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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실체 앞에서
2022. 9. 22
류시형 형제를 보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세계는 자꾸 새로워진다. 신화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건들이 차츰 베일이 벗겨지게 되고 애매했던 모든 것이 맑고 분명해진다.
옛날 말에 구약은 그림자고 신약은 실재라는 말이 있어도 정확하게 왜 그런지 몰랐다. 예수님이 구약의 실재라는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왜 그런지 분명히 밝히 보기 어려웠다. 구약은 예수를 지시하는 책이고, 복음서도 예수를 지시하는 책이고, 신약도 역시 예수를 지시하는 책이다. 결국 집중되는 것은 예수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인데 예수의 정체가 우리에게 명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이 나온 것 같다. 믿어지지 않으니까 신화라는 말이 나오고 이해가 안되니까 기적이고 신화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인 것 같다.
그래서 창세기 1, 2장도 신화라고 하면 별로 가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보니까 내 인생을 가장 명백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나는 그 이상의 말씀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화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내 인생을 설명하는 유일한 설명이다.
형상이라는 말도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형상과 모양이라고 했는데 형상은 무엇이고 모양은 무엇인지, 아주 어려운 문제가 많다. 꼬치 꼬치 따지면 정말 어렵다.
그런데 나의 나 된 것, 이런 것으로 사람은 성경을 보는 것이니까 그렇게 보면 너무나 명백하다. 어느 하나를 꼬집어 말하기 보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아시니까 무엇이든지 애매하다고 생각하면 예수의 실재를 놓고 그 앞에서 보면 명백해 지는 것 같다. 전에도 알았지만 지금 보는 것과 비교가 안된다. 전에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고 알기는 했는데 애매하고 모호했다.
지난 주에 거듭남에 대해서 교회에서 말씀드렸다. 거듭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다시 난다. 위로부터 난다.’라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위로부터 났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렵고 다시 났다고 해도 어렵다.
교파 중에 성결교회가 사중복음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는데 그 내용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다. 그렇지만 성결교회에서도 어떻게 중생하는지 애매모호하다. 요즘에는 성결교회까지도 중생이라는 말을 많이 못쓰고 있는 것 같다. 교회들에서도 중생이라는 말을 거의 안쓴다. 우리나라는 장로교가 많으니까 믿음에 대해서만 말이 많지 다른 데 대해서는 강조점이 적다.
이번에 예를 든 거듭남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더 말씀드리겠다.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모 목사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단순한 복음을 가지고 세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따르는 사람도 많고 믿는 사람도 많다. 구체적인 내용은 못들어보았는데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도 있지만 무슨 죄를 사함 받는지도 명백하지 않다. 교회들에서 “죄 죄” 하는데 그것도 무엇인지 분명하지 못하다. 모든 것이 분명치 못하다.
부흥회에 가면 첫째 날은 죄를 회개하는 날이다. 죄를 회개하라고 강조하고 그 다음 날부터 말씀을 시작한다. 좌우간 첫째 날은 회개하는 날이다. 그날은 나에게 민망한 날이었다.
지난번에 누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죄를 안 지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고 한 것을 보면 ‘세상에는 선한 사람도 많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왜 이렇게 지독하게 말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충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안되고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도 알 수 없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러분이 들어보셔서 알겠지만 내가 말씀한 것 중에 죄 문제를 취급한 경우가 드물 것이다. 죄를 회개하라는 말을 나는 해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왔다가 그런 것을 꼬집는다. “이 교회는 십자가가 없네.”, “죄 문제가 없네.”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꾸준히 있었다. 그때 그때 할 말은 있었는데 딱 끄집어 내서 할 말은 없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다.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뿐이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한다는 사람들은 당연히 거듭났다고 한다. 몇월 며칠 몇시에 거듭났다고까지 한다. 그런 사람을 몇 사람 만나보았는데 너무 좋아서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6개월을 다녔다는 사람도 있고 3개월을 다녔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다. 안해 보았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대부분 성경에서 죄를 찾아다가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이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느냐. 저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느냐?”라며 따진다. 우리 교회에 어떤 자매님은 아버님이 특별하게 조금도 악한 마음이 없는 분이어서 자기도 어려서부터 한 번도 나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분인데 어느 전도자가 와서 일주일 동안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설득했다고 한다. 일단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야 그 다음 말이 되니까 그렇게 했는데 이 자매님이 계속해서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하니까 그 전도자는 할 수 없이 포기하고 갔다고 한다.
