 술집이나 부둣가나 거리에서 추던 춤이 무도회용 댄스로 규격화되면서 화려하고 세련되어졌지만, 아쉽게도 콘티넨털 탱고는 아르헨티나 탱고 본연의 애조와 자유로움 그리고 낭만적이며 유혹적인 특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3. 아프리카의 리듬, 유럽의 선율, 남미의 정서
정복과 이민을 통한 세 대륙의 섞임문화…
문화는 때로 역류한다.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굳이 나눠놓는다 하더라도, 문화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정복자와 식민지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식민지가 일방적으로 정복자의 문화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대개의 경우 양쪽의 문화는 서로 흘러들며 혼합돼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데, 이때 그 새로운 문화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쪽은 오히려 정복당한 쪽의 토속적인 색채일 경우가 흔하다.
탱고 음악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탱고 속에는 다양한 민속 음악의 리듬과 선율이 녹아 있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바네라(habanera)·칸돔베(candombe)·밀롱가(milonga) 등의 세 가지 음악이다.
'아바네라'는 1825년경 쿠바의 아바나에서 태어나고 유행하게 된 가요 형식이자 커플 댄스를 위한 춤곡. 4분의 2박자 리듬이지만 붓점이 붙은 음표를 써서 박자가 일정한 길이로 떨어지지 않고 어긋나게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셋잇단 음이 자주 나오는 것도 중요한 특색. 프랑스 작곡가 비제가 오페라 ‘카르멘’에서 사용한 아바네라는 당시에 무척 인기를 끌던 아바네라 형식의 대표적인 곡을 갖다 쓴 것이다.
'칸돔베'는 아르헨티나의 춤곡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남미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자손들이 깊은 정글에서 주술적인 예식을 행하며 쓰던 음악을 토대로 한다.
아르헨티나의 아프리카 흑인들과 혼혈 흑인들은 카니발이 열릴 때 2열로 늘어서서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행진했는데, 북소리와 격렬한 리듬에 흥분해 춤을 추다가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으므로 카니발에서 칸돔베를 추는 것이 아예 금지되기도 했다. 이 칸돔베는 싱코페이션(당김음)을 가진 4분의 2박자 리듬의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이다.
'밀롱가'는 아르헨티나의 민요 형식이자 춤곡으로, 팜파(초원) 지대의 밀롱가와 도회지 밀롱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팜파 밀롱가는 ‘가우초(목동·카우보이)’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노래인 반면, 도심에서는 다양한 악기의 합주에 의한 서민적인 춤곡으로 발전했다.
탱고의 발생에 기여하고 ‘탱고의 전신’으로 일컬어진 밀롱가는 비교적 템포가 빠른 도회지 밀롱가 쪽이며, 이 음악은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860년∼70년대에 성행했다. 결국 이 세 가지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한 결과로 탱고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탱고는 폴카와 안달루시아 탱고(오늘날의 탱고와는 전혀 다른 스페인 ‘플라멩코’의 전신) 등 19세기 유럽의 다양한 춤곡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탱고에는 아프리카·남아메리카·유럽 등 세 대륙의 전통이 뒤섞여 있으며, 정복과 이민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혼합되는 과정과 함께 그 각 문화의 토속적인 개성이 담겨 있다.
탱고 음악의 발생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반도네온’이라는 독특한 악기. 이 악기는 아코디언을 변형한 것으로, 이를 고안해낸 독일인 반트(H. Band)의 이름을 따서 반도네온으로 불린다.
네모난 긴 주름상자 양 끝에 단추 형태의 건반을 갖추고 있으며, 오른손 38건, 왼손 33건으로 142음을 낸다. 또 음을 길게 끄는 ‘레가토’ 주법과 함께 아코디언으로는 불가능한 ‘스타카토(음을 톡톡 튀듯 짧게 끊는 방법)’ 연주도 가능하다.
1880년 경에 탱고 밴드에 합류한 이 악기는 뼈저린 설움과 한을 느끼게 하는 깊고 매혹적인 음색으로 탱고 음악 전체에 큰 변화를 불러왔으며, 반도네온이 피아노·바이올린 등과 함께 탱고 밴드의 주역 악기가 되면서 이른바 ‘오르케스타 티피카(전형적인 탱고 밴드 형태)’라는 새로운 개념이 정착되었다.
4.낮에는 피아노 교습, 밤에는 탱고 연주
정식 음악 교육 받은 피아니스트, 탱고 음악 발전시켜…
초기 탱고 연주자들은 주로 술집이나 노천 카페에서 손님들을 위해 연주했다. 1880년대에 최초의 탱고 음악들이 탄생할 무렵 탱고 밴드는 대개 기타·바이올린·플룻·클라리넷 등의 악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기타 대신 하프나 만돌린이 쓰이기도 했다.
