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대군 孝寧大君
효령대군 (孝寧大君. 1396~1486) . 태종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가 폐세자(廢世子)된 양녕대군이고, 셋째 아들이 후일 世宗이 되는 충녕대군(忠寧大君)이다.효령대군의 아버지 즉 태종은 1명의 정비(正妃 ..왕후)와 9명의 후궁을 두었고,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과 4명의 공주를 두었다. 이 4명의 아들들이 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이다. 이중 넷째 아들 성녕대군은 14세에 홍역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보(補), 초명은 우(祐),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시호(諡號)는 정효(靖孝)이다. 태조 이성계 시절에 태어나 9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성종 17년에 91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조선 王 이름, 외자인 이유
효령대군의 이름은 이보(李補)이다. 조선 임금 중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조선시대 왕들은 이산 (정조의이름), 이도(세종의 이름)처럼 외자 이름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 정종 이방과, 태종 이방원을 비롯한 단종 (이홍위), 고종 (이명복, 이재황)을 제외하면 대부분 외자 이름이었다.
역대 왕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세조는 이유, 세종은 이도, 성종은 이혈, 연산군은 이융, 정조는 이산, 중종은 이역, 선조는 이공, 광해군은 이혼, 숙종은 이순, 영조는 이금, 순조는 이공, 철종은 이변이었다. 이밖에 왕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왕족이나 왕자들의 이름 역시 외자가 많았다. 사도세자는 이선, 양녕대군은 이제, 효령대군은 이보,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은 이용, 인종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이름은 이왕이었다. 왜 대부분 이름이 외자일까?
조선시대에는 왕위에 오른 임금의 이름자는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약 사용하는 글자 혹은 두 글자로 이름을 사용하면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글자가 제한되기 때문에 이름을 외자로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임금들의 실제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 글자 또는 외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효령대군 영정
효령대군의 초상화로 가로 70cm, 세로 90cm의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이 초상화는 황색의 관모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홍포를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이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다른 부분의 표현보다 중요한데, 여기서는 약간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된 느낌이 있다.
코와 입술은 윤곽을 묘사하는 일에는 신경을 썼으나 수염의 표현은 세밀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형태도 불완전하다. 모자와 허리띠, 옷의 무늬 등에는 금칠을 하였는데 무게감을 실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전기의 초상화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을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을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이 그림은 관악산 연주암에 보존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권사 淸權祠
통계청의 통계를 살펴 보면, 우리나라 총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9.6%가 김씨, 이씨, 박씨, 정씨에 몰려 있고, 15%가 이씨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이씨 중에서 전주이씨가 제일 많고, 105개 파로 나누어진 전주이씨는 창덕궁 앞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 많은 이씨 중에서 제일 많은 효령대군파의 총본산이 청권사이다.
청권(淸權)의 유래는 ' 신중청 폐중권 ... 身中淸 廢中權 '에서 비롯된 약어로 효령대군의 행적을 상징한것이다. 그 뜻을 보면 ' 몸가짐은 청도에 맞고, 그만둠은 권도에 맞았다 '라는 뜻으로 중국 주나라때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청권(淸權)이란 주(周)나라, 太王이 맏아들 태백(泰伯)과 둘째 아들 우중(虞仲)을 두고, 셋째 아들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짐작하고 형만(荊蠻)으로 가서 삭발(削髮), 문신(紋身), 은거(隱居)하며 왕위를 사양한 일을 뒷 날 공자(孔子)가 태백을 지덕(至德), 우중을 청권(淸權)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연유와 유래가 근거가 되어 正祖가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淸權祠),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사(至德祠)라고 이름지어 사액(賜額)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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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살아가기
태종이 장남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 효령대군을 뛰어넘어 셋째 충녕대군(훗날 세종)에게 왕위를 계승해 줄 세자로 마음먹고 있을 때 양녕과 효령은 얼마나 가시방석이었을까 ? 아버지 이방원이 어떤 사람인가 ?
