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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월8.9일
산행지:검단지맥 (one shot)
산행거리:56km 산행시간:16시간11분
한남 검단지맥이란
한남검단지맥이란 칠장산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한 한남정맥이 내려오다가
석성산과 할미성을 거쳐 향린동산에서 두가락의 산줄기가 분기되는데
한남정맥은 남서진하여 아차지고개로 내려가고,
또 한줄기는 북서진하여 법화산(385m), 불곡산(313m), 영장산(414m),
검단산(535m), 청량산(480), 남한산(벌봉, 521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쳐 하남시 바깥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다하는 51.6km 산줄기를 말한다.
한남정맥상 걸쳐 있는 지맥들
앵자.관악.독조에 이여 검단지맥으로 발길을 옴긴다.
이번 겨울은 눈도 별로 안오고 날도 그리 춥지 않은 날들이지만
따뜻함속에 갑자기 영하로 떨어지면
추위를 느끼겠끔 몸에 반응이온다.
다소 쌀쌀한 날씨 검단지맥을 가기위해
전철 세번을 갈아타는 번거러움속에 분당선 안에서 반가운 분도
만나고 1시간쯤 일찍 도착한 보정역1번 출구로 나오니
수도권의 변두리 역이라 허허벌판 날은 춥고 갈곳도 마땅치 않아
겨우겨우 찾은 파리바게트 안에 커피숍에서 함께 할 산우들을 기다린다.
10시가 되자 모두 모여 택시로 이동 88CC로 이동한다.
골프장 입구에 도착을 하니 경비원이 멀리서 불빛을 밝히며
우리쪽으로 오면서 하는말 이곳은 절대 들어 와서는 안되는곳이라고 하며
cctv가 설치되여 있고 경고음이 울리면 경찰이 온다나 어쩐대나
겁을 준다..
일단 골프장에서 철수하고
한남정맥과 검단지맥 분기점을 가기위해
산길로 접어든다..
추운 날인데도 함께 해줄 검단지맥의 멤버
상자님.하루엠대장님,집중타공님.고진감래님.산너머
8일 22시40분 산행을 시작합니다.
검단지맥 분기봉
330봉
경비에게 한번 지적을 당했으니
골프장을 어떻게 통과를 하나 걱정을 하며
일단 골프장 정문하고 멀어지는 곳까지 우회를 하기로 한다.
본 마루금은 아니지만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진행을 하면
법화산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슨 둘레길인데??
법화산 가는길 편하고 좋은길이지만
마루금과 멀어지니 맘이 불편하다.
이제 골프장 정문도 멀어진듯 하니
골프장으로 진입을 하고..
마루금상에 있는 골프장들 지맥길에 골치거리다..
골프장을 벗어나기 위해 철조망을 넘고
무푸래고개 도착
하루가 넘어가고 9일 00시30분
이제 고생끝 편안한 길을 따라 법화산으로 이동..
법화산 00시44분
법화산에 도착을 하니
8명 정도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 추운 산정에서
기도를 하고있다...
어떤 종교인지는 모르지만 이해가 안가는 행동들...
(할레?? 아? 이런 단어들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자기들 만에 신을 모시는 행위이니
나쁘다고 볼수도 없을것 같다...
기도에 방해가 될까봐 얼렁 자리를 뜬다...
고요한 용인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고..
대치고개를 내려서기 위해
가시밭길 탐험을 하고 계단을 이용해 대치고개로 내려선다
도로 우측길을 따라 터널을 통과
다시금 마루금으로 가기위해 좌측으로 오른다
대지산 02시26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시작되는 검단지맥
시작점에 골프장이 있어 분기봉에서
시작하는 것은 조금 어려움이 있지만
남한산성.용마산.팔당 검단산까지 등로는 고속도로
길도 좋고 밤 분위기도 좋고,,
하지만 잠시잠시 찾아오는 불청객 졸음을 이겨내며
다소 빠르게 진행을 한다.
03시03분
어느덧 불곡산에 도착을 한다..
시간 여유만 있다면 차분하게 앉아 책이라도 한권 읽고 갈텐데.ㅋ
갈길이 바빠서 그리하지는 못하고..ㅎㅎ
독서 보다는 밥구경이 우선인지라 태재로 밥집 찾아 나섭니다..
태재고개로 내려서고
태재고개 03시32분
편의점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으나
알바가 어디 갔는지 문은 굳게 닫혀있고
문여는 밥집이 있길 바라며 애타게 찾으니
24시 설렁탕집이 있어 차가워진 몸도 녹이고
따뜻한 국물에 허기도 달래고 잠시 휴식
다시금 팔당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영장산 06시03분
333.4봉
고불산 07시11분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저 멀리 독조지맥.앵자지맥길 양지 파인 스키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청계산 라인도 서서히 그 모습을 과시하고..