그런 분이 우리 교회에 왔는데 첫날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대번에 간증을 하셨다. 내가 이래저래 했는데 “오늘 여기 와서 보니까 여기가 천국이 아니냐.”고 하셨다. 교회에 한번도 안나와 본 사람인데 그런 간증을 하셨다. 아들들이 교회에 와 있으니까 긍정적인 마음도 있었겠지만 내가 죄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여기가 천국 아닙니까.”라고 하셨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안계신다.
뭔가 오리무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모든 것이 애매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예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이 신화를 벗겨봐야 된다.”라는 사람도 있고, “단지 예수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신앙고백이고 간증이고 설교다. 그것을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각색한 것이다.”라는 사람도 있어서 그런 말이 들으니까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을 따라왔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알지 않으면 안되겠구나.’라는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대강 알면 안되고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의 일생을 놓고 보면 모르는 점이 너무 많다. 어떻게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고, 베일에 가린 사람이었다. 단지 그분의 언행을 통해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식만 받아먹고 왔던 것은 분명하다. 다른 것은 내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고민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찾아보니까 아무 데도 내가 구체적으로 만날 예수가 없었다. 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거기서는 예수를 모르겠고 만나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로 온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고 소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때 당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을 들으면 다 가버린다. 별볼일 없고 쓸모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으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런 사람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사람이 우리 인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우리 문제에 대한 답이 되겠는가.
제자들까지 실망하고 가 버린 사람이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에서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예수를 보고 베드로는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배신한 것도 아니고 모르고 한 말도 아니라 당연한 말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습니다. 다 버리더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했던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는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6.25 때 인민군이 내려온 후에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가르느라고 그런 시험을 했다고 한다. 예수님 초상화를 밟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교회 다녀도 밟고 간 사람도 있고 밟지 않고 순교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그런 소문이 돌아서 그때 잠시 고민했다. 만일 인민군이 와서 나보고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믿는다고 대답하고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모른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을 통해서 시험을 한다니까 그때 성경책이 있는 사람들은 아궁이에 넣고 불살라 없애버린 사람도 있었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을 학살할 때도 할례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조사했다고 한다. 유대인들 중에도 피하려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할례받지 않은 유대인은 없으니까 다 걸렸다.
김준곤 목사님도 온 가족이 학살당했다. 전라남도 신안군인데 그쪽에서 그런 일이 상당히 심했다. 어느 여전도사님이 온 동네를 다 복음화시킨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부인과 함께 온 가족이 끌려가고 있었는데 어둑할 때 김 목사님만 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다 잡혀가서 죽고 그분 혼자 살아났는데 집에 오니까 어린 딸이 혼자 있었다. 그 딸을 데리고 혼자 살려니 어려워서 재혼했는데 부인이 약사였다. 그분에게서 딸을 둘을 더 낳았다. 한성 형제가 잘 아는데 부모의 심정은 아무리 계모가 잘해주어도 잘못하는 것이 보인다. 그러니 그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그렇다고 부인에게 왜 그러느냐고 하면 더 관계가 안좋아지니까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고통이 김 목사님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이 민족이 이렇게 된 것은 예수를 몰라서 그렇다. 그러니 이 민족을 복음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승화시켜서 민족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게 되어 국회 조찬 기도회도 만들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을 보고 일부에서는 정치에 아부한다며 비난했지만 내가 막상 CCC에 들어가서 보니 그분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행동은 많이 못했지만 민족 복음화 운동에 심취했던 때가 있었다.
