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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4. 3. 15.~16.(금,토) - 음력(2. 6.~7.), 일출 06:45~일몰 18:43
●산행지: 옥룡지맥(玉龍枝脈) 1구간 졸업
●산행코스: 옥정마을-헬기장-백룡산(420.8m)분기점-365.8m봉-명동재(361.3m)-조리봉(227.7m)-가는재-오봉산(162.3m)-노루목재-118.7m봉-나주힐스 전 삼거리-114.1m봉-93.8m봉-곰봉(137.2m)-78.5m봉-황교/원금수마을-군계휴게소-태마산(85.4m)-진등고개-820번지방도-장송마을표석-57.7m봉-청룡고개-두류산(106m)-82.5m봉-삼장고개-101.2m봉-102.6m봉-110.7m봉-할매당고개-구수봉(153.1m)-솔골재-86m봉-장골로-고문산(103.5m)-망해산(148m)-112.3m-23번국도-60.9m봉-23번국도-114.5m봉-할미당고개-93.4m봉-71.7m봉-79.9m봉-77.1m봉-월양터널-62.7m봉-대전교차로-77.3m봉-57.1m봉-남악동강로-몽송봉(88.5m)-옥룡산(132.9m)-몽탄나루(몽탄대교) 합수점
●먹거리: 생수1,500cc, 튀김건빵, 호떡빵2, 사탕3
●준비물: 고아텍스, 바람막이, 무릎담요, 상의, 모자, 장갑, 스틱, 헤드랜턴, 전지가위, 말방울, 충전지2, 충전짹, 핫팩2, 목폴라, 휴지, 물티슈,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손수건2, 양말, 띠지15
●거리: 약 53.8Km
●소요시간: 31.29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32,700, 찜질방23,500, 편의점5,000, 군계휴게소4,300, 저녁82,000, 공산할인마트9,200, 직행5,200, 뒤풀이9,000, 고속33,300
●날씨: 0~18
●산행경과:
* 3. 15.(금) 36.4km
- 06:18 : 출발
- 06:49 : 헬기장
- 06:55 : 백룡산(420.8m)
- 07:12 : 명동재
- 07:32 : 조리봉(227.7m)
- 07:44 : 가는재
- 07:51 : 오봉산(162.3m)
- 08:10 : 노루목재
- 08:15 : 118.7m봉
- 08:32 : 삼면봉(104m, 영암군 신북면, 금정면 → 나주시 세지면)/ 나주힐스C.C.
- 08:39 : 신지로
- 08:46 : 114.1m봉
- 09:00 : 93.8m봉
- 09:28~51 : 곰봉(137.2m)
- 10:33 : 황교마을
- 10:45 : 백제농장
- 11:05~13 : 군계휴게소
- 11:40~46 : 테마산(85.4m)
- 11:49 : 삼면봉(86m, 영암군 신북면, 나주시 세지면 → 왕곡면 )/ 통정대부사복사정묘
- 12:23 : 진등고개
- 12:37 : 30번도로
- 12:49 : 삼면경계면(나주시 왕곡면, 영암군 신북면 → 나주시 반남면)/ 전라남도종자관리소
- 12:58 : 대서버스정류소/ 함양박씨세장산
- 13:25 : 57.7m봉
- 13:39 : 청룡고개
- 13:49 : 두류산(106m)
- 14:00 : 삼면봉(81m, 나주시 왕곡면, 반남면 → 공산면)
- 14:22 : 82.2m봉
- 15:00~05 : 59.5m봉
- 15:05 : 삼장터널
- 15:40 : 101.2m봉
- 16:08 : 102.6m봉
- 16:38 : 인원농장
- 17:04 : 110.7m봉
- 17:13 : 할매당고개
- 17:35~41 : 구수봉(153.1m)/ 면계(왕곡면 - 공산면)
- 17:58 : 솔골재/ 사동고개
- 18:05 : 86m봉
- 18:13 : 백사보건진료소/ 장골로
- 18:25~20:34 : 중포리 충주산방사거리
- 20:52 : 가송리 대주사료사거리
* 3. 16.(토) 17.4km
- 06:17 : 출발
- 06:58 : 고문산(103.5m)
- 07:15~35 : 망해산갈림길/ 면계(공산면 - 동강면)
- 07:25 : 망해산(148m)
- 07:49 : 112.3m봉
- 08:12 : 매산재/ 인가
- 08:30 : 60.9m봉
- 08:45~09:05 : 병반재/ 하얀농장(축사)
- 09:17 : 114.5m봉
- 09:28 : 할매당고개/ 인동축산
- 09:40 : 93.4m봉
- 10:03 : 71.7m봉
- 10:10 : 백련산로/ 2차선도로
- 10:51 : 79.9m봉
- 11:07 : 77.1m봉
- 11:12 : 월양터널
- 11:25 : 대전교차로
- 11:44 : 77.3m봉
- 11:53 : 49번국지도/ 동강로
- 12:16~38 : 몽송봉(88.5m)
- 12:26 : 느러지전망대
- 13:27~33 : 옥룡산(132.9m)
- 13:46 : 몽탄나루
- 13:48 : 12번
- 14:26 : 10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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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룡지맥(玉龍枝脈)이란
땅끝기맥 활성산(498m) 북쪽 1.3km 지점의 418m봉에서 북서쪽으로 분기해서 형제봉(288.4m)을 지나 5.4km 떨어진 백룡산(420.8m)에서 산줄기는 다시 남북쪽 두 갈래로 갈라진다. 북쪽으로 이어진 옥룡지맥(玉龍枝脈)은 조리봉(227.7m), 오봉산(162.3m), 태산(85.4m), 두류산(106m), 고문산(103.5m), 옥룡산(132.9m)을 지나며 삼포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되어 영산강 몽탄나루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2km인 산줄기이고, 남쪽으로 이어진 백룡지맥(白龍枝脈)은 마산(159.2m), 13번국도, 호산(155.9m), 천제산(58.3m), 태산봉(84.2m)을 지나 영암천의 좌측(북측) 분수령이 되어 영암천과 영산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1km인 산줄기이다. 옥룡지맥의 끝을 옥룡산 아래 몽탄마을로 보는데는 별 이견이 없는듯 싶으나 백룡지맥의 끝은 현재의 구산리 여시머리 남쪽 들판은 매립지라 예전엔 강이었을 터이니 현재의 지형이 아닌 옛지형으로 따져 태봉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신학리 학림마을 앞 딴섬쪽으로 가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 옥룡지맥 개념도
* 옥룡지맥을 지나는 동네
* 영암군
영암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서 월나군과 아로곡현(阿老谷縣)·고미현(古彌縣)이 있었다. 일본에 유학을 전수해 준 왕인(王仁)의 탄생지가 있으며, 유적도 전하고 있다. 신라의 통일 이후 경덕왕 때 영암군으로 개칭했고, 월출산은 신라의 소사(小祀)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최지몽(崔知夢)과 도선 등의 활동으로 고려초에 영암의 지위는 급속히 상승되어, 995년(성종 14)에 낭주로 승격되었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안남도호부가 전주로 옮겨감으로써 다시 영암군으로 복칭되었다. 이 무렵의 영암은 남부의 황원군·도강군·곤미현·해남현·죽산현 등을 영속하는 호남 서남부의 행정중심지로서 존재하였다. 1172년(명종 2) 감무(監務)의 파견이 시작되는 것을 계기로 이들 군현이 독립해 대체로 현재의 지역에 상응하는 구역으로 축소되었다. 월출산에는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동석(움직이는 돌)이 세 개가 있다고 전해 오는데 그 하나는 운무봉(雲霧奉)에 나머지는 도갑과 용암 아래에 있었다 한다. "월출산에는 세개의 신령스러운 움직이는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는 천명을 동원해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단 한 사람이 흔들어도 곧 떨어질 것같이 흔들거렸다. 높이는 1m 정도이고 둘레는 열 아름 쯤 되는 큰 바위인데 서쪽은 돌뼈(石骨)뿐인 산머리에 있고 동쪽은 끝없는 절벽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동석은 그 무게로 보아 수 백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어 보거나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이 세개의 동석 때문에 영암에 큰 인물이 난다해서 이를 시기한 중국 사람이 바위 세개를 모두 떨어뜨렸는데, 그 중 하나가 다시 옛 자리에 올라와 있어 이 바위를 신령(神鈴)한 바위라고 전하고 있다. 이 동석 전설로 인해 영암(靈巖: 신령한 바위)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나주시(羅州市)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4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남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지역이 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백제 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남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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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백룡산-3.2km-오봉산-5.1km-곰봉-2.4km-원금수마을-3.1km-13번국도-1.7km-태마산-3.6km-820번도로-4.2km-두류산-1.9km-삼장고개-4.6km-구수봉-6.4km-고문산-2.1km-망해산-3.1km-114.5m봉-7.3km-옥룡산-0.6km-영산강 몽탄나루
* 구간거리
- 접속 : 영암 신북면 명동리 옥정마을 ~ 지맥분기점 1.7km
- 백룡산 ~ 삼장고개 25.2km
-. 백룡산 ~ 13번국도/신북논공단지 13.8km
-. 13번국도/신북논공단지 ~ 삼장고개/23번국도 11.4km
- 삼장고개 ~ 영산강 몽탄나루 24.1km
-. 삼장고개 ~ 망해산갈림길 13.1km
-. 망해산갈림길 ~ 몽탄나루 11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13번국도/신북논공단지: 군계휴계소, 암뽕순대, 기사식당, 한정식뷔페, 화장실
- 신북택시: 061)472-9100
- 공산개인택시: 061)335-1500
- 나주 중흥오투스파 찜질방: 전화 061)335-0200, 15,000원, 21시 이후 20,000(연중 무휴 24시간 영업, 광주,나주 등지에서 999, 999-1번 이용 일단 남평정류장으로 와서 702번으로 환승, 30분 소요), 광주송정역 좌석 02번, 호수공원 하차
- 영암군 시종면: 그랜드모텔
- 동강 택시: 061)335-8877, 010-3636-4306
- 무안 몽탄 택시: 061)453-1365
- 무안군 일로읍: 일로여인숙, 전일여인숙
* 서울에서 옥룡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용산역 ~ 광주송정역: 05:07~07:06, 2h, 46,800원
- 서울 센트럴시티 ~ 영암: 08:50, 15:05, 4.10h, 38,600~47,800원
- 서울 센트럴시티 ~ 나주혁신도시: 08:50, 10:50, 15:05, 3.30h, 32,7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05:30, 05:40, 06:15, 07, 07:10, 07:20, 07:30, 07:55, 08, 08:05, 08:10, 08:15,08:20, 08:25, 08:28,~ 22, 22:10, 22:20, 23, 23:20, 23:40, 23:50, 00:45, 01, 3.20h, 20,800~33,800원
- 광주 유스퀘어 ~ 영암: 05:50, 06:30, 07:10, 07:55, 09:05, ~18:20, 19:30, 20:30, 1.10h, 8,700원
- 광주 ~ 신북 ~ 명동리(광주에서 영암 가는 버스로 신북에서 내려 택시 이용)
-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옥정마을 백룡경로당
-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옥정마을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나주 동강 택시: 061)335-8877, 010-3636-4306
- 몽탄버스정류장 ~ 동강면버스정류장 ~ 영산포공용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 몽탄버스정류장에서 12번 마을버스(1일 6~7회, 20:10막차) 타고 동강리에서 100번 환승 영산포공용터미널로
- 무안 몽탄 택시: 061)453-1365
- 동강리 ~ 영산포공용터미널 ~ 나주터미널 ~ 나주역 ~ 서울역: ktx
- 일로역~익산~신탄진~서울역(환승): 07:22, 16:22, 17:48, 18:43, 5h, 24,9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동서울: 12:40, 13:20, 14, 14:50, 17, 19:10, 19:50, 21:20, 3.30h, 22,500~33,3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센트럴: 19:45, 20, 20:10, 20:20, 21, 21:15, 22:30, 23:20, 24, 3.20h, 30,80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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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과 백룡지맥의 주빈은 월출산과 태조 왕건으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지맥을 천년을 넘는 세월이 반겨준다. 역사성을 겸비한 테마와 스토리가 이처럼 풍부한 지맥은 흔치않다. 후삼국 견훤과 왕건의 쟁패전은 전국을 무대로 했지만 "태조가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니, 주변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들어와, 그 재력으로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고려사』의 한줄 기록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충분히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백룡지맥에 『덕진포 해전』이 있다면 옥룡지맥에는 몽탄강이 있다. 두 지맥 모두 월출산이 지켜보고 있으며 두 지맥을 통틀어 백룡산(420.8m)이 가장 높고 조리봉(227.7m) 이후에는 100m 내외의 나즈막한 산줄기로 이어가는 비산비야 지대로 도로 구간이 많다. 황교마을에서 13번 국도가 지나는 신북논공단지까지 2km, 태마산을 내려와 두류산 아래까지 6km, 구수봉을 내려와 솔골재에서 고문산까지 3km가 도로 구간으로 이후로도 도로를 따라 우회를 유혹하는 구간이 나온다.
