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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다낭, 호이안, 후에 2019년 5.20~ 5.24)]
●01일 22:00 김해 출발→ TW151(4.45h)→ 21일 00:50 다낭 도착→ Kay 호텔
●02일 오행 산→ 대바구니 투어→ 호이안 이동[1 고대도시 투어 2 튜본 강 유람]→ 다낭 이동
●03일 다낭 바나 산 관광→ 하이반 고개→ 후에 관광[1 후에 성 2 티엔무 사원 3 카이딘황제릉]
●04일 다낭 이동[1 다낭 대성당 2 까오다이교 사원 3 영흥사 4 한강 유람선]
●05일 01:50 부산 향발→ TW152편(5h)→ 07:50 부산 도착
[1] 2019년 05월 20일 월요일
●일정: 20일 22:00 김해 출발→ TW151(4.45h)→ 21일 00:50 다낭 도착→ Kay 호텔
[팀 구성]
여행가기 전까지 우리 일행인 6명으로 알았는데 3명이 더 있다고 하여 김해공항에서 만날 것으로 기대했으나
여기서도 못 만나 그럼 다낭에서 만나겠지 했으나 이곳에서도 없었다.
우리를 데리러 온 현지 가이드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호텔에서 만난 우리나라 가이드는 그들은 대구에서
출발한 3사람은 오전에 도착하여 다른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며, 그들도 모두가 남자이라고 한다.
여행 처음으로 모두가 남자들만 구성되었으며, 가이드와 기사도 모두가 남자이어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가이드를 일을 한지 5개월 되었다는 한국 가이드는 베트남에서 불법으로 가이드 하다가 쫓겨날 수 있다고 하며,
공항이나 관광지에는 일절 빠지고 대신 한국말을 좀 하는 베트남 가이드가 우리를 현장에 인도했다.
설명은 차 안에서 대충하고, 대신 돈에만 열심을 다했으며, 베트남 가이드는 설명 없이 길만 인도해서 예비지식이
없으면 눈만 관광했는데 마지막에 항의해서 사과를 받았으나 그게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라.
<대바구니 배를 타기 전 뽕나무 같이 생긴 노니나무 아래서 우리 팀만 모였다>
※베트남 역사: 면적 33.1㎢ 인구 9천6백50만이며, 베트남 역사는 고대로부터 근세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대월사기전서에서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BC 2879~ BC 258까지 있었던 홍방 왕조가 세운 반랑(文郎)이다.
이 반랑은 염제 신농의 후손인 락롱꿘가 산신의 딸 어우 꺼와 결혼하여 낳은 100명의 자식의 자식들 후손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 훙 브엉이 세웠다고 하며, BC 257년 툭판 왕조는 홍방 왕조의 왕 훙뚜엔브엉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 부족을 통합시켜 아우락 부족이라 하였으며, BC 208년 진나라 장수 찌에우 다라는 남비엣(남월국)을
세우고, 어우락 부족을 남비엣에 통합시켜 수도를 번우에 두고, 중국 남부와 홍 강 삼각주 지역을 통치했다.
BC 111년 중국의 전한 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했고, AD 41년 쯩 자매의 독립운동을 후한 광무제가 복파장군 마원을
보내어 42년 자매를 처형하고 자매의 잔여 세력과 교전 중에 41년의 전쟁 때 걸린 열병으로 49년 사망했다.
AD1세기 메콩 강 삼각주에 인도문화 영향을 받은 푸난 왕국은 6세기 멸망했으며, AD 192년 중부 후에 지역에는
보르네오에서 건너온 참 족이 건국한 참파 왕국은 1832년 잔존했고 북베트남 역사는 이 왕국과의 전쟁사이다.
참파 왕국은 후에서 다루었으며, 북베트남은 201년 사섭이 손권의 부하가 되면서 손권의 지배를 받았고, 939년
북부지역은 약 천년에 걸친 중국지배에서 벗어났다.
<안 하이 성당으로 가다가 만난 참파 나무와 꽃 즉 독참파>
베트남 궁중의 근위 대장이었던 리 꽁 우언(리 태조)이 10살의 어린 황제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라 황제 9대 216년
동안 베트남을 다스린 리 왕조(1009~1225년)는 안정적으로 존속한 베트남 최초의 왕조이다.
리 태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중국의 행정제도를 본떠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를 만들었고, 과거제와 학교를 설치하는
등 유교 보급에 힘썼는데 이는 베트남을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유교적인 나라가 되게 했다.
리 왕조 혜종의 외척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쩐투도가 1225년 리 왕조의 소황(昭皇)과 조카인 까인을 결혼시킨
뒤 까인에게 제후를 양위함으로써 리 왕조가 멸망하고, 쩐 왕조가 수립되어 1400년까지 존속하였다.
수도는 탕롱(하노이)였으며, 쩐 왕조는 중국 송의 영향을 받아 과거 제도 등을 실시하였고, 국력을 강화시켰으며,
역사 서적인 ‘대월사기’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고. 또한 베트남 문자인 쯔놈 문자가 만들어졌다.
쩐 왕조는 1257년부터 몽골의 침입을 받았는데, 쩐흥다오 등의 활약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 관료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등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이후 농민과 노비가 봉기하면서 쩐 왕조는 멸망하였고, 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1257~87년까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3차례 원정을 하면서 남북 양쪽으로 공격하여 참파를 점령하였기에 쩐 왕조가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더 켰으며,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고,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 왕조는 중국식정부가 수립되어 국경은 점차 남하하였고,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구엔 안 장군이 통일하여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되었으며, 1883~1939년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고,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독일이 세운 비시정권은 베트남이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을 도왔고, 일본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차단하고
천연자원을 얻기 위해 1940년 북부를 1941년 남부에 진주하였다.
<응우엔 왕조 왕궁의 정문인 오문 뒤에 있는 참파나무들>
1941년 호찌민은 공동통치하는 프랑스와 일본에게 독립을 요구하며, 베트남 독립동맹(비엣민 또는 베트민, 월맹)을
결성했고,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정권이 몰락하자 일본은 쿠데타로 프랑스 관리 모두를 감금했다.
그리고 꼭두각시 정부인 베트남 제국이 수립하여 바오다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베트남 제국도 무너졌고, 비엣민은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였다.
일본은 베트남의 행정권을 비엣민에게 넘겼으며, 비엣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선언하였고, 남에는
프랑스가 바오 다이를 내세워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 국을 수립하였다.
1946~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군은 프랑스군에 승리했다.
1954년 제네바협정으로 북위 17도를 경계로 비무장지역(DMZ)을 설치하고 프랑스는 철수 했고, 1955년 베트남의
총리 고 딘 지엠은 부정한 국민투표로 황제 바오 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공산주의 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이 대치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호치민은 군사력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하였고,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고 딘 디엠 정권을 지원하였다.
북베트남에서 훈련받고 무장한 베트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정글의 숨바꼭질'이라는 게릴라전을 확대시켜나갔고,
고 딘 디엠은 동료인 가톨릭교도들을 고위직에 등용하여 불교도들을 분노를 샀다.
불만은 군대 안에서도 커져가 고 딘 디엠은 1963년 11월 1일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에서 암살되었고, 1963년 8월
북베트남의 초계정 수척이 통킹 만에서 미군 구축함에 사격을 가했다.
1964년 존슨 대통령은 보복으로 미해군 비행기들은 북베트남을 폭격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965년 이후 미군 40만 명의 병력으로 증가했으나 베트콩을 진압 못했다.
<베트남 지도>
1965년 1월 26일 한국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베트남전쟁에 파병이 한국 최초의 국군 해외파병이었고, 이를 통해
'보릿고개'라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2월 비둘기부대가 2,000여 명을 시작으로 1965년 10월 9일 해병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상륙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1965년 미군 윌리엄 C.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지휘 아래 남베트남에 주둔했으나 베트콩을 뿌리 뽑을 수 없었고,
1967년부터 미국참전 반대 여론이 고조되어 평화행진, 시위, 그리고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1968년 존슨 대통령은 10월 폭격을 중지하고 파리 평화회담을 시작하여 1969년 6월 닉슨 대통령은 1차로 2만
5,000명의 미군을 철수시켰고, 1971년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선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치고
8년 동안 총 34만 여 명이 참전하였는데 승리한 북베트남을 지원한 나라가 북한이다.