할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면서 개성 선죽교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손에 피를 묻힌 인물이며,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가차없이 죽여 버린 사람이다. 또한 효령대군이 좌찬성 정역의 딸을 신부로 맞이하여 결혼한 이듬해 할아버지 이성계가 세상을 뜨자, 생전에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던 신덕왕후( 태조의 계비 강씨 )의 정동에 있던 무덤을 훼손하여 묘지는 동소문 밖 정능으로 보내버리고, 석물은 뜯어내어 경복궁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개천에 다리를 놓아 만백성이 밟고 다니게 했던 사람이다. 바로 광통교의 역사이다.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 태종이 동생 충녕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때 두 형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 바로 그것이 문제이었다.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이 보장된 양녕대군은 밤이면 개수구멍으로 대궐을 빠져나와 저잣거리에서 주막집 주모와 시시덕거리고 시정잡배와 어울리며 그 소식이 구중궁궐 대궐 담장을 넘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랐으며, 효령대군은 불경에 푹 빠져 중 아닌 중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이러한 와중에 외삼촌 민무구 사건이 터졌다. 아버지 태종을 도와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옹호하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민무구, 민무질 두 외삼촌은 누나인 태종비 민씨의 힘을 믿고 세자 양년대군을 끼고 돌면서 무엄하게도 태종과 각을 세운다. 인척이 발호하는것을 용납하지 않은 태종의 명에 의하여 사약을 받으니, 이때가 1410년으로 효령대군의 나이 14세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한양에 도성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을 무렵, 개성에 있는 정안궁에서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의 몸에서 태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은 할아버지 이성계의 건국 초기 혼란스러움과 아버지 이방원의 왕자의 난, 아우 세종대왕의 태평치세 그리고 조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성종의 태평성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연주암 戀主庵
서울 관악구는 관악산이 있어 區의 이름이 관악구로 정해졌을 만큼 관악산의 위용이 두드러진다. 높이 629m의 관악산은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으나 거친 암봉과 깊은골짜기가 어우러져 험한 산세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예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으로 손꼽혔다. 서울의 남쪽 경계를 휘두르고 과천 청계산으로 뻗어 내려간 관악산줄기는 수원 광교산에 닿아 있다.
연주암 戀主庵
연주암은 관악산의 모든 등산로가 집결하는 곳이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는 연주암은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의 연주대 남쪽 지점에 있다. 원래는 신라 문무왕 17년 (677년),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악사를 창건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의상대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관악사와 의상대는 연주암과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내력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하나는 조선개국 후 고려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사람들이 이 곳에 들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의 충신열사와 망해버린 왕조를 연모했다고 하여 연주대라 불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선 태종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과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이서 밀린 뒤 방랑하다가 이곳에 올라 왕위에 대한 미련과 동경의 심저을 담아 왕궁을 바라보았다고 해서 연주대라고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연주대의 주변경관이 워낙 뛰어난 절경인데다 한 눈에 멀리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여서 붙여진 전설이다.
효령각 孝寧閣
망원동에 있는 효령대군의 정자(亭子), 원래 이름은 합강정이었다.
한 가뭄이 들어, 세종이 기우제를 지내고, 농사 형편을 알아 보러 근처에 왔다가 이 정자에 들러 쉬고 있는데, 마침 비가 내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 사패문(賜牌文)을 내려 兄인 효령대군의 공덕을 기렸다.
후일 효령대군은 이 정자를 증손뻘인 월산대군에게 주었는데, 월산대군은 정자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고 고쳐 불렀다. 지금의 망원동의 유래이다.
월산대군은 成宗의 형으로, 효령대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여 많이 아꼈다고 한다.
희우정 송가 喜雨亭 頌歌
익피신정여봉사건 翼彼新亭如鳳斯騫 수기작지군후지현 誰其作之君侯之賢 왕출서교비유비전 王出西郊匪遊非箭 민방파종우한우전 民方播鍾憂旱于田 왕재우정시우패연 王在于亭時雨沛然 석지정명영요무전 錫之亭名榮耀無前 군후계수성덕여천 君侯稽首聖德如千 군후계수아후만년 君侯稽首我后萬年 사아문인이영궐전 思我文人以永厥傳 신배찬사위다사선 臣拜撰辭爲多士先 첨피화봉유석가전 瞻彼華峰維石可鐫 간차송장천고소선 刊此頌章千古昭宣
날 듯한 새 정자가 봉황새 나는 듯한데 / 그 누가 지었는가 어지신 군후이었는데 / 왕이 서교에 납셨으니 놀이함이 아니요 / 백성이 한창 씨앗 부리는데 가뭄을 걱정하심이었다 / 왕이 정자에 계시니 때 맞추어 비 쏟아지네 / 왕이 군후와 잔치하시는데 저 북소리가 둥둥 울린다 / 정자 이름 내려 빛나는 영화가 전에 없었네 / 군후가 머리 조아리시니 임금의 덕이 하늘과 같네 / 군후가 머리 조아리시니 우리 임금 만년수를 축원하였네 / 문인에게 부탁하여 그 전함을 길이 하실새 / 신이 절하고 글을 지으니 많은 선비 중에 처음이었다 / 저 화봉 (북한산 봉우리)을 바라보니 오직 돌에 새길만 하네 / 이 기리는 글을 새겨서 천고에 밝게 알린다.