두류산을 내려서면서 이후 23번국도 전후로는 옥룡지맥의 핵심공작소랄 수 있는 망개나무 가시잡목 구간이며 구수봉부터는 태청지맥 청림산과 철성지맥 속금산을 찾아보며 걷는 재미가 솔솔하다. 후반부 몽송봉(夢松峰, 88.5m)에 올라 1,100여 년 전 하몽탄 몽송골에 포위된 절체절명 왕건의 군사를 떠올려보는 한편, 느러지전망대를 다녀오는 여유를 갖기도 하고, 몽송골에서 철수하며 전세를 역전하는 운명의 도하작전을 벌인 무안과 나주 사이 몽탄강 몽탄나루에서 지맥을 마무리 한다. 금성산성 승기의 여세를 몰아 지금의 동강면 옥정리로 몰아붙인 견훤의 군대와 야음을 틈타 반전을 도모한 용의주도한 왕건 군대의 도하작전, 작전명은 야반도주?? 두대산과 파군천 그리고 몽송교차로의 식전바위는 두 영웅의 혈전을 목도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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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재(305m)/ 쇄재/ 금정면 아천리 아천마을
금정면 아천마을 위 아천저수지를 출발하여 임도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쇠재로 오르고 쇠재에서 우틀하여 백룡산에 오른다. 장의자가 여러 개 놓여져 있는 널찍한 안부 쉼터 사거리이다. 국가지점번호와 밀양박씨 지천비가 있으며 반바지님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 백룡마을
옥룡지맥 분기점인 백룡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와 금정면 아천리로 들머리를 잡는다. 거리는 비슷하고 명동리 옥정마을은 백룡경로당까지 신북터미널에서 버스가 들어간다.
옥룡지맥의 시작점이자 영암군의 삼면봉입니다.
♤ 백룡산(白龍山, 420.8m)/ 2등삼각점(영암 23/ 1990 재설)/ 옥룡지맥분기점/ 삼면봉(금정면, 덕진면 → 신북면)
사각정자 옆에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다.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옥룡지맥분기점 산패가 매어 있다. 백룡과 옥룡지맥을 통틀어 제일 높은 봉우리이고, 백룡은 왼쪽으로 덕진면 운암리와 신북면 명동리의 경계를 향하고 옥룡은 직진으로 금정면 아천리와 신북면 명동리의 경계를 따른다. 조선시대에 나주목(羅州牧) 금마면 터였던 지금의 영암군 금정면 아천리 백운 마을 아래에 용지(龍池)가 있다. 백룡산(白龍山)이라는 이름은 이 산 정상에 흰 구름이 자욱하게 일고, 뇌성벽력이 치면서 용지에 살던 백룡(白龍)이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백룡산은 활성산에서 형제봉을 거쳐 오르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영산강과 영암천 북쪽으로 등성이를 내밀고 있고, 동쪽의 금정면 아천리 골짜기는 영산강 수계의 금천(錦川)이다. 남동쪽의 덕진면 운암리 산기슭은 영산강 수계의 영암천이고, 북서쪽의 신북면 명동리 계곡은 영산강 수계의 삼포강의 발원지이다. 북쪽 두 갈래 능선은 북서쪽의 호산을 거쳐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과 영암군 시종면 태산봉에, 북쪽의 나주시 세지면 태산을 거쳐 영산포 가야산과 서쪽의 무안군 동강면 백련산과 옥룡산에 이른다. 땅끝기맥 활성산으로 올라가는 백룡지맥 분기점에 있는 영암풍력발전기와 영암읍 뒤로 월출산 조망이 좋다. 영진 5만지도에는 418.3m로 표기되어 있고 오룩스맵에는 420.8m로 되어 있다.
♤ 월출산(月出山, 810.7m)
월출산은 전남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정맥 무등산 줄기에 속하고 해발 810.7미터로 높지는 않지만 산의 몸체가 매우 크고 수려하며 1973년 3월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도갑산(376m) 지역을 합하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6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 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러왔다. 천황봉(天皇峯)을 주봉으로 구정봉, 사자봉, 도갑봉, 주지봉 등이 동에서 서로 하나의 작은 산맥을 형성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영산이라 불러왔다. 동쪽으로 장흥, 서쪽으로 해남, 남쪽으로는 강진만을 가로막고 있는 완도를 비롯한 다도해를 바라보고 있고 도갑사, 무위사 등의 사찰과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144) 등을 비롯해 뾰족한 암봉과 골짜기를 따라 폭포와 유적들이 산재해 있으며 곳곳에 얽힌 수많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말기에는 9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며 북쪽의 용추폭포, 동쪽의 구절폭포, 남쪽의 금릉경포대 등이 절경을 이루고 1978년에 천황봉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길이 51미터와 너비 0.6미터의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절벽 높이가 무려 120미터나 된다. 예로부터 월출산 산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외감을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암에 관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인데 이 동석 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靈巖)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영암군 신북면(新北面)
신북면은 영암군의 북동쪽에 위치한 면이다. 동쪽은 영암군 금정면과 전남 나주시 세지면, 남쪽은 영암군 덕진면·도포면, 서쪽은 나주시 반남면, 북쪽은 나주시 세지면·왕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말까지 영암군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북이종면이라 하였으며, 수현 등 65개의 마을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북일종면(北一終面)의 탑동, 호산 2개의 마을과 종남면의 복용동 일부, 나주군 비음면의 갈곡, 학동, 양계, 모산 등 14개 마을, 나주군 반남면의 평촌, 성덕, 하촌의 일부, 나주군 세화면의 황계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신북면이라 하였다. 개칭 당시 갈곡리, 학동리, 양계리, 모산리, 금수리, 장산리, 명동리, 이천리, 월평리, 행정리 등 12개의 법정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영암군 금정면에 속하였던 용산리를 신북면으로 편입하여 13개의 법정리를 관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북면의 서쪽에는 백룡산(420.8m), 오봉산(162.3m), 가막산(166.0m), 마산(159m)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한 지역은 30m 내외의 구릉으로 된 야산이 곳곳에 있고, 대부분 넓은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다. 신북면의 중부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삼보천(三甫川)이 흐른다. 지역 특산물로는 천연 황토에서 재배되는 무, 배추, 수박, 토마토, 오이, 고추 등이 있고, 배가 대단위로 생산되고 있다. 국도 13호선과 지방도 820호선이 신북면을 관통하고 있다.
♤ 365.8m봉
지나치는 능선 잡목봉으로 조망은 없고 산악오토바이가 많이 다녀 등산로가 엉망이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 명동재
지나치는 나즈막한 능선봉이다. 세종 홀산아선배님의 코팅산패가 작은 나무에 매어 있다. 명동재는 왼쪽 영암군 신북면 명동리와 오른쪽 금정면 아천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명동리(明洞里)에는 옥정 마을과 와우동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고 동쪽에 백룡산(420.6m)이 남쪽에 가막산(166m)이 그리고 북쪽에 조리봉(227.7m)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산자락 밑에 위치하고 농경지가 협소한 마을이다.
♤ 361.3m봉/ 사리봉(신북면 명동리, 금정면 아천리 → 월평리, 와운리)/ 폐산불초소
오른쪽으로 백룡지맥 분기점의 풍력발전기와 땅끝기맥의 활성산, 국사봉이 보인다.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정상 직전에 오른쪽 임도로 내려서면 명동재/ 명동고개이다. 지도에는 능선에 명동재를 표기했다. 지형상으로는 봉우리에서 오른쪽 임도로 내려선 임도를 명동재로 본다. 명동재로 내려서며 지맥의 왼쪽이 신북면 명동리 → 용산리로 바뀐다. 덕산마을 방향으로 임도를 잠시 따른다.
♤ 영암군 금정면 와운리(臥雲里)
와운리는 동쪽과 남쪽은 금정면 안노리, 서쪽은 전남 나주시 세지면 모산리, 북쪽은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본래 나주군 원정면 지역이었는데, 1895년(고종 32)에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화산리, 분수리, 신기리, 양와리, 강변리, 운동리, 기동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고, 양와리의 와(臥) 자와 운동리의 운(雲) 자를 따서 와운리라 하고 금정면에 편입되었다. 와운리는 오봉산(162.3m)밑에 위치한다. 남북으로 길게 금천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대봉감 과수원과 벼농사이다. 밭작물로는 콩, 고추 등을 생산하며, 2013년부터 마을 주민들이 곶감 사업을 위해 설비를 갖추고 있다. 국도 23호선이 와운리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龍山里)
용산리는 본래 영암군 원정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 4월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해 신흥리, 서당리, 용계리, 기동마을 일부와 나주군 금마면의 서천리를 병합하여 용산리라 하여, 금정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신북면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쪽은 오봉산과 경계이며, 서쪽으로 신북면 이천리, 남쪽으로 신북면 명동리, 북쪽으로 신북면 모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용산리 동쪽으로 오봉산(162.3m)과 조리봉(227.7m)이 있고, 낮은 구릉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농경지가 협소하게 형성되어 있다. 동쪽 산 밑에는 용산 저수지가 있으며 주변의 백용산, 오봉산이 용의 형국과 비슷하다 하여 용산(龍山)이라 하였다. 신흥마을, 서촌마을, 용계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있으며 주민들 대부분은 벼농사를 하며, 밭작물인 고추를 소규모로 재배한다.
♤ 조리봉(227.7m)/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 금정면 와운리
맥길은 오른쪽이지만 왼쪽으로 약50m 벗어나 있어 갈림길에서 잠시 다녀와야 한다. 영암군 학산면 용산리에 있는 나즈막한 봉우리로서 지명유래는 찾을 수 없다. 소나무 아래 작은 공터가 있고 조망은 없다.
♤ 가는재
왼쪽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와 오른쪽 금정면 와운리를 연결하는 비포장 임도로 문화류씨세장산비와 양쪽으로 문중묘가 있다. 소나무 가지에 세종 홀산아선배님 가는재 코팅지가 매달려 있다.
♤ 오봉산(五峰山, 162.3m)
맥길에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나 있어 다녀와야 한다. 잡목을 헤치며 오른 감나무 과수원 위에 있는 봉우리로 조망이 좋다. 작은 개옻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오봉산은 정확한 지명유래는 찾을 수 없지만 주위 마을 지명인 용산리에서 주변의 백룡산과 오봉산을 보면 용의 형국과 비슷하다 하여 용산리라 하였다는 유래가 보인다. 등로 주위에 대봉시 감나무 과수원이 많이 보인다.
♤ 노루목재(85m)/ 신금로/ 2차선포장도로/ 금정면 - 신북면
시누대 숲을 벗어나 내려선다. 금정면 와운리와 신북면 용산리의 경계로 용산마을과 기동제가 있는 기동마을을 이어주는 12번군도가 지난다. 신북면 표지판 뒤로 오르는 길이 있다. 왼쪽 가족묘지로 올라서면 편백나무에 반바지님 코팅지가 매어 있다.
♤ 118.7m봉
노루목재에서 어렵지 않게 오른 잡목봉으로 감태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반바지님 코팅지에 신궁은 다음에서 검색하여 표기한듯하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맥 왼쪽으로 신북면 용산리 용산마을에서 가는재골을 따라 북쪽으로 700m 들어선 곳에 신흥골이 있다. 잡목과 시누대가 우거져 내려서는 길이 어렵다.
옥룡지맥이 나주시(세지면)와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자 삼면봉입니다. 삼면봉이라지만 봉우리라 하기도 그렇고 묘지 말고는 사진으로 찍을만한 마땅한 건물이 없습니다. 아래로 내려서니 골프장이 시작하는 곳에 묘지와 관련된 효자각 건물이 있더군요.
♤ 삼면봉(104m,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금정면 와운리 →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 시군계/ 나주힐스C.C.
지맥이 나주힐스C.C. 만나는 지점으로 시군계이자 삼면봉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영암군 금정면 와운리 →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로 바뀐다. 마루금 위에 골프장이 있어 나주힐스 골프장을 왼쪽으로 우회한다. 오른쪽에 하동정씨 종중묘가 보인다.
♤ 나주시 세지면(細枝面)
세지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31개 동리를 관할하던 지죽면과 25개 동리를 관할하던 세화면, 욱곡면의 구천리를 병합해 세화와 지죽의 머리글자를 따서 세지면으로 개칭하고 면사무소를 현재의 오봉리 동창마을에 두었다. 나주시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덕산(171m)이 솟은 남동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완만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영산강의 지류인 만봉천과 금천이 세지면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으며, 하천 양안에 있는 동곡리·죽동리 일대에 넓은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한다. 자연환경이 깨끗하여 토하젓, 참계장 등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이다. 기온이 온화하여 과실 작물이 생산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나주배는 물론 세지멜론은 전국 생산량의 60% 차지하고 있다. 또한 송제리 5층 석탑과 벽류정 등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광-강진, 담양- 해남을 잇는 국도와 지방도가 나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 나주힐스C.C. 전삼거리/ 신지로/ 2차선포장도로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서서 우틀하여 골프장 정문쪽으로 향하고 하동정씨세장산비가 있는 나주힐스골프장 정문쪽에서 등산로는 오른쪽 나주시 세지면 경계판 위로 오른다.
나주시와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신북면 내안으로 들어섰다가 교산면 황교마을에서 다시 시군계와 만납니다.
♤ 114.1m봉/ 시군계/ 삼리봉(나주시 세지면 성산리,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 모산리)
묘지길을 따라 올라 성균생원정공묘를 올라서며 지맥의 왼쪽이 신북면 용산리 → 모산리로 바뀐다. 빽빽한 시누대숲을 뚫고 잠시 올라서면 114.1m봉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갈림길에서 좌틀하며 시군계를 버리고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와 모산리의 경계를 따른다.
♤ 93.8m/ 4등삼각점(영암 426/ 1986 재설)/ 신북면 용산리 - 모산리
잡목을 뚫고 안부사거리에 도착하니 왼쪽으론 양회임도가 보이고 오른쪽 태양광발전소 옆으로 우회하면 4등삼각점이 있는 93.8m 삼각점봉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가시나무를 헤치며 내려서야 한다.
