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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9
2022. 7. 30
여러분을 볼 때마다 늘 감사하다. 요즘 나는 어떻게 할말이 많은지 사람이 오기만 하면 한 시간씩 붙잡고 있다. 듣든지 안듣든지 내가 좋으니까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대부분이 잘 듣고 좋아한다. 그래서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옛날에는 사람을 만나도 할 말이 없던 사람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좀 사귀어 보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매일 해도 할 말이 있다. 늘 같은 말을하는데 할수록 더 재미있고 신이 난다. 이런 일은 내 생전에 처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새로 사는 것 같다. 전에 하고 다르다.
나와 나이가 같은 분을 만나서도 20년 이상이 넘었는데 한번도 안했던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하고 있다. 상당히 말하기가 어려운 자리인데 염치불구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뜻밖에도 반응이 좋다. 앞으로 큰 일이 생길 것 같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나도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지금부터입니다. 나는 지금 새롭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내용은 지금까지 내 해 왔던 말인데 말을 못했는데 지금은 한 마디로 하라고 해도 되고 열 마디로 하라고 해도 되고, 천 마디로 하라고 해도 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을 말해도 나를 말하는 것이고 나를 말해도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를 말해도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말해도 우리를 말하고……, 이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할수록 신이 난다.
길은 단순하고 한 길이다. 여러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께로 가는데 어떻게 길이 여럿이겠는가. 모를 때 그런 것이지 알고 나면 길은 한길 뿐이다. 옛날에 CCC에 있을 때 그런 노래를 불렀다. “예수밖에 없네. 한길밖에 없네…….” 이런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는 뜻을 잘 모르고 한 것 같다. 물론 그때대로도 뜻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가사가 분명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하던 말 같지만 아주 분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한 그대로다. 거울로 볼 때도 보았는데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해 보는 것은 다르다. 다르다 해서 근본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보이기를 훨씬 명료하고 사실로 보인다는 말이다. 편지로 보던 것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하여 보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편지에 너무 익숙해지면 실제 인물이 와도 편지를 더 좋아한다. 편지가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실제 인물이라야 손도 잡고 할 것 아닌가.
우리는 참으로 신기한 세계에 와 있다. 특별히 예수에 대해서 그러하다. 예수는 아주 특이한 분이다. 모든 사람이 다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모세까지도 가르쳤다. 공자님도, 석가모니도 다 가르쳤다. 그들에게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에게 물으며 다 ‘나는 ~이다.’라고 하셨다. ‘I am ~.’ 이것이 답이다. 예수 없이는 아무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3년반을 예수님에게 듣고 배웠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니까 도로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어디에도 이런 일은 없다. 3년 반을 배웠으면 그래도 교회 하나라도 세워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말짱 옛날에 고기잡던 데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수는 이런 사람이다. 그분이 없이는 대답이 없는 것이다.
“길이 어딥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길이다.”라고 했고, “생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생명이다.”라고 했다. “먹으면 영생하는 떡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다. 무엇이든 다 자기라고 하니까 그분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바로 알아야 답이 있다. 참 신기한 분이다. 세상에 이런 분은 없다.
그러므로 이 분을 만난다는 것은 중간에 매개 없이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 보는 것이고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예수라는 분에게 접촉되기를 바란다.
양문회 이시문 형제
이 구속의 복음을 발견해주시고 말씀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이 나온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대전 류경미 자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다섯째 날까지는 단수였는데 다섯째 날부터는 왜 우리라고 하셨는지?
이현래 목사
두 질문이 같은데 나와 우리가 어떻게 다른가? 객관적으로는 나라는 표현을 썼는데 주관적으로 직접 말할 때는 우리라고 표현한 것 같다.
‘우리’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무리한 해석인 것 같다. 옛날에 왕은 자기를 말할 때 복수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우리 말로 ‘짐’이라고 했는데 백성 전체와 관계된다는 뜻이거나 크다는 뜻인 것 같다. 그렇게 표현한 것이 많다. 우리라는 표현은 꼭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적인 의미가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송영소
여러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길만 있다고 하셨는데 왜 한 길 외에 없는가.
날개가 있는 닭은 개로부터 자유한다. 그런 닭이 있었는데 항상 개만 오면 쫓겼다. 올해 63세인데 나도 개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더 젊어졌고 더 건강해졌다. 그전에는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가 없어서 쫓겼는데 날개가 생겼다. 이 한 길이 날개가 나오는 구속의 시점인 것 같다.
이현래 목사
얘기가 많이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질문이다. 한 번도 길다운 길에 못가봤다는 뜻이다. 우선 자기 눈 앞에 길이 보이면 가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가서 안되면 돌아오면 된다. 닭도 여러 번 날아보고 안되겠으니까 다른 길을 간 것 아닌가.