스페인의 남미 정복시대부터 남미 대륙에서 꾸준히 사랑받아온 악기인 기타는 탱고 연주에서 베이스 역할을 담당했고, 플룻과 바이올린은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당시의 탱고 연주자들 대부분은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운 일이 없는 아마추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밤마다 함께 모여 새로운 멜로디를 연주했고, 그 중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있으면 완전히 외워질 때까지 그 선율을 반복해서 연주해 보곤 했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악보로 기록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무렵에 연주된 곡들이 어떤 곡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런 곡들이 악보로 정착되면서 탱고는 음악적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그러면서 탱고 밴드에서 기타가 담당하고 있던 베이스의 기능을 차츰 피아노가 차지하게 되었다.
피아노는 바이올린이나 플룻같은 현악기 또는 관악기와 비교할 때 고도로 체계화되고 관념적인 악기여서, 악보를 읽지 못하고는 배우기 어려웠다.
탱고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은 밴드 내에서 유일하게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다른 연주자들과는 달리 대개 아마추어가 아닌 직업 연주자였다. 연주만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악보로 옮겨진 첫 탱고 음악의 작곡자들은 바로 이런 피아니스트들. 이들은 낮에는 상류 가정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밤이면 춤을 출 수 있는 술집에서 탱고 연주를 했다.
‘핸슨 하우스Casa Hansen’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이런 술집은 레스토랑과 매춘업소의 혼합형태였다. 손님들은 우선 레스토랑 정원에 차려진 식탁에서 근사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디저트로 여종업원과 탱고를 추다가 기분이 고조되면 안에 있는 은밀한 방으로 사라졌다.
이런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직업적인 매춘 여성이 아니라 해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매춘에 나설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물론 가난이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해 굶주리고 좌절할 때 그들의 누나나 여동생들은 몸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많은 카페에서 날마다 연주되는 탱고 음악은 춤추러 오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탱고 음악을 듣기 위해 카페에 와서 시간을 보냈고, 주의깊게 연주를 들어주는 청중을 의식한 연주자들은 좀더 정교하고 세련된 연주를 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가장 인기를 끈 것은 1900년 이후 밴드에 도입된 반도네온이었고, 그때부터 이 악기 없이는 탱고 음악을 생각하기 어려워졌다. 반도네온이 표현하는 멜랑콜릭(?)한 정서가 이민자들의 서글픈 심경을 자극하면서, 그 강렬한 음색은 플룻을 차츰 밴드에서 밀어냈다.
이렇게 해서 1910년대에는 바이올린·피아노·반도네온이 탱고 밴드를 구성하는 주요 악기로 자리잡았고, 마지막으로 콘트라베이스가 이에 덧붙여져 오늘날 아르헨티나 탱고 밴드의 표준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 탱고 밴드들은 이때부터 차츰 파리나 런던 등의 유럽 무대로 진출해 유럽 ‘콘티넨털 탱고’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 콘티넨털 탱고의 악기 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반도네온 대신 아코디언을 쓴다는 점.
반도네온의 어둡고 무거운 음색과 달리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아코디언의 음색은 콘티넨털 탱고를 아르헨티나 탱고와 구분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5. 유성영화가 탄생시킨 꽃미남 스타가수
카를로스 가르델… 삶의 정점에서 죽음으로 신화가 된 탱고의 황제
아르헨티나의 버스나 택시 기사들은 흔히 3면으로 된 사진 액자를 수호성인 모시듯 차 안에 붙박이로 세워두거나 걸어두고 있다. 왼편에는 ‘돈 크라이 포 미, 아르헨티나’로 유명한 ‘에비타’ 에바 페론, 오른편에는 축구의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 그리고 그 가운데 걸린 사진의 주인공은 ‘탱고의 황제’라는 이름으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새겨져 있는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1887∼1935)이다.
가르델은 1887년 12월12일에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샤를 가르드였다. 가르델의 아버지에게는 이미 다른 처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르델을 낳은 어머니는 그를 혼자 힘으로 키워야 했고, 가르델이 네살일 때 그를 데리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다림질하는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가르델을 힘겹게 초등학교에 보냈다. 이른 나이부터 공장 심부름꾼·시계 제조공 보조·출판사 식자공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자라난 가르델은 극장에 취직해 막을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열렬한 오페라 팬이 됐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는 그날의 주인공 테너를 흉내내며 멋지게 오페라 아리아를 불러 동료 일꾼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자 가르델은 차츰 술집이나 카페에서 스스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갈수록 많은 청중이 그의 노래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다른 구역의 스타 싱어와 가르델의 노래 대결을 주선하기도 했다.