♤ 121.5m봉/ 리계(신북면 용산리 → 모산리)
넓은 임도에서 지맥은 왼쪽으로 121.5m봉에는 오르지 않고 우틀하며 모산리 내안으로 들어선다. 여기부터 선초3대 청백리 중 한분인 하정공(夏亭公) 류관선생의 나와바리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쌍용아파트 자리가 그가 살던 우산각 집터이다. 옆으로 옮겨 집을 복원해두었다. 우의정이면서도 비가 새는 가난한 초가집에 살아 우산각골이라 부른다. 청계천에는 비우당교가 있다. 집은 그의 6대 외손자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이 이어받아 기거했다. 우산각과 비우당은 같은 의미로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이 비가오면 천정이 샜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류관묘역은 앵자지맥 관음봉 내리기전 오른쪽에 있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유좌(酉坐)에 경기지방문화재 제62호로 보존하고 있다.
문화류씨 하정공파에게 이 웅봉은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왕방지맥이 지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에 문화류씨 5대단이(文化柳氏五代壇) 있습니다. 그 후손 일족이 영암 신북면 모산리로 낙향한 것으로 보입니다.
♤ 곰봉(熊峰, 137.2m)/ 천제단/ 체육시설/ 정자/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백룡지맥 마산과 그 뒤로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정상석이 있는 웅봉천제단은 실제로는 웅봉의 전위봉이다. 정상은 80m를 더 가야 한다. 정상에는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고 왼쪽으로 신북농공단지와 그 뒤로 백룡지맥 호산(虎山, 155.6m)과 곰봉에서 나가는 여석산(礪石山, 60.9m)을 찾아본다. 체육시설과 사각정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는 137.2봉에서 50m쯤 내려서다 독도 주의지점으로 우틀하여 잡목 속으로 들어서서 대형 축사를 향향하여 내려서야 한다.
♤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茅山里)
신북면 모산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나주군 비음면(非音面)에 속했으며, 1906년에 영암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청용리, 송파리, 산정리, 천동, 황계리, 구만리, 송내, 용동, 구암리, 신기리, 흑석점 등 12개 마을을 통합해 모산리라 하였다. 백동과 용교는 폐촌되고 이목동과 통산은 이천리에 통합되어 현재는 산정마을, 청룡마을, 구암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모산리 동쪽과 북쪽은 곰봉(137.2m) 등의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으로 삼포천(三浦川)이 지나며, 그 주위로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1975년에 야산 개발 조성 단지로 지정되어 낮은 구릉을 개간하여 무, 수박을 재배했고 1980년 무렵부터 무, 수박 대신에 배 과수원을 조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모산리 명칭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첫 번째로 예로부터 마을 안에 못이 있어 못안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못산으로 변하고 다시 모산으로 변했다고 하고 또 하나는 마을의 주변에 띠(茅)가 무성하여 바람이 불어오면 띠 잎이 난바다로 금물결을 이루었다.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수림이 아름다워 띠 모(茅)와 뫼 산(山)을 합하여 모산(茅山)이라 했다고 한다.
♤ 78.5m봉/ 리계(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 금수리)
밭둑길과 과수원을 지나는 마루금을 따르다가 잡목숲으로 오른 야트막한 잡목봉으로 조망은 없다. 맨발 대선배님 산패가 있다. 우틀로 내려서며 지맥은 신북면 모산리 → 금수리로 접어든다. 과수원으로 변한 마루금을 마을길을 따라 우회하기도 한다.
♤ 황교마을/ 금교로/ 2차선포장도로/ 시군면계(나주시 세지면 교산리 - 영암군 신북면 금수리)
황교마을은 나주시 세지면 교산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넓은 다리가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맥은 황교마을에서 다시 나주시와 만나고 다시 금수리로 들어선다. 밭으로 변한 지맥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심어져 있고, 사유지 백제농장 입구에서 인공수로가 지나는 곳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출입금지 표시판이 있어 수로를 따른다. 마루금 능선을 마을길로 우회하며 진행한다. 영주목장 입구에서 인공수로가 지하로 흐르고 맥길은 왼쪽 도로를 따른다. 김해김씨문중묘로 내려서기 전에 마루금 상에 과수원집을 지나며 지맥의 오른쪽이 나주시 세지면 교산리 → 송제리로 바뀐다. 도로를 따라 13번국도가 지나는 논공단지까지 약2.4km(1시간) 진행한다.
♤ 금수마을/ 영암군 신북면 금수리(金水里)
금수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나주군 비음면에 속했으며, 마을에 생금(生金, 캐낸 그대로의 금), 생수가 많이 나와 쇠 금(金)과 물 수(水)를 따서 금수리라 했다. 1895년(고종 32)에 영암군 북이종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해 평류동, 화정리, 만년리를 병합하여 금수리라 했다. 마을 앞들에 참새굴, 지승계, 강남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옛날에는 포구가 있어 삼포천으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동쪽은 나주시 세지면 교산리, 서쪽은 유곡리, 남쪽은 모산리, 북쪽은 갈곡리와 맞닿아 있다. 대부분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낮은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고, 농경지는 대부분 논이다. 북쪽에 제방인 평류제가 있다. 금수리 왼쪽으로 국도 13호선이 남북으로 길게 관통하고 있다.
♤ 신북논공단지삼거리/ 13번국도/ 군계휴게소/ 화장실/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
군계버스정류장이 있는 13번국도를 건너서며 지맥의 왼쪽이 신북면 금수리 → 갈곡리로 바뀐다. 신북논공단지 사거리로 옆에는 군계암뽕순대라는 음식점이 있고 건너편에는 군계휴게소&기사뷔페식당이 있다. 마루금에 전방(주) 영암공장이 있어 오른쪽 밭으로 우회한다.
♤ 영암신북논공단지
영암신북농공단지는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에 있는 논공단지로서 지역간 균형 개발로 유휴 인력의 취업 기회를 확대하고 농외 소득 증대 및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1986년 8월 2일 농공 단지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 10월 6일 실시 승인을 받았다. 약 10개 업체가 들어와 가동 중에 있고 국도 13호선과 500m 거리에 있으며 KTX와 새마을호 및 무궁화호가 정차하는 나주역이 20km 거리에 있다.
♤ 태마산(85.4m)/ 태산(太山)/ 정자, 나무의자/ 시군면계/ 삼리봉(나주시 세지면 송제리,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 학동리)
과수원과 민가가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어 왼쪽으로 우회해서 내려와 양회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간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낡은 사각정자 앞쪽 참나무에 매어 있다. 영진 5만지도에는 태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묘지를 찍기는 아무래도 꺼려지던데 비석이라도 찍을걸 그랬나요. 지맥이 세지면과 헤어지고 영암군 신북면과 나주시 왕곡면의 경계를 따릅니다.
♤ 삼면봉(86m, 영암군 신북면, 나주시 세지면 → 왕곡면)/ 시군계/ 도근점
통훈대부 사복사정 금성나공묘에서 뒤돌아 좋은 길을 따라 좌틀로 내려선다. 사복사는 궁중의 수레와 말, 목장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정은 정삼품, 부정은 종삼품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 → 왕곡면 신원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이다.
♤ 나주시 왕곡면(旺谷面)
왕곡면은 조선조 말엽에 마산면, 욱곡면, 전왕면이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3개면이 병합하여 왕곡면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나주 시청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동쪽은 세지면과 접해 있고 남쪽은 반남면, 영암군 신북면, 서쪽은 공산면, 북쪽은 영산강을 경계로 하여 다시면, 이창동과 접해 있으며, 봉의산과 삼산을 제외하면 왕곡면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 있고, 그 가운데를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왕곡면은 면 소재지인 덕산리를 비롯하여 본양리, 옥곡리, 송죽리, 신포리, 월천리, 화정리, 행전리, 신원리, 신가리, 양산리, 장산리 등 법정리 12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를 하며 영농, 과수, 축산, 시설하우스 등 다양하게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왕곡면 덕산리 일대에 배테마파크를 준공해 다목적강당, 교육전시관, 배체험장 등의 시설을 두고 있다.
♤ 영암군 신북면 학동리(鶴洞里)
태산이 속해 있는 영암군 신북면 학동리는 마을의 지형이 황새처럼 생겼다 하여 황새울 또는 학동(鶴洞)이라 하였다. 학동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나주군 비음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신월리, 연곡리, 연동과 영암군 북이종면의 태산리(泰山里)를 병합하여 신북면에 편입하여 학동리라 했다. 학동리는 신북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나주시 왕곡면 신원리와 경계이며, 서쪽은 신북면 양계리, 남쪽은 신북면 갈곡리, 북쪽은 나주시 왕곡면 행전리와 경계하고 있다. 마을 동쪽의 태산(86.0m), 남쪽의 가재산(49.9m) 등의 낮은 구릉지가 일부 있으나 대부분이 평지이고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앞으로 삼포천이 지나가고 그 주위로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학동리 주민들 대부분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며, 시설 하우스에서 수박, 알타리무, 쪽파 등을 재배하고 있다. 학동리 왼쪽으로 지방도 820호선이 지나가고 있다.
♤ 진등고개/ 시군면계/ 삼리경계면(영암군 신북면 학동리, 나주시 왕곡면 신원리 → 행전리)
진등고개는 왕곡면 행전리에 있는 고개로서 자료를 찾을 수 없으나 주변이 황토밭으로 둘러싸여 진고개와 같은 의미로 추정된다. 왼쪽 태간제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 오른쪽으로 가며 비닐하우스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행전저수지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나주시 왕곡면 신원리 → 행전리로 바뀐다. 4분 정도 진행하여 과수원을 만나 탱자울타리를 따라 내려서면 준희선생님 여기가 진등고개입니다 산패가 전봇대에 매어 있다.
♤ 나주시 왕곡면 행전리(杏田里)
행전리는 평지와 낮은 산지로 이루어진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행장, 여시골마을 등이 있는데 행장마을은 은행나무 고목이 있어 행동이라 불러오다 고목은 없으나 해방 후 행장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여시골마을은 옛날 여기에 여우가 살았다고 전해져 붙여진 이름이다.
이 구간을 걸으며 왼쪽 멀리 백룡지맥과 월출산이 비치고, 오른쪽으론 태청지맥의 마루금이 보인다.
♤ 820번지방도/ 시군면계/ 삼리경계면(나주시 왕곡면 행전리, 영암군 신북면 학동리 → 양계리)
영암군 신북면과 나주시 왕곡면의 경계표지가 있는 사거리이다. 도로 건너 화정로를 따라 전남 종자관리소 방향으로 들어서서 경고푯말이 있고 오른쪽에 49.7m봉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왕곡면 행전리 → 화정리로 바뀐다. 도로따라 약3.7km 진행한다.
지맥이 영암군 신북면과 헤어지고 좌우가 완전하게 나주시로 들어서서 왕곡면과 반남면의 경계를 따릅니다.
♤ 삼면경계면(나주시 왕곡면, 영암군 신북면 → 나주시 반남면)/ 전라남도 종자관리소
전라남도 종자관리소를 지나며 지맥의 왼쪽이 영암군 신북면 양계리 →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로 바뀌며 이제부터 영암군을 떠나 나주시 내로 들어서며 왕곡면 화정리와 반남면 청송리의 경계를 따른다. 장송마을 표석과 함양박씨세장산비가 있는 대서버스정류장을 지난다.
♤ 나주시 반남면(潘南面)
전남 나주시 남부에 있는 면으로 동남쪽으로 영암군 신북면, 서쪽으로 시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북쪽으로 공산면과 왕곡면에 접하고 있다. 동서로 약 4km, 남북으로 약 5km의 야산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자미산이 있다.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이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며, 기름진 옥토를 이루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다. 면의 대부분이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를 이루고 있다. 삼포강이 면의 동부와 북부 경계를 흘러 영산강에 유입하며, 대안리·덕산리·하촌리 일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분포한다. 쌀·보리를 비롯한 채소 및 과일 생산이 많다. 나주 반남지역에 흩어져 있는 대형 고분군은 이 지역이 백제로 통합되기 이전의 마한 연맹 왕국을 이끈 세력들의 중심부였음을 말해준다. 자미산성 터는 백제 때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 이전에 이 지역에 있었던 54국의 마안연맹 왕국 중 하나인 내비리국(內卑離國)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자미산성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데다 해상교통의 요지여서 견훤이나 견훤의 배후를 공격하는 왕건의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곳이었다. 자미산성 일대가 후삼국시대에 견훤과 왕건 세력이 충돌한 격전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주시지』에도 견훤이 자미산성에 주둔하여 나주의 왕건과 대항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여겨진다.
왼쪽으로 가면 곧바로 청룡고개로 가는 우회길입니다.
♤ 대서버스정류장/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 - 왕곡면 화정리
장송마을 표석에서 묘지가 있는 왼쪽 장송길로 들어서서 농경지와 사유지로 변한 마루금을 우회하지만 마루금은 계속 화정로를 따라 왕곡방향으로 좀더 직진하여 동우페이퍼텍 공장을 지나 만나는 광주정씨세장산비에서 좌틀한다.
♤ 면계/ 삼리봉(나주시 반남면 청송리, 왕곡면 화정리 → 신포리)
광주정씨세장산비에서 좌틀하여 왼쪽으로 보이는 능선이 마루금이다. 지맥의 오른쪽이 왕곡면 화정리 → 신포리로 바뀐다. 묘지를 지나고 양회임도와 수레길을 따라 57.7m봉으로 오른다. 낮은 무명봉을 찍고 길이 없는 최악의 잡목지대를 뚫고 내려서면 도로가 지나는 청룡고개이다.
태양열판넬 울타리를 따르자니 가시가 사납고, 조금 더 진행하여 해주오씨묘이던가 묘로 올라 밭을 따라서 마루금으로 올라서기가 수월하였습니다.
