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허씨(河陽 許氏)의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허황옥(許黃玉)의 33세손이다. 고려(高麗) 때 호부낭장(戶部郞將)을 역임하고 말년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어 하주(河州)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본관(本貫)을 하주(河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지명(地名)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花城)으로 개관(改貫)하였으며 그 후 하양(河陽)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안(許康安)의 손자 작린(許綽麟)이 고려(高麗)에서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으며, 증손(曾孫) 허신(許愼)은 호부주사(戶部主事)·동정(同正)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8세 허유(許裕)가 검교대호군으로 문성공 안향(安珦)과 통혼을 하고 아들 수(許綏)는 고려의 정2품관인 판전객시사로 고위직에 출사하고, 아들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장자 허윤창(許允昌)은 도관정랑으로 세종 때 숭록대부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고, 차자 허윤충(許允忠)은 밀직부사이고, 3자 허윤여(許允呂)는 광평시랑평장사로 그의 아들 허관(許寬)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장손인 11세 허귀룡(許貴龍)은 개성부윤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들 삼형제가 모두 재상이 되었는데 장자 허주(許周)는 우왕 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다 조선 개국 후에는 한성부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시호가 간숙(簡肅)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허성(許誠)은 경사(經史)에 밝아,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권근(權近)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우고 공양왕(恭讓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처음으로 학당을 세웠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를 법전화 하는데도 노력하였다. 조선전기 통치강령 예제(五禮儀)와 법제(續六典)를 찬정하고, 이조판서를 3번이나 역임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아 후일 사육신의 스승으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돌아가신 후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허조(許稠)의 아들 13세 허후(許珝 )는 문종 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단종 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영조에 의해 신원이 회복되고 정간(貞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허후(許詡)의 아들 14세 허조(許慥)는 집현전 수찬으로 사육신 이개(李塏)의 매부이자 김문기(金文起)의 사돈이다. 성삼문 이개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자결하니 세조가 ‘그 애비에 그 자식이다.’ 고하며 박팽년 유성원의 시신과 같이 거열효수하고 아들형제도 연좌로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조에 의해 신원 회복과 홍문관 부제학으로 추증되고 아버지와 함께 정려가 내리고,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3대(代)가 모두 사육신(四六臣)과 깊은 관계를 맺어 충절의 집안으로 꼽힌다.허조(許稠)의 동생 척(許倜)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府使)로 질(姪) 허후(許詡)에 연좌되어 사직하였고,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 받았다. 그 뒤 병조참의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했다.
첫댓글 우리 허 씨 집안은 대단한 가문이다.이게 후대에 널리 알려야 할 텐 데 그렇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자손의 도리를 다 하지 못 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