탱고 역사에서 초기 몇 십 년간은 춤과 기악이 발전된 시기였다.
그런데 1917년에 가르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엠파이어 극장에서 ‘슬픈 나의 밤 Mi noche triste’을 노래하면서부터 탱고의 두 번째 표현양식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건 ‘탱고 칸시온’이라고 불리는 ‘가사가 있는 노래’였다.
가르델 이전에도 탱고곡에 더러 가사가 붙여지긴 했지만, 그 깊은 서글픔과 한을 가르델 만큼 탁월하게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탱고가 노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 “그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청중에게 들려 주는 가르델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반주를 맡은 연주자들은 그의 노래를 그렇게 평했다.
타고난 아름다운 음색과 수려한 외모가 성공의 발판이 되긴 했지만 가르델은 자신의 노래와 작곡기법을 향상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수이기도 했다.
음악공부를 할 기회가 없어 악보를 읽을 줄도 몰랐지만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을 직접 작곡했다. 새 멜로디가 떠오르면 반주자에게 부탁해 악보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1928년 파리에서 데뷔한 그는 하룻밤 만에 파리 시민들의 영원한 연인이 됐고, 이후 줄곧 유럽과 아르헨티나를 왕래하며 활동했다.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그라모폰의 발명과 녹음 기술의 발전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면, 카를로스 가르델은 유성영화의 출발로 인해 세계적인 스타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가 주연으로 출연해 노래를 부른 최초의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불빛들’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파라마운트사는 행여 가르델을 빼앗길세라 서둘러 다음 영화 출연 계약들을 체결했다. 34년에 뉴욕을 출발점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가진 가르델은 이듬해에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을 촬영한 뒤 남미 순회공연을 떠났다가, 콜럼비아 공항에서 비행기 이륙 사고로 죽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결혼을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해 독신을 고수했던 가르델은 카루소와 마찬가지로 성공의 정점에서 48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무덤가에는 날마다 새 꽃다발이 놓이고 그의 동상 손가락에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팬들이 꽂아주는 새 담배가 타고 있다고 한다.
6. 재즈와 클래식 뒤섞인'탱고 누에보'
탱고를 너무나 좋아했던 비센테 피아졸라는 1921년 3월10일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극장에 가서 탱고 뮤지컬을 관람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아내의 진통이 시작됐고, 다음날 탱고의 역사를 바꾼 아르헨티나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92)가 세상에 태어났다.
아스토르가 네 살 때 그의 가족은 뉴욕으로 이주해 작은 아파트에 세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 타향살이는 냉혹하고 고단했다. 주변 환경은 온통 가난하고 우울하고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굶주림과 분노로 가득찬 거리에서 날마다 도둑질과 죽음을 목격하며, 깡패들 사이에서 싸우면서 자라났다. 엘리아 카잔, 앨 존슨, 조지 거슈윈, 길모퉁이 선술집…. 뉴욕의 이 모든 폭력과 감수성이 내 음악 속에 들어 있다. 훗날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탈리아계 이민의 자손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마피아가 경영하는 미용실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마피아는 이들 가족에게 한동안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
아코디언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여덟 살 되는 생일에 아들에게 탱고를 위한 악기 반도네온을 선물했다. 가족은 한때 아르헨티나로 귀향했다가 생활이 어려워 다시 뉴욕으로 옮겼다. 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은 아들이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스토르는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피아니스트 벨라 윌다가 바흐를 연주하는 걸 듣고 음악에 반한 아스토르는 과거에 라흐마니노프의 제자였던 그에게 클래식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수업료를 낼 돈이 없어 아스토르의 어머니는 이탈리아식 만두를 요리해 스승에게 갖다 주었다. 스승과 제자는 재즈와 요리, 우정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완벽에 도달할 때까지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연습을 계속했다.
춥고 비가 새는 방, 궁핍과 굶주림 속에서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 나는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반도네온으로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해 보았다. 날마다 나아졌다. 그러는 동안 탱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아스토르를 다시 고향의 음악인 탱고로 끌어당긴 사람은 바로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이었다. 가르델은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에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열세 살의 아스토르를 조역으로 출연시켰고, 뉴욕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 소년을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로 완전히 귀향한 뒤 피아졸라는 당대 최고의 탱고 그룹인 아니발 트로일로 밴드에서 반도네온 연주자로 일했지만, 낮에는 바르톡과 스트라빈스키 같은 현대 클래식 음악가들의 곡을 들으며 작곡을 공부하고 밤에만 탱고 연주를 했다.