♤ 57.7m봉/ 고압선 송전탑/ 면계/ 반남면 청송리 - 왕곡면 신포리
장송마을 표석 있는 곳에서 도로를 따라 마루금을 우회할 경우에는 농로를 따르다 오른쪽에 목장을 하나 지나고 태양광발전단지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57.7m봉으로 올라야 하나 대부분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우회한다.
♤ 청룡고개/ 청송로/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 청룡마을
도로를 따를 경우 두류산이 보이고 2차선 차도가 지나는 청송로 청룡고개에 도착하여 다시 맥길과 만난다. 청룡고개에서 도로 건너 임도/묘지길을 따라 오르고 묘지 이후 잡목길에서 선답자의 띠지를 따른다.
♤ 두류산(斗流山, 106m)/ 폐헬기장/ 면계/ 반남면 청송리 - 왕곡면 신포리
묘지 이후 산은 낮은데 가파르고 까칠한 등로를 10여 분 올라선다. 헬기장 처럼 널찍한 정상부 끝의 소나무에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두륜산으로 되어 있다. 두류산에서 다시 되돌아 약35m 내려와 왼쪽으로 내려선다. 망개나무 가시잡목이 진행을 방해해 여기부터 3시간 가까이 칼?을 빼들어야 한다.
♤ 삼면봉(81m,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반남면 청송리 → 공산면 상방리)
두류산에서 망개나무 잡목을 헤치고 내려서는 봉우리로, 조금 더 내려서면 오른쪽에 전망 좋은 묘지가 나오고 곧이어 나주C.C.와 만나는 지점이다. 지맥의 왼쪽이 반남면 청송리 → 공산면 상방리로 바뀐다. 지맥이 나주시 반남면과 완전히 헤어지고 여기부터 왕곡면과 공산면의 면계를 따른다.
♤ 나주시 공산면(公山面)
조선시대 나주목 공수면(公水面)·오산면(吾山面)이 합해졌다. 덕음(德蔭) 마을에는 1937년부터 금과 은을 채집한 굴이 있다. 1989년 폐광되어 현재 젓갈창고로 쓰이고 있으며, 나주시청에서 서남쪽으로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다시면, 왕곡면과 접경을 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영암군 시종면, 반남면, 서쪽으로는 동강면, 북쪽으로 함평군 학교면과 맞닿아 있다. 구수봉과 고문산이 솟아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이 해발고도 161m이고, 대부분 해발고도 20m 이하의 구릉지이다. 면의 북쪽으로 영산강이 흐르고, 영산강변 옛 사암(思菴)나루터에는 황포돛배 선착장이 꾸며져 있다. 영산강의 퇴적면에 제방이 구축되어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삼포강이 흐르는 넓은 저습지인 화산들이 있어 수리(水利)가 편리하여 농업이 발달한 고장이다. 특히 공산면은 42,000평의 전국 최대 규모의 드라마 세트장 '삼한지테마파크'인 《주몽》 촬영지와 금광토굴의 젓갈, 충주산방, 신곡리 전통테마마을, 백만송이 홍련화가 자리한 우습제 등 볼만한 구경거리가 많이 있다. 면 소재지인 금곡리를 비롯하여 가송리, 남창리, 동촌리, 백사리, 복룡리, 상방리, 신곡리, 중포리, 화성리 등 10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보리이고 특산물로 고구마, 수박, 인삼 등이 생산되고 있다. 교통은 국도 23호선이 면의 중앙을 지나고 있다.
♤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上方里)
상방리 1구 상구(上龜) 마을 천연기념물 제516호 호랑가시나무는 400여 년 전 오득린(吳得隣, 1564~1637)이 심었다고 전한다. 오득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이순신을 찾아가 막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했으며 마지막 노량해전에도 참전했다. 호랑가시나무는 호랑이가 이파리에 돋아난 가시로 가려운 데를 긁었다고 이름 붙었다. '호랑이 등 긁기 나무'다. 가시가 호랑이 발톱처럼 매섭게 생겼다고 '호랑이 발톱나무'로도 불린다. 억세고 단단한 가시를 호랑이도 무서워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상방리 2구는 석해(石海), 3구 백두(白頭)는 마을 뒤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어졌고, 4구는 동쪽의 문을 지키면 모든 악귀가 침범할 수 없는 고장으로 풀숲에 뱀이 엎드려 지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복사초리(伏蛇草理)로 불린다. 복사초리는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를 쟁탈하기 위해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 82.5m봉/ 면계(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 공산면 상방리)
나주C.C. 8번홀 상단 마루금으로 진행한다. 왼쪽 골프장으로 내려서면 안되고 오른쪽 잡목을 뚫고 나주C.C. 8번홀 상단 능선으로 진행해야 한다. 한번 내려서면 다시 잡목숲을 뚫고 마루금에 복귀하기가 어렵다. 아래에서 골프치는 소리가 들린다. 정상에서 좌틀로 다시 망개나무 가시밭길로 들어선다.
♤ 59.5m봉
풍악당(楓嶽堂)이 있는 골프장 진입도로가 실질적인 지도상의 삼장고개이다. 도로에서 민가 오른쪽 뒤로 마루금에 올라서면 59.5m봉이다. 세종 홀산아님 코팅지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잡목지를 통과하고 절개지 옆으로 삼장고개 동물이동통로 위로 내려선다.
♤ 삼장(三長) 터널/ 23번국도/ 동물이동통로/ 면계/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23번국도 위를 통과하는 동물이동통로이다.
♤ 101.2m봉
23번국도 전후로 잡목이 엄청 심하다. 두류산을 내려서면서 부터 102.6m봉 까지 약 7km가 전지가위를 필요로 하는 옥룡지맥의 핵심공작소랄 수 있다. 경주최씨 묘역을 지나 79m봉을 지나고, 잡목을 헤치면 다시 84.5m봉을 지나고, 다시 잡목을 빠져나오면 넓은 묘지를 지나 양회임도를 만나고 임도 끝에 문중묘지를 지나 101.2m봉에 닿는다. 묘지를 지나 우틀하는 길주의 지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나주시 왕곡면 신포리 → 송죽리로 바뀐다.
휴우~ 이제 어려운 구간을 다 지나왔단 말이지 하고 방심을 하는 사이 102.6m봉에서 내려서다 좌틀하는 지점을 놓치고 송전탑쪽으로 알바를 잠깐 했습니다.
♤ 102.6m봉
노간주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노간주숲을 허리도 펴지 못하고 몸을 수구려 지나야 하는 잡목지로 태양열단지 울타리를 따라 좌틀로 내려서면 맥길 안부에 대형축사가 자리잡고 있어 축사 옆에 마루금은 우회한다. 태양열판넬 울타리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좀 더 진행하여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내려서서 인원농장을 우회한다.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의 백두길을 만나서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마을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인원부화장이 있고, '악취잡는 바람돌이' 기계 있는 곳에서 왼쪽 과수원으로 진입하여 지맥 능선에 접속한다.
사진에 인원농장 입구를 지나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왼쪽 농장주 가옥으로 보이는 집을 옆으로 우회해 산으로 올랐습니다.
♤ 90.5m봉/ 삼각점봉
축사 입구에서 지맥의 왼쪽이 공산면 상방리 → 남창리로 바뀐다. 축사를 우회하여 오른쪽 묘지 진입로로 들어서서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양회임도가 나온다. 앞에 보이는 5번 송전탑으로 진행한다. 반남박공묘지에 오르니 정면으로 월출산이 보인다. 묘지를 지나 급경사를 잠시 오르니 삼각점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도근점이 있는 90.5m봉이다.
♤ 110.7m봉
90.5m봉에서 5분 정도 오른 과수원 위에 있는 봉우리이다. 직진으로 뚜렷한 등로를 따라 마루금을 놓치지 않으면 편하게 할매당고개로 내려서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명감나무와 가시, 소나무 묘목이 엉킨 잡목지를 뚫고 내려서니 선택이 필요하다.
♤ 할매당고개(35m)/ 송죽로 2차선도로/ 공산면 - 왕곡면
왼쪽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와 오른쪽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2차선 도로인 송죽로가 지난다. 반바지님의 코팅지가 백일홍나무에 매어 있다. 할매당고개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편안한 들입구가 있다. 직상하여 안동권씨 문중묘 뒤로 오르면 급오르막에 잡목구간으로 잠시나마 개고생이다.
지맥이 좌우가 왕곡면과 면계를 떠나 완전하게 나주시 공산면으로 안으로 들어섭니다.
♤ 구수봉(153.1m)/ 3등삼각점(영암 308/ 1986 재설)/ 면계/ 삼리봉(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왕곡면 송죽리 → 공산면 백사리)
전남 나주시 공산면에 있는 구수봉은 정상에 말발굽바위가 있다. 말발굽바위에서 구수봉을 다녀와야 한다. 왕곡면의 주산이기도 하다. 구수는 구유의 전라도 지역 사투리로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의병장 김덕령이 이 곳(구수봉)을 지나다 바위에 고인 물을 말에게 먹인 것에서 유래됐다고도 전해지고, 정유재란 당시 왜적 소탕에 앞장섰던 황대중 장군이 신흥마을 뒷산에서 말을 타고 가다 바위에 말발굽 자국을 남겨 그 형상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도 전해진다. 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천혜의 영산강 풍경과 죽산보, 다시면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산꾼들은 철성지맥의 속금산과 이별바우산, 태청지맥의 청림산을 찾아보기도 한다. 산줄기 끝자락에는 주몽, 천추태후, 태왕사신기 등 다수의 역사극 촬영지인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자리 잡고 있다. 구수봉 오름길은 체육시설과 함께 등로가 좋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고 다시 빽하여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잡목길이 기다린다. 지맥이 왕곡면과 헤어지고 좌우가 완전하게 공산면으로 들어서 솔골재로 내려선다.
♤ 죽산보(竹山湺)/ 영산강4경 죽산춘효(竹山春曉)
죽산보는 나주평야 가운데 영산간에 설치된 보로 나누평야 일대 농업용수 확보와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4대강 사업으로 2009년 12월에 착공하여 2011년 10월 11일에 완공되었다. 보의 길이는 184m, 영산강의 힘찬 물결을 모티브한 디자인으로 보의 교각 상부에는 공도교와 관리용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전망대에서 드넓은 영산강을 감상할 수 있다. 2020년 11월에 문을 연 죽산보 오토캠핑장은 카라반과 트레일러가 진입 가능한 캠핑장이다. 캠핑장 뒤편으로는 확 트인 평야가 펼쳐진다. 인근에 나주 영상테마파크, 국립나주박물관,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 황포돛배 선착장 등 가볼 곳이 많아서 색다른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죽산보관리시설에 올라가 내려다 보는 캠핑장 풍경은 초록색 평야와 공원 등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진다. 각 사이트마다 개수대가 있어 글램핑 시설처럼 편하게 물을 구할 수 있다. 어린이놀이터, 샤워시설, 취사장 등 캠핑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매점에서는 장작, 마시멜로, 라면, 과자, 부탄가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 솔골재(35m)/ 사동고개/ 덕음로 2차선도로
반바지님 코팅지가 동백나무에 매어 있다. 나주시 공산면 백사리 덕음로 2차선 도로가 지나는 솔골재에 내려서고, 솔골재/ 사동고개에서 도로 왼쪽으로 진행하여 낭주최씨 묘지길을 따라 86m봉으로 올라선다.
백사라는 호는 많은데, 조선 말엽이라면 임진왜란에 활약한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자 신립장군의 동서인 백사 이항복은 아니로군요.
♤ 나주시 공산면 백사리 사동(沙洞)마을
나주시 공산면 백사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인 사동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동은 약 350년 전 낭주 최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그 후 광산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를 보면 원래 마을 이름은 사동(絲洞)이었는데 조선 말엽 백사(白沙)선생이 이곳에 살면서 반급제를 하니 나라에서 크게 놀라 이들 형제들 때문에 국가가 위태롭게 될 것 같아 몰래 사람을 보내 이곳 오형제 선조의 묘를 파헤치니 검은 암소가 뒷발은 일어서고 앞발은 구부린 상태였다. 이때 실오라기 같은 안개가 자욱이 올라가고 있어 실이골이라 했으며 지금도 오황산이라 불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상에는 띠지 외에 아무 것도 없어서 트랭글에 위치 표시만 하고 지납니다.
♤ 86m봉/ 리계/ 공산면 백사리 - 중포리/ 수학산(垂鶴山, 116.8m) 갈림봉
솔골재/ 사동고개에서 낭주최씨 묘지길을 따라 올라서는 봉우리이나 눈으로만 오르고 도로(덕음로)를 따라 장골 백동제로 내려서는 경우가 많다. 월출산이 멀리 바라다 보인다. 86m봉에서 공산면 중포리와 만나 백사리와 중포리의 경계를 따라 좌틀하여 백동제 쪽으로 내려서는데 마루금에서 약간 빗긴 왼쪽 초지로 내려서면 삼거리인 사동고개이다. 마루금을 고수하면 양회임도를 따라 오산로사거리로 내려선다.
♤ 오산로사거리/ 삼리경계면(나주시 공산면 중포리, 백사리 → 남창리)
오산로사거리에 인공수로와 백사 보건진료소 표지판이 있고, 장골로가 마루금이다. 구수봉에서 솔골재로 내려서며 헤어졌던 남창리와 오산로사거리에서 다시 만나고, 장골로로 진행하다 오른편 우사를 지나고, 도로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지점 왼편 대형 우사가 있는 지점에서 지맥의 왼쪽이 공산면 남창리 → 동촌리로 바뀐다.