한 교회에서 8년간 목회를 했는데 거기서 사건이 있어서 축출당했다. 4년을 버텼지만 마지막에는 내가 못견디겠어서 아무 대책도 없이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때는 돈 한푼도 없었는데 어쩌려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를 지지했던 집사님들이 급하게 10만 원을 만들어와서 연희동 산꼭대기에 방 한 칸을 얻어주었다. 세 사람이 누우면 딱 맞는 방이었다. 그때 식구가 다섯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은 있을 데가 없어서 첫 애를 데리고 충주로 내려갔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 셋이서 그 방에서 살았다.
이런 경우를 겪었기 때문에 다시는 교회에 안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교회를 안한다. 어느 교회라고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없겠는가.’ 하다가 CCC에 들어가니 너무나 자유롭고 좋았다. ‘여기는 적어도 교회가 아니고 선교 기관이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했는데 4년 있고 또 밀려나서 나오게 되었다. 재승형제도 그때 같이 나왔다.
모두 다 열심히 하느라고 애를 썼다. 김 목사님 보면 정말 그렇게 한 가지 일에 몰입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앉으나 서나, 차를 타나 무엇을 하나 밤낮 주야로 그 생각만 하셨다. 무슨 생각만 나면 노트에 적어서 간사들에게 시달했다. 그것을 시달하는 사람들이 서무실 직원들이었는데 얼굴이 펼 날이 없이 항상 찡그리고 있었다. 간사들은 사명감에 왔지만 정말 피땀 흘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려웠다. 개인 전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일들이 많았고 좋은 일도 많았다. 뮐러 같은 사람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만날 예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 개인들의 문제지 내가 만날 예수가 없었다.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밖에는 찾아갈 데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거기서 깜짝 그를 부딪쳐서 ‘여기 내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있네. 예수가 여기 있네.’라고 알았다. 나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만났다.”고 소리쳤다.
그런데 반응은 여러 가지고 아직도 대구교회는 통일이 안되고 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는 전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 다음 일은 모른다.
이분을 접근하고 나서 보니 나라는 것이 저절로 사라졌다. 나는 사라지고 그분밖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참 사람이 없다고 알게 되었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라고 했을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흙이라고 발견했을 때도 좋았다.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이탈했던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도덕적인 문제였겠는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회라고 모임을 시작하고 보니까 제일 많은 것이 선악에 대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선악과라는 것이 교회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교단에서 나왔던 것도 그런 판단 때문이었고, CCC에서 나온 것도 그런 판단 때문이었고, 그래서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교회를 방해하기 위한 것도 맞지만 ‘그보다 더 깊은 데 무엇이 있구나. 사람이 사람 되는 길을 가로막고 있구나.’라고 알게 되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아주 심각하게 생각되었다. 전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분명해지는 것 같다.
거듭남에 대해서도 어떤 것을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니고데모는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 그것도 모릅니까?”라고 대답하셨다. 니고데모의 말이 진실하다. 비록 모르고 한 말일지라도 거듭나려면 죽었다가 다시 나야 되지 안죽고 다시 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니고데모에게 “그것도 모르십니까?”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가르쳐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더 어려워졌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합니다.”라고 하시니 더 못알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시한 것이 장대에 달린 놋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라고 하셨다.
민수기 2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사의 골짜기를 지날 때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 놓고 “이 뱀을 쳐다보라. 그러면 산다.”고 했던 사건이 나온다. 어떻게 놋뱀을 쳐다 보았는데 살았는지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거기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는 독이 없는 뱀을 제시했다고 해석한다. 독이 없는 뱀을 보니까 독이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때는 이해가 되는 듯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독이 없는 뱀을 본다고 내게 있는 독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애매하다.
그런데 이제 예수 앞에서 ‘나는 죽은 사람이구나.’라고 아니 나를 얘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참되기 때문이다. 형체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죽었으니 시체밖에 없는데도 ‘이분만이 참된 사람이구나. 우리를 하나님이 지으실 때 이렇게 지으셨구나. 처음에 지으실 때 이런 사람처럼 지으셨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무것도 없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야 언제든지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이 형상을 입고 나와서 만물을 상대할 것 아닌가. 이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나 영광스러웠다.