유일한 세종의 친필 글씨
2005년 최초로 발견된 世宗의 친필 ... 효령대군의 희우정(喜雨亭) 방문
세종 즉위 7년, 1425년 4월에 극심한 가뭄에 세종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한강에 있는 兄 효령대군의 정자, 합강정을 방문한다. 이 곳에서 세종은 형님 효령대군과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을 때 마침 비가 내려 크게 기뻐하며, 이는 어진 형님의 德이라고 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세종은 궁궐로 돌아가서 사패문(賜牌文)을 내린다. " 태백과 우중은 周나라의 어진 분이다. 능히 천하를 양보하고 문신(紋身)한 채 형만(荊蠻)에 살면서 인(仁)을 이루어 공자께서 칭찬한 것이다. 수 천년이 지난 후 그 이름을 듣고, 그 의로움을 우러렀으나 아득히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더니, 이제 양녕(讓寧)과 효령(孝寧) 두 대군에게서 본다. 양 대군은 곧 나의 형님이시다....." 그리고 마지막에 "국왕 아우"라고 적어 국왕 자신을 맞추고, 형에 대한 예와 우의를 나타냈다. 지금까지 세종이 글을 지은 어제(御製)는 있었지만, 세종의 親筆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태종이 말하는 효령대군이 世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양녕대군이 폐세자(廢世子)된 후 태종이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대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택한 이유가 태종실록 35권에 기록되어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손 윗사람이 임금이 되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라고 하였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한 융통성이 부족하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다. 나와 왕비는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새도록 글을 읽었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걸릴까 두려워하여 밤에는 글을 읽는 것을 항상 금하였다. 또 정사를 다루는 원칙을 알아서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제안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였고, 또 예상을 뛰어넘는 발상도 있었다.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경우에도 몸가짐이며 언어, 동작이 두루 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은 비록 유익한 일은 아니지만, 중국의 使臣을 상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잔도 마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손님에게 권할 것이며, 환심을 살 수 있겠는가 ? 효령대군은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니 이 것도 안 될 일이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알맞게 마시고 그만두며 또한 그 아들도 장래성이 있다. 충녕대군은 큰자리를 맡길 만하므로 나는 충녕을 세자로 삼고자 한다.....
청권사 둘러보기
청권사의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보이고 그 뒤로 고즈넉한 고택의 풍모를자랑하는 모련재가 자리잡고 있다. 옛 정취가 물신거리는 모련재 오른쪽에 돌거북 등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효령대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이다. 효령대군의 생전의 업적을 살펴보고 하느로 올라가는 듯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서 있는 문인석이 찾는 이를 맞이한다.
중앙에 자리한 석등을 지나 제단을 마주보고 바라보면 왼쪽이 효령대군이고, 오른쪽이 예성 부부인 해주정씨의 묘이다. 주변을 바라보니 풍화에 세월의 더께를 말해주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시위하고 있지만, 치솟은 빌딩과 고층아파트가 효령대군의 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효령대군이 살아서 빌딩과 아파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의 묘비 .. 묘 앞에 서 있지 않고 별도를 비각(碑閣)을 세워 보관하고 있다. 무엇이든, 특히 역사적 유물은 제 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가 있을 터인데... 묘역의 철통같은 관리로 보아 도난의 우려는 없을 듯하고, 훼손 우려?? 아니면 인테리어 요소... 웃기는 돈 질?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한양에 미처 도성을 마련하지 못햇을 무렵, 개성에 있는 정안궁에서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의 몸에서 태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효령대군, 그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건국 초기 혼란스러움과 아버지 이방원의 왕자의 난, 아우 세종대왕의 태평치세 그리고 조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성종의 태평성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91세를 살명서 9명의 임금이 거쳐간 효령대군,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효령대군에게 묻고 싶은 말
아버지 태종의 네 차례의 선위 파동을 거치면서 외삼촌 두 명이 사사되었고, 외할아버지는 자진하는 등 외갓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양녕의 폐세자를 반대하던 황희 정승은 유배를 갔지만 형제는 다치지 않았고, 아우 세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는데 양녕, 효령, 충녕 이들 3형제의 우의가 돈독해서 그리된 것입니까 ?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너그러워서 그리된 것입니까 ?