옛날에 천하장사 씨름을 하면 마지막에 이봉걸과 이만기가 대결했다. 자세히 보면 이봉걸이 키도 크고 힘도 훨씬 좋다. 그런데 똑같은 패턴으로 씨름을 해서 번번이 이봉걸이 졌다. 계속 보다가 속으로 ‘저러면 안되고 이러면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봉걸이 그런 방법으로 해서 이겼다. 이만기를 이기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몰라서 못이겼던 것이다. 이봉걸의 씨름 방법은 키도 크고 힘도 세서 늘 상대를 드는 것이었다. 들었으면 내던져야 하는데 이만기가 딱 붙어있으니까 던지지 못하다가 땅에 내려놓을 때 이만기가 걸고 넘어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은 이만기를 들지 않고 위에서 눌렀다. 샅바를 잡고 이만기가 아무리 기술을 넣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이만기가 어찌하지 못했다. 기술을 써야 되는데 꼼짝도 않고 버티고 있다가 마지막에 눌러 버리니까 이만기는 할 수 없이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봉걸이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은 일이 있다. 이봉걸에게는 이만기를 이길 기술이 그것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거다 싶으면 한번 해 봐야 되지 안해 보고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다가는 평생 가도 못한다. 끝이 안보여서 몰라도 일단은 잡고 봐야 한다.
나도 예수를 만나려고 찾아보다가 만날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른 데서 만날 수도 있다. 그러니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직 나같이 만났다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만 유일한 길인지 또 다른 길이 있는지는 해봐야 알지 않겠는가. 나는 이 길밖에 모르니까 여러분이 나에게 백날 물어봤자 이 말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발견한 예수가 여기 있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예수가 맞다면 또 다른 길을 굳이 갈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체험하고 얘기한 것이니 기왕이면 내 말을 듣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모르는 사람 얘기를 듣는 것보다 기왕이면 직접 만났다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바깥 사람들은 몰라도 최소한 여러분은 내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해서 내가 강제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길이 있으면 얼마든지 해 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이보다 더 좋고 확실하고 쉬운 길이 있다면 우리 모두 함께 가기 원한다. 더 쉽고 확실한 길이 있다면 그 말을 듣고 그리 가야지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말을 진즉 교회에서 해야 했는데 내가 안타까운 것이 그것이다. 내가 보았다고 하니까 적어도 나를 따라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은 한번 해 볼 일이지 머뭇거릴 일이겠는가. 내가 여태까지 거짓말을 했겠는가. 혹시 모르고 잘못한 것은 있어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확실하게 끝을 알고 말하는 것이니 여러분이 나를 한번 믿어보기 바란다. 믿어도 크게 망하는 길이 아닐 것이다. 나도 아직 망하지 않고 이 나이에 새로 살고 있다고 하니까 한번 들어와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한번만 나를 더 믿어달라고 사정하고 싶다. 여러분이 믿어주면 된다. 만일 잘못되면 내가 보상하겠다. 우리 교회에 망설이는 사람이 많은데 시간이 굉장히 바쁘다. 여러분은 젊으니까 느긋한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나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한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부탁이다.
염경선
5분전까지도 질문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시문 형제의 첫 질문에 가슴이 뛰어 나오게 되었다.
엊그제 창세기 스카이프 모임에서 ‘우리’라는 말이 나와서 주의 깊게 들었다. 간단하게 객관적으로 말할 때는 단수고 주관적으로 말할 때는 복수라고 하시며 표현의 차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 영으로 분배된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현래 목사
하나님은 어차피 모르는 분이다. 그런데 왜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칭호다. 군수, 구청장, 대통령과 같은 직함이다. 그럴 경우에는 아들이 내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성령이 내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이것은 소나무, 저것은 감나무’라고 알듯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모른다. 어제 내가 무엇이라고 했다 해서 오늘도 그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여러분이 ‘주의 손에 이끌려’를 보셨듯이 나는 나를 이끄신 분을 나는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다. 나는 그분이 누군지 모른다. 지금도 역시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알려고 몇년간 애를 먹다가 마지막에는 나 자신만 알았다.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구나.’그것만 알았다. 그러니가 하나님을 알려던 모든 것이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나만 덩그라니 남았다. 그리고 많은 거품이 사라져 버리고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 인간, 내일 일도 모르는 인간으로 발견되었다.
지금도 똑같다. 전에도 한번 말했는데 나는 얼마 전에 할 수 없이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전에는 내가 구하지 않아도 주셨고 묻지 않아도 대답하셨는데 지금 나는 병석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고쳐주십시요.”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돌아서서 생각하니까 ‘아이고, 내가 왜 이런 기도를 했지. 구하지 않아도 주신 하나님인데 내가 왜 구하고 있지?’ 하고 웃었다.
지금도 나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 어떤 경우에 어떤 분을 보고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할 수 있다. 칭호니까 내게 나타나신 분, 내가 만난 분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모른다. 그는 원래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다. 단지 예수를 만난 것이다. 다메섹에서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를 듣고 “주여, 뉘십니까.”라고 하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를 그때 만났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못들어서 모른다. 요즘도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예수와 바울이 만난 예수가 같은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칭호라고 이해하시면 좋겠다. 사람이 하나님을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규정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만날 때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만날 때 부르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아시면 될 것 같다.
염경선 다른 질문
어차피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질문드리겠다. 나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불렀다. 은사도 못받고 방언도 못받았다. 애를 썼지만 내게는 그런 은사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CCC에서 대구로 가라 해서 왔고 대구에서 목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워치만 니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난 목사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40여년을 살아왔다. 목사님 입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먹고 마셨기 때문에 나도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처음 말씀하실 때도 내 속에서는 ‘우리 시작이 그것이 아니었어요?’라는 말이 나왔다. 내가 꼼짝도 할 수 없을 때 말씀이 들렸고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소화가 안되었지만 목사님도 그 자리가 시작이고 우리도 그 자리가 시작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믿으라 하시지 않아도 믿을 것이고 따르라 하시지 않아도 따를 것이다.
