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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
2023. 1. 1
늘 하는 말이지만 여러분을 볼 때마다 반갑다. 젊은이들이 나오니 얼마나 활기찬지 힘이 어디서 오는 것 같다. 오늘은 2023년 첫날이다. 뉴 밀레니엄이라더니 벌써 23년이 흘렀다. 오늘 여러분에게 새해 선물을 무엇을 드릴까 했는데 좋은 선물이 생겼다. 울산에서 온 젊은 형제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복음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지난 수요일 간증을 듣고 깜짝 놀랬다. 이것은 배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신학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력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자길 형제 말대로 즉시 복음이라는 말이 맞다. 어떻게 그렇게 확실한지 여러분이 들어보면 알겠지만 놀랍다. 울산 오성진 형제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발령 대기중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에게 줄 선물로 이 형제를 소개하겠다.
오성진 형제의 간증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따라왔던 형제들도 이것을 알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왜냐하면 내가 말씀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싶은데 막상 하려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되는데 우리는 왜 안되는가?’라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 청년은 나이도 얼마 안되는데 내 속을 환히 알고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예수도 우리가 그렇게 알면 쉽게 알 텐데 너무 어렵게 알고 있다. 행하신 일을 보나 기적으로 보나 어느 것을 보아도 그분은 우리와 너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숭배만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이라고 숭배한다. 기독교 전반에서 예수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1 없다. 자유주의 계통에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신인데 위격상 아들이라는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우리와 먼 사람이다. 우리가 숭배할 사람밖에 안된다. 내 생각에는 그래서 이천 년 동안 기독교가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유대인들은 그들대로 “네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내려와 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못내려온 것은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같은 사람, 바로 앞에서 신이 된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도 한번 그렇게 해 봐.”라고 한 것인데 예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 실망하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옛날에 그것을 보면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버린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뭔가를 기대하고 따랐는데 예수는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실망하고 가 버렸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은 헛것을 기대하다가 예수에게 실망하고 떠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자신도 마지막에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그분도 마지막까지 무엇인가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네가 지금 죽지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한 마디 해 주셨으면 예수님은 마음 놓고 돌아가셨을 것 아닌가.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말을 하고 죽은 것이다.
우리 말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끝났다, It is finished.’라는 뜻이다. 이 말을 하나님의 모든 경륜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직접적인 의미는 다 이루었다는 뜻이 아니라 끝났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어려운 예수를 가깝게 만나게 되었다. ‘아, 이분도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전에도 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도 그래도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은 어려웠고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내가 어떻게 다 알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먹었다. 먹으니 맛있고 편하고 쉬우니까 그것을 교회에 공급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너무나 편한 교회가 되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도 없고 십 년을 놀다 와도 되고……, 세상에서 이렇게 편한 교회가 없게 되었는데 항상 그분과 거리감이 있었다. 그분과 하나가 안되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니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나오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나와 다른 분이니까 그렇구나.’ 하고 접어놓고 그 부스러기를 먹었다.
마지막에 “이것이 내 살이다. 내 피다.”라는 말이 왔으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된다고만 해석하고 먹고 살았다. 그래서 편했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고 못먹는 것은 놔 두었으니까 얼마나 편했겠는가.
일반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면 편하지 못하다. “금식해라. 철야해라. 충성을 다해라. 잘 믿어라.” 이런 요구가 많다. 평생 해도 완전하게 안된다.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그만하면 되는지 점검할 수 없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생활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그런데 예수를 알고 보니 전혀 딴판이다. 그는 우리와 똑같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나왔다. 이것이 비밀이다. 우리와 똑같은데 나오는 것은 우리와 다른 것이 나온 것이다.
모세도 그러했다. 양식은 똑같았다. 그런데 다른 것이 나왔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 하시니까 모세는 온갖 핑계를 다 댔다.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 내가 누굽니까. 바로가 무서워서 도망친 놈 아닙니까. 이런 나를 왜 거기 가라고 하십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며 끝까지 버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가서 바로와 붙었던 것이다. 바로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어했지만 마지막에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는 판이 되니까 놀라서 빨리 나가달라고 등을 밀었고 애굽 백성들은 “당신이 여기 있으면 우리나라가 다 망하겠다.” 하고 은금패물을 주면서까지 빨리 나가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애굽을 나온 것이지 이백만 이상 되는 백성을 바로가 그냥 보냈겠는가.
유대인들은 예수께 “너도 한번 그렇게 해 보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거기서 나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던 분도 실 내용은 사람이구나. 진짜 내용은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된 것이다. 그렇게 쓰실만 하니까 그렇게 쓰신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를 모세처럼 쓰시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은 아니다. 사람인데 신으로 쓰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람을 이렇게도 쓰실 수 있고 저렇게도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
자기 색깔이 있으면 못쓰신다. 하나님이 파란색으로 쓰시고 싶은데 내가 노란색을 가지고 있으면 뭐가 되겠는가. 섞이면 초록색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자기에게 필요한 색깔이 있는데 아무리 배합해도 그 색이 안나오면 그림을 못그린다.