1973년 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병력은 사라졌고, 1975년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타이완으로 도망쳤고,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하여 1976년 7월 2일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됐다.
1978년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정책 불이익의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여
캄보디아 및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979년 캄보디아를 침공해 친 중공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친 베트남 정권을 수립하여 이에 대응해 중국(중공)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하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갔으나 9일 만에 중국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1980년대 캄보디아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베트남군에 끊임없이 공격하여 베트남도 1989년 철군을 완료하였고,
1991년 소련이 붕괴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영흥사에서 바라본 다낭 시>
[2] 2019년 05월 21일 화요일
●일정: 오행 산 마블 마운틴→ 호이안 이동(1 고대도시 투어 2 야간 투어)→ 다낭→ 캐이 호텔
[아침 산책]
6시에 일어나 오기 전에 익혀 두었던 안 하이 성당((An Hai Church)을 찾았으나 입구가 공사 중이어서 다른 곳을
찾아 한 바퀴를 돌아서 입구를 찾고 보니 공사 때문에 착각했었는데 착각 덕분에 구경은 많이 했다.
까우 송 다리에서 용 다리까지 산책을 했으며, 다낭 시민들도 많았고, 그 덕분에 주의의 지리를 대충 익혔으며,
오늘 일정은 늦게 호텔에 들어간 관계로 11시 10분에 만나 먼저 점심 식사를 위해 모나코 식당으로 향했다.
<안 하이 성당과 야경>
[오행 산(五行山) 관광]
가이드는 나무, 불, 흙, 쇠, 물 이 5가지 의미를 가진 5개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어 오행 산이라고 하며, 대리석이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을 파는 상점들이 많으니 구경하면서 가라고 한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깔려 있던 산이라고 하고, 동굴은 절대로 시원하지 않으며, 지하로 내려가면 지옥으로 앵간 하면
지옥만 보고 오는 것이 좋다고 하며, 천국은 가파르고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굴 안이 어둡기 때문에 선글라스는 필히 벗어야 하고, 어둠을 이용한 날치기가 있으니 물품은 잘 챙기라고 하며,
결로(結露)로 인해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 진 사람도 있으니 조심하며, 통로가 좁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천국계단으로 내려오면 편할 것 같아 엘리베이터를 안타는지 물었더니 지금 너무 덥고
코스도 위험하다고 하며, 타 본 사람들의 만족도도 많이 낮다고 했는데 못타는 이유는 잘 만들어 놓았다.
좌측에 보이는 미케비치는 길이로 세계 6대 해변에 속하지만 깨끗하지는 않고, 부산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낮에는 너무 더워 수영을 하는 사람이 없으나 5시가 되면 바다가 사람으로 가득 찬다고 한다.
베트남은 불교문화가 80%이고, 나머지는 천주교, 까오다이교 등이라고 하며, 베트남은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어 대우를 받고 살아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낮에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카드를 치거나 커피를 마시다가 저녁이 되면 아이나 부인 또는 연인을 데리려 간다고 하며, 베트남 월급이 20~
30만원 이지만 물가가 저렴해서 그것으로 살 수가 있는데 특히 식비가 싸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가 싸고 수입하는 것은 모두가 비싼데 맥주는 생산되어서 무척 싸고 수입하는
소주는 비싸다고 하며, 점심 식사 때 마신 넵 모이(Nep Moi)이는 17달러나 해서 물어 보았다.
베트남에서 생산하는 보드카라서 비싸다고 하며, 도수가 높아도 부드럽게 넘어 간다며 가이드도 즐겁게 마신다고
했는데 사실은 2달러 밖에 하지 않지만 모든 식당에서는 엄청나게 비싸게 받았으나 우리 팀은 꼭 마셨다.
우리는 바가지가 아니라 다라이를 쓰고 다닌다는 표현을 했는데 가이드가 있는 곳에서 산 물건, 술 등은 모두가
엄청나게 비쌌지만 가이드가 없는 곳이면 정말 믿지 못할 정도로 싸서 이곳에서 살고 싶을 정도이다.
넵 모이는 39.6도나 되지만 마실 때는 무척 부드럽다고 애주가들의 칭찬한 술이며, 베트남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은 마음이 너그러워 오늘 하루만 즐거우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엘리베이터 2 오행산 3 대리석 조각들 4 오행산 동굴입구 5~6 동굴 내부 전경들>
우리나라 같이 악착같이 돈 벌다가 나이 먹고 건강 잃어서 여행도 못 다닌다고 하며, 이왕 여행 나오셨으니 마음을
좀 너그럽게 먹으면 더워도 덜 느끼고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예방 차원의 이야기로 들렸다.
갑자기 박항서 이야기가 나오자 가이드는 신나게 얘기했는데 베트남이 2018년 아시안게임에서 캄보디아를 이기고
4강에 올랐을 때는 전국에서 사람과 오토바이가 등장해 길을 메우고 경적(크락손)을 밤새도록 울렸다고 한다.
큰 경기가 있는 날에 식당에 가면 종업원들이 얼마나 TV에 열중하는지 주문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며, 박항서 감독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졌다고 하며, 한국과 베트남은 사돈지간이라고 할 만큼 결호도 많이 한다.
한국 남자가 결혼을 위해 2천만 원 정도를 결혼회사에 지불하면 베트남 여자를 선택할 수 있고, 맞선을 본 후 바로
신혼여행을 떠나며, 여자는 한국에서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도록 6개월가량 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이 학원비용은 한국 남자가 지불하며, 결혼을 하고 비자가 나오면 한국으로 올 수 있는데 결혼이 쉽지만은 않는데
박항서 덕분에 한국비자가 내기가 쉬워졌으며, 돌아오는 것을 위해 천만 원의 보증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11~2월까지가 건기이고, 나머지는 우기로 이때 정말 비가 많이 오는데 작년에는 다낭 시내가 물에 잠겨 교통이
마비가 되어 출근 뿐 아니라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집에 물을 퍼내야 한다며 출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낭은 4년 전만해도 허허벌판에 발전도 안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투자자들이 땅만 보이면 투자하여 중국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고, 그리고 유럽인들도 많이 찾기 때문에 호텔산업이 매우번창하다고 한다.
베트남도 공산국가이어서 땅을 살 수는 없지만 50년 정도 임대를 해서 빌리면 임대 및 양도도 할 수 있고, 결혼은
20살 정도이면 하는데 아이는 생기면 낳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 발전성이 큰 나라라고 한다.
오행 산에 도착했는데 5개의 봉우리가 있고, 그 사이에 동굴들이 있는 줄 알았으나 봉우리는 오간데 없고, 커다란
자연 동굴 하나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천국계단으로 나아가면 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 힘들고 높아 보여 포기를 하고 지옥만 10여 분 정도 다녔는데 종류석도 없고 볼 것도 없기에 인위로
만든 미니어처를 만들어 놓았으나 너무 조잡하여 차라리 없는 것만 못했으나 동굴 높이는 대단했다.
★오행 산: 베트남 민간신앙을 대표하는 산으로 서유기의 손오공이 죄를 짓고 500년간 갇혀있던 산으로 산 전체가
대리석이어서 마블 마운틴(Mable Mountains)이라고도 불린다.
전망대까지 오르면 다낭 시내의 모습과 대리석 공예품을 판매하는 논 느억(Non Nuoc) 마을과 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계단은 가팔라 힘들고. 1.5만동(750원)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서유기: 송, 원 시대에 대체적인 줄거리가 꾸며지고, 명나라의 오승은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현장이 불경을 구하러
멀리 천축(인도)까지 갔다 온 이야기를 공상적인 소설로 꾸민 것이다.
서유기의 손오공은 화과산 정상의 돌들이 천지의 정기를 받아 쪼개지면서 태어났고, 손오공은 불로장생의 신선술과
자신의 털로 작은 원숭이를 만드는 변신술과 단숨에 10.8만 리를 날 수 있는 구름을 모으는 재주를 가졌다.
그러나 지나친 장난으로 석가모니의 법력에 따라 오행 산에 갇히고 말았고, 500년이 지난 당 태종 때 석가모니는
온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국에 경전을 전하고자 관세음보살을 장안에 보냈다.