작곡경연대회에서 1등을 해 장학금을 받고 파리음악원에 간 피아졸라의 인생은 새로운 스승 나디아 불랑제를 만나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레너드 번스타인을 가르쳤던 이 스승에게서 피아졸라는 자신만의 개성, 자기 민족의 토속성을 토대로 새 음악을 세우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 탱고를 작곡하고 연주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던 그가 탱고와 클래식 음악 양쪽으로 찢겼던 정체성의 분열을 극복하고 음악적으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이후 그는 8중주단 또는 5중주단 등을 결성해 새로운 탱고(탱고 누에보)를 선보였다.
재즈와 전위적인 클래식 음악이 뒤섞인 그의 탱고 작품들은 탱고계에 하나의 혁명이었다. 춤추기에 적합한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통적인 탱고 애호가들의 반발을 샀지만, 젊은 세대는 그의 음악을 열렬히 환영했다.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피아졸라를 예찬하고 그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90년대 중반부터 탱고 열풍이 새롭게 전세계를 휩쓸게 됐다.
7. 탱고에 남겨진 아르헨티나 기사도
1968년 학생운동이 주도한 사회개혁과 페미니스트들의 오랜 투쟁으로 남녀평등이 이뤄지면서 유럽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 구분이 모호해진 지 오래다.
기사도가 생겨난 곳이 바로 유럽이지만, 이제 유럽인들에게는 기사도라는 단어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되고 말았다. 여성과 남성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일을 하며, 남성에게는 여성을 보호할 의무가 없고,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유럽인들이 탱고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에 가서 유럽의 5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남녀관계와 성 역할의 패턴을 발견할 때 우선은 놀라움과 거부감을 느끼지만, 곧 이 보수적인 성 역할에 대해 공감하고 동경하기도 한다.
여성을 가장 여성답게, 남성을 가장 남성답게 느끼게 하는 춤이 바로 아르헨티나 탱고라는 것이다.
탱고 페스티벌에서 만나 자연스럽게 댄스 커플이 된 독일 그래픽 디자이너 니콜과 네덜란드 건축설계사 리카르도는 탱고를 본고장의 문화 속에서 제대로 배우려고 아르헨티나에 갔다가 유럽과는 전혀 다른 남녀관계에 여러 차례 놀라면서 문화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탱고를 추러 가서 함께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는데, 제게 춤을 청하는 모든 남자들이 제 파트너인 리카르도를 비난하는 듯한 눈길로 계속 쳐다보는 것이었어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야 애길 듣고 알았어요.
제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던 것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혼자 오는 여자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파트너의 보호를 받으며 함께 춤을 추러 오는 여성이라면 다리를 얌전하게 테이블 밑에 모으고 있어야 한다는 거였죠.
커플 댄스에서 두 사람 중 누가 리드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많은 여성들이 춤을 더 잘 추는 쪽이라고 대답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 그 대답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커플 댄스에서 리드를 하는 쪽은 언제나 남성이며, 특히 탱고에서는 남성의 리드가 절대적이다. 탱고 공연이나 영화 속의 탱고 장면을 보면 남성의 움직임에 비해 여성의 스텝이나 동작이 훨씬 복잡하고 현란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관객 대부분은 여성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탱고를 추게 되면, 남성의 리드와 도움에 의해 그 모든 어려운 동작들이 얼마나 수월해지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면 주로 남성 댄서에게 더 큰 갈채를 보낸다. 아무리 춤을 잘 추는 여성이라고 해도 결코 남성을 리드할 수 없으며, 결국 남성의 리드 능력에 의해 춤의 아름다움과 완성도가 대부분 결정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온 다른 여성 댄서는 이렇게 말한다. 탱고를 배우기 시작한 첫 시간부터 나는 내가 리드를 할 것인지 상대방이 리드를 하게 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겪었어요. 사실 이 문제는 탱고를 출 때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도 언제나 존재하죠.
자기애와 사회적 성취욕이 강한 유럽 선진국 여성들이 남성우월주의적 전통을 지닌 사회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이런 갈등은 영화'탱고 레슨'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영국의 여성 감독 샐리 포터는 탱고의 매력에 심취해 아르헨티나와 파리를 배경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극중에서 샐리 포터는 탱고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이 남성본위의 방식에 화를 내며 자신의 탱고 선생인 아르헨티나 댄서와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탱고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말한다. 탱고의 성 역할을 두고 볼 때 이 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춤의 진행 방향과 다음에 구사할 동작을 매순간 머릿속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남성 댄서는 인생에서도 자신이 언제나 전진과 후퇴의 시기와 방식을 결정해야 하는 존재임을 실감하는 것이다.