내가 처음 가졌던 질문이 ‘나를 왜 이 세상에 내 놓았습니까?’라는 의문이었는데 나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형상으로 지으셨다니까 사람의 위상이 아주 확실하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고 있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셨듯이 지금도 이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며 찾으시는데 어디 있다고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위치 이탈이라고 했다. 이것을 위치 이탈이라고 한 신학자를 나는 못보았다. 다 원죄라고 한다.
그러나 그 원죄라는 것도 애매하다. 불순종, 교만, 욕정, 욕망이라고도 하는데 혹시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결과지 근본이 아니다. 왜 불순종했겠는가, 왜 교만하겠는가, 왜 욕정이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온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대답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니까 ‘사람에게 죽음 이상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만약 죽지 않고 사는 길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번 죽었다 살았다 해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있는데 그래도 죽어도 예수 믿겠다고 하겠는가, 죽지 않고 살고 봐야겠다고 하겠는가.’ 병원에 있을 때 그런 고민을 잠깐 했다. 일단 거짓말로 살아 놓고 다음에 또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얄퍅한 생각도 해 보았다. 죽음이 눈앞에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죽음이구나.’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너무 답답한 사정을 보면서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도저히 나갈 길이 없었다. 병실에는 문도 없고 외부 사람들은 못들어오게 하고, 왔다갔다 하는 간호사들이 몇 있었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꼭 유령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하려니 나는 마음만 있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사정을 바깥에서 형제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되는 문제지 여기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나의 이런 사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몇날 며칠이나 지났는지 몰라도 그런 순간이 계속 되었다.
너무 답답하니까 “하나님,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나면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것도 계속 하니까 도로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늘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밖에 없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있다면, 모든 인간에게 죽지 않고 사는 길만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거부하겠는가.
이병철 씨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차동엽 신부에게 질문서를 보냈다고 한다. 차 신부는 신부 중에 엘리트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대답해 놓은 것을 보아도 시원치 않다. 그것을 듣고 마음놓고 운명을 했을까? 만일 그때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라고 했으면 어떻게 했을까? 삼성을 내놓고 살았겠는가, 아니면 삼성을 소유하고 죽겠는가. 나 같으면 삼성을 내던지고라도 살고 싶다.
그때 중환자실에 갈 때는 정말 위험했다. 나는 집에서 나가는 것도 몰랐다. 119에 실려서 영대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급하니까 처치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우리 교회 최대식 형제가 영대병원 호흡기 센타장과 친구 사이라서 그분을 찾으니까 세미나 때문에 제주에 가 있다 해서 창용이한테 연락이 되어 사돈 되는 사람이 호흡기 센타에 있는 것을 알고 급히 중환자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 보면 알겠지만 잘못하면 살 사람도 죽는다.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동안에 재수없으면 죽고 재수 있으면 산다. 각북에 있을 때 그 집 주인인 권 교수도 응급실에서 처치를 못받아서 죽었다.
급히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그곳이 외과 중환자실이었다. 병원에 큰 중환자실이 네 군데 있는데 그곳이 제일 위급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 순간을 놓쳤으면 나는 죽었거나 혼수에 빠져서 살아나도 기억이 없거나 뇌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잠들듯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몇날을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는 시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다. 나와서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사흘 반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이었다. 밤낮도 없고 자는 시간도 없고 먹는 시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본 것은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삼일 반이 그렇게 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퇴원할 때도 그분이 아니었으면 한 과정을 더 거쳐야 했을 텐데 그분이 힘을 써서 바로 빼내서 침내에 누운채로 나왔다. 그런 예가 없다고 하는데 병실이 없으니까 내과병실에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구해서 바로 입원시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었으면 영락없이 죽었을 것인데 간신히 살아났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과연 생명과 바꿀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은 것 같다.
예수 십자가 사건을 볼 때 사람으로서의 예수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죽으셨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할 말이 아니겠는가.