한 편 불교의 큰 뜻을 알게 된 현장은 태종으로부터 ‘삼장법사’의 칭호를 받고, 불교경전을 전수받기 위해 천축으로
떠났으며, 그는 여행 중에 갖은 고난을 겪지만 오행 산에서 손오공을 만났다.
이어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여행을 계속 하였고, 드디어 천축에 도착하여 경전 5,048권을
받고 14년만의 장안으로 무사히 돌아와 태종에게 경전을 바쳤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었다.
<오행산 내부 전경>
[옵션(40$) 대바구니 배 (탄통) 타기]
룸메이트와 한조를 이루어 할머니가 노를 젓는 대바구니를 타고 30분 정도를 그들이 코코넛이라고 부르는 투본
강과 이어진 호수 같은 곳을 탐방하는 것이었는데 대바구니보다는 노니 나무를 만난 것이 더 의미가 컸다.
호수를 장식한 코코넛 숲이 오히려 장관이었는데 이 코코넛은 열매도 달리지 않는 코코넛과 속으로 사고야 야자,
대추야자, 코코넛 야자, 아레이카 야자 중에 아레이카 야자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 즉 초본식물이다.
넓은 지역에 도착하면 젊은이가 바구니를 타고 묘기를 보이고 팀을 받고 나면 다른 배에서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음악이 퍼지면 노래를 부르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으로 한판을 놀고 나면 팀을 받았다.
이 많은 대바구니를 채운 사람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제일 많다고 했으나 우리 눈에는 우리
사람만 보여 다낭을 먹어 살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팀을 너무 후하게 주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어마무시한 대바구니 대열>
<대바구니 묘기>
[호이완 도자기 마을 탐방]
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마을이라고 했지만 유약을 발라 구운 자기는 보지 못했고, 토기만 보였으며, 이곳에서 본
것은 꼽아 보면 잭 프릇이라는 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지 가이드가 자기가 태어난 띠를 적어가면서 이곳에서는 십이지 가운데 토끼가 없고, 대신 고양이가 있다고
했으며, 현지 가이드는 자기 띠로 만든 휘슬(호각)을 선물이라고 주었는데 너무 조잡해서 버렸다.
바나나 냄새를 싫어해서 집 울타리에 심었다는 바나나와 중미에서 보았던 헬리코니아도 피어있었다.
※잭 프룻(Jackfruit): 중남미의 자까(자카, Jaca)와 같이 부르며, 과육은 생것으로 먹고, 씨는 삼아서 먹으면
밤보다도 더 맛있다고 하며, 자카의 어원은 힌두어‘Chakha'이라고 한다.
[옵션(30$) 투본 강 배 타기]
투본 강 중류 정글 속에 있는 미 선 유적지(My Son)는 4세기 말 참파 왕이 시바 신의 목조 사당을 지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7세기에 벽돌로 재건했는데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A부터 H까지 번호를 붙인 건물만 공개하고 있다고 하는데 가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설명도 듣지 못했으며, 이제는
도자기 마을 강가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20분 정도 가면 호이안의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1 도자기 마을 공원 2 도자기 마을의 학교와 불꽃나무 3 바나나와 헬리코니아 4 전시된 도자기 5 잭 프릇
6 잭 프릇 과육 7 투본 강 배타고 관광>
[호이안 구시가지 관광]
호이안에 들어가기 전 가이드는 왜 현장에 못 가는지와 호이안에 대한 설명을 설명했는데 자기는 관광비자로
들어왔기에 관광지에서 자주 보여 가이드 한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된다고 한다.
호이안은 국제 무역항이어서 성원들이 내리면 몇 달씩 머물러서 그들만의 특색 있는 건축물을 만들었기에 프랑스,
일본, 중국 건축물 등이 섞여 있는 곳으로 가장 유명한 떤키(Tanky) 집은 한문은 진기(進記)라고 한다.
베트남 가이드 따라 진기라고 쓰여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인파 속에 가이드를 따라 가는 것도 힘들며,
200년 된 거상이 살던 집으로 7대 후손이 거주하고 있고 , 이 집은 흑단 목(黑檀 木)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홍수로 투본 강이 범람하여 집이 잠겨도 썩지 않았는데 홍수 때 마다 범람한 것을 노란 선으로 표시해
놓았다고 하나 알려주지 않아 보지도 못했으나 강아지를 통에 담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홍수 때 목숨 걸고 강아지를 구하는 사진은 감동을 주었으며, 현지 가이드는 사진 찍을 시간도 주지 않았고, 그리고
뒷문으로 나아가면 한눈에 봐도 딱 중국식 건축물은 광동(廣東) 또는 광조(廣肇) 회관會館)이라고 한다.
1786년 광동출신 화교들이 신처럼 모시는 관우를 위해 건립한 사당이자 중국인들의 집회장소로 회관내부에 삼국지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의 그림이 있으며, 광조 회관 안에서 잠시 쉬었다가 내원교(來遠橋)로 향했다.
<1~2 떤키(진기) 집 2~7 광조회관 풍경>
내원교는 베트남 돈 2만동에 나오며, 1593년 일본인들이 중국인 거주지로 가기 위해 세운 나무다리인데 인파가
많았고, 원숭이상과 개상을 본 후 200년 되었다는 풍흥고가라는 목조주택에 들어갔고, 1층엔 기념품을 팔았다.
2층에는 조상의 위패와 외부 발코니에서는 내원교 입구를 볼 수 있었으며, 너무 더워 시원한 커피 집에서 코코아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가 내원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한 후 투본 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1시간 자유 시간을 주면 이때 열리는 야시장을 구경하며, 물건을 살려면 한국관광객이 깎는 것을 알기에 그 만큼 더 붙여 팔기에 깎아야 한다고 한다.
먹는 것은 인정된 것이 없기에 탈이 날 수 있어 사지 말라고 하면서 망고와 오징어를 햇빛이 강해서 밖에서 말리는
것을 보았는데 파리인지 망고인지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어서 놀랄 다고 한다.
그리고 먹거리 중에 특이 한 것은 개구리를 통째로 불에 구어 주기에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먹을 수가 없지만 또 망에 있는 주먹만 한 살아 있는 개구리를 손님에게 요리할 수 있도록 손질해 줄 때는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개구리는 우리가 어릴 때도 먹어보았지만 싱가포르 식당에서도 먹은 적이 있는데 옛 추억을 생각하면서 한 번 드셔 보셔도 좋은 것이라고 하며, 모든 종업원이 다 한국어를 조금씩 하기에 큰 불편은 없다고 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이고, 저녁은 어둡기에 날치기를 조심해야 하며, 자유 시간은 30분에 5천원 하는 발마사지로
소비했고, 8시에 다낭으로 돌아와 카턴 야시장을 구경한 후 안 하이 성당을 찾아가 야경을 찍었다.
<내원교 1 외부 2 입구 3 내부 4 사당 5 개 상 6 원숭이 상>
※흑단 나무: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가 원산지로 감나무속의 여러 해살이 식물로 상록수로 성장 속도가 느려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여 물에도 가라 않는다고 하는 검은 목재로 연마했을 때 부드러운 광택이 났다.
장식용 목재로서 큰 가치를 가지기에 무분별한 벌채로 멸종 위기종이 되어 현재는 제한된 용도로만 쓰이며, 키는
20~25m까지 자라고, 감과 비슷하게 생긴, 2cm 정도의 작은 열매가 열린다.
※호이안: 베트남 꽝남성의 남중국해 연안에 있는 작은 도시로 인구는 약 80,000명으로 중국, 유럽 등 동서양의
무역상이 체류하던 상업항구로 번영하여 동서양의 건축양식 건물이 흩어져 있다.
약180년 전 목조 가옥들이 있는 이 거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최고라고 하며,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대표적인
볼거리는 운치 있는 작은 다리 내원교는 중국인 거주지를 가기 위해 1593년 일본이 만들었다.
