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6대왕 성종은 961년 태조 왕 건의 아들 대종과 선의태후 유 씨의 차남
으로 태어났고 이름은 치입니다. 969년 아버지 대종을 여의고 개령 군을
세습하였으며 어머니 선의왕후마저 여의게 되자 성종과 두 여동생들은 할머니
인 신정왕후의 손에 길러졌습니다. 경종이 위독하자 내선으로 왕위에 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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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본래 전왕이자 사촌형인 경종은 성종의 여동생인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2살 된 아들 왕 송(후일 목종)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국사를 맡을 수가
없었기에 대신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최지몽 이라는 책사가
꿈을 현몽해 지시한 것으로 설정을 하더이다만 성종은 조카 목종을 개령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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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임명하고 친자식처럼 길렀다고 합니다. 즉위 직후 유교적 통치를 선언
하였고, 아버지 왕 욱을 대종 선경대왕으로 추존하고, 모후를 선의왕후로
추존한 뒤 종묘에 합사하였습니다. 이후 태조의 기일 전후 5일, 아버지 대종과
어머니 선의왕후의 기일 전후로 3일간 육식과 음주를 하지 않고, 도살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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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살을 금하고 경건하게 보냅니다. 호족들 중에는 불교 정책에 반하는 점과
그가 대종의 아들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주장
하며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최 승로 등 유학자의 자문·건의로 신정을
단행하고, 국자감에서의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고려 초창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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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반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 집권적인 봉건 제도를 확립하였습니다.
그해에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정하였고, 983년(성종 2년) 2성
6관을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한 7시를 설치하는 등 중앙 관제를 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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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언론을 맡은 사헌부, 군국의 기밀기관인 중추원 등을 두었습니다.
한편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지방에는 처음에 12목을 설치하였고 팔관회,
연등회를 폐지하고 천자가 내리는 명령인 조서를 교서로 낮추는 등 북송에
사대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평가도 있으나 천자가 천제를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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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인 원구단을 또한 이 때 설치하여 국가의 안정과 체제정비에 힘쓴 실리
적인 군주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습니다. 광종, 성종의 노력으로 문치주의
전통이 수립되었고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성종의 두 누이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고종 사촌인 헌숙왕후는 호족을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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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하려던 백부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광종의 태자 경종의 왕비가 된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경종은 천추태후의 사이에서 아들 개령 군 ‘송’을
낳았고, 헌정왕후와의 사이에는 소생 자녀 없이 사망합니다. 경종이 죽자
헌애왕후는 궁궐에서 살았고, 헌정왕후는 왕륜사 남쪽에 있는 사저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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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어요. 그러나 헌정왕후는 이웃에 살던 이복 숙부 왕 욱과 정을 통하였고,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왕 욱의 집 가노는 집에 방화를 하여 왕과 대신
들이 오게 합니다. 이때 임신 사실이 성종에게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사수
현(사천 시)으로 유배 보내고 그녀는 안종의 유배 가는 길을 배웅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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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산통을 느껴 아들인 대량원군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수태 중 왕욱의 사저에 있다가 발각되어, 부끄러워
울며 도망가다가 출산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고려사 후비열전과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출산 직전 그녀는 이웃에 살던 왕욱의 사저에 있었다고 하는 것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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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 쪼게 무게가 실립니다. 아이는 성종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종이 명하여
보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돌보게 합니다. 한편 천추태후 역시 김 치양과 간통
하다가 발각됩니다. 경종이 죽은 후 외가의 친척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김 치양을 만나 자주 교류하다가 사통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공공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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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성종은 김 치양을 처형하려 했으나
헌애왕후의 부탁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대대적으로 실추되었을 것입니다.
성종 12년(993)에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대군이 고려로 침략하자 친히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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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안주)까지 나아갑니다. 이후 서 희를 적진에 보내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합니다. 또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혔습니다. 고려사에서 성종 때 ‘서 희’라는
인물과 ‘강 감찬’ 은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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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4년(995) 잠시 중단된 개혁을 재개하여, 6관을 상서 6부로 하는 등
관제를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12주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습니다. 백부 광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과거제도를 강화, 장려하였고, 숭불의 폐단을 고려하여 팔관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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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였고 밖으로는 993년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동북·서북 지방에 특히 유의
합니다. 건국 이후의 고려는 외 왕 내제를 지향하였으나 그는 송나라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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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정책과 동시에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사대외교 정책을 추진하여
호족,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조선 성종과 사망한
나이도 같을 뿐더러 , 두 왕 모두 업적이 큽니다. 아들을 얻으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997년 음력 10월에 병이 위독하여 조카인 개령군 왕 송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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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38세 사망). 자신의 외 조카(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사촌 동생(왕 욱의 아들)인 현종을 자신의 친자와 같이 양육하였습니다.
그 중 성종의 둘째부인 문화왕후 김 씨의 딸은 후일 현종의 원정왕후가
되었고, 셋째부인 연창궁부인 최 씨의 딸은 현종 비 원화왕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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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종은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천추태후와 성종이 남매로서 각별한 것으로
설정되어있긴 합니다. 그렇다면 성종은 최 지몽의 해몽을 믿은 것일까?
2021.3.21.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