살았을 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하셨던 분인데 아무 대답도 못들은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신 것은 살기를 바랐다기 보다는 무엇인가 응답을 받기를 원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세례를 받고 올라올 때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고 변화산에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했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뭔가 대답을 주셨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 대답도 못듣고 죽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말은 못하고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만 해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십자가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와 똑같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와 나는 하나다. 예수도 죽고 나도 죽는다. 죽음 앞에서는 똑같다.” 이래서 그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죽음 자체는 같지만 ‘예수의 죽음은 나와 차원이 다른 죽음이구나.’라고 보이니까 ‘참사람이 저것이구나. 진실이 저것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참이라는 것도 없어지고 진실이라는 것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나 자신은 거기서 사라지고 내 앞에서 진실하신 분 한 분만 보인다.
옛날에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진실해서 믿는다고 했다. 그때도 진실한 분이라고 알았는데 이렇게 아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이 진실 앞에서 보니까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갈수록 명백해진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면 애매하던 데가 아주 명백해진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도 아주 명백해진다. 거듭나는 것은 여기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죽고(없고) 다시 사는 것, 이것이 거듭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야, 여기서 거듭났네.’라고 알았다.
전에도 애매하지만 거듭났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예수를 안믿다 믿으면 거듭났다고 하고 예수 믿고 사람이 달라지면 거듭났다고 한다. 물론 거듭난 것이지만 결정적으로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영원한 죽음, 진실만 남은 이 죽음, 여기서 내가 죽고 다시 산다면 그것이 거듭난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안 것은 이것이다. ‘아, 여기가 죽고 다시 사는 자리구나.’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시 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죽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죽은 자로 발견된다면 그 사람으로 내가 살아야 당연하다.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내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유가 다 끝나버리니까, 내 존재도 끝나버리니까 나는 그것밖에 살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사는 길이 이것이구나. 죽고 다시 사는 것이구나.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구나.’ 이렇게 당연하게 알아진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참 좋은 말인데 잘 안된다. 자아를 버린다고 하지만 아무리 버려도 다 안버려진다. 무엇이 남아도 남는다. 심지어는 ‘나는 자아를 버렸다.’는 것이 남아 있다. 사실은 다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버릴 수 없다. 자기 몸에 주사 바늘을 꼽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 나는 매일 내 몸에 주사를 놓아 보았는데 놓을 때마다 어려웠다. 하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격이지 절대로 불가능하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으니까 다 자기를 부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100% 부인이 안된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도 100%가 안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이 자리에 오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된다. 그래서 이 안에서 사람은 다 하나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은사만 보아도 다 다르고, 믿음만 보아도 서로 다르다. 물론 신학은 말할 것도 없다. 신학자가 나올 때마다 달라졌다. 이것이 끝없는 함정이다. 이것이 죽음보다 더 깊은 함정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가도 안되는 끝없는 함정이다.
그동안 역사를 경험하면서 자본주의 정신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하게 되었다. 또 교육을 그렇게 받는다. “절대적인 것이 어디 있느냐. 절대적인 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다 독재자들이다. 히틀러가 그렇고 도죠가 그렇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말하면 안된다. 가봐야 되고 찾아봐야 되고, 지금 답이 없어도 찾을 때까지 찾아봐야 한다.” 이것이 과학 정신이다. 찾고 또 찾다 보니까 과학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러나 사람은 발전이 안되었다. 과학의 세계와는 아주 다른 세계다. 그렇다고 “두고 봐야 되지 지금 다 안다고 할 수 있느냐?”고 하면 언제 다 알겠는가.
그러나 오늘로서 나는 마지막이고 오늘로서 나는 절대적이다. 다른 것이 없으니까 오늘로서 절대적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지 다른 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은 신이 될 수도 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갈 때 신으로 갔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바로 앞에 가서 이 엄청난 말을 하겠습니까. 나는 갈 수 없습니다.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며 버티니까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모세가 바로 앞에 신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그 백성을 내 주었겠는가. 신으로 보였기 때문에 내준 것이다.