다리 끝에 있는 원숭이와 개상은 원숭이해에 시작해서 개해에 완공됐다는 설과 일본 왕들이 개와 원숭이에서 태어
났다는 설도 있으며, 다리 중앙에 있는 까우 사원은 머리는 인도, 몸통은 베트남, 꼬리는 일본에 둔 아주 큰
꾸(Cu)라는 괴물이 움직이면 홍수나 지진이 발생하기에 꾸의 약점이 있는 이곳에 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1~2 호이완 거리 풍경 3 내원교에서 본 야시장 서는 섬 4 투본 강 사이에 있는 섬, 야시장 거리>
[3] 2019년 05월 22일 수요일
●일정: 바나 산 관광→ 하이반 고개→ 후에 관광[1 티엔무 사원 2 후에 성 3 카이딘 황제릉]→ Romance 호텔
[옵션(40$) 바나 산(BA NA HILL) 관광]
다낭에서 20km 떨어진 바나 산 국립공원은 1920년 설립된 해발 1,487m의 바나 산꼭대기에 위치한 바나 힐은
프랑스 지배시절 더운 날씨 때문에 그들의 휴양지로 베트남 사람들이 짐을 지고 올라가 건설했다.
프랑스가 물러간 후 파괴했던 것들을 선 월드(Sun World) 회사가 다시 건설한 바나 힐은 세계 2번째로 길고,
높다고 기네스북에 등재된 케이블카로 길이가 5,042m 이며, 타는 시간은 20분 정도라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울창한 밀림을 보며 오르면 2016년 6월 완공한 골든 브리지(Golden Bridge)는 다리를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거대한 손이 인상적이며, 이 다리를 지나면서 사찰에 있는 대형불상과 다낭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다리를 통과하면 손, 다리, 머리가 따로 분리된 조각과 두상 조각, 병 조각 등을 본 후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테마파크 선 월드에 도착하여 말 탄 프랑스 병사의 그림이 있는 출구를 나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1 케이블카 승강장 2~3 골든 브리지 전경 4 몸통이 분리된 조각상 5 바나 산 전경>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봤던 원뿔형의 첨탑들이 즐비한 유럽풍의 전경과 로마병사들이 도열한 통로를 지나면 광장
중앙에는 선 월드를 상징하는 지구본이 있으며, 네덜란드의 붉은 풍차도 보였다.
우리는 90분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고, 우리 팀은 먼저 전망대로 향했으며, 유럽풍의 건물을 지나면 동양풍의 건물과
탑 등이 보였고, 가는 길에는 녹음된 풀벌레 소리가 들려다. 전망대에 오르면 베트남식의 범종이 달려 있다.
이곳에서 테마파크의 전경을 보고 내려오다 육각정 안에는 배를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포대화상이 있었으며, 다시
광장으로 도착하니 성당 앞 계단에는 결혼식 촬영이 있었고, 팀들이 쉬는 동안에 혼자 이곳저곳을 다녔다.
사람이 없는 빈 광장에는 손만 만들어 놓은 곳도 있고, 지하로 내려가니 조명이 화려한 어린이 놀이터로 로버트도
있었으며, 좀 특이한 것은 관광하는 승려들이었고, 11시에 거행되는 공연을 구경했다.
<1 우측 말 탄 프랑스 군대의 그림과 테마파크 입구 2 선 월드 지구본이 있는 중앙 광장 3 전망대에서 본
바나 산 테마파크 전경 4 포대화상 5 결혼식 6 작업장 7 이벤트 거리 8 어린이 놀이터 9 관광하는 승려>
<전망대에서 본 바나 산 테마파크 전경>
가장행렬이거니 생각했으나 이벤트는 몇 명이거나 단체로 각 곳에서 행해졌으며, 거리를 거닐면서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는 머리 없는 사람은 앞을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했고, 앞바퀴가 큰 자전거의 뒤에는 화분을 실고 다녔다.
키다리 아저씨와 아주머니, 링으로 휘감은 특이한 옷을 입은 아가씨, 무대 위의 흑인들은 관광객과 사지만 찍었고,
성당 앞에서는 악단이 연주를 했으며, 물고기 분수대에서 관광객과 사진 찍는 인어공주도 보였다.
관광객과 사진 찍는 마도로스 복장의 아가씨 등을 본 후 우리 팀을 찾아다니는데 그들은 차집에서 망고 주스를
마시고 있었으며, 이젠 가이드를 만나 하산하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점심은 한식과 베트남식을 선택해서 먹을 수가 먹을 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전부 한식을 먹었으며, 김치가 좋았고,
식사를 마치고 가도 후에 안 가도 후에로 향하면서 가는 길목에 있는 하이반 고개 길로 향했다.
16 <바나 산 테마파크의 이벤트 행사 모습들>
[하이반 고개(Hai Van Pass) 관광]
가이드는 하이반은 ‘구름 위에 있는 산’이라고 했으며, 예전엔 요충지로 성터와 벙커가 있으며, 총탄 자국도 있고,
해발 1,200m로 옛날에는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를 냈다고 한다.
하이반 고개 길을 갈 것이지 물었는데 올 때 고속도로로 오고 갈 때는 하이반 고개로 가자고 했으나 반대로 했으면
민망왕릉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몰랐고, 인터넷에는 이 고개 길은 세계 10대 절경 중에 하나로 했다.
그것은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오직 3사람만 옛 성터로 향했는데 돌아와 차에 오르니 안개가 앞을
가려 하이반의 이름이 지어진 것을 깨닫게 했으며, 베트남의 농촌 풍경을 보면서 후에에 도착했다.
★하이반 고개: 다낭과 후에를 잇는 약 20km의 해발 900m인 이 해안도로는 '하이'는 바다, '반'은 구름으로 '구름을
낀 바다(海雲) 고개'로 세계 10대 절경 중에 하나로 안개 자욱한 아름다운 해안 도로이다.
역사적으로 대월과 참파의 경계였고, 현재는 다낭과 후에의 경계이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는 월맹과 베트남의
경계로 미군과 청룡부대가 베트콩과 교전을 벌였던 곳으로 고개 정상에는 프랑스가 건설한 성문이 있다.
남북 베트남 간의 기후의 경계로 11월~3월 겨울철에는 남쪽은 기온이 높고 공기는 건조하지만 북쪽은 한랭하고,
습도가 높으며, 하이반 고개는 전략적 요지였고, 오래 동안 이동하는 군대에게 심각한 장벽이었다.
1세기 중반, 한나라 장군 마원이 북부를 평정한 후 이곳에 청동 기둥을 세워 한나라 남쪽의 경계로 삼았고, 2세기에
한나라가 붕괴되자 그 한인들 중에서 참파의 전신인 임읍국(林邑國)을 세웠다.
※마원(BC14~49):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나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손잡고 후한을
세운 광무제(25~57/58 재위)의 신하가 되었고, 35년 화남지방의 태수로 임명되었다.
북베트남 지역까지 중국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고, 45년에는 북방 국경지대로 파견되어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을
제압하는 데 힘썼으며, 죽은 후 중국 남부의 광시(廣西)지방에서는 파도를 잠재우는 해신으로 받들어졌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신하였으나 반란군과 손잡고 후한(AD25~220)을 건국한 광무제의 신하가 되어 북베트남도
지배권을 확립한 마원(馬援) 장군은 복파장군으로 불리며, 계림의 복파산(伏波山)에 그의 묘가 있다.
또 전설에 베트남과 전투 때 그가 쏜 화살이 뚫고 지나갔다는 큰 구멍이 있어 뚫을 천(穿)의 천산도 있다.
※안남산맥(安南山脈, Annamite Range): 인도차이나반도 동부라오스에서 베트남에 걸쳐 뻗어있는 산맥으로 길이
약 1,100 km 이고, 해안선과 거의 평행하게 위치하며, 가장 높은 응옥린(2,598m) 봉우리는 호이완 서남쪽에 있다.
<1 아름다운 하이반 고개길 2~3 고개 정상에 있는 프랑스가 건설한 요새 3 산꼭대기로부터 내려오는 안개>
※후에(Hue) 역사: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로 불렸고, 2천 년 전 보르네오 일대에서 이주에온 참
족은 AD 192년 후에 지역의 지방 관리인 키우 리엔이 한 나라로 독립하여 참파 왕국을 건설하였다.
참 족은 베트남 족과는 다른 민족으로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에도 일진일퇴를 주고받던 국가로 앙코르와트의 부조된
바나나 잎 모자를 쓴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며, 한자 문화권인 북쪽의 베트남은 유교, 대승불교, 도교를 믿었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참족은 이슬람을 주로 믿고, 베트남 참족은 힌두교를 주로 믿었는데 15세기 베트남의 침략을
막으려 조호르 술탄국과 동맹을 맺으려 이슬람을 믿었으나 술탄국은 아체하고 전쟁 중이라 도움은 되지 못했다.