8.'여인의 향기'탱고는 사이비?
Por Una Cabeza
이 노래의 제목은 ‘머리 하나 차이로’라는 뜻이다. 미성으로 유명한 가르델이 1930년대에 부른 노래다.
가사는 경마장에서 자신이 돈을 건 말이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못해 내기 에서 돈을 잃은 사내의 독백으로 돼 있다. 돈을 따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고 싶지만 매번 행운은 그를 외면한다는 내용이다.
우아한 멜로디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사실은 운명의 장난과 삶의 좌절을 이야기하는 가장 ‘탱고다운’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탱고를 추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의외로 많다.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는 망명한 노년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탱고를 추는 그림같은 장면이 나온다.
심지어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특수공작요원으로 등장하는 ‘트루 라이즈’ 같은 액션코미디에서도 아놀드가 임무수행 중 갑작스럽게 탱고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우울한 분위기와 남미 대륙의 황량함을 배경으로 두 남자의 절절한 사랑을 그렸는데, 여기서도 탱고는 두 주인공을 하나로 묶는 공감의 끈이 된다.
1920년대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이민사와 인신매매를 배경으로 한 ‘네이키드 탱고’는 절망과 광기로 가득한 독특한 분위기의 영화다.
마돈나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을 맡아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화 ‘에비타’에도 탱고 장면들은 가끔 나오지만, 화려한 의상과 노래에 가려져 춤 자체는 그리 인상적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이처럼 많은 영화에 탱고가 등장하지만, 제대로 탱고를 출 줄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일반 극영화에 나오는 탱고 중에는 사실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흔하지 않다.
탱고와 몇 가지 라틴 댄스를 그럴듯하게 조합해 놓거나 애크로바틱한 동작을 과장한 눈요기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를 통해 탱고를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일반 영화에 나오는 탱고는 다 잊어버리고 꼭 두 편의 영화만 보면 된다.
하나는 영국 여성 감독 샐리 포터가 만든 ‘탱고 레슨’,다른 하나는 스페인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탱고’다.
실제로 탱고를 너무나 좋아하는 샐리 포터는 아르헨티나의 탱고 스타 파블로 베론과 함께 주연을 맡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의 첫 레슨 때 “나는 제대로 걷는 것조차 못하는군요”라며 스스로에게 화를 내던 샐리가 나중에는 파블로와 함께 무대에 설 정도로 실력을 기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가서 탱고를 춘다.
이 영화의 강점은 카메라가 다리에 시선을 집중해 탱고 스텝들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과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우라의 ‘탱고’는 그가 만든 플라멩코 영화 ‘카르멘’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조명기법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기본 스토리는 다분히 통속적이지만, 1920∼30년대 탱고 스타들의 기록 필름이 등장하는 등 탱고에 대한 제작진의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탱고가 겪은 시련을 안무로 표현하는 등 사우라 특유의 시대의식이 드러나 있으나, 그냥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평범한 관객들에게는 좀 지루하거나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탱고의 거장 훌리오 보카와 후안 카를로스 코페스의 춤, 그리고 환상적인 군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회없는 영화다.
최근 TV에서 방영된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의 ‘탱고, 가르델의 망명’도 탱고와 아르헨티나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멋진 작품이었다.
9. 탱고의 세계화 위해 새 장르 개발
관객이 무대 위의 탱고를 경험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댄스스포츠 대회 장면을 통해 접하는 경우다.
탱고가 어떤 춤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사람들 대부분은 팔을 옆으로 쭉 뻗고'헤드 플릭(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는 동작)'을 과장해 흉내내며"이런 춤이죠?"라고 묻는다.
이런 헤드 플릭이 바로 인터내셔널 스탠더드 탱고를 추는 댄스 대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동작으로, 도도하고 힘찬 분위기를 연출해 시선을 끈다. 춤에 쓰이는 음악도 빠르고 경쾌한 행진곡풍이다. 한 곡의 길이도 2분 10초 내외로 통일돼 있다.
이런 춤과 음악을 탱고라고 알고 있다가 아르헨티나 본고장의 탱고를 처음 접하면 관객은 몹시 당황한다.
느리고 애조를 띤 음악과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동작,'육체로 쓰는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표현되는 이 춤을 보면'탱고란 과연 어떤 춤인가?'라는 질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로큰롤이 등장하면서 차츰 잊혀졌던 탱고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중에 밀실에서 숨을 죽여야 했고, 그 사이에 유럽 특히 파리에서 새로운 형태로 꽃피어 그 열풍이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역수입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디스코텍에 가는 대신 탱고를 출 수 있는 밀롱가에 갔고, 198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엄청난 수의 댄스 쇼가 제작됐다.