♤ 801번지방도 사거리/ 리계(공산면 중포리 - 남창리)/ 충주산방 표지판
충주산방 표지판이 있는 801번도로 사거리를 지나 도로 따라 가송리까지 약 3.5km를 진행한다. 도로 오른쪽에 인공수로가 함께 가며 오른쪽으로 철성지맥의 뾰족한 속금산이 바라다 보인다.
♤ 형제방죽/ 나주시 공산면 중포리(中埔里)
나주시 공산면 중포리 사암(思庵) 마을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고 어지신 분(思庵 박순, 1523~1589)이 살았다고 하여 물수, 어질양 수양(水良)이라 불러지게 되었다는데 형제 방죽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옛날 마을에 유명한 도둑이 나주 고을 곳곳을 다니며 물건을 훔쳐 고을 사람은 물론 나주 관아에서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도둑을 잡기는커녕 누가 도둑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진짜 도둑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고 도둑은 형제를 불러놓고 자신이 몇 해 전 고을을 떠들썩하게 했던 도둑임을 밝히고, 죄를 용서하는 뜻으로 고을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기를 바라는 유언을 남겼다. 형제는 마을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서다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고 중포리 수양마을 옆에 방죽을 파기 시작하였다. 형은 넓은 자리에 얕으면서 넓게 팠고, 동생은 좁은 장소를 잡아 깊게 팠다. 형제가 방죽을 파기 시작한 지 서너 해가 지나 제법 방죽의 모습이 갖추어지자 형제들은 뚝을 쌓기 시작하였다. 방죽이 완성되는 날 마을 사람들은 큰 잔치를 벌였다. 마을 주민들은 형제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형제가 파 놓은 방죽이 있어서 다음 해 가뭄이 들었을 때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 청하농장 삼거리/ 광산김씨세장산비/ 삼리경계면(나주시 공산면 동촌리, 중포리 → 가송리)
한밤중에 지나는 곳이라 대형 농장이 있다는 정도로 알고 지난다. 공산면 중포리와 동촌리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가송리로 들어선다.
♤ 가송리사거리/ 대주사료
대주사료가 있는 사거리에 도착하여 직진 아니면 오른쪽으로 고문산(103.5m) 가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대주사료앞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마루금이 이어지지만 태양광발전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우회해야 한다. 가송로를 따라 진행하면 화이트덕 표지석이 서 있는 곳에서 좌틀로 멋진 한옥 기와집이 보이는 오리농장으로 진입하여 오리농장 한옥집을 우회하고, 청도김씨세장산 묫길로 진입하면 김해김씨세장산비가 나온다. 가송리사거리에서 직진하였다면 만나게 되는 지점이다.
♤ 고문산(103.5m)/ 나주시 공산면 가송리
고문산으로 오르는 초입에 태양열발전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가송로 오리농장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청도김씨세천비에서 마루금으로 수레길을 따르는 경우도 있고 우틀하여 가송로를 따라 가송리 3구 석계(石溪) 마을 뒤로 오르는 경우도 있다. 가송로를 따라 300m 진행하다 석계정류장 전에 좌틀하여 효자각을 지난다. 김해김씨세장산비에서 도로와 작별하고 고문산 등산로로 진입한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고문산에서 내려서 시누대 숲을 나오니 정면에 태청지맥의 청림산과 영산강이 보인다.
구수봉에서부터 공산면 내안을 지나온 지맥이 망해산 갈림길에서 동강면과 만나고 60.9m봉까지 잠시 면계를 따릅니다.
♤ 망해산갈림길/ 면리계(공산면 가송리 - 동강면 양지리)
망해산은 갈림길에서 시누대 숲으로 직진하여 왕복 1.2km를 다녀온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매어 있다.
모악지맥을 하며 망해사(望海寺)를 지났는데 여긴 망해산이로군요. 망해산 이후 종착점까지 약 11km 남습니다.
♤ 망해산(望海山, 148m)/ 2등삼각점(영암 25/ 1990 재설)
망해산은 나주시 공산면 가송리와 동강면 양지리 및 운산리 경계에 있는 영산강변의 산으로 망해(望海)는 물에 가까운 산을 의미한다. 북쪽에 위치한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에 두 개의 하중도(河中島)가 형성되어 있는데 하중도는 장탄(長灘)섬으로도 불려진다. 북쪽 큰 것은 함평군에 속하고 남쪽에 나중에 생긴 작은 섬은 나주시 영역이며 과거 함평 장탄 북쪽의 좁은 수로가 배가 오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척포(尺浦)와 형제방죽이 근처에 있고 두개가 나란히 있는 형제저수지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오산들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정상 북동쪽 기슭에 제주 양씨 재각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 나주시 동강면(洞江面)
전남 나주시의 남서단에 있는 면으로 동쪽은 공산면, 서쪽은 영산강 건너 무안군 몽탄면, 남쪽은 영산호, 북쪽은 영산강 너머 함평군 엄다면 · 학교면과 접해 있다. 신도청 소재지와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제23호선과 국가지원지방도 제49호선이 확포장 될 경우, 서해안고속도로와 무안국제공항과의 연계성으로 인해 개발 잠재력이 많은 지역이다. 영암 백룡산에서 뻗어온 능선이 공산면을 거쳐 백련산, 성산, 옥룡산으로 이어진다. 동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영산강으로 둘러 쌓인 반도형 지형으로, 심하게 굽이도는 구간이라 일대를 곡강(曲江)이라 칭했다. 영산강 충적평야와 간척지들로 유명하다. 몽탄나루와 간석지에서 많은 어패류가 생산된 곳이었다. 백제 때 봉산현(鳳山縣)이 있었고, 1355년 곡강·두동(豆洞)방을 두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폐한 후 나주목 두동·곡강면에 속했다. 1914년 개편 때 나주군 동강면이 되었다. 동강은 두동과 곡강이 통합되어 형성된 지명이다. 1995년 나주시 동강면이 되었다. 면 소재지인 인동리를 비롯하여 월양리, 진천리, 대전리, 장동리, 옥정리, 곡천리, 대지리, 월송리, 양지리, 운산리 등 11개 법정리를 관할한다. 『해동여지도』(나주)에는 영산강 좌안에 곡강면 일대가 잘 묘사되어 있다. 두동은 두북동면(豆北洞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이곳의 우십교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우십교지(牛十橋池)는 주 남쪽 45리에 있다."고 수록되었고, 『여지도서』에 "우십교제는 둘레 7,060척이며, 깊이 7척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영산강 유역 제방 중 가장 큰 규모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 건국을 앞두고 견훤과 필사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때 왕건이 잠을 자다 꿈을 꾼 마을과 왕건이 꿈을 꾸고 강을 건넌 몽(夢)과 탄(灘)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1996년에 몽탄대교가 건설되었다.
부서진 산패도 보이지 않고 선답자님들 띠지가 지키고 있습니다.
♤ 112.3m봉/ 면리계(공산면 가송리 - 동강면 양지리)
망해산(148m)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누대 숲길을 헤치고 내려서서 오른 잡목길 가시넝쿨 지대이다. 부서진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내림길이 흐리고 잡목이 많아 쉽지가 않다. 칡넝쿨지대를 지나고 자헌대부공조판서 고성이공 묘지를 지나는데 공조는 조선시대 6조의 하나로 산림(山林)과 소택(沼澤), 공장(工匠) 및 건축과 수리 그리고 도야(陶冶) 등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판서는 정 2품의 관직이다. 다시 지독한 가시잡목을 헤치며 진행한다. 편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태양광발전소를 만나고 오른쪽으로 울타리를 따라 묘지에서 밭으로 나가니 매산재에 닿는다.
인가가 한채 있습니다. 도로를 따라 양지사거리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진입하면 어김없이 띠지가 길안내를 해줍니다.
♤ 매산재(25m)/ 23번국도/ 가양로/ 2차선포장도로/ 면리계(공산면 가송리 - 양지리)/ 동강면 양지리 매산마을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오른쪽 나주시 동강면 양지리와 왼쪽 공산면 가송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가양로' 포장도로가 23번도로(나주서부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맥은 왼쪽 산으로 이어진다. 도로 건너 콘테이너 박스 옆 비포장임도로 진입하여 왼쪽 절개지를 타고 능선으로 오른다.
지맥의 좌우가 완전하게 옥룡지맥의 마지막 면인 동강면 내안으로 접어듭니다. 산패는 없고 선답자님들 띠지가 지키고 있습니다.
♤ 60.9m봉/ 면계/ 삼리봉(나주시 동강면 양지리, 공산면 가송리 → 동강면 인동리)
함양박공 묘지를 지나 무명의 양회임도에 도착한다. 도로 건너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우거진 시누대 지대를 통과하고 무명묘지와 개활지를 지나니 황토밭 경작지가 펼쳐진다. 밭경작지 끝에서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능선으로 60.9m봉에 오른다. 산패는 없고 고도를 수기한 선답자 띠지만 있다. 지맥의 좌우가 완전하게 동강면 내안으로 접어들어 양지리와 인동리의 경계지점인 안부로 내려선다. 무명안부 지나 54.1m봉을 넘어 송전탑봉에 도착한다. 62.1m봉을 넘어서면 뚜렷한 등로가 나타난다. 나주나씨세장산비가 있는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한다. 이곳은 동강면 양지리와 인동리의 경계지점이다.
♤ 23번국도/ 나주서부로/ 병반재
하얀마을 대형 축사가 있다. 양지사거리로 이어지는 공사중인 23번국도를 다시 만난다. 철계단으로 올라 시누대 길을 지나며 오른쪽 아래로 대형 축사가 내려다 보인다.
♤ 병반마을/ 나주시 동강면 인동1리
조선 중엽 마을에 병참기지가 설치되어 병졸들이 많이 주둔하였다 하여 병반이라 부르게 되었다.
♤ 114.5m봉/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양지리 → 곡천리)/ 백련산(148.9m) 갈림봉
맥길은 도로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 왼쪽에 보이는 축사건물 뒤쪽에 짧은 절개지로 올라선다. 묘지를 지나 정상에 도착하니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여기서 백련산(148.9m)은 왕복 약 2.4km 소요된다.
♤ 할미당고개(45m)/ 2차선도로(인월로삼거리)/ 사각정자
오른쪽 114.5m봉에서 내려서는 곳에 사각정자 추모정이 있다. 왼쪽 인동축산 농로로 진행한다.
♤ 93.4m봉
마을길을 따라 93.4m봉을 향한다. 이동통신중계기탑이 서 있고 축사가 마루금에 앉아있다. 축사 뒤로 가파르게 오른다. 소나무가 많은 잡목봉이다. 산패는 없고 수기로 고도를 적은 선답자 띠지가 있다. 봉을 내려서니 깊은 동굴이 보인다. 무슨 짐승이 살았을까.
묘지길의 연속이라 마루금에 길이 잘 나 있습니다.
♤ 71.1m봉
잡목지대로 가파르게 올라서니 마루금에 길이 잘 나있고 고도가 적혀있는 법광대선배님 띠지가 있다. 내려서면 경주최공수환부부 합장묘가 있다.
♤ 2차선포장도로/ 백련산로/ 동강면 곡천리 - 인동리
시누대 군락지를 지나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선다.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와 곡천리의 경계지점이고 동강면소재지가 가깝다. 도로 건너 시누대 군락지 옆으로 나있는 비포장임도를 따라 능선으로 오른다. 묘지가 있는 곳에서 지맥의 왼쪽이 동강면 인동리 → 월양리로 바뀐다. 뚜렷한 등로로 이어지다가 잡목지도 지나고 감나무과수원을 만나 그물망 울타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능선으로 올라 벌목지를 따라 계속 진행한다.
정상을 선답자님 띠지가 지키고 있습니다.
♤ 79.9m봉/ 3등삼각점(영암 301/ 1999 재설)
오름길에 왼쪽으로 동강면 월랑리 신양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잡목봉으로 조망은 없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는데 보이지 않는다.
♤ 77.1m봉
시누대 군락지를 지나면 개활지가 넓게 펼쳐져 나타난다. 멀리 파란 물탱크가 보이는 봉우리로 향한다. 개활지 사이로 나있는 넓은 비포장임도를 따른다. 편백나무에 걸린 법광대선배님 띠지에 77.1m가 수기로 적혀있다.
♤ 남악동강로 6차선/ 월양터널 위/ 동물이동통로/ 삼리봉(동강면 곡천리, 월랑리 → 대전리)
동물이동통로로 내려서기 전에 지맥이 왼쪽이 동강면 월랑리에서 대전리로 바뀐다. 가시잡목이 지키고 있는 동물이동로를 통과하고 진주이공묘지로 내려서야 하는데 왼쪽으로 월출산이 능선이 장쾌하게 펼쳐보인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생긴 양회임도로 내려서서 왼쪽 절개지로 이뤄진 무명봉은 패스한다. 49번국지도의 일부로 나주시 왕곡면 장산사거리와 나주시 동강면 곡창교차로를 잇는 남악동강로가 직선화되면서 지형이 변했다.
♤ 62.7m봉
남악동강로를 중간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머리만 남은 62.7m봉을 잡풀을 헤지며 올라야 하는데, 도로를 내려서지 말고 그대로 남악동강로 갓길을 따라가면 편하다. 이 경우 도로 건너에 62.7m봉은 차량통행이 많은 6차선 동강로를 넘어야 하기에 패스하게 된다. 동강로 갓길을 따라 대전교차로로 향한다.
♤ 대전교차로/ 철산정류장
곡천,철산마을 표석이 있는 교차로에서 느러지전망대 쪽으로 우틀, 맥길은 왼쪽 밭으로 이어지나 오른쪽으로 49번지방도를 따르다 왼쪽 수레길로 편하게 77.3m봉에 오른다.