1257~87년까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3차례 원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는데 원정 때 남북 양쪽으로 공격하면서
참파를 점령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이 몽골을 격퇴시켰어도 참파의 피해가 더 켰다.
참파의 마지막 부흥기는 비나수르 왕으로 1360년 즉위하자 베트남에 옛 영토의 반환을 요구했고,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베트남의 쩐 왕조를 공격했으나 1390년 전투에서 비나수르가 전사한 뒤,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1471년 참파의 마하사잔 왕이 베트남남부국경을 공격하였고, 화가 난 베트남 후 레 왕조의 타인똥(성종,聖宗)이
군사 25만을 이끌고 수도 비자야 성으로 쳐들어가 마하사잔 왕을 생포하면서 베트남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없었고, 영토는 베트남에 의해 분열되었으며, 마지막 왕 포 치엥은 참 족을 이끌고
캄보디아 남부 지역인 캄퐁참으로 이주했고, 일부는 중국 하이난 섬으로 이동하였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판두랑가 지역의 참파는 마침내 1832년 응우옌 왕조가 합병을 선언하여 완전히 소멸되었고,
이중 중북부 해안 지역에 있는 참 족을 베트남 정부는 이슬람 신봉자들을 짬 바니라 부른다.
짬 바니는 80% 정도이고, 힌두교를 신봉 하는 발라몬이 20%가량으로 현재 베트남에 약 40만 명이 거주한다.
베트남 왕국의 역사는 참파 왕국과 전쟁의 역사로 대부분 베트남이 우위에 있었던 것은 참파 왕국은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제로 도시국가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도시의 왕이 참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
베트남은 중국의 중앙집권체제를 받아들였기에 왕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으며,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기에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기에 참파 왕국을 이길 수 있었다,
1802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가 수도로 정하면서 후에가 되었는데 1885년 프랑스는
통킹지역의 종주권을 거부당하여 후에를 포위공격하며 약탈했다.
1945년 8월 30일 후에 궁전에서 베트남제국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의 퇴위로 수도로 막을 내렸으며, 1964~
1975년 사이 남북베트남의 전쟁으로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남북베트남이 차례로 후에를 점령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이 살해되는 살육의 현장이기도 하였으며, 왕성 대부분이
황폐해졌으나 1990년대 베트남의 유일한 유적지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드는 도시이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고,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로 왕궁과
동 바 시장이 있으며, 남쪽의 신시가지로 호텔, 레스토랑, 토산품점, 여행사가 밀집되어 있다.
흐엉(香, perfume) 강은 향기가 나는 강이란 뜻으로 강 상류에서 핀 난초가 가을에 강으로 떨어져 향기가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흐엉 강 남에는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보트를 타고 이곳을 둘러볼 수도 있다.
‘흐엉'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김정남 암살한 여자이름도 강 이름도 ‘흐엉'이다.
<1 흐엉(향) 강이 보이는 후에 2 응우엔 왕조의 왕궁>
[티무엔 사원 관광]
후에에 도착하여 흐엉 강을 건너 후에 성 앞을 통과하여 도착한 곳이 티무엔 사원으로 정문 앞 계단 위로 보이는
‘옥주옌 탑’은 베트남의 대표하는 건축물로 높이 21m의 7층 팔각형 탑이다.
탑 좌측 끝에는 여배우 혼자 세워 놓고 촬영하고 있었고, 사천왕이 양쪽에 지키는 천왕문을 통과하면 사원 중앙
홀인 자이훙 사당과 승려 방 손님방이 있는 건물이 있으며, 이곳에서 틱꽝득 승려가 거주한 곳이다.
사당 안은 들어갈 수 있으며, 사진을 찍어도 되고, 사당 안에는 승려와 신도들이 불공을 드리며, 사당 좌측을
돌아가면 틱꽝득 승려의 작은 박물관이 있으며, 파란 차는 사이공 갈 때 탔던 오스틴이라고 한다.
승려가 두 손 바쳐 들고 있는 사진은 특광득의 ‘영원한 심장’이라고 하며, 이곳을 지나면 호박같이 생긴 열매가
달리는 신기한 나무가 보였는데 잭 프릇 열매하고는 전혀 다른 나무인데 이름이 ‘박 나무’라고 했다.
베트남 말인지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는데 이 나무를 보고 도착한 곳은 이 사원의 저명한
틱동하우(1896~1992년) 스님의 6층짜리 사리탑이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다.
돌아 나오다가 잭 프릇 나무와 뿌리가 조금 특이한 나무를 보고 나왔는데 들어갈 때 보였던 푸옥주옌(복연, 福緣)
탑이 보이지 않아 그 속에 있다는 거북 비와 종을 보지 못했는데 베트남 가이드가 왠지 몹시 바쁘게 설쳤다.
변소에는 천 원짜리와 만 원권을 바꾸자는 상인들이 있어 안 그래도 천 원짜리가 모자라 바꾸었으며, 주차장에
도착하니 회오리바람에 큰 나무가 쓰려져 부서진 차량이 이었으나 다행이도 우리 차는 피해가 없었다.
★티엔무 사원: 흐엉(香, perfume) 강 북쪽에 있고, 한 노파가 왕이 와서 ‘국가의 번영을 위해 석가탑을 세울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며, 이 이야기를 들은 응우옌호앙 왕이 1601년 탑을 세웠다.
이름은 ‘티무엔(선한 노파) 탑’ 하였고, 1665년 응우옌푹딴 왕이 개보수 했으며, 1677년 청동상과 징, 1710년
응우옌푹쭈 왕은 높이 2.5m 무게 3,285kg의 종을 주조했고, 1714년 금박 입힌 나무판에 왕의 글을 새겼다.
1715년 2.58m의 대리석 거북 비를 세웠고, 1884년 티에우찌 왕이 세운 높이 21m의 7층 팔각형 탑은 처음엔
뚜냔 탑이라 불렀던 푸옥주옌 탑이 있으며, 중앙 홀인 자이훙 사당과 승려 방 손님방이 있다.
이 사원으로 중국불교의 흔적과 남방불교의 색채를 많이 띠고 있으며, 1963년 6월 11일 이 사원 출신 특광득
(틱꽝득) 승려가 사이공 중심가 한복판에서 분실 자살하여 소신공양 전 궁중에 한 말이 있다.
‘내가 앞으로 넘어 지면 나라가 망할 것이니까 모두들 피신하고, 뒤로 넘어지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고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좌불로 10분 동안 미동도 없이 버티다가 뒤로 넘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옆으로 넘어지는 것으로 보였는데 하여튼 앞으로는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것과 과학적으로 불에 타면 근육이
오므라들면서 앞으로 넘어져야 하는데도 앞으로 넘어지지 않아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또 시신을 수습하여 8시간 화장을 하여도 심장이 타지 않아 또 충격을 주었다고 하며, 타지 않은 ‘영원한 심장’은
호치민 시 중앙은행에 사진과 함께 보관되었으며, 베트남사람들은 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페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고딘디엠(응오딘지엠) 동생부인 쩐레수언이 미국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
‘바비큐 쇼를 보고 박수를 쳤다.’라고 조롱하여 국민을 더 분노케 했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본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등을 돌리게 했고, 1963년 11월 1일 특광득의 소신공양으로 일어난 즈엉반민 장군의 쿠데타는 고딘디엠 정권은 무너트리고 동생도 살해되었으며, 베트남은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
<1 티무엔 사원 입구 2 촬영 중 3 천왕문 4 자이훙 사당 5 자이훙 사당 내부 6 틱꽝득 승려가 사이공
갈 때 탔던 오스틴 차 7 틱동하우 승려의 6층짜리 사리탑 8 박 나무 9 뿌리가 특이한 나무>
[후에 성(궁전) 관광]
후에 성은 넓기 때문에 전동카를 타고 이동하며, 다음에도 또 타기에 차번호를 잘 기억해야하고 우리 팀만 타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국 팀들도 같이 타고 움직이면서 한국말을 잘하는 베트남 사람이 가이드 했다.
베트남 가이드는 한쪽은 우리나라 태극기이고 반대편은 베트남의 홍성기가 그려진 깃발을 가졌으며, 후에 성에서
한국 팀만 전문하는 가이드로 유머도 많고 한국역사도 많이 알고 있어 베트남 역사와 비교해서 설명을 했다.