아버지 태종이 살아있을 때여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였지만, 할아버지 이성계, 아버지 이방원이 죽고 아우 세종대왕마저 죽은 후에 종실의 어른으로 ' 황표정사 '를 맞이했는데, 날뛰던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 여덟 명의 조카들 중에서 누가 제일 욕심이 많았고, 누가 제일 어질고 착했습니까 ?
1450년 세종이 죽고 세종의 큰 아들 문종이 즉위하였으나 즉위 2년 3개월만에 ' 어린세자를 부탁한다 '는 고명을 집현적 학사들에게 남기고 숨을 거둔다. 이때 어린 세자가 단종이다.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되어 사사당하는데, 이때 61세의 종실 어른으로 효령대군 당신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였습니까 ?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사되기 1년 전, 단종복위 사건이 터진다.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우성원 등 문관과 유응부, 성승 등 무관들이 모의하여 상왕으로 몰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사건에 가담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털어놓아,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던 집현전 학자들과 무관들은 모두 붙잡혀 살이 찢기고 뼈가 부스러지는 국문을 당한 끝에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내걸리게 된다. 이때 죽은 이가 사육신이 아니냐고 묻자 그것은 생육신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지어낸 말이 아니냐고 되묻는것 같다. 그렇다면 사육신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재위하고 있는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던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현재에는 생육신으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효령대군은 어떠하였습니까 ?
칠삭둥이 한명회가 권람의 천거로 경덕궁 궁지기에서 수양대군의 책사로 등장하여 계유정난을 설계하고 조카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유배시키고 똑똑하다고 칭송이 자자하던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사사케 하는 밑그림을 그렸으며, 첫째 딸은 예종비, 둘째 딸은 성종비로 만들어 역사에 유례가 없는 자매가 대를 이어 왕비가 되었는데, 종실의 어른으로서 한명회를 사돈으로 맞이할 때의 기분은 어떠하였습니까 ?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지만,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1483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할아버지 효령대군이 1486년에 죽지 않고 무오사화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종실 어른인 효령대군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을까 ?
효령대군은 조선 개국 초기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에 입각한 왕권확립과 종교 변혁기(고려의 불교에서 유교로..)에 동요하는 백성들의 민심 이반을 총화로 이끌기 위하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론(儒佛調和論)을 주창하였다. 또한 여러 불경의 국역과 사찰의 증,개축 및 법기 조성 등의 불사에 힘 썼으며, 특히 백성들의 자치규범으로 " 향헌(鄕憲) 56조"를 제정하고, 대민 강론으로 백성들의 윤리 도덕과 의식교화에 헌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보 제2호인 탑골공원(塔骨公園)의 10층 석탑과 보물 제2호인 보신각종(普信閣鐘)의 주조를 직접 관장하였다. 옛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건립하게 되자 그 불사를 주관하여고, 관악산 연주암(戀主庵), 월출산 무위사, 만덕산 백련사, 양주의 회암사 등의 많은 사찰을 중건, 중수하였다.
효령대군과 매월당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온 몸으로 항거하며 이 강산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정도로 방랑의 세월을 보낸다. 그는 방랑시기를 거쳐 1463년부터 1470년 사이에 경주 금오산에서 그의 중년기를 보낸다.