어둠속에서 발걸음이 하루를 여는 아침의 시간으로
이동했다..
이배재고개
몸은 차갑지만 마음속에
따뜻함이 스며드는 아침이다.
도심속에 신선한 공기를 느낄수 있는 시간
밤새 걸어온 우리들의 행복에 일부분이라 느껴지는 시간이다.
저 태양이 우리와 같이 머무는 동안에
우린 검단에 끝자락에 서 있을 것이다..
망덕산 08시31분
밤에도 멋졌는데
날이 밝으니 모습들이 샤방샤방 합니다..
성남 검단산 08시57분
길이 좋으니 다들 힘든 기색없이 여유가 있습니다.
남한산성 입성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산성 밖으로 잠깐 외도를 하고
맛난 아침을 먹고
반가운 두령님도 잠시 만나고....
두령님은 하남 검단산
역으로 마중 오신다하고 가시고
..
우린 애달픈 역사 이야기가 숨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다시금 입성을 합니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주장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이란 별칭있는 남한산성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왕 때 도성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백제 주거지 2곳과 저장 구덩이 8곳 등이 확인되었을 뿐
성곽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혹은 日長城)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3,460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장성은 곧 남한산성이고, 당시 돌로 쌓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2005년에 북문과 동장대 사이의 제4암문과
수구(水口)터 주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성벽 안쪽에서 주장성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행궁터 발굴 조사에서는 대규모 건물터가 확인되어,
주장성 당시 성 안에 무기고(武器庫)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자리하였음도 밝혀졌다.
본래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다.
현대와 달리 장군이 직접 전장을 관찰하며 지휘했던 당시에
지휘소의 역할을 하는 장대는 성내에서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보통 한국의 성에서 장대는 단층 형태가 주류이나,
남한산성은 2층 누각형태다.
이와 같은 형태는 경기도 수원시의 수원 화성에서도 확인된다.
남한산성은 넓어서 총 5개의 장대를 설치했는데,
18세기 중엽에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세웠지만, 현재 남은 것은 서장대다.
"수어장대"란 이름은 이 서장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장대의 편액을 수어장대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의 수어장대 건물은 1896년 유수 박기수가 재건한 것이다.
신라와 조선시대 역사가 숨겨져 있는
남한산성을 빠져 나와 벌봉으로 이동을 한다.
벌봉 12시07분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이고
혼자 걷는 외로움을 보단
함께걷는 즐거움을 나누워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어떤 길이던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듯이
어떤 목적된 길이 주어진다면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발걸음으로 함께 할수 있는 사람이 되는것
같은 목적 같은 마음을 갖는 다는것
결코 쉽지않는 마음이다...
묵묵히 걷는 걸음일지라도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편안함
그리고 자신보다 더 이해하고 싶은 배려심
그렇게 함께 걷는 걸음이
매 순간 우리들 맘 속에 간직 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하는 동안
그리고 주어진 시간 만큼은
온전히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것이다.
522m 삼각점
검단지맥에 진수를 보여줄
용마산과 검단산이 지척이다...
제대로 돌아보고 달아둔 것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정표들
달아 둔지가 얼마 되지 않은것 같은데...
은고개 13시10분
은고개에서 용마산가는길
마루금을 고집 하기 보다는 편하게
이용하라고 잘 만들어 놓은
등로를 따라 가기로 한다.
약간에 허벅지 힘이 들어가는 된비알을 치고
용마산에 선다.
14시36분
첫 지맥길이지만 꿋꿋하게 잘 와준 상자님..
앞으로 산길이 더욱더 기대 됩니다..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해낸 것을 즐기는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들보다 저 잘하려고 고민하지 말자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게 더 중요하다,
서울에 도심이 시야에 들어온다.
불암.수락 그리고 뒤편에 북한산까지..
올해는 또 얼마나 담박질에 매진 하실지
저 같이 뛰 다니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올 한해 목표했던 산길을 다 다닐수 있을지.
시간과 몸이 받혀 주어야 할텐데....
검단지맥에 최고봉에 섭니다.
15시56분
검단선사는 매일 해가 중천에 뜨면 소년과 만나서
바둑 두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약속보다 늦게 힘없이 산에 올라와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간호를 하다가 늦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의원 말씀이 어머니의 병은 대추하고 곶감이 약이래요.
그 두 가지를
한꺼번 에 넣고 달여 먹으면 병이 낫는데요.
그래서 그 것을 구하려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해요.
북쪽으로 멀리가면 그 곳은 가을일 테니까 오늘 당장
밤을 세워서라도 부지런히 가서 구해 와야 지요.