그는 설명을 하기 전에 갑자기 여자한분과 우리 팀 남자한사람을 장모장인이라고 불렀고, 그는 김해 김씨로 김수로
왕의 후예이며 이름은 김진이라고 하며 75대 손으로 할아버지가 월남 전쟁 때 왔다고 한다.
비밀이라고 했지만 그는 ‘라이따이한’라는 이야기인데 시간 날 때마다 장인장모를 찾아 웃겼으나 웃음 뒤에는 팁을
주어야 될 것 같은 숨은 전략도 있는 듯 했는데 모두들 ‘라이 따이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푸르메리아 나무 아래 있는 궁전의 조감도가 있는 곳에서 멈추었고, 조감도 아래에 떨어진 푸르메리아 꽃을
주서 들었을 때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챘는데 라오스에서 ‘참파’라고 부르는 나무 이름 때문이다.
푸르메리아를 라오스에서는 참파라고 부르며 참파 왕국은 위에 있는 후에 역사에 기록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라고,
응우엔 왕조에 대한 기록은 베트남 역사에 기록하였다.
그의 발음은 정확하게 알아듣기 힘들었으며, 후에 인구가 35만 명이고, 후에는 1802년에 건국한 응우엔 왕조의
수도이라고 하며, 궁전은 중국자금성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앞에 보이는 것이 오문(午門)이라고 한다.
1834년에 5개의 문으로 지어졌고, 중앙은 오로지 왕만의 출입문이며, 양 옆에는 문관과 무관의 출입문이었으나
현재는 우측은 베트남 사람의 출입문이고, 좌측은 외국인들이 출입하는 문이란다.
맨 양쪽 끝에 확장된 문은 병사와 코끼리와 말 등이 출입했다고 하며, 1945년 8월 30일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장소로 13대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퇴위하여 정부는 하노이로 옮겨졌다고 한다.
<1~2 후에 성 3 오문으로 외국인 출입 문 4 오문 뒤 모습 5 참파나무와 베트남 도슨트(해설자)>
태화전, 근정전, 종묘 등 100여 개의 건물이 이었으나 1947년 프랑스와 1968년 미국과 전쟁으로 80%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해자 다리 위에 놓인 화분에 심어진 노란 ‘황금 트럼펫’라고 부르는 꽃은 ‘알라만디’라고 했다.
노란색은 ‘알라만디 카타르티카라고 하고, 자주색은 ‘알라만디 블란체티’라고 하며, 연못에 핀 연꽃은 베트남의
국화이며, 중도교를 건너면 왕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태화전은 경북궁의 근정전과 같다고 한다.
왕의 즉위식, 황실의례, 조회 등을 행하든 곳으로 왕좌와 옥쇄를 보관했던 곳으로 이곳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라고
하며, 좌측 끝과 우측 끝에 있는 코끼리 나무는 응우엔 왕조의 힘을 상징하고, 입장하면 모자는 벗어야 한다.
옥좌만 기억에 있고 나머지는 기억에서 사라졌고, 궁전 모형이 전시된 곳에서 베트남 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했는데
북쪽엔 베트남, 중부엔 참파왕국이 있었으며, 남쪽 사이공 쪽은 캄보디아, 라오스 등과 함께 인도 영토였다고 한다.
중국 자금성에서 화재 때 사용하기 위해 두었던 거대한 물 항아리 같이 생긴 청동 가마솥(무, 廡)이 좌우에 있는
쌍둥이 건물은 뭘 하던 곳인지도 모르고 통과하였는데 인터넷에서는 큰 건물’을 뜻하는 타부라고 했다.
타부는 자금성에 속한 부속 건물로 좌무(左廡)가 있는 건물은 문신들이 대기하는 곳이며, 우무(右廡)가 있는 건물은
무신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때에 따라 대신과 국사 논의 및 연회, 무술 경연들을 하던 곳이란다.
전동카를 타고 3분 이동해서 들어간 곳이 현림각으로 마당에는 자두나무가 있는 현림각(顯臨閣)은 우리나라 공신당
(功臣堂) 같은 곳으로 공을 세운 공신들을 모신 곳이며, 2대 민망왕 때 건설했다고 한다.
민망왕은 백제의 3천 궁녀를 거느린 의자왕과 같다고 하며, 하루에 10명의 부인과 잠을 잔적도 있으며, 한국의
야관문에 해당하는 노니가 있고 민망주도 있으니 사가라는 이야기는 2분 이상했으나 설명은 20초만 했다.
범종이 달려 있는 열주문(駿烈門)을 통과하면 우리나라 종묘에 해당하는 세조묘(世祖廟) 건물이 있는 광장에서
현림각 뒤쪽으로 3발 달린 청동 솥에 9개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무게는 2톤 내외지만 가장 무거운 것은 2.7톤으로 청동 솥에는 해, 달, 별, 구름, 강산, 산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붉은 유리 상자 속에는 해태상이 있다.
광장 건너에 응우엔 왕조 역대황제의 위패가 있는 세조묘 건물이 있는데 모자와 신발을 벗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인터넷에 보면 개인여행자들은 사진도 찍어 올린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안 된다고 했다.
밖에서 안을 보고 찍었으나 잘 나오지 않았으며, 숭성문(崇成門)을 지나 전동카를 타고 우리 팀만 현인문(顯仁門)
앞에 도착하여 후원, 태평류 등은 보지도 못한 체 40분 동안 후에 성 관광을 마치고 카이딘 황제릉으로 향했다.
<1 참파나무 2 알라만디 4 태화전 5 코끼리나무 6 베트남 3국지도 7 왕궁모형도 8 우무 9 좌무 10 자두나무
11 현림각 12 열주문 13 해, 달, 별, 구름, 강산, 산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14 해태 상 15 세조묘
16 세조묘 내부 17 숭성문 18 현인문>
※참파(Champa): 이 꽃을 인도-챔파, 미안마-데어스꾸뻰, 라오스-독참파, 태국-리리와디, 필리핀-깔라츄치,
중국-지단화, 미국-푸르메리아(풀루메리아)로 불리며, 탬플 트리 또는 ‘하와이안 재스민’이라고도 부른다.
풀루메리아(Plumeria) 꽃은 하와이완 훌라춤을 추는 여자들이 레이(Lei)를 만들어 목에 걸거나 귀 뒤쪽에 꽂고
있는 꽃으로 흰색 꽃은 기혼, 붉은색을 꽂으면 미혼을 나타낸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가 잠잘 때 입었다는 유일한 잠옷이라고 했던 ‘샤넬 No.5’ 향수의 원료이고, 라오스에서 독 참파
(Dok Champa)라고 하며, 독은 꽃의 의미이다.
꽃의 이름은 17세기 카리브지역을 여행하던 프랑스 식물학자 Charles Plumier의 이름이며, 협죽도(유도화)과로
학명은 Plumeria rubra L로 rubra은 적색의 뜻이라고 하고, 향기가 너무 좋다.
꽃은 흰색, 붉은색, 노란색, 눈물의 참파 4종이 있고, 꽃말은 사랑했던 두 커플이 영원히 이별하게 된 사건 중심에
참파가 있다고 하여 ‘영원한 이별’이라고 한다.
★후에 성: 응우엔 왕조 왕궁인 후에 성은 자금성을 본떠서 만들었기에 오문, 태화전, 자금성, 절, 등이 해자로
둘러 있고, 황궁 앞에는 좌우로 대포진지가 있으며, 잔디 광장에는 베트남 국기가 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전동카를 타고 이동해야 할 정도로 커지만 전쟁으로 빈 성터를 현재는 많이 복원이 되었으며,
당시 생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는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1 참파나무 2 후에 성>
[12대 카이딘 황제릉 관광]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 중에 돼지새끼 바비큐가 있다고 하며, 30분간 달려 카이딘 황제릉에 도착하였고,
오늘 우리가 마지막 팀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민망왕릉은 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물어도 가이드는 대답이 없다.
우측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내려오면서 현지 가이드를 열심히 따라 바쁘게 사진을 찍었으며, 36계단을 올라가는데
숨이 차서 고생을 했는데 중앙에 공덕비가 있으며, 공덕비 좌우로 문무관, 기마, 코끼리 상이 도열해 있다.