금오산 시절 김시습은 두 차례 한양 출입을 하였다. 첫 번째는 경주 금오산에 정착한 첫 해 봄에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 그러다가 효령대군의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열흘 가량 내불당(內佛堂)에 머물며 ' 묘법연화경 ' 의 언해에 참여하였다. 여러 불경을 간행하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을 관할하던 효령대군이 김시습을 불경에 밝은 학승(學僧)으로 대우한 것이다. 이때 김시습은 효령대군에게 받은 얼마간의 돈으로 국영 출판국이던 교서관(校書館)에서 펴낸 맹자대전, 성리대전, 자치통감, 노자 등을 구입하고 서둘러 금오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효령대군이 원각사를 준공한 후에 전국의 스님을 초치한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場)에 김시습도 불려간 것이다. 이때 효령대군은 김시습에게 급히 올라오라고 말까지 보냈다. 이때 원각사의 일화가 전한다.
낙성법회가 있던날, 김시습은 世祖를 만나지 않으려고 미친 척 뒷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승려로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신분증으로 계권(契券)이라고도 하는 도첩(度牒)을 받고 이렇게 김시습은 찬양하였다. 불법을 널리 반포하니 요임금 하늘이 가깝고, 왕도의 강령을 널리 펴시니 순 임금 날이 펼쳐지네 .. 효령대군이 강제로 권하여 지었다. 세조는 기분이 좋아져 김시습을 친견하겠다고 전지를 내렸지만, 그러나 김시습은 서둘러 도성을 빠져 나왔다. 도첩을 받았으니 멈칫할 까닭이 없었고, 금오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효령 북치듯......
효령은 타고난 성품이 정치가이기보다는 종교의 지도자가 어울릴 듯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권력과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형 양녕대군에 대한 폐세자(廢世子) 논의가 많아지자 효령은 더욱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어느 날 술 취한 양녕대군이 효령을 찾아 와 넌지시 말하고 간다. 아버지 태종의 뜻은 충녕대군에 있다고... 이 말에 효령은 홀연히 궁을 나와 절로 들어 간다. 양주의 회암(檜巖寺)라는 설도 있고,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얘기도 있고... 실제 연주암에는 효령각(孝寧閣)도 있고, 그 안에는 효령의 영정도 봉안되어 있다.
평소에도 불교에 심취하였던 효령대군...그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조선에서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이야기하며, 조선 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므로, 그의 행적이 이해되며, 우리나라 여러 사찰에서 효령대군과 관련된 일화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연이는 추문, 효령대군의 망신
세종 9년(1427년) 2월 19일,의금부에서 보고를 올렸다. 그 보고 내용이 우선 충격적이었다. 돈녕부(敦寧府) 지사 이담(李湛)이 몰래 효령대군의 첩 기생 계궁선(桂宮仙)과 간통하였으니 법률에 의거 곤장 60대에 도형(徒刑 ..오늘날의 징역형) 2년 반에 해당합니다.
돈녕부란 왕실 종친의 범위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먼 종친이나 외척을 관리하기 위해 태종 9년에 만들어진 기구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담(李湛)이란 어떤 인물이기에 현직 국왕의 친형의 기생 첩과 대담하게 간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담은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초지일관하여 태종 이방원을 후원하였던 이화(李和)의 4남이다. 결국 이담은 비록 서자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효령대군의 5촌 아저씨이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나이 한창 때인 32세이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난감하였다. 李和가 누구인가 ? 개국공신 1등에, 자신의 아버지 태종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된 정사(靖社)공신 1등, 2차 왕자의 난 직후 책봉된 좌명(佐命)공신 2등으로 ' 3 功臣 '에다가 1등공신 중의 1등공신이었다. 결국 세종은 ' 종실훈친(宗室勳親)의 후손 '이라는 이유로 직위만 해제하고 공주로 귀양보냈다.
대신 효령대군의 첩 계궁선(桂宮仙)은 곤장 90대, 이담과 계궁선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중매쟁이 기생 대천교(帶千嬌)는곤장 80대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공주로 귀양갔던 이담은 이드해 윤 4월에석방되었고 후일 복권까지 되었다.
다시 세종 9년, 문제의 의금부 국문이 있은지 석달 후인 5월9일 이번에도 ' 왕실의 추문 '과 관련하여 세종은 대대적인 단죄를 명한다.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 후궁이 아닌 궁첩으로부터 얻은 아들들인 이의생, 이무생, 이복생 등을 한꺼번에 각각 강화도나 원주 등으로 유배보냈다. 서얼이기는 해도 자신의 사촌형제들을 대거 중형에 처했다는 것은 뭔가 큰일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번에도 중매쟁이 기생이 등장한다.