이현래 목사
헷갈리게 해서 미안한데 내가 여러분에게 흙을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흙이다. 흙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해가 되니까 모두 좋아했다.
아브라함은 젊었을 때 하나님을 믿었다.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신 말을 믿으니까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바울도 이 말을 인용해서 아브라함이 무슨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낳은 것이 이스마엘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다 된 것 같은데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나서 이삭을 얻게 되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내 나이가 백살입니다.’라고 했고 사라도 장막 뒤에서 웃었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왜 너는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무한정 믿는 것이 사람이 아니고 믿을 때까지만 믿고 더 이상 못믿는 것이 사람이니까 “아니다. 내년 이맘때에 꼭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렇게 위로를 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믿음의 한계는 이스마엘까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삭이다. 이것도 흙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삭은 눈이 멀어서 야곱을 축복했다. 속은 것이다. 하지만 속지 않을 수 없어서 속은 것이다. 그래서 이삭에게 “너는 왜 그렇게 축복했느냐.”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 안 것 같은데 모르고 안 것 같은데 모르고……. 워치만 니를 만나서 하나님을 알았다는 말은 다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이고 귀중한 말씀으로 들렸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쓸 때는 그런 경험을 하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가 아니다. 사실은 모른다. 그런데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마는 옆구리를 만져보고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신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칭호지 신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굉장하지 않은가.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개신교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다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알려고 하면 안된다.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일이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구나.’라고 아는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모를뿐이다. 미리 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미리 알 수는 없다.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하셨구나.’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내게 일어난 일들도 하나님이 안했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 정도로 알아두면 된다. 하나님을 너무 알려고 하면 안된다.
나는 몇년간 하나님을 알려고 하다가 고생을 했다. 그렇다고 지금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강 그렇게 아는 것이 좋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수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대강 알면 안된다.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라고 오신 분이니까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광야 사십 년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서 만나를 먹었어도 그 하나님을 몰랐다. 만나를 주셨다는 것만 알았지 그 하나님이 누군지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을 섬겼다. 그들은 유목민이었는데 가나안 족속들은 농경민이었다. 유목민인 그들에 비해 농경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문화가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우리를 광야에서 인도해 낸 그 신은 바로 이 신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바알이나 엘이나 같은 말이다. 그래서 바알을 숭배한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영어로 God고 우리 말로는 하나님이다. 비슷한 개념이다. 직함이 아니라 너무나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뛰어들어 보자. 손해나면 내가 변상하겠다.
염경선
인생에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만날 사람을 만났다.
요즘 신인 사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참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아멘이다. 목사님을 따라 오면서 사람인 사람을 보고 너무 좋았다. 전에는 사람에 대한 개념도 없었는데 목사님을 보니 정말 사람이다. 목사님이 사람인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길이 정해졌다. 우리에게 사람인 것만 보여주신 목사님께 감사한다.
이현래 목사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내가 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에 비하면 그래도 모르는 것이 또 있다. 그래서 예수를 제시하는 것이다. 여지없이 알 수 있는 사람, 사람이 아니라고 할 여지가 전혀 없도록 완벽하게 사람인 사람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딱 꼬집어 내려면 어렵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수를 보면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구나. 이 사람을 만드시고 좋다고 하셨구나.’라고 알 수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 입장에서 나는 중매장이다.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사람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다. 나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를 거침없이 제시할 수 있다.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이 진짜 사람이다. 바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무엇이 붙어 있을 여지가 없는 사람이다. 완전하게 사람이다.”
전에 여러분이 나를 알았다 해도 지금의 나와는 비교가 안된다. 지금은 너무 명백하다. 그렇다고 남남이라는 말도 아니다. 지금 내가 예수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나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등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말할 때마다 너무 기쁘다. 어떻게 예수를 말하는데 나를 말해지는지 그것이 너무 신기하다. 예수를 말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너무 기쁘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비해 편견이 없어졌다. 내가 좀 더 알아도, 덜 알아도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이 한 자리에서 만나면 다 같다. 그래서 모든 차별이 없어지고 모든 관계가 새로워졌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도 두려움이 없다. 거리감이 없이 그 사람을 순전하게 사람으로 대하니까 두려움이 없고 내가 너무 편하다. 자유롭다. 또 우리가 모두 그 안에 있다고 아니까 세계가 무한정 넓어졌다.
우리가 못만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다 아는 것 같고 다 만난 것 같다. 유럽 어느 산골에 있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이다. 만나면 다 아는 사람이다. 이런 세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예수 안에는 이렇게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했는데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했다(요일4:3).
예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지극히 묘한 분이다. 지극히 무능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지극히 능력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아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다. 여러분이 꼭 이 예수를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요즘 열매를 문제 삼는데 온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면 그것이 열매가 아닌가. 어느 열매가 이보다 크겠는가. 사분오열되어 언어가 통일되지 않는 인간들이 다 예수 안에서 포함되어서 그 안에서 만나진다면 그것이 최고의 열매가 아닌가. 무슨 열매가 더 있겠는가.
겸손, 사랑, 온유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그 이전에 한 말이지 예수 안에 오면 다 소용없다.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판이 다르니까 소용없게 된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하였다. “그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이다. 무슨 은혜인가? ‘예수 안에’ 이것이 그의 은혜다. 모든 인류를 다 한 자리에 있게 한 것, 이것이 예수의 은혜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 이보다 더 큰 열매도 없다. 열매에 집착하지 말자. 농사를 지으면 자연히 열매가 열리니까 열매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참 열매를 보면 “열매 열매” 할 필요가 없다.
