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을 기독교 성지화하자
이 철 재 목 사
한국오순절교회협의회 명예회장
기독교한국성서하나님의교회 감독
삼각산은 1907년 평양대부흥 이후 기독교민족지도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곳이다.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기독교애국청년들이 일본순사의 감시를 피해 낮에는 교회에서, 직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모여 기도하던 곳이다. 또한 성령세례 받은 이영도 목사 같은 오순절운동의 신앙선배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던 곳이다. 해방 전후의 민족적인 수난기와 1960년대 산업화시대에 한국교회지도자들이 금식하며 국가를 위해 기도하던 곳이다. 특히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수천 명의 성도들이 금식하며 삼각산 골짜기마다 봉우리마다 울부짖고 기도하던 곳이다. 어떤 장로님은 사재를 털어 정릉쪽 구복암 뒤편의 노적봉 가는 길에 철제난간을 만들어 금식하는 주의 종들이 오르기 좋게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이 삼각산은 한국기독교의 기도의 요람이요 부흥의 요람이었다. 특별히 삼각산 통일봉은 기도처가 산봉우리지만 평평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하기 좋은 곳이며, 맑은 날은 이곳에서 북한 개성의 송학산이 보인다. 그래서 개성출신 장세각 목사가 민족기도제단을 이곳에서 조직하여 전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함으로써 통일봉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1960년대, 김신조 등의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삼각산이 개발되고 마침내 국립공원화 되면서 삼각산 기도의 맥이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제한 받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되고 부흥이 정지 되었으며 사회 전반이 음란하고 타락하게 되었다.
삼각산이 이와 같이 한국기독교부흥의 요람이 된 것은 ①서울에 있음으로 접근이 수월했고 ②바위와 계곡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할 수 있는 기도처가 많았고 ③맑은 샘물이 곳곳에 있어 금식하기에 좋았으며 ④가난한 성도들이 마땅히 기도할 곳이 없어 삼각산으로 모인 것이며 특히 1960년 전후 성령이 폭발적으로 역사하자 기성교회에서 성령세례 받고 방언하는 성도들을 추방하고 핍박하자 삼각산으로 모인 것이다. 삼각산은 한국기독교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인 기도원운동의 출발점이다. 나운몽 목사의 용문산 기도원이나 최자실 목사의 오산리 금식기도원, 이천석 목사의 한얼산 기도원의 뿌리가 삼각산 기도다. 삼각산은 역사적으로 민족의 영산으로 일제치하 때나 가난한 보릿고개의 군사독재정권시절 기독교인들의 기도의 동산이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의 경제성장의 여파로 교회가 전국에 기도원을 세우게 되는 것도 삼각산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금식한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응답이다. 특히 용문산기도원의 365일 24시간 국가를 위한 기도 운동이나 오산리 금식기도원의 금식 운동은 한국오순절교회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이런 삼각산 기도운동은 세계기독교역사에 유례가 없는 한국적 기독교문화이다. 이는 한국의 무속문화에서 나오는 산의 정기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독특한 한국기독교 상황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런 삼각산을 기독교성지화해서 후세에 본이 되게 하자.
<2012년 7월 23일>
이철재 목사님 원고-삼각산을 기독교 성지화 하자 - 2012년 7월 23일.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