사람은 신이 되도록 지어졌다. 그 말은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신의 모습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신의 모습으로 보여야 되기 때문에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여기서 모두 헷갈리는 것 같다. “예수가 어떻게 단순한 사람이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성이 있지만 위격상 사람이 된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숭배하기는 좋은데 문제는 내가 그 안에서 인생의 원위치를 찾을 수 없고, 원위치를 찾지 못하면 내가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구속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나와 똑같아야 거기서 ‘그와 함께’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함께 될 길이 없다.
거듭남은 그분 안에서 다시 나는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노골적으로 말하면 “당신은 나로 말미암아 다시 나야 합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돌려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끝내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은 정직하고 옳은 사람이라는 것은 각인이 되어 예수께서 죽은 다음에 향 백근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향 백근은 굉장히 많은 양인데 그것을 몸에 어떻게 넣었는지 모른다. 미라를 만들 때는 해부해서 넣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배를 갈라서 넣었을 리는 없고 어떻게 향 백근을 넣어서 사람이 들어가 보지 않은 새 무덤에 넣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는 끝까지 예수의 주변을 위성처럼 돌다가 만나지 못하고 가버렸다.
만났다 해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만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버린 것이다. 이 자리는 지난 번에 재승 형제가 말한 대로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자리다.
그런데 거기에 진실이 있고 참이 있다. 우리의 영원한 자리가 거기 있다. 내가 형상으로 지어진 자리가 있다면 바로 이 자리가 아니겠는가.
십계명에는 “나를 위해서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셨다. 맑은 유리에 빛이 맑게 투과된다. 전에 자기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비유했다. “해방 직후에는 유리가 없고 기술도 없어서 전구에 버큼이 있었다. 불을 켜면 어름어름하게 그늘이 졌다. 지금은 유리 원료가 들어오고 완전하게 만들어져서 전구가 백열등에 들어가면 불빛이 제대로 비친다. 사람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형상이라 해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용을 100% 반사하는 것, 그것이 형상이 아니겠는가.”라고.
모든 사람이 버리고 간 예수가 바로 그런 백열등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불이 꺼지면 도로 유리다. 흙은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지만 열매를 거두어가면 도로 흙이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씨를 받아서 아기를 만들어내지만 아기를 낳고나면 도로 여자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셔서 우리를 신이 되게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다.
나도 적지만 그런 경험이 있다. 도저히 내가 한 말로 상대방이 살아날 수 없었는데 살아나서 “내가 엊저녁에 목사님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재승 형제 큰 누님이 간암에 걸려 죽게되었다면서 아버님이 가자고 하셨다. 난감했다. 어른이 가자 하시는데 못간다고 할 수도 없어서 마지못해 따라갔지만 가는 내내 고민이 그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지? 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죽어가는 분 앞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죽어도 천당에 간다고 할 수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가서 막상 대해 보니까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그분은 누워계셨다.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 시간까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어서 내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다. “나는 어려서 병이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저러하게 살아났습니다.” 그 말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달리 생각하면 ‘너는 살았으니 그런 말을 하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 말을 듣고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쪽지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신으로 쓰셨던 셈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 일주일 정도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시니까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심하고 가세요.”라고 쪽지를 써서 드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버리셨다. 나는 준비하라는 마음으로 했는데 고개를 돌려버리니 민망했다. 아무 때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무슨 말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면 어떻게 사용하실지 전혀 모른다. ‘이렇게 사용되면 좋겠다.’고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에는 사용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 나를 쓰시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부르심을 따라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 왔다가신 흔적은 있는데 오시기 전에는 모른다. 어떻게 오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 사건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지난 지가 이천 년이 지났다. 분명한 사실이니까 없어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건이다.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 아닌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 아니겠는가. “너는 사람이 아니냐. 너는 사람이다.” 그러니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냥 운명하셨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들으셨는지 못들으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자리, 아무것도 아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자리가 진실하다.