어제도 누구와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열매구나 싶었다. 너와 내가 이렇게 즐거워하는데 이것이 열매가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은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서로 사랑하라고 했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사랑하라는 말을 뭐하러 하겠는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아주 신기한 세계다.
청년부 김경수 형제
성경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대한 질문이다. 많은 신학자와 목사님들은 성경이 바이블이라는 전제에서 먼저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에 따라 예수님을 말하고 신앙의 기준을 설명한다. 반면에 목사님은 먼저 예수의 실체를 만난 후에 그 안에서 성경을 풀이한다.
‘성경을 통해 예수를 규정하느냐’와 ‘예수의 실체를 통해 성경을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이것 때문에 교회 내에서 갈등이 있는 것 같은데 목사님의 성경을 보는 관점은?
이현래 목사
성경은 누가 썼는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쓴 것이다. 성경보다 예수가 먼저다. 성경이 있어서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있어서 성경이 생긴 것이다. 예수라는 분이 있어서 성경을 쓰게 된 것이다. 소나무에 대한 말이 있어서 소나무가 생긴 것이 아니라 소나무가 있어서 소나무에 대해 써 있는 것이다. 소나무를 먼저 알아야 소나무에 대해 써놓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순서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예수를 얘기하니까 성경이 먼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도 예수께로 돌아오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예수 때문에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를 보아도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수 때문에 써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기록함에 있어서는 천분의 일이라도 오류가 있지 않겠는가. 기록한 것이니까 기록을 잘못할 수도 있고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성경의 기록들은 여러 사본을 통해서 전해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바울이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냈는데 그 원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돌고 돌아서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옛날에 책 한 권을 사기가 어려웠다. 춘향전을 한 권 사면 그 책을 베꼈다. 인쇄되어 나와서 팔리기도 했는데 옛날에는 구전으로 내려왔고 그것을 어떤 사람이 쓰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베꼈다. 그런 수없이 많은 사본 중에 이치에 맞는 것을 골라서 만든 것이 성경이다. 원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쓴 것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성경은 교회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성경보다 교회를 중요시한다. 교회가 성경을 선택했고 교회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게 되어 교황권이 하늘을 찌르듯 높아졌다. 가톨릭에서는 자기들대로 모든 것을 만든다.
그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교황청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다. 이 두 가지가 개신교의 기치다. 근원을 따지자면 예수가 있고 신약성경이 쓰여졌다. 예수가 먼저고 성경이 다음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보니까 성경은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문자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모순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나라 성리학은 주기론과 주리론, 둘로 갈라졌다. 퇴계선생의 학파는 주리론으로 원론인 셈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주기도문과 비슷하다. 그에 비해 이율곡 선생을 중심으로 한 주기론은 하늘의 뜻도 사람에게 오면 제한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사람에 따라 하늘의 뜻이 제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율곡 학파가 밀려나고 퇴계학파가 세력을 잡았던 것이다. 퇴계학파의 이론이 왕권을 유지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학문적이고 문자적인 데에 너무 얽매여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시해도 안된다. 꼭 실재가 있어야 되지 예수가 없으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형제들이 망고를 보기 전에는 내가 아무리 망고에 대해서 얘기를 해도 형제들은 다 자기대로 상상했다. ‘이렇게 생겼겠지, 저렇게 생겼겠지.’ 하고 상상했지만 막상 실재를 보고 나면 ‘아, 이것이 망고구나.’라고 안다. 지금은 망고를 파니까 볼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미국 갔을 때는 우리나라에 망고가 없었다. 망고를 먹고 하도 신기해서 아무리 얘기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사실을 보고 말했는데 듣는 사람은 다 자기대로 말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없으면 다 자기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파가 많이 갈라진 것이다. 사도들은 두 파로 갈라지지 않았다. 보았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그 사람이고 저렇게 말해도 그 사람이라고 알았다. 그런데 그 후로 갈라져서 지금은 수없이 갈라져 있다. 예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역사적인 인물을 지금은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볼 수 있는 데가 있다.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한 그 자리다. 그때 보나 지금 보나 똑같다. 앞으로 천년 후에 봐도 똑같다. 이렇게 확실한 데 뿌리를 박아야 한다. 해석은 시간이 가면 달라질 수 있다. 그래도 근본이 확실하게 있으면 언젠가는 확실하게 알 때가 온다.
그러나 근본이 흐려져 버리면 아무리 해도 안된다. 흐려진 것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니 제대로 되겠는가. “바람 핑” 한 것을 계속 근본으로 하면 그것이 “바람 빵”이 될지 “바람 풍”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바람 풍”이라고 되어 있으면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예수, 다른 예수 말고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해도 내려오지 못한 예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천 년이 지났어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앞으로 이천 년이 더 지나도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다. 사람의 해석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분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반석 아닌가.
여기 집을 지어야 되지 해석 위에 집을 지으면 되겠는가. 해석 위에 집을 짓고 해석 위에 집을 짓고, 늘 해석하고 해석하면 그것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그러니까 확실한 반석 위에 집을 짓고 확실한 흙 위에 씨를 뿌리자. 기본이 확실해야 끝도 확실하지 기본이 불확실한데 어떻게 끝이 확실해지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다. 하지만 믿는 것으로는 안된다. 믿음도 사람마다 다르고 교파마다 다르다. 거기 어떻게 내 인생을 박겠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어디 집을 지어야 창수가 나도 비가 와도 무너지지 않을까?’ 한다고 되겠는가. 반석이 어딘가. 게바라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베드로 위에 세우면 되겠는가.