그리고 유럽 대도시에 속속 생겨난 탱고 스쿨들은 아르헨티나의 댄서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그러면서 직업적인 탱고 댄서들이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장이 조성됐고, 90년대에는 베를린과 바젤이 유럽 탱고의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했다.
83 년 댄스 쇼 형식의 무대 공연'탱고 아르헨티노'가 제작되면서 탱고를 쇼 형식에 적합하게 바꾼'탱고 판타지아'라는 새 장르가 개발됐다. 탱고를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만든 셈이다.
이 쇼가 세계 각지의 순회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이와 비슷한 새로운 공연작품이 계속 제작됐다.
물론 이런 공연들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때문에 아르헨티나 탱고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이 화려하고 흥미로운 공연들 덕분에 전세계 사람들이 탱고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탱고 패션'이라는 공연으로 세계를 순회한 탱고 댄서 필라 알바레스와 클라우디오 호프만은 이 작품의 제작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인 뮤지컬이나 발레 공연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안무(코리오그래피)에 따라 움직여야겠죠.
하지만 탱고 공연은 다릅니다. 물론 군무장면에서는 안무를 따라야 하지만, 한 커플만이 무대에 등장해 춤을 출 때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춤출 것인가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지요. 그런 식으로 공연자에게 많은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에 기꺼이 공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필라는 85년 처음으로 탱고 공연을 봤을 때만 해도 고전 발레를 전공하고 있었다."무대 위의 두 탱고 댄서가 이제까지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몸의 언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느꼈어요. 발레와는 전혀 다른 언어였죠."
그래서 필라는 그때부터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탱고 메트로폴리스'라는 공연물을 제작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탱고 공연에 참여하는 댄서들 가운데는 탱고와 함께 발레와 현대무용을 모두 제대로 익힌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새로운 몸의 언어를 배우고 그것들을 조합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만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롱가를 무대 위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탱고 공연이라면, 관객은 오히려 지루해할 것이다. 그러나 현란한 의상과 조명·무대장치 등으로 문외한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무대 공연의 놀라운 효과는 의외로 컸다.
지난해 가을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알랭 드 카로가 제작한'패시네이팅 탱고'공연이 있었고, 올해 초에는 LG아트센터에서 루이스 브라보의'포에버 탱고'공연이 다시 한국 관객을 찾았다.
공연 전에 분위기 타진을 위해 두 차례 내한했던 알랭 드 카로는"탱고의 서글프고 깊이있는 곡조가 한국적 리듬과 정서에 어울린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더 많은 탱고 공연이 탱고에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 한국 관객들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10. 탱고의 가사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이 1917년에'슬픈 나의 밤(Mi noche triste)'을 노래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탱고 칸시온'은 탱고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만든 것이다.
1900 년에 태어나 탱고의 역사와 더불어 한 세기를 살아낸 엔리케 카디카모는 평생 3백곡이 넘는 탱고 칸시온의 가사를 썼다. 그중 카를로스 가르델이 음반으로 취입한 노래만 해도 스물세 곡이다.
24 년에 첫 히트곡을 기록한 카디카모는 35년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이 작곡한 탱고곡에 가사를 붙여'그리움(Nostalgias)'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카디카모가 이 곡을 유명 악보 출판 업자이자 음반 제작자인 발레리니에게 들고 갔을 때 발레리니는"곡이 너무 어려워 대중성이 없다"면서 음반 제작을 거절했다.
그래서 카디카모는 무명의 신진 제작자를 찾았고, 그와 함께 만든 이 음반은 탱고 역사상 최고의 히트를 기록해서 발레리니로 하여금 두고두고 땅을 치게 만들었다.
이 무렵의 탱고 칸시온은 대체로 주제가 비슷했는데, 그 주제는 떠나버린 사랑에 대한 회한이다.'슬픈 나의 밤'이나'그리움'이나 모두 실연당한 남자가 떠난 여자를 그리워하며 그 고통을 못이겨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탱고의 고전으로 유명한'라 쿰파르시타('가장행렬'이라는 뜻)'에 붙은 가사도 버림받은 남자의 처절한 외로움과 고통을 노래한다. 필리베르토의'길(Caminito)', 가르델의'귀향(Volver)'같은 유명한 노래들도 실연의 고통을 노래하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 노래의 주인공들은 오래 전의 사랑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며 과거의 연인과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인생은 바람결같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내가 간절하게 그대를 그리워하며 그대의 이름을 불러온 지난 20년은 세월이랄 수도 없다').
