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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내 문학의 스승님들
남 진 원
당시 교육 전문잡지 ‘교육자료’와 ‘새교실’이 있었는데 유명한 시인께서 시평과 함께 문예작품을 뽑아 추천을 하였다.
나는 그걸 읽으며 문학 공부를 했다. 1년 내내 투고를 하였다. 작품을 보내고 나서는 내 작품이 추천되어 작품이 활자화되어 나오는 상상에 늘 빠졌다. 1975년, 기다릴 때마다 찾아오는 것은 실망감과 허탄함 뿐이었다.
그러나 『교육자료』와 『새교실』 에 추천된 작품들을 읽으며 문학공부를 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1] 윤일광, 김사웅 시인의 작품들
「교육자료」에서 추천 1회를 받은 윤일광의 동시 ‘아가의 나이’는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아가에게 몇 살이냐고 물을 때, 아가는 대답 대신 주먹손을 펴 보인다. 아기가 펴 보이는 손은 얼마나 귀여운가? 엄마 등에 업힌 채 아가가 펴 보이는 손은 천사의 손보다도 아름다울 것 같다고 여겼다. 윤일광 선생님의 동시를 읽으며 아가의 천진한 모습과 손이 눈에 어른거렸다. 가장 즐거운 상상이었다.
1975년을 전후하여, 윤일광 시인이 경남 거제 하청국민학교에 계실 때 「교육자료」에 추천 받은 작품이다. 아기의 귀여운 손을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한 작품은 보기 드물다. 몇 번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손을 펴 보이는 아기의 귀여운 조막손과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 하였다.
아기 손을 나무 잎사귀라 생각한 점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 아기 손가락을 빨간 고추잠자리라 여긴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신선한 감각에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다. 특히 대화법을 사용한 점은 동시의 흐름을 더욱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아가 손 – 단풍 잎사귀
아가 손 – 빨간 고추잠자리
아가 손 – 별
이런 대비가 아주 적절하여 오늘도 읽으며 미소를 짓는다.
내 문학의 스승이었다.
‘꼬가신 기다리며’는 김사웅 선생님이 대구 내당국민학교에 계실 때 추천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다. 고향마을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장이 섰다. 5일마다 마을 어른들은 장을 보러 가셨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귀하였기에 대부분 30리길을 걸어서 임계장을 다녀왔다. 하얀 고무신을 사오셨을 때엔 얼마나 기뻤는지….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김사웅 선생님의 동시 ‘꼬까신 기다리며’를 읽으면 어릴 때 장에 가신 어른들을 기다리던 일이 그리움처럼 떠오른다. 이 동시는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어서 더욱 정이 간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어릴 때의 일이, 행복했던 것을 깨달았다.
위의 작품에서 어린이는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가 꼬까신을 사 가지고 오실 거라는 희망을 갖고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엄마는 오시지 않는다. 날은 어두워지고 문풍지가 떨리도록 바람이 분다. 아마 늦가을이나 초겨울인 것 같다. 어린이는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꼬까신 꿈을 꾸며 잠이 든다.
아이는 엄마가 사 온 꼬까신을 신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나이 스물 세 살, 윤일광 선생님의 ‘아가의 나이’, 김사웅선생님의 ‘꼬까신 기다리며’ 등의 시를 공부하며 문학의 꿈을 다졌다.
[2]김현승(金顯承)시인의 시 선후평
김현승 시인은 「교육자료」인가 「새교실」인가의 시평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사실을 그대로 나태내는 글은 시가 되기 힘들다고 하며 ‘들판을 걷는 마음’이란 작품을 예로 들었다. 나는 그 작품과 해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닿는 부분이 컸다. 사실의 아름다운 기록은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친 기교도 금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노원호시인은 추천완료를 받고 천료 소감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며 시를 쓰기도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천료 소감을 쓰신 노원호 선생은 한국동시문학회 회장을 지내고 「새싹문학」을 운영을 맡기도 했다. 「새싹문학」은 전에 윤석중 선생이 만들어온 아동 문학 전문잡지였다.
그 후 노원호 시인의 동시 ‘바다를 담은 일기장’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는데 그 작품을 최도규 선생게서 가지고 와 읽어주셨다. 실감이나고 멋진 동시여서 놀라웠다. 또한 내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3]이석현 시인의 선후평(選後評)
「교육자료」에서 선평을 맡은 이석현 시인의 작품 평 또한 눈을 새롭게 뜨게 한 글들이었다.
시인의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시를 쓰는 지금도 꼭 필요한 구절이다.
그러면서 김학선 시인의 작품 ‘군창터에서’를 추천하며 매우 우수작이라고 평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그 작품을 읽으며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우수한 작품을 뽑을 수 있는 뛰어난 시인과 그 작품을 쓴 김학선 시인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어느 날, ‘아, 이거구나!’ 속으로 부르짖었다.
가르치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창작의 불씨를 지폈다.
우울했던 내 정신의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그 이후, 1976년 3월에 처음 쓴 작품은 시조였다.
3월, 봄빛이 지붕 위의 눈을 녹이고 있다. 조록조록 낙숫물이 떨어지고 흙 담장 밑은 햇볕이 내려앉아 자리를 틀었다. 온산의 눈들이 몰래 물기를 흘러보내는 봄날의 한나절이었다.
햇빛과 낙숫물 하얀 눈, 흙 담장, 이런 사물들을 떠올리니 행복했다. 옛날 봄이 찾아오는 고향의 마을이었다. 싱싱한 과일을 앞에 놓은 듯 싱그러운 기운이 내 몸 속을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록 토록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서 봄은 자리 트는가.
시상이 떠오르고 시조 한 수를 써 내려갔다. 『샘터』지에 시조 작품을 투고하였다.
4월이 끝나갈 무렵 샘터사로부터 책을 한 권 받았다. 샘터 5월호였다. 거기에 내 작품 ‘늦겨 울 아침’이 게재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원고료도 받았다.
나는 뛰어난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내 마음은 우쭐거림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한심한 행동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
1975년 내 문학의 스승님들이 있어서 감사했다. 내 곁에 제일 가까운 스승님은 뭐니뭐니해도 돌아가신 최도규 선생님이시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그립다.
문단 50여 년이 흐른 지금 내 문학의 스승은 더 많아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천하가 다 나의 문학 스승님임을 알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