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 순교자를 기리는 비, 상주 신앙 고백비 *
경북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 석간산(石壇山)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 (徐光修) 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2년)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10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비롯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렇듯 감대하게 했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비가 오늘 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고백비의 역사적 유래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악랄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66년 한불 수호 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石壇山) 아래 높이 127센티미터,폭 39cm, 두께 22cm, 두께 22cm의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를 건립한 것이다.
박해를 피해 도피생활 하던 김삼록 도미니코
신앙고백비가 서있는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김씨 집안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왔다고 전해진다. 그 중 차남인 삼록 도미니코의 신앙심이 유난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박해에 못 이겨 배교했지만 김삼록 도미니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이곳저곳으로 도피생활을 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났으나 그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산골짜기에 숨어사는 농부 삼록에게는 박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도미니코는 오매불망 천주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겨야하는 자신의 신앙심을 참을 수 없어 단단한 바위에 새겨 신앙고백비를 만들었다.(1894~1900년 추정) 자신과 집안문중이 살고 있는 석단산 아래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화강암에 전통적인 직사각형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에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얹어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상단의 십자형 돌에 천주라는 글이 새겨놓고 그 아래 비석 부분에는 1: 천주님 2: 교황님 3: 주교님 4: 신부님 5: 신자들을 위한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장감을 위해서 한자와 풀이한 한글을 옮겨보았다.
비문과 해제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架)천주성교회 성호십자가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움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父)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五: 敎于衛咸(友)다섯 째는 교우들을 받들어 모신다.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도명고(도미니코) 바침
癸卯生本(古) 盆城(今.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김씨다.
언뜻 보면 그 당시 언어표기에 문제점이 보이나 생각하고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우리말은 한자로 한자로 표기가 안 되는 우리말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자의 음만 따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神夫衛咸(신부 衛함. 아비(父)대신에 지아비(夫)를 사용한 것과 위(爲)한다는 의미의 한자를 소리 위(衛)로 차용한 점은 당시 한자에 능하지 않았을 한 농부가 최선을 다한 표기로 이해의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또 자신의 세례명인 도미니코를 도명고로 새기고 천주님은 물론이지만 교황님과 주교님 신부님에 심지어 신자들까지 받들어 모시자는 그 큰 신앙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국천주교회사 유일의 신앙고백비
큰 돌을 운반하고 세우고 글을 새기는 과정에서 삼록은 쌀 다섯 가마 분의 금액을 부담하고 마을에 사는 이갈방 노인과 몇몇 신자들의 도움으로 나머지 비용을 댔다. 그리고 삼록은 그 고백비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봐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들을 많이 심어 사람들의 이목을 가렸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말하지 못해 애가 타는 천주님 사랑을 그렇게 숨겨서라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신앙고백비가 교회사적으로 공식화 된 것은 1980년대. 1945년 해방 후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내어 땅을 넓히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상주 서문동성당 이성길 신부가 김순경의 둘째 아들을 만나 사실을 듣고 교회에 알렸고 2년 뒤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그 후 안동교구와 남성동성당을 중심으로 주변부지 매입 후 성역화가 이루어지고 대형 십자가와 14처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이 설치되었으며 2009년 12월22일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562호로 지정되었다.
산 속 깊은 곳에서 외롭게 어렵게 자신의 신앙을 돌에 새긴 김삼록 도미니코 형제의 바위 같은 믿음은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 한다’는 성경말씀처럼 한국천주교회사에 발견된 유일한 신앙고백비로 남아 우리의 뜨뜻미지근한 신앙의 자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