예수가 반석이다. 어떤 예수가 반석인가. 나는 이 반석을 말하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이 반석 위에 내 인생을 세우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여기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 한번 박히면 자기 마음대로 못하니까 어찌 하든지 박히지 않으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해 보자. 집을 지어 보자. 태풍이 오면 넘어지는지 집을 지어 보면 안다. 내가 넘어지지 않고 있지 않은가! 80 넘은 나이에 이렇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앞으로 80살이 되면 나처럼 살겠는가. 그런데 여러분이 이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나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된다.
여러분은 수지맞은 것이다. 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축복이라고 알아야 한다. 내가 만일 여러분 나이에 이런 복음을 받았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풍성하고 넘치게 살았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금방 새로워진다. 아무도 없으면 똑같다. 빈그릇이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면 나는 완전히 돌변한다.
엊그제도 자매들 몇이 왔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 시간을 했다. 마지막에는 할렐루야 하고 춤추고 했다. 인생이 이렇게 재미있으면 되지 않는가. 더 재미있으면 좋지만 이만큼 해도 잘 사는 것이다. 이 정도면 나는 인생을 아주 잘 사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안심하고 해 보기 바란다. 믿어보라고는 안할 테니까 해 보기 바란다. 안되면 가면 된다. 들어왔다가도 나가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내가 예수 안에 있다. 내가 그렇게 믿거나 안믿거나 나는 그 안에 있다. 발견될 날만 남았다. 하루라도 빨리 발견되면 인생이 확 달라진다.
양승숙
수지맞은 사람이다. 새롭게 산다고 하시는데 아멘이다. 나도 54년 평생에 요즘 너무 새롭고 신나고 인생이 너무 확고하고 분명해진다. 내가 분명해지니까 교회도 분명해지고 사람이 분명해진다. 감사하고 은혜가 넘친다.
나도 종교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반신반인이라고 알았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철저하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5년 전에 병원에 갔다 오시고 십자가가 희미했고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분명하다고 하셨다.
그때 병실에 있으면서 죽음과 맞닥뜨리니까 이제까지 살아왔던 모든 역사, 교회, 가족, 깨달았던 것, 은혜……, 다 떨어져 나가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하셨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한 자리, 모든 것이 떠나고 마지막으로 붙들었던 아버지 하나님께도 버려진 자리, 그 자리에서 예수를 직접 만난 것인가. 그래서 그 후부터 직접 만났다고 하셨고 소유와 존재가 구분되었다고 하신 것인가?
이현래 목사
내 속을 후벼파서 창자까지 다 긁어내려는 질문인 것 같다. 수박은 껍데기 쪽보다 안쪽이 훨씬 달다. 진짜 수박 맛을 아는 사람은 가장 속에 것을 먹으려고 한다. 예수도 그렇다. 우리는 껍데기부터 핥아보고 냄새맡아 보았다. 다 수박이다. 껍데기도 수박이고 알맹이도 수박인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달다. 사람도 그러하다. 들어가 볼수록 더욱 진실하다. 예수도 들어가 볼수록 더욱 진실하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 같았는지 의문이 된다는 사람이 많다. 어째서 하나님 같았는가? 그것이 연합의 비밀이다. 이것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사람라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는 말씀을 듣고 “내가 누굽니까. 바로가 무서워서 도망쳐 온 사람인데 바로에게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면 듣겠습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온갖 말로 바로에게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래서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모세는 바로 앞에 갈 때 신이 되어 간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올 때 하나님같이 오신 것 처럼 신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 주었지 그렇지 않으면 내주었겠는가. 바로가 누군데 양이나 치던 80세의 노인에게 자기 백성을 내어주겠는가. 신으로 보였기 때문에 내준 것이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쓰일 수 있다. 우리에게 “가라.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실 수 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셨다(요10:34-36).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명령을 받은 것이다.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 이 말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신이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다. 나도 ‘내 말을 듣고 왜 저 사람이 굴복했을까?’ 할 때가 있었다. 신이 아니면 사람이 굴복하지 않는다. 말을 잘 한다고 굴복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많이 한다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으로 보여야 굴복한다. 하나님이 쓰시면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는가? 신으로 쓰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를 드러내려는 판이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던 것이다.
“너는 사람 아니냐. 너는 사람이다.”라고 하시지 않았겠는가.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할 때 “너는 원래 사람 아니냐.”라고 하셨을 것이다. “너는 원래 흙이 아니냐.” 그러니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별 짓을 다해서 무엇을 얻어먹는다 해도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 인간은 입이 다물어진다. “너는 흙이다.” 하시면 끝이다.
이런 인생을 하나님께서 쓰신다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흙과 같은 내 인생에 어떻게 씨를 뿌려서 열매를 기대하시겠다는 말인가! 이것이 영광 아닌가! 영광이 다른 것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신으로 쓰신다는 말인가! 이것이 영광이다.
그러니까 노력해서 신과 같이 되려고 하지 말자. 하나님이 나를 신으로 쓰시면 신이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신과 같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해도 안된다. 가만히 있는 사람도 하나님이 불러서 쓰시면 신이 된다.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지으셨다. 그렇게 쓰려고 지으셨으니까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이 쓰신다. 여러분은 신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된다.