그래서'귀향'은 솔라나스의 영화'가르델의 망명'에도 인상적으로 쓰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아르헨티나인들에게는 노래 속의'연인'이'조국'또는'고향'을 뜻하는 여성명사'파트리아(patria)'와 동일시됐던 것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언제나 남자만 버림받는 것일까? 물론 그럴리는 없다. 남미 라틴족의 전통적인 남성우월주의가 버림받은 남자의 고통을'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끝없이 실연을 그려내는 이런 노래들 속의 나약한 남성상을 거부하면서, 음담패설과 도박과 칼싸움과 말타기에 능하고 확신과 자부심에 가득찬 전형적인'아르헨티나 스타일'의 마초를 내세워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탱고 가사들을 썼다.
65 년 아스토르 피아졸라가 곡을 붙인'니카노르 파레데스를 위해'는 세상을 떠난 이런 류의 실존인물 파레데스에게 헌정한 보르헤스의'탱고시'였다.
아르헨티나의 비교적 젊은 탱고 음악가들은 과거의 전통을 되살리려 하면서도 이런 남성우월주의적인 탱고의 본질을 바꾸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여성 탱고 가수 파트리시아 바로네와 탱고 작곡가 하비에르 곤살레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정치적 혹은 페미니즘적인 테마를 서슴없이 탱고 칸시온의 소재로 삼는다.
이들이 만든 노래'폼페이아, 잊지 말아요'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치하에서 체포된 수많은 임신한 여성들의 비극을 담고 있다. 잡혀가서 낳은 아기들은 즉각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어디론가 입양됐고, 그 어머니들은 가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역사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만든 노래가 예술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보다는 오늘날의 세대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노래를 만드는 게 중요하겠죠. 그래야 탱고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파트리시아와 하비에르는 힘있게 말한다. 그들은 탱고 칸시온의 미래를 쥐고 있다.
11.'딴스 홀'서 한복 입고 추던 탱고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일본 제국 판도내와 아시아 문명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함은 심히 통탄할 일로… (중략) 하루속히 서울에 딴스홀을 허락하시어, 우리가 동경 갔다가'후로리다홀'이나'일미홀'등에 가서 놀고 오는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을 60만 서울 시민들도 맛보게 하여 주소서."
이 글은 1937년에 레코드 회사 부장·기생·배우 등 신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서울의 치안담당자에게 보낸 공개 탄원서의 일부로, 당시'삼천리'지에 실렸던 이 내용을 김진송씨가 자신의 저서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에서 인용한 것.
당시 탱고를 비롯한 여러 커플댄스가 일본에서는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유교적 전통에 충실했던 조선 사회에는 상륙할 수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 해방이 되고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 군 장교들의 파티를 통해 탱고가 알려지기 시작했고, 댄스홀도 생겨났다.
"요즘 사람들이 추는 탱고를 보면, 당시에 우리가 추는 탱고는 그저 어설픈 흉내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남자들은 양복 정장이었지만 여성들은 한복 입고 탱고를 추기도 했거든요. 푸른 벨벳으로 한복을 해입고 허리끈을 동여맨 채 탱고를 추던 기억이 나는군요."20대에 장교 부인으로 그 사회에서 춤을 배웠던 박현성씨(75)의 말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세계 1차대전을 전후해 탱고의 유행이 정점에 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전쟁을 전후해 이른바'춤바람'이 사회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탱고는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가 아니었다.
본고장 탱고를 무도회장에서 추기 쉬운 형태로 바꾸어놓은 유럽식 콘티넨텔탱고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 어메리칸 탱고 동작과 스텝이 단순화되고 음악도 박자를 맞추기가 아주 쉬워 원래 아르헨티나 탱고의 깊은 맛은 찾아볼 수 없는 춤이었다.
예술적인 춤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춤을 추며, 사람들은 춤 자체의 아름다움에 빠지기보다는 단순히 몸을 맞대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커플댄스는'탈선의 온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점차 사회의 음지로 밀려나게 된다.
유럽뿐만 아니라 본고장 아르헨티나에서까지도 60∼70년대에 거의 잊혀진 듯했던 탱고가 80년대에 들어 새롭게 부활할 무렵,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갔던 공명규씨(한국 아르헨티나탱고협회 회장)는 그곳에서 탱고를 배우게 됐다.
"원래 남미에 온 유럽 이민자들의 설움과 애환을 담아냈던 이 춤과 음악이 고국을 아득히 먼 곳에 두고 떠나온 제게도 마음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남북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애절한 상황 등을 생각할 때, 아르헨티나 탱고는 비슷한 정서를 지닌 우리 민족에게도 깊은 호소력을 가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공명규씨가 정통 탱고를 한국에 알리기로 결심한 배경이다.