♤ 77.3m봉
비포장임도를 오른쪽으로 보내고 가시잡목을 오른다. 왼쪽에서 올라오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 인도를 따른다. 임도 오른쪽 옆에 선답자들의 산행띠지들이 걸려있다. 법광대선배님 띠지에 수기로 적힌 77.3m봉을 확인하고 계속 비포장임도를 따른다.
♤ 57.1m봉/ 사각정자, 운동시설
등로 오른쪽에 사각정자와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57.1m봉을 확인하고 옥룡산갈림삼거리로 진행한다.
왼쪽 아래로 식전바위가 있다는 몽송교차로이고 마지막 옥룡산이 바라보입니다.
♤ 남악동강로/ 49번지방도
중앙분리대가 있는 6차선도로 동강로를 다시 만난다. 통행량이 뜸한 사이 도로를 건너 오른쪽 임도를 따르다가 왼쪽으로 우회하여 맥길에 진입한다.
감회가 이는군요. 하몽탄이라는 몽송골 몽송마을이 여기입니다. 910년 견훤은 왕건이 지키고 있는 나주성을 되찾기 위해 기병 3천을 이끌고 쳐들어 왔습니다. 이 나주 전투에서 밀려 퇴각하던 왕건의 군사가 견훤의 군사에 포위되었던 절체절명의 장소.... 자그마치 1,114년 전의 역사 이야깁니다.
♤ 몽송봉(夢松峰, 88.5m)/ 동강면 곡천리 → 옥정리
몽송봉 아래 옥정리에 몽송골 몽송마을이 있어 서레와선배님 식으로 몽승봉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정확히는 소나무 아래에서 꿈을 꾸었기에 몽송(夢松)이 맞다. 옥룡산 통신안테나를 바라보며 감나무 과수원 끝까지 진행하여 능선으로 몽송봉에 오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는 잡목봉이다. 마루금은 왼쪽으로 내려서서 편백나무 숲을 지난다. 몽송봉에서 느러지전망대를 들리려면 오른쪽으로 향한다.
♤ 능선갈림삼거리
느러지전망대를 가기 위해 몽승봉에서 북서방향으로 묘지를 지나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무궁화동산 계단이 나온다. 포장도로로 내려선 갈림삼거리에서 느러지전망대관광인증센터를 지나고 느러지전망대에 도착하여 계단을 타고 3층 정상으로 오른다.
♤ 느러지전망대/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담양 용추봉에서 시작되어 목포 하구언에 이르는 영산강은 나주평야에서 달려오던 영산강이 동강면을 지나면서 강폭이 넓어져 유속을 낮추고 휘돌아 나가는 곡강으로 영낙없는 한반도지형을 형성한다. 성내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져 흘러가는 강줄기가 느림의 미학을 말해주면서 한편으로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주는 잠금장치 역할을 하는 자연의 오묘함을 보여준다.
♤ 곡강(曲江) 최부길
『표해록』은 15세기에 최부가 쓴 명나라 견문록으로 총 148일 동안의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한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으뜸이다. 뚜렷한 역사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지니고 충효 등 유교적 가치관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극복, 43명 전원이 무사귀국하기까지 조선 최고의 선비가 보여준 극적인 인간승리의 여정, 그 시작점은 바로 최부가 태어난 동강면 인하리 성지마을이다. 그래서 곡강(曲江) 최부길이 만들어졌다.
♤ 72m봉
왼쪽으로 가시잡목을 뚫고 내려서고 58.3m봉에는 무한도전 띠지가 걸려 있다. 평산신공 묘지를 구경하고 규칙적으로 타이어가 놓여져 있는 임도를 잠시 따르면 몀생이 농장이 마루금을 차지하고 있어 왼쪽으로 조심해서 울타리를 따라 이동한다.
강건너가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입니다. 일대가 몽땅 몽(夢)자 아니면 용(龍)자로 뒤덮혀 있군요.
♤ 옥룡산(132.9m)/ 3등삼각점(영암 309/ )/ 체육시설, 의자
마루금을 대봉시 감나무 과수원이 차지해 우회해서 진행하고 양회임도로 오른다. 평산신공 묘지 뒤로 올라 철탑 앞으로 올라서는데 가파른 길에 잡목과 가시나무가 우거져 네발로 기어서 올라야 한다. 그래서 옥룡산 오름길에 곧바른 능선을 피하고 왼쪽으로 우회하여 된비알을 오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낡고 부서진 나무의자가 있다. 옥룡산은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에 위치한 산으로 영산강변에 솟아 있으며, 영산강 위의 영산강대교와 몽탄대교가 보이고, 몽탄나루가 바로 앞이다. 『호구총수』에는 두동면에 옥룡촌(玉龍村)이 기록되어 있고, 옥룡은 귀한 곳, 유리한 곳, 전망이 좋은 곳을 뜻하고, 광복 이후 옥룡촌은 몽탄(夢灘)이라 했으며, 영산강 건너편 무안군 몽탄면과 나루가 연결되어 있었다. 1994년 몽탄대교가 개통되었고 북서쪽에 복룡(伏龍) 마을이 있으며 영산강변에는 들노래로 소문난 봉추마을도 있다. 정상에서 좌틀하여 바위쪽으로 내려서서 울산김공덕수 묘지에서 조망을 하고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옥정로와 만난다. 옥정4구 버스정류장,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 몽탄대교로 향한다.
♤ 몽탄나루(몽탄대교) 합수점/ 몽탄버스정류장(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1123)
옥정마을길에 내려서면 마을 정자와 영산강, 그리고 자전거길이 나온다. 옥룡지맥의 끝이 영산강에 잠기는 지점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성에 웅거한 후백제를 공략하다가 현 나주 동강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영산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고 있던 중 꿈(夢)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눈앞의 호수는 강이 아니라 여울(灘)이니 빨리 건너라고 하므로 말을 타고 현재의 몽탄나루를 건너 견훤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하여 몽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탄나루는 무안군의 동쪽 몽탄면 몽강리에 있는 나루터로서 현재 몽탄나루 바로 아래에 몽탄면 명산리와 나주시 동강면을 연결하는 몽탄대교가 건설되어 몽탄나루의 기능은 쇠퇴하였다. 대동여지도에 몽탄포(夢灘浦)가 승달산 동쪽 영산강가에 표기되어 있을 정도로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 교통이 매우 발달한 지역이고 대동지지에 몽탄진(夢灘津)은 남쪽으로 35리인데 나주 경계와 통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몽탄나루는 몽탄대교가 건설되기 이전에 몽탄면 몽강과 명산, 청룡, 당호 등지에서 영산강 동쪽의 나주시 동강과 공산면 지역으로 건너다니던 나루터이다. 몽탄나루는 영산강 하류에 있는 나루터로서 이 나루터에서 하류 쪽의 주룡나루터까지 강폭이 갑자기 넓어지므로 나루터로서의 기능이 매우 활발했던 곳이다.
♤ 몽탄강(夢灘江)/ 무안군 몽탄면(夢灘面)
태봉국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은 송악 연변의 토호인 해상세력이 배경이었다. 해상왕 장보고 휘하 장수계열이 통일신라가 망하자 개성 연안으로 이주하였고, 왕건은 이 해상세력을 발판으로 무안과 나주를 오가며 호남정략을 펼칠 수 있었다. 무안과 나주의 젖줄인 몽탄강은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견훤(867~936)의 격전지였다. 몽탄이란 이름은 후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후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후백제 견훤과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되어, 견훤이 마지막 나주성에 웅거하여 고려군과 싸우게 될 때 왕건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에 당도하여 진을 쳤다. 그 때에 3천의 견훤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하니 포위된 고려군은 당황하여 포위망에서 혈로를 뚫으려 하였으나 마침 강물이 범람하여 빠져나갈 수 없었다. 고려군은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였으며 밤이 깊어서야 견훤군이 공격을 멈추어 서로가 방어태세로 전환하고, 싸움은 소강상태에 들어가 고려군은 지친 나머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고려의 장수 왕건도 소나무 아래 군막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백발 노인이 왕건 앞에 나타나 "앞으로 대업을 이루려는 장군이 일기도 모르고 잠만 자면 되는가?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군사를 이끌고 빨리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148.2m)을 향하여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있으면 견훤군이 뒤를 쫒을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견훤군을 치면 장군은 크게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왕건이 깜짝 놀라 일어나니 그것은 꿈(夢)이었고 이상한 꿈인지라 밖을 나가보니 과연 강에는 물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이에 급히 군사를 깨워 강물이 빠진 여울(灘)을 건너 청용리 두대산을 항하여 행군하였다. 두대산은 마람으로 이어져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봉 같았고, 파군천에 이르니 마치 강물이 하얀 쌀뜨물처럼 흐르고 있어 이상히 여기고 군사를 좌우에 매복시켜 놓고 지형을 살피고 있을 때, 견훤군이 뒤를 쫒아오다가 큰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 줄 알고 전진을 주저하자 좌우에 매복한 왕건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화공으로 협공하니 혼비백산한 견훤의 군대는 지리멸렬하여 크게 부서지고 견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이 강을 "꿈(夢)에서 가르쳐 준 대로 여울(灘)을 건넜다" 하여 "몽탄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 몽탄강 하류의 전승지를 파군천이라 하였으며 이 천을 이은 다리를 파군교라 하였다. 무안군 몽탄면과 나주군 동강면을 연결하는 영산강 하류의 몽탄강은 지금도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에 몽송부락을 하몽탄이라 하고,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를 상몽탄이라 부르고 있다. 이후 왕건은 나주 오씨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태조의 제2비인 장화왕후(莊和王后)가 낳은 아들이 바로 고려 2대왕 혜종(惠宗)이다.
♤ 고려 왕건과 몽탄강
때는 바야흐로 후삼국시대였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궁예는 송악(개성)을, 견훤은 광주를 기반으로 해 나라를 세웠다. 궁예는 901년 국호를 고려(후고구려:후고구려라는 국호는 없으나 나중에 왕건이 세운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로 하고 왕위에 올랐다. 궁예가 세운 고려의 세력은 지금의 강원도와 충청도 북부, 경기도에 해당되는 지역에 이르렀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고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 경상도 서부 일대를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견훤은 신라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며 백제유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에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 남쪽은 다시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신라로 다시 나눠졌다. 이를 후삼국시대라 한다. 통일신라가 후삼국시대로 바뀐 것은 신라귀족들이 무능과 탐욕 때문이었다. 신라왕족들은 왕위싸움을 하느라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진골 귀족들은 ‘족당(族黨)’을 만들어 서로 왕이 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지방호족들은 신라왕실의 통제와 군사력이 약해지자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의 군사를 키우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갈수록 신라왕실의 힘은 약해졌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강성해졌다. 신라왕실의 힘이 급격히 쇠락한 것은 장보고(張保皐, ?~846)의 죽음이었다. 완도를 기반으로 해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는 가장 세력이 컸던 신라의 호족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신라 왕실에 속해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 지방호족들을 장악했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신라왕실에 대한 영향력도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장보고의 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던 신라 왕실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했다. 자신들을 통제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 없어지자 지방호족들은 힘을 키워갔다. 이미 신라 왕실은 ‘종이호랑이’신세였다. 이때 궁예는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출신으로 알려졌다. 절에서 자라나다 강원도의 큰 도적이었던 양길 수하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이 세력을 기반으로 해 힘을 키워갔다. 왕건 역시 통일신라시대 지방호족의 하나였다.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예성강에서 강화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수십 척의 배로 상단(商團)을 꾸려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궁예의 세력이 더 컸다. 그래서 왕륭은 궁예의 수하로 들어갔다.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김화·창도·철원)에, 아들 왕건은 송악태수(발어참성 성주)로 앉혔다. 궁예는 아래쪽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견훤이 항상 거슬렸다. 그래서 궁예의 부하가 된 왕건에게 견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 전략적 요충지는 서남해안 일대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 영산강 일대였다. 903년 왕건은 전선을 이끌고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 에필로그
4년 전 땅끝기맥을 하며 월출산(月出山, 810.7m) 천황봉 통천문에 서서 영암벌을 바라보며 옥룡과 백룡지맥을 찾아보았습니다만 그야말로 비산비야의 들판에 산줄기를 잇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남아 있네요. 그때 막연하게 감으로 남겨둔 사진 한장에 옥룡과 백룡은 거은 다 들어 있는것 같았습니다.
밖에서 한번만 더 떨어보자 했지만 아무리 동계라도 박짐 메고 옥룡을 덤비다니 동밖에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두곱절 이상 힘들었을 것입니다. 세세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치부책에 자세하게 적어 두었습니다. 월양터널에서 대전교차로 까지 직진한거 외에 우회하지 않았고, 느러지전망대도 다녀왔습니다. 태청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옥룡이 태청 이상이었습니다. 여름에 옥룡을 계획한다면 미리 존경의 말씀을 보내드립니다.