나도 언제 하나님께 또 쓰일지 모른다. 누가 오면 하나님이 쓰신다. 내가 생각하지 않고 말해도 누가 와서 말을 하다 보면 ‘아, 하나님이 쓰셨구나.’라고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망설일 것이 없다. 그 앞에 가야 되지 안가보고는 모른다. 탁상공론을 해봤자 소용없다. 가봐야 안다.
김성훈
독특한 질문들로 목사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못해서 굉장히 아쉽다. 건강이 좋아지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되면 목사님 간병을 하고 싶다.
첫째는 양문 양생회 위로 모든 어른들이 내일 갑자기 사라지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제 자매는 성경을 읽고 불경도 읽겠다고 한다.
두 번째는 요즘 각자 형제 자매가 예수와 일대 일의 관계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가 가능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현래 목사
될 수 있는 대로 어려운 질문을 하면 더 좋다.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는 그런 전통이 있었다. 이모 삼촌들이 사는 것을 보고 따라왔다. 맹목적으로 따라온 사람도 있고 실속있게 따라온 사람도 있다. 겉만 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까 철저히 알아보고 따라오는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말을 할 때는 이렇게 쉬운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복음은 이렇게 쉬운 것이다. 창세기 형제들은 오랜 시간 나를 따라왔다. 40년, 50년 나를 따라온 형제들이다. 물론 그때 그때 다 좋아서 따라왔지 싫은 것을 억지로 따라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내가 지금 안 것처럼 알았더라면 쉽게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는데 내가 몰라서 형제들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 왔으니까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좀더 때를 압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아보고 얻은 결론이니까 압축했으면 좋겠다. 읽을 수 있으면 새로 불경도 읽어보고 논어맹자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나도 많이는 안봤어도 대강 거쳤는데 읽어 보면 내가 말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를 것이다.
공자님 말씀은 천리를 따라 천륜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따라서 인간생활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라는 것이다. 배워야 안다고 해서 학이시습이라 했다. 시간이 되면 많이 읽으면 좋다. 그렇지만 몇줄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알아야 되지 평생 읽어도 안되는 것을 언제 다 읽겠는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전, 서전, 예전……, 어느 세월에 다 읽어 보고 유교를 알겠는가.
불교를 다 알려면 부처님이 간 데까지 가봐야 되는데 해 보고 알아야 되지 어느 세월에 다 알겠는가. 예수도 딱 들어보면 뭔지 알아야 되지 어느 세월에 다 알고 가겠는가. 이것은 공부하듯이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우침이 필요하다.
나는 스님과 일 년간 같이 있었다. 많이 배운 것은 없지만 보고 알았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못하겠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가 안되는데 좋은 것을 알면 뭐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거기서 부족하면 더 알면 되지 다 알고 나서 하겠다고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해도 다 못안다. 그러면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하고 세상을 떠날 것 아닌가. 우선 확실한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 그것부터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형제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가깝게 있지 않은가. 멀리 갈 것 없이 아버지와 의논하면 된다. 그래도 안되면 나에게 오면 된다. 유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언제 그 많은 책을 다 읽고 있겠는가. 지혜롭게 살기 바란다. 있는 것부터 해 보고 안되면 다른 데로 옮기면 된다. 지금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옛날에는 끝까지 해 보라고 했고 끝까지 붙어 있으라고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끝까지 안해도 된다. 와 보고 싫으면 가면 된다. 또 들어와도 된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면 좋지 않은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된다. 안되면 나가고 갈 데가 없으면 또 들어오고,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
옛날에 끝까지 붙어 있으라고 했다. “잘 왔다. 끝까지 붙어 있으면 된다.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어라.” 그런데 듣다 보면 한계가 있으니까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다.’고 할 수 있는데도 나는 끝까지 붙어 있으라고 했고 오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지금은 오래 있으라고 하지 않는다. 잠깐만 있다 가도 좋다. 맛만 보고 가도 된다. 그러니 말하는대로 들으면 된다. 간단하다. 해 보고 안되면 그만두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된다. 어려운 것이 없으니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답답하면 못한다. 나부터 못하니까 여러분에게도 답답한 것을 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놀고 싶으면 실컷 놀고 뛰고 싶으면 실컷 뛰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안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면 된다. 절대로 무거운 짐은 주지 않는다. 나도 못지는데 어떻게 남에게 주겠는가.
서울교회 조순호
누가 똥을 쌌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고 한다. 냄새는 진동하는데 똥 싼 사람이 사라졌다.
1. 존재만 나이면 소유는 누구인가?
2. 존재와 소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현래 목사
존재와 소유, 이것은 우리가 늘 말하는 화두다.
주관적인 것은 똥 냄새인지 아닌지도 다 모른다. 맡기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짜장면 냄새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똥 냄새라고 할 수도 있다. 똥을 눌 데 누면 깨끗하고 좋다. 나도 시원하고 남도 깨끗하다. 그러나 안쌀 데 싸 놓으면 냄새도 나고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그러면 곤란하다. 한쪽에서는 냄새가 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향기롭다고 하면 되겠는가. 아주 문제가 커진다. 어떤 사람은 “너 때문이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나 때문이야.”라고 하는데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은 끝이 없다.