자신이 도인인 줄 모르는 이 소년과 혈육 이상으로 정이 든
검단 선사는 자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칠 수도 있었으나,
소년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순수한 심성을 잃게 될까봐,
자신이 6일 후에 약을 구해 오겠다고 약속하고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라고 부탁한 후 길을 떠났습니다.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소년을 뒤로 하고 검단 선사는 길을 떠났으나,
소년의 어머니 병은 날로 더해가 검단 선사가 떠난 지
닷새 째 되는 날 운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검단 선사는 축지법을 써서 묘향산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대추와 곶감을 구해 가지고 약속된 날짜에
돌아왔으나 소년은 소식이 없었습니다.
부락에 내려가 수소문을 하니 어머니를 장사지낸
소년은 울면서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검단선사는 자신의 깨우침이 아직도 미치지 못함에 무상함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 채 힘없이 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 절을 짓고
절 뒷산에 올라 산천을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소년 생각에 능선을 따라 하염없이 동쪽으로 길을 가다
해질녘에 닿은 곳이 지금의 검단산이고,
이 곳에서 검단선사는 작은 암자를 짓고 도를 닦다 돌아가시니,
이 산의 이름을 검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절터가 있고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옛 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명산 이었다.
광악산의 북쪽 정상인 검단산(657M) 검단산은 신앙의 산이다.
한성시대 백제 황실은 태양의 기운을 받고
하늘을 숭배하던 부여계의 해씨(解氏)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동쪽의
높이 솟은 검단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검단산을 생명의
태반으로 인식하고 숭모하여 동악숭산(東岳崇山) 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에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와 동명왕의 묘단을 세우고는
해마다 역대 왕이 친히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또 태종실록 14년 3월 18일 신묘일조에는 "왕이 내시별간을 보내어
광주의 성황과 검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 하였고
세종 실록 지리지 광주 목조에는 " 검단산은 광주의 동쪽에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광주의 진산이라 일컷는다." 고 하였다.
또 대동산경에는 "검단산의 꼭대기에 기우제를 지내는 단이 있다."
고 했는데 , 해동 지도에도 검단산의 기우제단이 보인다.
광주부 읍지,첩역지도,대동여 지도,중정 남한지,태종실록 등에
산이름이 모두 검단산으로 기록 되었다.
지명의 본래 의미는 "검(웅대하다)+ 단(??) " 에서 출발한것이다.
그러므로 검단산은 크고 신령한 기운이 넘치는 산이라 하겠다.
광주목읍지에 "백제의 승려 검단 선사가 살았기 때문에 이름이
검단산이 되었다" 고 기록한 글은 잘못된 주장이다.
이미 많은 역사 학자들이 검단 선사의 허구를 밝혀 냈고
믿을 바가 못된다.
옛사람들조차 검단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해서
이처럼 억지 논리를 편것이다.
검단이라는 지명은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검단리,전남 신안군 중도면
검단산, 대구시 북구 검단동,등 전국에 허다하다.
이처럼 검단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널리 산재한 까닭은
고대 마한의 소도당굿,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동예의 무천,
백제의 5워제등..제천신앙이 전국에 성행했기 때문이며
천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땅을 "소도" 또는 검단이라
고 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단산은 수천년동안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명기가
청정한 신령한 기도처라 할수 있다.
동악 숭산이란 이름만 보더라도 백제인들이 이 산을 얼마나
신령스럽게 숭배 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역으로 마중 오신 두령님
누군가가 누눈가를 위해 찾아 준다는것
참 고마운 마음이다,^^
팔당 건너편에 언제나 가도 좋은 운길산
한강기맥길과 백운봉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운길.예봉.적갑산이 다정스럽게 모여있고..
이제 하산만 하면 된다..
날머리 창모루로 내려 서는길에 한강에 모습..
예봉산이 꾀나 높아 보입니다..
아침에 반갑게 맞이 했던 태양은 마지막 빛을 발산하며
저편 너머로 넘어 가려고 한다..
친구란 참 좋는 벗 인듯 합니다.
한달음에 마중을 온걸 보면...
저 빛이 다 넘어 가기전에 하산해야죠...
292.0m 마지막 삼각점
검단지맥 날머리
17시19분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시작한 검단지맥 56km
함께 해준 마음 따뜻한 산우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였습니다.
마중 와 주신 두령님.산이란님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다음 지맥길에서도 즐거운 산길이여 갈것을 약속하며
검단지맥 산길 이야기를 마칩니다.^^
첫댓글 산너머 대장님의 장쾌한 산행기를 이곳에서도 볼 수 있네요. ^^
저도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집이 서울인데도 아직 검단지맥 못했습니다. 저도 56 km 한번에 끝낼 수 있나요? 몇년전에 화대종주는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ㅎ
아마 저는 2 - 3번 나눠서 해야될지십네요. 무한도전 클럽이 진짜 무한도전이네요....
검단지맥은 길이 너무 좋아 이른 새벽에 시작한다면 충분 할거라 봅니다.
용마산 오를때 쪼매 힘들고
나머지는 평탄한 길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