97 년에 귀국한 그는 탱고 공연을 기획하고 탱고 레슨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우리나라에 아르헨티나 탱고를 뿌리내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민주화와'몸의 시대'가 맞물려 가능해진 대학 내 댄스 동아리들의 출현, 인터넷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과 함께 속속 생겨난 댄스 동호회들도 아르헨티나 탱고의 보급에 발을 맞췄다.
"살사가 젊음을 대변하는 춤이라면 탱고는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춤입니다. 그래서 연령의 벽이 없다는 것이 탱고의 큰 매력이죠. 실제로 40∼50대 연령층에서도 탱고를 배우는 분이 많습니다."이런 공명규씨의 말처럼 이제 탱고는 연령과 관습의 벽을 넘어 바로 우리 곁에 와 있다.
12. 파트너에게 온 몸을 맡겨라!
직장 또는 일상의 생활을 제대로 꾸려가기도 힘드는데 취미생활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커플댄스 중 가장 어려운 춤이라고 알려져 있는 탱고보다는 살사나 스윙 등을 배우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탱고를 배우다가도'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 것 같아서'다른 춤으로 전향했다는 사람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밀롱가에서 평범한 복장으로 탱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느리고 여유있는 이 춤이 특별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무대공연용으로 안무된 탱고에는 고난도의 기교들이 등장하지만, 일반 댄스 바에서는 그런 기교를 거의 볼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어떤 춤보다 탱고가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내 댄스 동아리·인터넷 동호회·문화센터 등에서 탱고를 가르쳐온 강응구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살사 같은 라틴 댄스에서는 두 사람이 각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공간적 여유를 갖는데 비해, 탱고에서는 두 사람이 홀드해서 몸을 맞댄 채 움직이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제약하게 됩니다.
결국 나 혼자 잘해서는 의미가 없고, 파트너와의 호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죠."때문에 다른 춤보다 탱고를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남성쪽에서는 리드를 잘 하려면 음악을 잘 이해하고 박자감각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또 리드하면서 여성을 최대한 배려하고 여성의 반응을 기다려야 하죠. 여성쪽에서는 리드하는 남성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탱고 레슨을 하면서 가르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를 익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이 다음 동작으로 함께 넘어가기 위해서는, 남성이 힘의 신호를 통해 스텝의 진행방향 또는 동작의 방향을 적절한 순간에 전달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여성의 역할도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성은 그 신호를 제대로 이해하고 움직이면서도 그저 남성의 힘에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항력을 상대에게 전달해 파트너간의 텐션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춤에 비해 힘을 전달하는 방향이 다양하다는 것도 탱고에서 특별히 어려운 점이다.'탱고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영화'탱고 레슨'의 감독 샐리 포터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탱고를 배우면서 우리는 상대를 리드해야 하는 순간과 상대방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순간,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법과 잠시 멈춰 기다리는 법, 힘을 줘야 할 때와 힘을 빼야 할 때를 판단하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탱고를 배운, 필자의 지인 안겔리카는 이렇게 말한다."탱고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선생들을 진정한 탱고 교사로 인정하게 되죠.
제게 탱고를 가르친 아미라 선생님은 그저 탱고 스텝만 가르쳐 준 게 아니었어요. 아미라는 학생들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적인 특성들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었지요."
이어지는 그의 설명."자기 몸이 불편하거나 기분이 언짢은 날은 춤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럴 때면 그 책임을 항상 파트너에게 떠넘기며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 경우에 아미라는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지요."그런 이유로 유럽에서 탱고는 최근 들어'명상'또는'자아수련'의 다른 이름이 됐다.
유럽의 탱고 애호가들은 이렇게도 말한다."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추는 탱고만이 진짜 탱고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탱고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면 꼭 한 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보세요.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걸음걸이, 혹은 그저 느슨하게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자세까지도 모두 탱고 자체니까요."
저자 소개 :
1962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귄터 그라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고, 음악학도 공부했다. 귀국 후 이화여대 독문과 강사를 지냈으며 「오디오와 레코드」, 「해피데이스」에 음악 칼럼을 썼다. 오페라 에세이<사랑과 죽음의 아리아>를 출간했고, 독일 단편선<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는 것을 좋아한다>,<음악이 보인다 클래식이 들린다>,<섹스북>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마르셀 바이어의 소설<박쥐> 로 제6회 한독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 현재 번역가와 음악 칼럼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첫댓글 너무 자세한 설명이 땅고의 이해를 돕네요.
오늘부터 아트땅고에 강습 받으러 갈려고 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셔서 밀롱가에서 뵐날을 기대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