누가 냄새가 나는 똥을 싸고 갔거든 할 수 없이 내가 치워야 되지 어쩌겠는가. 내가 맡기 싫으면 내가 치워야 되지 어쩌겠는가. 이웃집에서 강아지를 여러마리 키우는데 이놈들이 꼭 우리집 잔디에 와서 싸고 간다. 똥 쌀 데가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 잔디밭에 싸는지 그놈들 심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잔디밭에 싸면 그냥 가도 되기 때문에 그러는가, 왜 하필 잔디밭에 쌀까? 집 안에서 개를 키워 보면 오줌을 방석 위에 싼다. 오줌이 싹 빨려 들어가니까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냄새가 나니까 주인은 골치 아프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많다. 싫으면 내가 치우는 수밖에 없다. 나도 옆집 개가 우리집 잔디밭에 싼 똥을 할 수 없이 나무 밑에 묻어 준다. 그러면 거름도 되니 나도 이용하게 되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씻지 않으면 발이 묻으니까 그 자리를 물로 씻어야 한다. 일부러 와서 잔디밭에 똥을 싸는데 내가 그놈 심리를 이해하려고 해도 안된다. 어쩌겠는가. 내가 치워야 되지 남의 강아지를 잡아서 때리겠는가. 똥이 싫은 사람이 조용하게 피하는 것이 좋지 어쩌겠는가. 고생을 많이 하시는 모양인데 똥을 싼 사람은 얼마나 시원하고 좋겠는가.
5일 만에 한번 똥을 누려니 나오지 않아서 사람을 불러서 관장약을 넣고 똥이 나올 때까지 참아야 한다. 몇번을 그렇게 했다. 요즘은 계속 변비약을 먹고 있다. 안그러면 막히니까 매일 아침마다 시원하게 똥을 누면 얼마나 좋겠는가.
남의 집 정문에 싸면 곤란하다. 몰래 싸놓으면 더 곤란하다. 그집 주인이 나를 찾으려고 경찰을 동원하겠는가, 어쩌겠는가. 찾았다 해서 소송을 하겠는가. 그러니까 “네가 쌌지?”라고 물어 보고 “나는 똥을 안쌌다.”고 하면 할 수 없지 어쩌겠는가. 그것으로 소송을 하겠는가. 똥이 싫으면 싫은 사람이 수고해야 되지 어쩔 수 없다.
존재만 남으면 소유는 누군가? 존재와 소유가 분리되는가? 존재와 소유의 관계를 물었는데 이 문제는 굉장히 재미있고 중요한 문제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있다는데 나는 그 책을 보지 않아서 모르는데 내가 말하는 소유와 존재는 좀 다를 것이다.
예수도 소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나도 여러분도 소유를 가진 사람이고 여러분도 소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유는 필요해서 쓰는 것이지 소유가 존재를 가리면 되겠는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소유 뒤에 숨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자 “예, 내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동산을 떠난 사람이다. 그래서 수고하고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라고 하셨다. 무엇을 위해 수고하는가? 자기를 나무로 가리느라고 수고하는 것이다. 나무를 멋있게 만들어서, 명함을 잘 만들어서 누구 앞에 내놓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것이다.
밥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수고가 아니다. 밥 먹고 사는 것을 수고라고 생각하면 죽어야지 어쩌겠는가. 밥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을 수고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누구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인가. 자기를 위한 수고다. 밥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다.
그런데 왜 땀이 흐르는가? 명함을 만드느라고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나에게 명함을 내놓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십자가에 매달려 내려오지 못한 사람’이라고 써 놓으면 “너 미쳤느냐?”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를 신격화 한 것이다.
예수를 왜 신격화 했는가? 희랍 세계에, 기라성 같은 엄청난 사람들이 있는 희랍 세계에 예수라는 사람을 내놓으려니 명함이 안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내려오지 못한 사람’을 내놓으면 믿겠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 교회에서만 해도 내가 이 예수를 내놓으니까 망설이기도 하고 말도 많고 이유도 많은데 하물며 믿지 않는 세계에 이런 예수를 내놓으면 누가 따라오겠는가.
그래서 예수 신격화 운동이 생긴 것이다. 근사한 간판을 만드느라고 오랜 세월이 걸렸다. 300년 이상 걸려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이 삼위일체론다. 삼위일체의 한분으로 승격이 된 것이다. 본질은 신인데 위격상 인간으로 나타나신 분
아리송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문제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문제꺼리다. 아무도 그 사람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이론은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사람끼리도 못만나는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그래서 나는 예수를 찾았고 만났다. 삼위일체론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해도 못내려오고 죽은 그 사람이다. 이 사람만 내가 알 수 있는 분이다. 여러분도 이 예수를 만나기 원한다.
어려운 예수를 만나려고 하면 어렵다. “나는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라고 하려면 굉장히 어렵다. “나는 성령이 충만합니다.”라고 하기도 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된다 해도 자기 혼자뿐이지 남에게 나눠 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 예수를 만나고 보니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싶다. 알고 보면 내가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뚜껑만 열어 주는 것이다. 나는 믿음이 없어서 할 수 없어서 하다 보니 이런 예수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뚜껑만 열어줄 뿐이지 내가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유와 존재는 다르다. 소유는 하나님에게 받거나 내가 만든 것이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것이다.