태청을 하며 동밖에님에게 사사받은 오룩스어플을 연습하다 다 날려먹어 하루 전에 나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광주 나사모 회장님이신 무돌님께서도 오룩스를 공부하러 오셨더군요. 단순히 두발을 이용해 산길을 걷는 등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룩스에 구글어스를 합쳐 운용하고, 지도를 그리고, 컴퓨터를 이용해 아주 세밀한 등산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하 옥룡과 관계된 참고자료로 올려두었으니 필요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왕건의 나주 진출
왕건이 견훤의 세력권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지금의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다. 고이도에 성(고이도성, 왕산성)을 쌓고 군사기지로 삼은 뒤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망운의 다경진과 임치진을 공략했다. 그런 다음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동강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나주의 호족인 오다련을 찾아갔다. 오다련은 수십 척의 배를 부리는 무역상단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나주는 오다련의 세력권에 있었다. 왕건과 인연을 맺기 이전에 오다련은 견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오다련은 견훤의 세력이 커지자 집안의 안전을 위해 군량미와 해산물, 군마, 군포 등을 상납했다. 장인인 사간 연위와 금성태수 나총례 등도 견훤에게 복종할 뜻을 내비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왕건이 오다련을 찾아간 것은 강력한 호족인 오다련을 끌어들여야 견훤의 배후지인 나주를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다련은 왕건에게 우호적이었다. 오다련은 견훤에게 한 것처럼 왕건에게도 군량미와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더 나아가 영광 항화도항과 함평 손불의 군유산에 군사 전진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암 신북의 여석산은 질 좋은 숫돌이 나는 곳이었다. 숫돌은 병사들의 전투필수품이었다. 오다련은 이 숫돌까지 상납했다. 오다련은 견훤과 등지고 왕건을 도왔다. 오다련 등 나주 호족의 도움을 받아 왕건은 금성군을 비롯 10여 군현을 점령한 뒤 군사를 나눠 잘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서해안 일대 섬과 나주 등지를 놓고 왕건과 견훤의 싸움은 계속됐다. 909년 벌어진 염해현(지금의 해제면 임수리)전투에서 왕건의 군사가 승리하면서 서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인 진도가 왕건의 수중에 떨어졌다. 왕건은 견훤이 중국 오월국에 보낸 선박을 나포하는 등 견훤을 괴롭혔다.
■ 몽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왕건
903년부터 왕건과 견훤은 영암 덕진포와 몽탄강, 극락천 일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10년 견훤은 왕건이 지키고 있는 나주 성을 되찾기 위해 기병 3천명을 이끌고 나주를 쳐들어왔다. 왕건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견훤 군사들의 맹공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이라는 곳까지 밀려와 결국은 견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주를 하려해도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모두 견훤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왕건이 밤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영산강 물이 빠졌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라. 무안 청용리 두대산으로 향하다 파군천 하류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면 견훤 군사들이 쫒아올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꿈인지라 왕건이 밖에 나가보니, 꿈속의 도인이 말한 대로 넘실대던 영산강의 물이 줄어있었다. 왕건은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해 철수했다. 그리고 청용리에 도착한 왕건은 병사들을 민가로 보내 밀가루와 겨를 모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두대산에 볏짚을 쌓아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다음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왕건은 밀가루를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천(川)에 풀기 시작했다. 왕건의 군사가 밥을 해먹기 위해 씻은 쌀의 뜨물이 흘러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밀가루를 강에 풀자 금방 영산강물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편 견훤은 날이 밝자말자 왕건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왕건은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였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왕건의 진영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강을 건너간 것이다. 견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왕건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가다보니 영산강 상류 쪽에서 쌀뜨물 같은 것이 흘러오고 있었다. 견훤과 견훤군사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나 왕건의 군사들이 많으면 저렇게 강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쌀을 씻었을까?” 생각하니 위축이 됐다. 왕건의 심리전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견훤의 군사들이 겁을 먹은 그때, 두대산 양쪽에 숨어있던 왕건의 군사들이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의 매복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대산 좌우 양쪽에서 왕건의 군사들이 활을 쏘고 바위를 굴려대는 바람에 전투의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견훤은 참패당하고 말았다. 왕건은 꿈속에 나타난 도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로 현재의 몽탄교가 있는 영산강 유역을 꿈夢 여울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했다 전해진다. 쌀뜨물처럼 보인 밀가루를 흘려보낸 하천은 ‘견훤의 군사들을 속여 깨뜨렸다’는 의미로 파군천(破軍川)이라 했다. 또 군량을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한 산은 두타산(혹은 두대산)이라 부르게 됐다. 왕건군이 배수진을 쳤던 현재의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 일대는 하몽탄, 영산강을 건너 무안지역으로 건너간 곳은 상몽탄이라 칭한다.
■ 광주에서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전투
나주공략에 성공한 왕건은 차츰차츰 군사를 내륙으로 진격시켰다. 그래서 영산강과 서창들녁,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는 왕건과 견훤 군사들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왕건은 지금의 서창 들녘 쪽 산(사월산 혹은 백마산)에 진을 치고, 견훤은 운암동 일대 산(대마산)에 군사를 배치했다. 왕건이 진을 친 곳을 왕조대(王祖臺), 견훤의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을 견훤대(甄萱臺)라 부른다. 왕건과 견훤 부대 간의 전투는 사월산(獅月山)과 대마산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치평동(상무대)일대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월산은 앞발을 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사자의 모습을 닮았다. 광주~송정을 연결하는 도로변에 있다. 견훤대를 마주 보고 있다. 왕건은 나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광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견훤과 한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다. 왕건은 영산강 상류 쪽 산에 군진(軍陣)을 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머문 그곳을 ‘왕조대’(王祖臺)라 불렀다. 왕조대는 ‘왕이 머물었던 장소’ 혹은 ‘왕이 진을 친 곳’이라는 뜻이다. 왕은 물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다. 왕조대의 본디 이름은 왕건대(王建臺)였으나 나중에 왕조대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조대의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왕조대는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주둔했던 곳이다. 그런데 사려 깊지 못한 백성들이 고려 태조의 성과 이름을 장소이름으로 사용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다른 이름, 즉 왕조대로 바꿔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왕조대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왕조대라 추정되는 곳은 여러 곳이다. <여지도서>에는 ‘왕조대가 광주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고 견훤대와 마주보고 있다’(王祖臺 與甄萱臺 相對)기록돼 있다. 김정호가 조선후기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왕조대가 서창마을 북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에 왕조대라는 지명이 쓰인 곳은 광주 서창의 북쪽 언저리다. 그 지점은 조선 초 고내상(전라병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광주와 송정리 간을 연결하는 광송도로 극락교 주변이다. 극락교 주변의 높은 산은 사월산이다. 사월산은 101.5m 높이의 산으로 견훤대와 마주하고 있다. 견훤이 군진을 치고 군마를 길렀다는 방목평(放牧坪)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해 군 지휘소로 사용될 수 있는 여건을 지녔다. 그러나 사월산은 광주관아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고 거리도 21리에 불과해 지도·문헌상의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 때문에 ‘광주관아 서쪽 30리에 있는 산’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에서 서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백마산(白馬山)을 왕조대 자리로 지목하기도 한다. 백마산은 해발고도가 162.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다. 그렇지만 백마산 일대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해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군사를 지휘하기에 그런대로 적합한 곳이다. 백마산은 금당산~화방산~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에서 멈춰 북쪽으로 솟아오르면서 생긴 산이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있어 주변은 평지다. 그래서 송정리는 물론이고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사이로 첨단지구 쪽까지 보인다. 왕조대의 위치와 관련해 일부 연구자들은 남구 대촌동 일대에 있는 여러 산봉우리 중 하나를 지목하고 있다. 또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의 봉호마을 뒷산도 왕조대로 추정되는 장소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이 왕건이 머물렀던 산이라 믿고 지난 80년대까지 왕건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다. 견훤대로 추정되는 북구 운암동의 대마산 앞은 견훤이 군마를 키웠던 방목평이 있었다. 지금은 주택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왕건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견훤 역시 군사를 동원해 방어진을 쳤다. 전해오는 말로는 견훤이 진을 친 곳은 지금의 광주 북구 동림동 대마산이다. 광주시 북구 생룡동 뒷산에 있는 토성 터를 견훤대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삼국유사’에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 북촌으로 적혀 있는 점, 담양군 대전면에 무진주의 치소(治所)가 있었다는 설(說), 광주 북구와 담양 일대 동네 이름에 들어있는 龍(용)은 견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생룡(生龍)동 뒷산이 견훤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 문헌들이 ‘견훤대는 북쪽 15리’에 있다고 기록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북쪽 40리에 위치한 생룡동을 견훤대라 여기기에는 무리가 크다. 동림동에 있는 대마산은 해발 93.9m 높이의 산이다. 대마산은 왕건의 군사들이 대형을 이룬 서창의 산과 마주보고 있어 적들의 동향을 살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대마산 아래 견훤이 말을 키웠다는 방목평은 매우 넓은 곳이어서 군사를 모아두었다가 움직이기에도 좋았다. ‘대동여지도’에는 견훤대가 황계면(현재의 북구 운암동) 남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횡계면은 광주 북문으로부터 20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산을 대마산으로 여겨도 무방한 듯싶다.
■ 왕건과 견훤의 역사를 품고 있는 전남과 광주
왕조대 자리가 서구 사월산이든, 아니면 백마산이든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견훤대 자리가 지금의 대마산인지, 생룡동 뒷산 또는 대전면 일대의 야산인지도 큰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왕건과 견훤이 왕조대와 견훤대에 군사를 모아놓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구전에 불과하다. 지금의 광주·전남지역에서 왕건과 견훤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는 상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작성된 각종 지도와 문헌에는 왕건과 견훤을 뜻하는 왕조대와 견훤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 두 사람이 자웅을 겨뤘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보면 당시의 무진주(광주)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한 듯싶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발자취와 왕건에 맞서 천하를 호령했던 견훤의 자취는 무안 몽탄강과 광주 왕조대, 대마산 신안 일대의 섬, 무안에 남아 있다. 광주, 전남의 중요한 역사 자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조대와 견훤대의 정확한 위치를 따지는 것보다는 왕건과 견훤의 대립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왕건이 승자가 되고 견훤이 패자가 됐는지를 따져보는 역사적 고찰이 더 중요한 듯싶다. 무안 몽탄강과 파군천, 두대산, 왕조대, 견훤대는 왕건과 견훤이라는 두 영웅의 흥미로운 대립과정을 되새겨보고 거기서 승자의 교훈을 음미해보는 역사적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다.
■ 나주공방전(羅州 攻防戰)
903년, 909~914년 나주(羅州)를 둘러싸고 태봉과 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후삼국시대 전투로 당시 금성군이라고 불렸던 나주는 곡창지대 역할 뿐 아니라 중요한 대중국 무역 거점이었다. 이 점을 노린 궁예가 왕건을 파견해 인근 호족들과 연합하여 진도와 나주를 공격,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903년의 나주 정벌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903년에 나주가 이미 고려 땅이었다면 909년 이후에야 벌어진 나주 공방전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903년에는 기습으로 확실히 점령했고 909년에 이르러 나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투입된 거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나주를 공략한 건 909년이라는 의견, 공략은 했으되 성 단위 점령이 아닌 주변 섬들에 영향력을 심은 정도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 시기에 왕건의 수군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오월로 보내는 후백제의 선박을 나포하기도 했고, 903년에 양주(현재의 양산) 지역의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청하자 뱃길로 가서 구원하기도 했다는 걸 보면 아예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고 북쪽으로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견훤도 이 지역을 탈환할 계획을 쉽게 세우지 못했을 듯하다. 태봉의 수군이 주둔한 곳은 현 경기도 개풍군인 정주로 왕건은 태봉의 수군을 책임지는 총 대장으로서 알찬 종희와 김언을 부장으로 2,500명의 병력으로 진도를 함락, 곧이어 고이도(압해읍 고이리)에 상륙하였다. 견훤은 이에 맞서 덕진포로 나아갔고 여기서 두 영웅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면서 공격을 명령하였고, 백제는 이 기세에 밀려 일시 퇴각, 왕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화공을 벌였다. 이 때 백제군의 전사자는 500여명에 달했고,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황급히 몸만 빠져나갔다고 한다.(덕진포 전투) 하지만 이때 제대로 된 포상이 없었는지 부하 및 병사들의 사기가 꽤 떨어져 있었다. 특히 나주에 계속 주둔한 김언 등은 더 했던 듯. 결국 견훤이 나주를 탈환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시 내려가게 되는데 이때 첩자를 풀어 그 유명한 수달(능창)을 생포하게 된다. 수달은 그때 매복해서 왕건을 잡으려 했는데 왕건의 계책에 의해 되려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하고 이듬해 마진의 수도 철원으로 끌려가 모욕을 받고 자신에게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궁예의 현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장작 더미로 들어가 불타 죽는다. 수달은 견훤의 부하였든가 이래저래 태봉을 많이 괴롭힌듯 하다. 일단 기록상으론 백제와 별개 해상세력이었다. 아무튼 910년에 견훤은 직접 보기 삼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지만 왕건이 파견되어 수군으로 백제 진영을 기습, 물러나게 만들었으며 이듬해인 911년에는 무진주를 공격하는 등 꽤 기세가 커졌다. 이때 무진주의 성주였던 지훤은 성을 굳게 방어하여 태봉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912년과 914년에도 다시 나주로 가서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즈음에는 나주와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대야성이나 강주 등에 병력을 보낸 기록 등을 보면 두고두고 잘 이용해 먹은 것 같다. 사실상 한반도 주변 바다를 완전히 지배한 것이다. 물론 견훤은 후에 대반격을 준비하여 나주 공격에서 꽤 성과를 거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견훤이 다시 나주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보여지는 때는 무려 20년 후인 929년으로,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다시 해군력을 양성하여 나주를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근성있는 공방전이었다. 그 후 후백제의 나주 탈환 성과는 좋아서 나주를 빼앗아 주변 제해권을 확보한 후인 932년 9월, 여세를 몰아 장수 상귀를 예성강 유역으로 보내 고려 군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고려가 정성들여 키운 군마 300필도 빼앗는다. 심지어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 왕궁을 포위공격하는 등(예성강전투) 고려를 크게 위협하였고 바로 다음 달인 932년 10월에는 장수 상래를 보내 고려의 대우도와 저산도 등을 불바다로 만든다. 이에 고려 측은 수군 총사령관인 왕만세를 출진시키지만 상애의 백제 수군에 패퇴당한다. 그러나 훗날 유금필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나주를 도로 빼앗았고, 이렇게 수복한 나주는 훗날 신검의 반란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아끼던 아들 금강까지 잃은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서 고려로 귀부할 때 이곳 나주를 거쳐간다. 다만 이 대목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신라 기병 10정 군단 중 하나인 검은 깃발 현웅정(=미다부리정)의 치소인 남평읍만은 아예 892년 이래로 내내 견훤 세력 및 후백제의 일부였음이다. 물론 후백제는 나주를, 고려는 광주를 집요하게 노리다보니 사실 남평읍을 비롯한 나주 동부는 후백제가 주로 점유했고 광주는 견훤 입장에서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게도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쪽 절반 가까이를 빼앗기고 있었으나, 여하튼 남평읍 일대만은 다른 나주 일대와는 달리 내내 견훤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견훤과 신라 정규군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1차 나주 공방전
지금의 나주시 일대는 당시에는 '금성(錦城)'이라고 불리면서 무진주 내 군사적 요충지인 '미다부리정'이 있었는데, 각간 위홍의 죽음으로 그 휘하 부장으로 있던 견훤이 이 곳의 책임자로 불리면서 당시 해적 출신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수달과 종례, 오다련 등을 포섭하고 인심을 얻어 무진주(광주)를 거쳐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열었다. 그러나 이후 처음의 본 뜻을 잃고, 완산주 궁궐 공사나 건국 이후 전쟁 준비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금성을 비롯한 서남해 지역의 호족들에게 강요하면서 지역 호족들은 견훤 정권과 그에게 포섭되어 수족으로 일하는 수달(능창)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던 중, 순행 이후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던 고려는 당시 조금씩 명성을 얻고 있던 청년 장군 왕건으로 하여금 이 일대를 평정하려는 비밀 작전을 기획한다. 왕건은 그의 집안 사람들은 물론 집안 대대로 교류를 가졌던 송악 인근 정주의 대호족 유천궁, 순행에서 만났던 금강 주변의 전의성주 이치와 함께 이 작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금성 인근 목포의 대 호족인 오다련의 딸 오도영의 도움으로 오다련과 종례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고 기습 상륙에 성공하고 금성과 그 주변을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전령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기뻐하면서 '금성'이란 이름은 신라가 지어준 이름이니 '나주(羅州)'를 정벌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나주'라는 새 이름을 지어 보냈고, 동시에 왕건과 고려군을 가장 많이 도와줬던 오다련과 종례에게 나주를 본관으로 한 성씨를 하사하고 왕건은 오다련의 딸 도영과 혼인을 하게 한다. 그리고 나주는 같이 종군했던 장수 김언과 종회가 태수로 부임한 오대련과 함께 맡기고 다른 이들은 송악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904년의 일이다.