마지막 건물이 황제의 능으로 능 중앙에는 황금 도금된 카이딘 황제의 동상이 있고, 실내가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으며, 천장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으나 잘 구별되지 않았다.
황제의 사진과 근무하던 책상을 보고 나와서 반대편에 있었던 문무관, 기마, 코끼리 상을 보고 내려오는 것으로
관광을 마쳤는데 가이드는 능 앞에 있는 나무에서 잭 프릇이라는 과일을 땄고, 이젠 민망 왕릉으로 향했다.
★카이딘 황제릉: 시내에서 10Km 떨어진 차우구 구릉지역에 1916년~1925년까지 통치한 카이딘 황제의 능은
1920~1931년까지 무려 11년에 걸쳐 축조되었고, 20세기 초 베트남 건축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능은 베트남과 유럽 고딕양식과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인도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다른 능에 비해서 벽과 제단은
세계에서 만들어진 깨진 도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천장에 용 그림이 화려하다.
가이드는 12대 왕인 카이딘 왕은 민망 왕과 반대되는 왕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이 자기무덤의 조성을 위하여
세금을 더 부과했으며, 프랑스 건축가를 초빙하여 만들었기에 많이 화려하고 프랑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게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며, 후궁도 많이 거느리지도 않았고, 일찍 죽어 유일한 아들이 마지막 황제인 13대의
바오다이로 1945년 8월 30일 후에 궁전에서 베트남제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퇴위하여 막을 내렸다.
<1 36계단 입구 2 우측 문무관 석상 3~4 공덕비 5~6우측과 좌측에서 찍은 황제의 동상 7 황제의 제례단
8 실내 마지막 장식을 보고 나옴 11 황제가 사용하던 물품이 전시되었지만 보지 못함 12 좌측 문무관 석상>
[2대 민망 왕릉 관광]
민망왕릉까지 15분 정도 걸려 도착했으나 이미 문이 닫혔는데 다시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내일 들리겠다고 했으나
아무도 대답이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이 참았으며, 주차장에서 만다라 꽃을 만났다.
이 꽃은 인도 산호나무(Coral Tree Indian) 또는 만다라(曼陀羅, Mandara)라고 부르는 꽃으로 뉴질랜드 오클랜드
장미공원에서 처음 본 꽃나무인데 여기서 만나 반가웠으며, 로맨스 호텔로 향했다.
★민망 왕릉(Minh Mang Tomb): 현존 왕릉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민망왕릉은 응우옌 왕조의 두 번째 통치자인
민망왕 1820~1840년까지 재임 시에 설계되었고, 왕의 사후인 1841년에 공사가 시작됐다.
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좌우 두 줄기의 강이 향 강과 만나는 곳으로 장대하고 근엄한 느낌의
왕릉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건물 조각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민망 왕은 정치를 잘해서 베트남 국민에게 칭송받는 왕이지만 더 유명한 것은 500명의 후궁과 142명의 자식을 둔 것이라고 했으나 다른 자료에는 1,500 명의 후궁에 1,000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민망할 정도로 후궁이 많았던 그가 마시던 술 민망주는 약제로 만든 술인데 정력제로 많이 팔린다고 한다.
<1 닫혀 있는 민망왕 입구 2 왕릉 관리소 3 인도 산호나무 꽃(만다라) 4 로맨스 호텔 로비>
[옵션(40$) 아오자이 쇼]
아오자이 쇼를 보기 위해 자전거 택시인 씨클로를 타고 출발하기 직전 혼란한 틈을 이용한 사기꾼에게 일만 팔천을
사기 당한 것은 작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당한 것으로 룸메이트가 5만 원 권 있냐고 물었다.
있다고 했더니 여기 오만 이천원 잔돈과 바꾸어 주라고 했는데 중국에서 잔돈으로 큰돈과 바꾸어 주면 작은 선물을
주는 것을 자주했고, 티무엔 사원에서도 했기에 바꾸어 주었는데 이제는 달러와 바꾸자고 몇 명이 달려들었다.
바로 씨클로가 떠나면서 잔돈을 세어 보니 3만 2천이었는데 잔돈을 세어 볼 수 없었던 것은 달러 장수들이 방해를 했기 때문인데 이들이 한 통속이 되어 사기를 친 것으로 룸메이트 권유 때문에 눈 뜨고 사기를 당했다.
많은 액수가 아니어서 공부한 셈치고 마음을 다스렸고, 후에의 야경을 구경하며 1시간 정도 탔는데 볼 것도 없어
너무 지주했으며, 쇼는 응우엔 왕조를 가미해서 시나리오를 만들어 좀 지루함을 덜하게 했다.
황제에게 받쳤던 술을 관광객에게도 나누어 주었는데 팁을 주면 잔이 비는 즉시 채워주었고, 가슴에 태극기가 있는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이 등장하면 1시간짜리 쇼는 끝나며, 술 좋아하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했으나 너무 지루했다.
<1 씨클로 타고 본 후에시 야경 2~4 태화전에서 황제에게 바친 술을 관광객에도 나누어 준다. 5 끝 장면>
[4] 2019년 05월 23일 목요일 흐림, 비 석/한
●일정: 다낭 이동[1 까오다이교 사원 2 다낭 대성당 3 영흥사 4 한강 유람선]→ 01:50 부산 향발→
TW152편(5h)→ 07:50 부산 도착
※다낭: 베트남 중부에 있는 직할시로 고대는 참 족의 근거지로 역사적인 곳이며, 1858년 프랑스에 점령되면서
식민정부의 중요 항구였고, 한때 경제적으로 번창했으며, 현재는 베트남 4번째로 큰 도시이다.
베트남전쟁 때 미군의 기지이었으며, 1997년 직할시가 되었고, 2000년대 해변풍광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호텔과
리조트가 건설되었고, 2017년 제29차 APEC 정상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한 강(Song Han)을 두고 동쪽의 선짜 반도와 서쪽의 시가지로 나뉘며, 동서로 뻗은 흥 브엉(Hong Vuong) 중심
거리와 판 쭈찐 거리와 만나는 곳이 다낭의 중심부로 참 족 유적지 말고는 볼거리가 별로 없다.
[까오다이교 사원 관광]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한다는 ‘높은 곳’은 신이 지배하는 천국을 뜻하지만 신의 이름의 약자이기도 하며, 사원은
작고 좁아 볼 것이 없었으나 그들이 숭배하는 사원 안에 있는 둥글고 큰 외눈(지고의 눈)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칸 반도에서도 외눈을 본적이 있는데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은 ‘이념은 모든 종교는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 또는
까오다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까오다이교 사원: 까오다이교의 본산으로 유일신교로서 호아하오교와 함께 베트남의 양대 신흥종교이며, 사원은
발을 벗고 남자는 우측으로 들어가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며, 총 9개의 계단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상징한다.
하루 4차례 열리는 기도 시간에는 2층 베란다에서 종교 의식을 구경할 수 있다.
※까오다이교: 1919년 식민지 관료였던 레 반 쩨우(Le Van Chieu)는 동서양 종교 서적을 탐독하고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교리를 종합하여 베트남 현실에 맞는 종교를 창건하여 약 2만 6천 명의 신도가 있었다.
1926년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고, 1930년 일본은 까오다이교의 지도자들과 접근을 시도하였고, 반 프랑스적인
신자들과 베트남에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일본과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졌다.
1940년 즈음엔 추종자가 50만 명이나 되었으며, 프랑스의 박해가 시작되었고, 1943년 12월 일본의 지원을 받은
쩐꽝빈(Tran Quang Bình)은 떠이닌 지방에서 재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일본은 조선소의 노동력과 정보를 제공 받는 대신 2만 명의 군사훈련을 지도해 주었고, 1945년 일본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 까오다이교 같은 친일단체들은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이양해 달라고 일본군에 요청했다.
일본 측의 반응이 없자 일부 친일집단은 반일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8월 일본의 항복했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군과 연합한 적도 있으며, 베트콩을 지원하지 않아 통일 후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75년에는 20여 교파로 확대되고, 신도 수도 20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까오다이교 1 본당의 외부모습 2 사원 안의 외눈? 3 부속건물과 정원>
[다낭 대성당]관광]
다낭대성당은 사진이 예쁘게 나오면서 관광객에게 유명해졌으며, 프랑스 식민시절에 프랑스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건축한 성당으로 외부의 핑크색은 포도주 또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첨탑에 있는 수탉 풍향계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수탉 성당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특이한 것은 성모마리아 앞에서
향을 피우는 것이라고 가이드가 이야기했으나 내부는 볼 수가 없어 그런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한국관광객이 많았으며, 여기서도 이름 궁금한 파파야를 닮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가 있었고, 혼자 한 바퀴를 돌고
팀과 합류하여 차로 향하는 길에 도로 가운데 있는 ‘레이디 팜’은 파나마에서 봤고, 우리는 노니 판매장으로 갔다.