이것이 애매하게 들려서 잘 안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어떤 형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부활한 것을 보여줄 수도 없다. 아무것도 그분을 우리가 보여줄 만한 것이 없다. 이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지 않은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죽었다는 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안에 만민이 포함된다. 누구나 그 앞에 가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나는 없어지고 그분만 남는다. 그러니까 그분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사람이 일반이다. 너, 나, 우리밖에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른 것은 소유 때문이다. 지식 때문에, 물질 때문에, 경험 때문에 달랐다. 그것은 다 우리의 소유다. 소유는 그 앞에서 다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하나님을 안다는 소유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그런 사람으로 살다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지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누구하고든지 할 말이 이것밖에 없다. 알아듣든지 못알아듣든지 이 말밖에 없다. 긴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이 말밖에 없다. 이 말도 길어서 나는 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말이 없겠는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도를 하려면 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한 마디로 해야 되지 긴 말을 한다고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개인 전도를 한번도 못해보았다. 전도를 하려고 긴 설명을 하고 나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가버렸다. 한 사람을 붙잡고 6개월 동안 했는데 장가갈 때 딴 데로 가버렸다. 6개월간 성경공부를 같이 했는데 로 헛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 교회 교사들에게 같은 교무실에서 4년에서 8년을 같이 근무하면서 전도를 못한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따라오는 것은 다른 이유로 오는 것이지 전도를 잘한다고 따라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구자길 형제는 어수룩한데 권재훈 형제가 따라왔다. 예비군 훈련 갔다가 만나서 오게 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따라올지 모르는 것이다. CCC에서 보고를 하면서 구자길 형제 이야기를 했다. 아침에 염경선 자매가 도시락을 싸 주면 그것을 가지고 나는 경대로 갔고 재승 형제는 영대로 갔는데 아침 큐티를 하고 나면 교정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학생들을 만나다가 저녁 때 돌아왔다. 그때 구자길 형제가 인문관 뒤에서 누군가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그 이야기를 했다. 학생 하나가 그렇게 전도를 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김준곤 목사님이 “우리 기도합시다.” 하더니 엉엉 울면서 “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애원했는데 안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보내주셨으면 다 나 같은 사람을 만들었을겁니다. 나는 내 가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난리가 났다. 그 방 안에 간사들이 80명, 대전지구 순장들이 6-70명으로 가득 찼는데 기도판이 벌어져서 방언하는 사람, 우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생겼다.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잤다. 모인 것은 회의와 전달 사항 때문이었는데 그냥 잤던 것이다. 아침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김 목사님이 뒤에 와서 “오늘 기도회를 인도하시요.”라고 하셨다. 자기가 할 것을 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래서 10분 동안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러고 나니까 두말 안하고 얼굴이 밝아지더니 “우리 일어나 갑시다.”라고 하셨다. 회의라고 모아놓고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간사들이 어쩌려고 그냥 가자는 것이냐고 수근수근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집회에 상상 외로 많이 모였다. 1000명을 목표로 했는데 2300명이 모였다. 그래서 오류동 박동선 씨 별장을 취소하고 문화체육관을 빌렸다. 그런 사건으로 내가 나서게 된 것이다. 나는 늘 숨어 있고 싶었지 나서기를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 목사님 빽으로 왔다고 할 수도 없고 김 목사님을 잘 알아서 왔다고 할 수도 없어서 될 수 있으면 얼굴을 안보이려고 했다. 서무실에 들어가도 아무도 인사를 안했다. 다 본체만체 했어도 나는 그것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문화체육관 집회에 가니까 서무실 직원들이 일어나서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김 목사님이 아무것도 하라는 말을 안하니까 그들에게는 그때 보다 편한 여름집회가 없었던 것이다. 간사들도 나를 보고 너무 반가워했다. 이런 집회같으면 다달이해도 되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라는 말을 안하니까 아무것도 안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전보다 훨씬 많이 모였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숨기지 못하게 되었다. 그 뒤로는 한번도 나에게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 뭐가 잘못 끼어서 그 사건 때문에 우리가 밀려나게 되었다.