내가 만난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인간, 그것뿐이다.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 같았던 것도 떨어져 나가고 다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서 못내려왔다는 말을 꼭 쓰는 것이다. 듣기 싫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 말을 안쓰면 평범하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많다. 예수만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다 못내려오고 죽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에게는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쓰지 않는가. 쓸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에게 내려와 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했다.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여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수는 내려오지 못했다. “나는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해놓고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려와 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좀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마27:42, 막15:32, 눅23:35).”고 한 것이다. 우리 생각 같으면 거기서 내려왔으면 얼마나 일이 잘되었겠는가. 그러나 못내려왔다.
여기 비밀이 있다. 못내려오면 하나님 아들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못내려와도 하나님 아들이다. 상속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상속자가 아들이다. 낳았다고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낳았다고만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낳겠는가. 창조는 했지만 낳은 것이 아니다. 아들이라는 개념은 상속자라는 개념이다. 후사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육신으로 이어받을 사람,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사람, 이 사람이 아들이다.
나를 포함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공자님도 아니고 석가모니도 아니다. 나를 포함해 줄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 이러면 되지 않은가. 나를 포함하실 분이면 되지 않는가. 그분이 신이라면 나를 포함하지 못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나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다. ‘나를 포함해 줄 분이 있다. 온 인류를 포함해 줄 분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다. 내 안에도 포함될 사람이 몇은 된다. 그러나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분 안에는 만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분을 우리가 만난 것이다.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분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잠을 자고 그분 안에 있고 똥을 싸도 그분 안에 있고 언제라도 그분 안에 있다.
전에 우리는 그분을 모셔 보려고 애를 썼다. 교회 다닌 분들은 알겠지만 어떻게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살까 했고. 할 수만 있다면 수녀라도 되고 수도사도 되려고 했다. 진짜로 예수를 잘 믿어 보려는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안되었다. 기도해도 안되었다. 그분을 내 안에 모실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내가 그 안에 있다. 그러니 쉽지 않은가. 그 안에 내가 있으니 자나깨나 그 안에 있지 않은가. 성경 말씀을 보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고 하였다. 어떻게 이런 말을 했겠는가. 우리는 죽어도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의 것이다.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살아도 주를 위해 있고 죽어도 주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겠는가. 이것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연구를 많이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좋아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 안에 있다. 나가도 그 안에 있고 들어가도 그 안에 있다. 백 번을 왔다갔다 해도 된다. 그래도 그 안에 있다. 자기 혼자 왔다갔다할뿐이지 운명은 다 그 안에 있다. 예수 안에 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한 사람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여러분이 생각을 어찌 하든지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각은 문제가 안된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한국 사람이겠는가. 나는 생각하나 안하나 한국 사람이다. 착각하면 안된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말을 잘한다고 미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크면서 ‘아, 내가 한국 사람이구나.’라고 알아질 때가 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내 본적은 한국이다.’라고 알고 살면 편하다.
미국 사람들 속에 끼이려고 해도 끼워주겠는가. 대학은 서클 중심이다. 그 서클에 백인들이 우리를 끼워주겠는가.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 가기 어려운 것이다. 중요한 자리에 간 사람들은 대학 4년 동안 같이 서클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클린턴 서클이 백악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서클에 못끼이면 아무리 똑똑해도 안된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라고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잘 살 수 있다.
우리 정체성을 알고 사는 것이 좋다.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존재로 주신 것만 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분수다. 분수를 알라고 하는데 어떻게 분수를 아는가. 이것이 진짜 나의 분수다. 이렇게 아는 분수가 진짜다. 상식적으로 아는 분수는 아무리 알아도 부족하다.
존재는 하나님이 나를 지어주신 것이고 다른 것은 다 소유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어도, 하나님 같이 되게 해 주셨어도 소요다. 모세는 한번 하나님 같이 되었는데 나오니까 도로 사람이었다. 소유와 존재는 이렇게 확실하게 구분된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함을 만드느라고 일생을 허비한다. 그 명함이 자기 소유인 줄 아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 얼굴을 가리고 “명함을 보세요. 이것이 나입니다.”라고 한다.
골프 클럽의 회원이 어느날 갑자기 사업이 망하면 그 클럽에 못나간다. 끼워주지 않는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명함을 다시 만들어서 그 안에 끼어들려고 하는 것이다. 교회 장로도 무슨 자격이 있어서 장로로 세워놓은 것인데 사업을 하다 망하면 교회에 못나간다. 비난을 받게 되고 설 자리가 없고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업에 성공하면 다시 나간다. 나같으면 안갈 텐데 기어코 나왔던 데로 돌아간다. 거기 가야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 안된다. 정체성이 있게 살아야 되지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 정체성이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
존재와 소유는 확실히 구별된다. 그렇다고 소유는 없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필요하니까 있는 것이니 필요한 만큼 사용하면 된다. 그러면 욕심 부릴 것도 없고 그것으로 자기를 내세울 것도 없다.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을 자랑하면 반푼이다. 남이 보리밥 먹는데 쌀밥을 먹는다고 자랑하면 되겠는가. 쌀밥을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보리밥 먹고 사는 사람도 있지 그것이 내 존재는 아니다.
존재와 소유는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도 예수가 필요하다. 예수는 소유와 존재가 확실히 분리된 존재다. 나대로 분리되는 것도 있지만 애매한 경우가 많다. 확실한 것은 예수 안에서다. 예수 안에서 존재와 소유가 완전히 구별된다. 하나님 같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사람이다.
하나님 같았던 것은 예수님의 소유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예수의 존재다.
여러분 모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고하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