이의생은 기생 매소월(梅素月)을 첩으로 삼은 다음에 매소월로 하여금 이무생에게 자동선(紫洞仙), 간설매(間雪梅), 죽간매(竹間梅)를 소개하도록 하여 간통을 도왔고, 이복생에게는 약계춘(藥溪春)과 백정의 딸 보금(寶金)을 연결시켜 주었다. 사실 조선 초기에 권력에 참여할 수 없었던 왕실 사람들이 땅과 저택, 기생첩을 옆에 끼고 한세월 보내는 것을 탓하는 풍조는 아니었다.
문제는 또 효령대군과의 관련이었다. 죽간매와 약계춘은 효령대군이 ' 일찍이 관계했던 여인들 '이었다. 게다가 '보금'은 의성군이 일찍이 관계했던 자이고, 간설매는 봉녕군의 아들이 일찍이 관계했던 여인이었다. 의성군 이용은 효령대군의 큰 아들이다. 봉녕군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자 태종의 친형인 진안대군 이방우의 외아들이다. 현실의 권력 논리를 배제하고 적장자(적장자)로 이어졌다면 조선의 왕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인물이다. 효령대군이나 의성군, 봉녕군은 따지고 보면 추문의 희생자들이었다.
이에 버금갈 만한, 아니 그보다 훨씬 추잡한 스캔들이 세조 9년(1463) 윤7월에 터진다. 옥부향(玉膚香)은 일찍이 효령대군과 사통(私通)하였던 당대의 명기인데,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난 익현군 이관과도 사통을 하였다. 익현군은 효령대군의 조카이다.
어우동 ,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인이었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이었다. 즉 어우동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정2품 벼슬인 지사(知事) 박윤창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仝)의 아내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하였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 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죄로 처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과뇨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하여 사형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효령북... 또는 효령 북치듯...
늙은이의 늘어진, 쳐진 뱃가죽을 보고 효령북이라고 하는..그리고 무언가 미친 듯이 하는 모습을 효령 북 치듯이...라는 옛 속담이 있다.
양념의 귀뜸으로 자신에게 올 수도 있었던 왕위를 포기하고 절에 찾아 든 효령... 그는 아버지 태종에 대한 반발, 왕권에 대한 탐욕 그러나 잊을 수 밖에 없는 자괴감에서 치미는 번민... 이것은 그대로 번뇌이었을 것이다.
그는 밤낮으로 법고(法鼓)를 두드리며, 울부짖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그 야무진 북이 늙은 암소 뱃가죽마냥 축 늘어졌다고 한다. 얼마나 혼신의 힘으로 북을 두들겼는지...거기에는 自虐의 마음과 아울러 양보의 노력도 함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효령의 몸부림을 ..미화하여 효령은 선뜻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불교에 정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말하지만.. 차라이 울분에 찬 자학의 몸부림이었다고.. 그래서 그런 모습을 효령 북 치듯이..한다고 하는 속담의 맛이 그래도 인간적인 해석이 아닐까?
침묵의 지존
효령대군은 또한 침묵의 제왕이었다. 평생 자신의 의중을 들어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나라의 어른으로써 큰 일을 소리없이 추진하여 오던 그가 원망을 들은 일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일에 대하여도 침묵을 지킨 일이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될지? 이 또한 침묵만이 자신이 할 봉사로 생각한 때문일까 ? 하여튼 그는 침묵의 지존이었다.
그러나 그도 말년인 成宗시절, 어른으로써 나라의 정사에 쓴소리를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아마 그 때 쯤에는 할 말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을까?
부정축재
효령대군은 오래 살았다. 세종이 죽은 후에도 36년을 더 살아 91세에 죽는다. 그리고 그는 자식복도 많아 엄청 많은 자손을 낳아 왕실 종친 중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고, 한편 많은 재산을 남겼다.
현재에도 종친회 소유의 토지가 무척 많아 ,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不正蓄財)의 의심이 들기도 한다. 묘역을 꾸며 놓은 것 등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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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