나는 밀려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 계속 있었으면 이런 복음을 알았을 리 없다. 충주에서 답답한 친구들을 만나다 보니까 내가 워치만 니를 만나게 되었고, 앞이 콱 막혀서 이번에도 죽음 앞에 서니까 꽉 막혀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길이 없어야 길이 생기는구나. 길이 없어야 길이 되시지 길이 있는데 길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내가 길이요.” 한다고 다 길이 되겠는가. 길이 없는 사람에게만 길을 찾는데 길이 없어서 콱 막힌 사람에게만 “내가 길이요”라는 말이 들리지 갈 길이 많은 사람에게 그 말이 들리겠는가. 아무리 들어도 안들린다.
나는 왜 이런 사람만 만나는지 모르지만 가난도 복이고 갈 길이 막힌 것도 복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될까? 그럴듯한 사람에게 전파되면 좋은데 꽉 막힌 사람들만 복음을 만난다. 궁즉통이라고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류시형이에게도 배운 것이 많다. 처음에 와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더니 찬송한다는 사람이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어서 부르는 것을 보니 머리가 좋다. 나는 평생 교회밖에 안다녀서 그런 노래를 찬송이라고 부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아니구나. 저것이 찬송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600곡 찬송에 있는 것만 찬송이 아니라 저것이 진짜 바로 찬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찬송가를 터버린 것이다. 가사도 개사하고 이렇게 부르든 저렇게 부르든 자기가 좋아서 부르는 것은 다 찬송이다. 류시형에게서 큰 것을 배웠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자기가 좋은 것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을 보고 ‘저것이 찬송이구나. 곡조와 가사를 맞춰서 한다고 찬송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냥 입으로 찬송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냥 순서에 따라서 하는 것이다. 찬송가 부르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드물고 보통 사람은 다 의식에 따라 부른다. 그보다는 류시형 형제 노래가 훨씬 낫지 않은가. 그렇다고 일부러 유행가 곡에 가사를 붙여서 부르고 다니면 안된다.
아무리 좋은 가사를 만들어 놓아도 사람들이 안부르면 헛일이다. 찬송가는 다 사연이 있어서 만들었는데 부르는 사람에게 그런 사연이 없으면 불러도 소용없다. 제주에 가면 아줌마들 여럿이 부르는 18번이 있었다. 가정 생활도 어렵고 여러가지 어려운 데서 왔으니까 부르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손을 들고 부르는데 아주 구성지게 불렀다. 사람마다 은혜를 받았다는 찬송이 따로 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찬송이지 그냥 곡조 좋다고 부르는 것은 찬송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지금은 누가 물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다시 산다.” 내가 이 나이에 다시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내 느낌에는 분명히 전과 다르게 다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이 짧은 것이 아쉽다. 짧은 것을 생각하면 아쉽다. 한참 입맛 나서 살고 있는데 ‘불러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당신에게 필요하면 살려 놓으시고 필요치 않으면 데려가세요. 개인적으로는 만족합니다. 과분합니다.”라고 기도한다. 백 살일지 이백 살일지 모르고, 내일일지 모레일지 모른다.
정말 좋다. 편하고 좋고 자유롭다. 사람 차별이 안되고 정말 좋다. 또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옛날에는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 오면 ‘저 사람이 왜 왔는가,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듣든지 안듣든지 해야 한다. 안들으면 그만이고 들으면 좋고, 내가 할 말이 이것밖에 없다고 아니까 담대해졌다.
나는 지금 새판에 살고 있다. 옛날 판과 다르다.
지난번에 윤동형제와 형상과 모양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끝이 없었다. 문자적인 해석을 하다 보니 해석이 안된다. 그래서 ‘아이고, 모르겠다. 그냥 내가 아는 대로밖에 말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게 되었다.
형상은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흙이다. 여자다.’ 이것밖에 비유할 데가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아무것도 없다. 형상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면 무슨 형상이 된다.
류시형이도 하나님이 쓰시니 살아난 것 같다. 이제는 청송에 갈 필요가 없다. 그 전에도 갈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영원히 갈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