■ 2차 나주 공방전
이후 후고구려가 나라 이름을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혼란을 거듭하고 이 와중에 낙동강 부근으로 진출했다가 왕건에게 덜미가 잡힌 후백제는 금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많은 군대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압해도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왕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진은 내부 혼란의 와중에서도 어렵게 얻은 전선을 잃지 않기 위해 상주 전투에서 돌아온 왕건을 다시 나주로 보내 치르도록 했다. 왕건을 비롯한 마진군은 후백제군보다 열세에다가 날씨조차 도와주지 못한 상황에서 이무렵 왕건의 책사로 일하던 태평의 계략대로 남동풍을 이용한 화공에 의해 기다리고 잇던 견훤의 대함대를 무찔렀다.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육지에 도착해 겨우 도망쳤는데, 이 와중에 능산의 기습으로 인해 맹장 방희가 전사하고 수달은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수달은 식음을 전폐하고 이듬해 마진의 수도 철원으로 끌려가 모욕을 받고 자신에게 절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궁예의 현혹을 뿌리치고 스스로 장작 더미로 들어가 불타 죽는다. 그의 최후를 전령을 통해 접한 견훤은 분노해 최승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금성산성에서 몇 차례 공성전과 여러 지상전을 감행했지만 마진군의 완강한 방어 태세로 낭패만 본 후 철군했다. 이때가 909년에서 910년의 일이다.
■ 태조 왕건과 나주 오씨 처녀의 사연이 깃든 완사천
완사천공원. 완사천은 왕건과 장화왕후의 러브스토리가 담겨있는 곳이다. 공원으로 조성된 완사천에는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을 형상화한 현대적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910년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장화왕후)이 됐다. 왕건과 오다련의 딸, 나주 오씨 처녀와의 첫 만남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 완사천이다. 어느 날 목이 마른 왕건이 샘을 찾아갔다. 샘에는 어떤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왕건은 급한 목소리로 물을 달라 청했다. 왕건을 한번 바라본 처녀는 물바가지를 바로 건네지 않고 곁에 있는 버들나무로 가서 버들잎을 따 물바가지에 띄어놓는 것이었다. 왕건은 목이 마르지만 버들잎이 목에 넘어가지 않도록 버들잎을 불어가며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갈증이 가시자 왕건이 물었다. “어이하여, 버들잎을 물에 띄운 게요?” 처녀가 대답했다.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한답니다. 물에 체하면 약도 없지요. 장군이 급하게 물을 드시다 혹여 몸이 상할까봐 그랬답니다” 왕건은 이 처녀의 지혜로움에 감탄했다. 그리고 아내로 삼았다. 그 샘이 바로 나주시청 입구에 있는 완사천(浣紗川)이다. 나주시는 완사천에 오씨 처녀와 왕건의 동상을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샘물이 말라버렸으나 수맥을 개발해 완사천에는 다시 물이 가득 고이고 있다. 완사천의 인연으로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아내가 됐다. 이런 사연이 없었더라도 왕건은 오다련의 딸을 아내로 삼을 법했다. 지지기반이 약했던 왕건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완사천 러브스토리는 어쩌면 이런 정략결혼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기 위해서 후세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주 오씨 처녀,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다.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됐다. 913년 왕건은 태봉국 최고 벼슬인 시중에 올랐다. 당시 궁예는 포악하고 교만한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백성들을 괴롭히고 충신들을 함부로 죽였다. 민심이 동요하자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철원 포정전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왕건은 왕이 됐지만 고려의 군사력은 견훤의 후백제에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왕건이 신라호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왕건이 동해안을 침략하는 북방민족을 쫓아주는 등 신라백성들을 돕자 신라의 민심이 자연스럽게 왕건에게 넘어간 것이다. 결국 왕건이 세운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투항하고 만다. 견훤에 이어 신검도 936년 왕건에게 항복했다.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 견훤(甄萱)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왕건은 고려를 세웠다. 후삼국 시대에 왕건을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견훤이었다. 그러니 견훤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고려시대에 정리된 사서 대부분에 견훤의 성정이 포악하게 그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켰던 신라를 멸하고, 왕건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했던 용장이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사람이다. 농사꾼이었으나 후에 상주를 다스리는 장군이 됐다. 견훤의 본래 성(姓)은 이(李)씨인데 15세 때 스스로 견(甄)씨로 고쳤다. 그런데 이 견씨의 음독(音讀)과 관련해 일부 역사가들은 견훤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甄의 음은 진(眞)‘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따라 일부 학자들은 견훤이라 하지 않고 진훤이라고도 한다. 견훤의 묘로 알려진 전견훤묘(傳甄萱墓). 견훤왕릉이라고도 한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로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이 한 명 있어 외모가 단정했다. 그런데 밤이면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방으로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했다. 딸은 그리했다.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甄萱)이라 했다’ 견훤은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됐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모아 892년(진성여왕 6)여러 성을 공략했다. 곧 무진주(武珍州:광주)를 점령해 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상대는 궁예였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견훤이 광주출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학계에서는 견훤의 출신지를 상주로 보고 있으나 노성태 선생은 진훤(견훤)이 광주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성태 선생은 견훤이 광주출신일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거병한지 한 달 만에 5천명을 모은다. 궁예가 3,500명을 모으는데 10년이 걸린 것에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다. 광주출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견훤정권에 참여한 상주출신은 거의 없는 반면 지훤을 비롯한 박영규, 김총, 능창 등 견훤 주변인물들이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외에도 ‘아자개가 견훤의 친부이라면 918년 어떻게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투항)할 수 있겠는가?’, ‘견훤의 생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돼 금의환향하지만 사서에는 견훤에 대한 상주민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등을 제시하고 있다. 견훤은 중국 오월국, 일본과 국교를 맺고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경쟁적으로 세력 확장을 벌였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기도 했다. 견훤의 군사는 무척 강해 몇 차례나 왕건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나주공략에 나선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게 둘러 싸여 몽탄강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927년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돌아가던 견훤을 왕건이 대구 공산에서 기습공격을 했으나 이때도 견훤은 대승을 거뒀다. 왕건이 거느리던 정예기병 5천여 명은 모두 몰살당했고 왕건 역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곡성출신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후백제군을 유인해 목숨을 잃었고 왕건은 목숨을 건졌다. 견훤의 세력은 929년 고창(古昌: 안동)전투에서 왕건에게 패한 뒤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은 왕위계승 문제로 견훤과 아들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견훤은 4남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의 묘로 알려진 전견훤묘(傳甄萱墓)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라 한다.
첫댓글 축하합니다.안전.
감사합니다. 고려산인선배님!
이번에 전지가위를 사용하며 조심히 다루었습니다.
손가락을 잘른 덕산지맥 트라우마가 있어서요.^^
명감나무도 토막내고 노간주나무 가지도 등로를 막고 있는 것은 잘라주었습니다.
서너번 왔다갔다 하면 길이 잘 날것 같더군요.^^
조그마한 톱도 가져가서 잔가지도 잘라준다면 더 좋겠구요.
인원농장으로 내려서다가 벌목지에 심어둔 묘목 거치대를 올라탔습니다.
회음부를 들어올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네요. 먼 곳만 쳐다보다가 미처 보질 못했어요.
다행히 끝이 커버가 덮혀있고, 쇠막대가 약간 휘어져 걸을만 했습니다만 껍닥이 벗겨졌습니다.ㅋ
옥룡지맥 예전 한창 대구지맥에서 했지요
그때 도로를 따르기도 하고 해서 대원들이 도로를 잘 걷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혼자 고집을 부르지도 못하고 말았네요
황교마을 경로당에서 점심을 먹고 차로 이동한 기억이 남니다
중간에 태마산(x85.4) 진동고개 두류산(x106.0) 삼장고개 구수봉(x153.1)을 건너 뛰고 말아서 홀로
가슴 앓이 한적이 기억이 남니다
고문산 아래에서 다시 출발해서 마무리 했습니다
이제 홀산이 많으니 내마음대로 하니까 한편으로 좋습니다
긴구간 두구간으로 마무리 축하 드립니다
우리 담달에 백룡지맥 원샷으로 할려고 합니다
이곳은 37km 거리니까 가능할것 같습니다
늘 안산 즐산 하시고 행복한 맥길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와룡산선배님!
저는 가급적 남김없이 다 두발로 걷고 싶습니다.
제 평생 두번 걸을 수도 없는 길이니깐요.
고문산에서 내려서는데 키보다 더 큰 시누대숲이 밀림처럼 우거져서 방향을 잡을 수가 없더군요.
잠시 멘붕이었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단 달라붙고 보면 표고가 낮아서 그닥 오래 오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지막 옥룡산 오름만 약간 힘들었습니다.
저도 조만간 백룡 잡으러 나설려구요.
철성이나 사자도 잡아볼까 하는데 근처 병풍과 분적, 장원도 세트로 해야될 지맥으로 보이네요.
퐁라라운영자님의 이틀간에 걸친 옥룡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여름철에는 진행이 어렵다는 충고 말씀 부터 들으니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요. ㅎ
나주 동밖에님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수월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무돌님은 무한도전클럽 산행에서 자주 접했던 분이시구요.
4년전 땅끝기맥하면서 미리 숙지하셨던 옥룡길을 두발로 답습하여 원을 풀었으니 시원섭섭하시겠습니다. ㅎ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정신없이 옥룡과 백룡을 끝냈더니 댓글 달 여유도 없이 바빳습니다.
옥룡은 태청에 비해 거리는 짧고 등고는 낮지만 작은 고추 처럼 더 매웁습니다.
백룡은 호산 오르내림만 빼고는 그런대로 할만 하네요.
준희선생님께서 좋은 분을 소개시켜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동밖에님은 산에 대한 열정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이 많으신 분이시네요.
착실하게 주변과 일상을 관리해 나가시는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모두 동밖에 님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준희선생님과 동밖에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옥룡지맥 이름만 이쁘지 아주아주 안좋아요.
백룡에서 갈라진 형제 산줄기인데 어쩜 그리도 다른가 몰라요.
백룡은 우리도 당일산행으로 끝냈거든요.
죄우지간 수고하셨습니다.
부뜰이성님!
옥룡이 길이는 짧지만 화원과 진도와 맞장까는 지맥이라고 그러더군요.^^
둘쨋날 구간은 크게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
박짐을 메고도 무난하게 진행했으니깐요.
옥룡 아주 그냥... 간신히 끝내긴 했지만 저걸 어떻게 했나 싶습니다.
그래도 첫날 낮에 제일 힘든 구간을 넘어섰고, 짐이 가벼워 중간 이상 간것 같습니다.
저는 섬지맥 강화, 안면, 진도, 남해, 거제는 묶어서 세트로 할려고 하구요.
이제 어렵다는 지맥은 사자와 철성이 남았는가 봅니다.
부뜰이성님은 마무리 중이시니 정말 좋으시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