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서원(鳳山書院) 편액과 주련
봉산서원(鳳山書院)은 문탄(聞灘) 손린(孫遴)선생을 모셔둔 서원이다. 이 서원은 대구시 수성구 상동(上洞) 주택가 안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은행 본점에서 수성못 가는 길로 향하다가 상동의 덕화여중으로 진입하여 첫 번째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00여 미터 가다보면 우측에 아담한 서원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이 바로 지극한 효성과 평생 학문의 길로 일생을 올곧게 살다간 문탄선생을 모셔놓은 봉산서원이다.
서원의 건립연대는 선생이 돌아가신 뒤 1735년(乙卯 영조 11년: 追補에는 乙卯, 영조 12년으로 되어있다.)에 도내의 유생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었는데, 당시 방백이던 김재증(金在曾)이 영문(營門)에 쓰기를 “선생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와 별 같으며, 바람소리를 듣는 것과 같으니 누구라도 우러르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후 1766년(영조 42)에 수성 옛 터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고, 1799년(정조 23)에 금봉산(金鳳山)아래에 사우를 이건하였다. 이 후 1803년(순조 3) 2월에 봉암사(鳳巖祠)에 위판을 봉안하고 1844년(헌종 10)에 서원으로 높여 부르고 이름도 ‘봉산서원(鳳山書院)’이라 하였다. 이 후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강당을 지어 경모재(敬慕齋)라 하였고, 1996년 후손들과 유림에서 지행당 등 수성구 상동의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家藏)으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발문(跋文)을 적은 사호도(四皓圖)가 전하고 있다.
봉산서원의 배치로는 외삼문인 지행문(砥行門)이 있고, 지행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봉산서원의 정당인 지행당(砥行堂)이 자리하고 있다. 문 바로 왼편에는 「문탄선생유허비(聞灘先生遺墟碑)」와 서재(西齋)인 송독재(誦讀齋)가 있으며, 송독재 맞은편으로는 문탄선생을 모셔놓은 봉암사(鳳巖祠)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정당 앞에 동서재가 마주하고 사당은 강당 뒤편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봉산서원의 경우 동재가 있을 자리에 사당을 배치한 것은 서원의 터가 넉넉하지 못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일직인(一直人) 문탄(聞灘) 손린(孫遴)선생은 8세 때(1573년. 선조 6년) 그의 모부인(母夫人) 박씨(朴氏)의 상을 당하자, 그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이 마치 성인(成人)이 하는 것과 같았으며, 때문에 그 혈기가 다 차지 않았는데도 슬픔으로 인해 몸을 상하게 되었다. 하루는 육즙(肉汁)으로 먹기를 권하자, 선생이 울면서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 어머니께서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오래되셨는데, 내 음식을 입에 들이는 것은 오히려 차마 할 짓이 못되거늘 하물며 고기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이 사실을 들은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선생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대로 효성이 있는 집안에서 또한 효자를 낳았도다. 『시경(詩經)』에 이르길 ‘효자가 끊이지 않으니 길이길이 복을 누리리라’라고 한 것은 바로 손씨 집안을 말한 것이도다”라고 하였다. 계동선생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문탄선생의 5대조인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선생이 효로써 정려(旌閭)를 받았고, 왕고(王考) 참봉공(參奉公), 백부(伯父) 현감공(縣監公)이 모두 효행으로 천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문탄선생은 효행으로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나 그 역시 어려서부터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학문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음을 하나의 일화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왜적이 침입하여 고산동으로 피난한 선생은 고산동 탑곡(塔谷)에 있으면서도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는 왜적 6․7명이 날카로운 병기를 둘러메고 선생이 있는 곳에 이르렀지만 선생의 기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책을 읽음에 마치 적병과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한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자 적병은 끝내 해칠 뜻이 없이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문탄선생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한강(寒岡) 정구(鄭구), 대암(大庵) 박성(朴惺),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 등의 여러 제현들과 법이산재(法伊山齋), 지암(枝巖), 오창정(五蒼亭), 청휘당(淸暉堂) 난가대(爛柯臺) 등을 다니며, 학문을 교유하면서 지내다가 문장으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선생이 늘 강학하던 장소인 선사서재(仙査書齋)를 당시 방백(方伯)이 군영을 손보는 것으로써 허물려고 하자 사림이 선생을 찾아와 글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선생이 글을 지어 서재가 허물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 내용의 핵심은 “누가 말하겠는가? 이 한 서재가 왜적의 화에도 면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 군영을 설치하는 데에는 벗어나지 못하였다고.”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방백이 이 글을 읽고 탄식하여 말하길 “진실로 곧은 선비의 저항하는 말인즉 허물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과감성 있는 그의 언행은 1611년(광해군 3년)에 동방의 주자(朱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의 종사(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종질(從姪)인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올려 종사하게 하는 직언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선생은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의 직을 맡고 있다가 1611년 부정척사문의 일로 유안삭직(儒案削職)당하였다. 이 때 선생은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잠와(潛窩) 이명준(李命俊), 영천군수 현주(玄洲) 조찬한(趙纘漢) 등의 벗들과 더불어, 오매정(五梅亭)과 1607년 정월에 신천(新川) 가에 있는 계실(溪室)에서 남쪽으로 열 걸음 정도 되는 지점에 지은 문탄정사(聞灘精舍)에서 교유하면서 지냈다.
또한 선생은 안동(安東), 상주(尙州) 교수(敎授)를 지낸 뒤 1618년(광해군 10년)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다. 이 때 「정선생질심경의의(鄭先生質心經疑義)」를 짓고 서애(西厓)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는데 교정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나 병으로 사양하고, 예조좌랑겸춘춘관기서관(禮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에서 병조좌랑(兵曹佐郞), 단성현감(丹城縣監),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옮기는 등 쉼 없이 관직생활을 하다가 1628년(인조 6년) 10월 정침에서 작고하였다.
【봉산서원 주련 시구 풀이】
一家花樹敦倫 일가화수돈륜
絃誦四時有聞 현송사시유문
兩世羹墻寓慕 양세갱장우모
朝暮自怡白雲 조모자이백운
古今特立靑嶂 고금특립청장
한 가문의 화수 돈독하고 질서 있다네.
언제나 글 읽는 소리 들려오니,
두 세대가 추앙받고 흠모하네.
아침저녁 흰 구름은 스스로 기뻐하고,
예나 지금 푸른 산은 홀로 우뚝 서있네.
사진 1. 봉산서원(鳳山書院) 전경. 1844년(헌종 10) 건립.
첫댓글 후범 님. 이제 그림 잘 보입니다. 훨씬 이해가 잘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