★다낭 대성당: 1923년 2월, 프랑스통치 때 건축된 유일한 성당으로 이색적인 분홍색 외벽과 지붕의 수탉풍향계가
있어 수탉(차카) 성당(찐 또아 꽁 가)이라 불리며, 사제 발레(Vallet)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1924년 3월 10일까지 아주 짧은 기간에 지어져 봉헌과 취임식까지 같이 진행했으며, 내부는 서구 교회를 모티브로
했고, 성서 내용을 주제로 한 삽화와 있는 아치의 고딕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성당을 찾는 사람이 많다.
주위 시장에는 좋은 가게들이 많아 저녁방문도 좋고, 유로 화장실은 거스름돈을 잘 안주려고 하기에 잔돈이 필수.
<성당 우측으로 들어가 정면을 보고 좌측을 돌면 다시 입구이다.>
[영흥사 관광]
가이드는 20032년에 지어진 절이라 깨끗하며, 유명한 것은 67m의 해수관음상은 보트피플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살아난 사람들이 기금을 마련해서 만든 것인데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태풍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그 영험을 믿고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반바지를 입으면 입장할 수 없다고 하며, 침향나무가
있다고 했으나 고가이어서 모조품을 전시해 놓았다고 베트남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많은 원숭이가 있어 먹이를 주는 것은 괜찮으나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면 야성이 있어 공격하면 물릴 수가 있는데
물리면 워낙 병균이 많아서 치료 받고 다 나을 때까지 한국에 돌아갈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사원 뜰에 큰 화분에 조성된 나무들이 볼만 했으며, 해수관음상 밑에 마련된 기도실은 온통 커다란 기둥으로 꽉 찬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았으며, 베트남 가이드도 없어 침향 목은 어디에 있는지도 물어 볼 수 없었다.
미케 해변 뒤로 보이는 다낭시가 아름답게 보였으며, 저녁 식사 후 미케 해변을 가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돈만
챙기는 한국 가이드의 사과를 받고, 다시 한 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영흥사: 다낭에서 10km 떨어진 선짜(손짜) 반도의 해발 693m에 있는 영흥사(린응사 또는 링엄사)는 2003년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자유를 찾아 떠날 때 살아난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다낭 앞 바다에서 포탄공격으로 보트타고 죽은 사람이 14,000여 명이라고 하며,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다낭
시내를 조망할 있고, 한 줄로 세웠다고 해서 붙어진 일주문을 지키는 것은 관우이다.
문을 통과하면 자연재해를 막아준다는 영흥사가 있고 대웅전에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 건강장수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 배를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포대화상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다.
영흥사에는 특별한 침향 화석이 있는데 침향은 나무가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된 수액이 수백 년 굳어서 만들어
지며, 호랑이도 치료를 위해 찾았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화석은 절의 터를 닦다가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화석은 1g에 수백만 원하는 약제로서 전체가격은 1,6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정원에는 깨달음은 얻었지만 열반에
오르지 못한 18나한이 각기 다른 동물을 타고 있는 조각도 있으며, 특이한 벵갈보리수도 있다.
안전한 항해를 지켜준다는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해수관음상은 흰 대리석으로 높이가 67m 이며, 이 보살은 중생을
구원하는 33가지 형태 중에 하나로 이마에 있는 작은 불상은 화합을 이루려는 의미라고 한다.
<1 일주문 2 영흥사 3 해수관음상 4 관음상 발아래에 있는 기도실 5 포대화상 6 린응 사원 7 다낭 시>
[한강유람선]
다낭에도 서울의 한 강과 이름이 같은 강이 흐르며 유람선은 가격이 비싸 수록 새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탄 배도
새것으로 보였으며, 출발하기 전 베트남 전통무용사가 춤으로 무드를 조성한 후 출발했다.
주황과 청색으로 변하고 주말 9시에 물과 불을 내 뿜는다는 용교 밑을 지나 붉은 색과 파랑색 그리고 흰색으로
변하는 쩐티리 다리 밑을 통과면 되돌아섰고 다시 용교를 통과 한다.
붉은 조명에 기우러 진 듯한 주 탑이 쩐티리 다리가 가까우면 선착장으로 한 40분 걸렸으며, 우리는 건너편 용교
옆에 있는 인공으로 만든 배의 부두인 ‘사랑의 부두’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공항으로 향했다.
★한강유람선: 하류로부터 투언푸옥→ 까우 송(사각뿔 주탑)→ 용교→ 쩐티리→ 꺼우 띠엔 선 다리
<1 한강 유람선 무희 2 용 다리 3 까우송 다리 4 쩐터리>
<까우송 다리>
[베트남에서 귀화한 정선 이씨(旌善 李氏)와 화산 이씨(花山 李氏)의 역사]
1. 정선 이씨: 북베트남 하노이를 수도로 하던 이왕조(李王朝, 1009~1225) 태조는 이공온(생애 974~1028)이며,
전성기인 4대 이인종(재위 1072~1127)의 아들 이양혼은 5대 이신종(재위 1127~1138)의 동생이다.
형 이신종과 왕위를 다투다 패하여 중국 북송에 머물며, 중서문하성의 평장사(平章事) 지위를 받았으나 금나라가
침공해오자 1127년 고려로 건너와 경주(慶州)에 정착했고, 그의 손자가 고려 무인정권의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힘이 장사라서 ‘금강야차’로 불렸고, 경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옥룡사 노비이며, 양아치이었던 3남매는 경주 안렴사 김자양의 고문으로 형들은 죽고 이의민은 용케 살아남았다.
이의민은 감자양이 무관으로 발탁하였고, 고려 18대 의종은 무술이 능한 이의민을 총애하여 별장에 임명했으나
1170년 정중부 난 때 의종을 배반하고 난에 가담했으며, 1173년 의종의 등뼈를 부러뜨려 살해하였다.
이의민은 반대파들에게 배은망덕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1183년 정권을 잡았던 경대승이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며,
1194년 공신이 되었고, 1196년(명종26) 이의민 아들 이지영은 장군이 되었다.
아버지권세를 믿고 동생 이지광과 함께 온갖 나쁜 짓을 했으며, 이지영은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애지중지 키우던
비둘기를 빼앗아 화가 난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의민 부자는 세력을 키우던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되어 13년 만에 이의민정권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최충헌은
이의민의 3족을 멸했고, 이지영의 비둘기강탈사건은 62년간 최씨 무인정권의 도화선이 됐다.
9세손 이우원이 강원도 정선에 정착하여 본관을 정선(旌善)으로 하였다.
2. 화산 이씨: 이 왕조의 6대 이영종(재위 1138~1175)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용상은 정선 이씨의 이양혼과 종손과
종조부 사이로 1226년 왕조가 멸망하고,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들과 배를 탔다.
표류 중에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도착했고, 고려 고종은 측은히 여겨 그 지역 땅을 주며 그를 화산군으로 봉해져
정착을 도왔으며, 원나라 침입 때 주민들과 함께 싸워 전과를 올렸고, 본관을 화산, 이용상을 시조로 받든다.
3. 베트남과 교류: 1995년 베트남 리 왕조 왕손들이 정선과 화산 이씨 대표단을 초청하여 도무오이 당서기장과
지도급 인사들의 환대를 받고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대우 및 왕손인정과 만찬에 참석했다.
베트남 인사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관례가 되었으며, 화산 이씨가 양국 관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고, 베트남
정부는 후손 이용근씨에게 왕족으로 인정하는 증서를 주었으며, 리 왕조가 출범한 날이 음력 3월 15일이다.
박닌 지방 민속 문화제로 열리는 이 왕조 축제날에는 베트남정부는 해마다 종친회장과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청하며, 2002년 12월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 왕자의 일대기를 공연했다.
<인공으로 만든 ‘사랑의 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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