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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9장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이야기, 특히 환자들을 치유해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8장 1~3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
2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절하면서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자 병이 깨끗이 나았답니다. 병을 고쳐주셨다는 기록은 이어지는 본문에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로마군 백인대장의 종도 고쳐주시고,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도 고쳐주십니다. 16~17절을 보겠습니다.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 뿐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도 쫓아내셨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마태복음서의 저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4~5절을 보겠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마태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들이 이사야의 예언에 대한 성취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공동체의 이런 해석을 기록된 그대로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서기 80년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와는 50년 이상의 간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가 늙어서 50년 전의 사건을 회고하며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예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단편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서기 80년대에 한 편의 복음서로 묶여졌는데, 이 작업은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의 복음서라는 이름은, 이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초대교회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실제로는 마태가 아니라 예수님 시대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신학자들이 마태공동체라고 부르는 집단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또는 여러 명이 합력해서 기록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50년이나 지난 후대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는데 제자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더라도 스승의 사상을 이으면 제자인 것입니다. 맹자가 공자의 제자라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간격은 200년 정도 됩니다. 공자는 서기전 5~6세기에 살았던 분이고 맹자는 서기전 3~4세기에 살았던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의 실제 삶과 말씀, 그리고 기록 사이에는 40년 이상의 시대적인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예수이야기가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고, 단편적으로 기록도 되면서, 그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잘못 전해진 것도 있고 의도적인 왜곡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기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정말로 환자들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주신 걸까요? 나병이나 중풍병은 오늘날의 의학으로도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의료장비나 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말씀 한 마디로 이런 병들을 고쳤답니다.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할까요?
아직까지 우리 한국 교회에는 그렇다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이런 본문은 치료가 아니라 치유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치료는 병을 물리적으로 직접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마음을 고치는 것입니다. 영어의 healing에 해당하는 말이 바로 치유입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셔서 그들의 마음이 치유 받게 해주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악령이 들렸다는 것도 개신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정신병의 영역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오늘날의 신경정신과 의사나 상담자들처럼 그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며 위로해주고 치유해주셨다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제자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먼저 19~20절을 보겠습니다.
19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2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본문은,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피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은 사회적인 권위를 인정받았던 율법학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것입니다.
이 사람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이 활동하시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나는 떠돌이 노숙자라 당신이 나를 따른다면 지금까지 누려왔던 유복한 생활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될 텐데 그럴 각오가 되어 있소?’ 라고 묻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스펙이 좋은 사람보다는 진솔한 사람을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이어서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또 제자 가운데 하나가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이 말씀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도 불편한 마음을 느끼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예수님 말씀이라도 인륜은 천륜인데 너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율법 규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기 21장 10~11절을 보겠습니다.
10 형제 제사장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대제사장은, 임명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므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도해서는 안 된다.
11 그는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민수기 6장 6~7절도 보겠습니다.
6 그는, 주께 헌신하기로 한 그 모든 기간에는, 죽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도 안 된다.
7 아버지나 어머니나 형제나 누이가 죽었을 때에라도, 그들의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표를 그 머리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마태공동체 사람들의 시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종말론적이고 극단적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복음서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록된 본문들 중에서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기록했거나, 자기들이 믿고 기록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태공동체 사람들의 시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기적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23~27절입니다.
23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24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27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
이 본문 역시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의미의 기록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연법칙까지 지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초대교회 사람들의 신앙고백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본문이 실제 사건을 기초로 전해지고 기록된 말씀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타셨던 배가 거친 풍랑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무사히 그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사건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꾸짖어서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기록은 그냥 영웅담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도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8~34절을 보겠습니다.
28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에 가셨을 때에, 귀신 들린 사람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와 마주쳤다. 그들이 너무나 사나웠으므로, 아무도 그 길을 지나다닐 수 없었다.
29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31 귀신들이 예수께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우리를 저 돼지들 속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32 예수께서 "가라" 하고 명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돼지 떼가 모두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서, 물 속에 빠져 죽었다.
33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도망 가서, 읍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을 퍼뜨렸다.
34 그래서 온 읍내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고,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 본문도 앞의 기적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의미로 읽어야 할 본문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했습니다. 귀신을 쫓는 이방종교의식을 따라하는 자는 불에 태워죽이라고까지 율법은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귀신의 존재도 인정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도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방세계의 종교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이며 흔적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에 대한 마태공동체 사람들의 신앙고백적인 기록입니다. 신화의 세계에서 살았던 이천년 전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고백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렇게 믿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