그 색이 나와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제일 좋은 물감은 섞으면 화가가 원하는 색이 나오는 물감이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하셨던 사람도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다 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에게는 뭔가 위대한 것이 있겠지. 뭔가 다른 것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대로 위대한 것, 다른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다.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 버리니까 쓰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비밀은 귀신 같은 비밀이 아니라 사실인데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다. 왜 모르는가? 우리 위치가 이탈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리 위치가 이탈되었으니까 하나님에게는 평범한 일인데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끝없이 거리가 먼 것이다. 거리가 머니까 나갈 때마다 뭔가를 들고 가야 하던 것이다. 무엇을 들고 나오는 것, 이것이 대속이다. 나를 무엇이 대신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그러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으므로 처음 익은 열매를 갖고 왔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므로 양의 첫 새끼를 갖고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다. 왜 그랬을까?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를 대속으로 받으신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시지 제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까 아담은 “내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아담은 하나님께 얼굴을 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가 내놓을 수 있는 얼굴은 나무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나무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간판이다. 내가 가지고 가는 제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진짜 얼굴을 원하신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사진만 보낸다면 만족이 되겠는가. 사람은 오지 않고 사진만 보내면서 “이것은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것은 더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하면 만족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잘 찍은 사진만 보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잘 찍은 사진, 멋있는 사진을 애인에게 보내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다.
구약시대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나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가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해 보니까 제물로는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새 언약을 내놓으신 것이다. 제물로 되었으면 새 언약을 내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누구나 제물만 가지고 가면 되는데 새로운 언약을 뭐하러 내놓으셨겠는가.
새 언약의 내용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 속에 두겠는가. 사람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바꾸겠는가. 사람을 바꿀 방법이 없다. 사람의 위치를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모든 종교가 자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만들수록 가짜다. 우리는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놓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짜다. 가짜라는 말은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원래 그 얼굴이 아니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다.” 하신 그 얼굴이 아니니까 못쓰는 것이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그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본 것은 이 사람이다. ‘아, 저 사람, 저 자리를 보시고 심히 좋다 하셨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냥 끝난 것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싫은 것이니까 필요없는 것이고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지을 때 원래 그렇게 지으셨다. 그래 놓고 보기에 좋다고 하신 것이다.
아담이 왜 먹지 말라 하신 과일을 기어코 먹었겠는가. 자기 모습을 보니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을 피해 보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창세기 3장 22절에는 “저 자가 선악과를 먹고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셨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동산에서 내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산 동편에 화염검을 두어 누구도 못들어오게 막아 놓으셨다.
아담은 그때부터 동산에 못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부르고 있는데 “두려워 숨었습니다. 내 앞에 있는 나무를 보세요.” 하고 있으니 되겠는가. 가인과 아벨이 올 때는 “나는 두렵고 이런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좀 보세요.” 하고 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신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가면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만든 것은 다 싫으니까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그것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없다. 왜 없는가? 싫으니까 버린 것이다. 고물상으로 줘 버려서 나에게 없으니까 누가 물어도 “그런 것은 나에게 없다.”고 한다. 누가 혹시 나보고 “너는 고철이 아니냐?”고 하면 “내가 왜 고철이냐.”라고 한다.
“그래도 너는 고철 아니냐.”고 하면 “나는 상고철이다.”라고 한다. 고철 중에도 상, 중, 하가 있다. 철근은 상고철이다. 녹이면 금방 쇠가 되니까 상고철이다. 깡통 부스러기는 아무리 많아도 철이 안된다. 비철금속이라 해서 부피를 늘리려고 조금씩 집어넣어서 제철소로 보내는데 진짜 상고철은 값이 비싸다. 그러니까 최소한 상고철이라도 되고 싶지 쓸데없는 고철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께는 상고철이든 하고철이든 어차피 용광로에서 다시 녹여야 쓰실 수 있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고철 그대로, 쇠 그대로 있는 것이 제일 좋다. 이것이 이상한 비밀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 ‘나에게는 절대로 쓸모가 없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이 비밀을 아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그럴듯하게 생각하는 것, 거기 내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쓰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멸망과 영생이 결정된다. 멸망이라 해서 폭탄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 쓸모없으면 멸망이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 지으셨는데 쓰실 수 없으면 멸망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쓸모가 없게 되면 고철이다. 미국 어느 박물관에 가 보니 맨 처음에 만들었던 컴퓨터가 있었다. 그 크기가 온 방에 가득 찰 정도였다. 그렇게 커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백분의 일도 안된다. 그것을 그냥 물건으로 전시해 놓고 있다. 거기서 점점 축소되고 더 축소되었고, 그 방에 있는 것보다 백 배나 성능이 좋은 것을 지금 우리는 손에 들고 다닌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평생 가봐야 하나님께 쓸모가 없다. 나는 싫어하는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자리,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하나님이 정하신 그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 어디 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는가. 나도 한참 젊은 날에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몇년을 헤매고 다녔는데 마지막에는 모르게 되었다. 무엇을 알았는가?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 이것만 알았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을 생각이 없어졌다. 내일도 모르는 놈이 무슨 하나님을 찾겠는가. 내일 아침에 밥을 먹을지 못먹을지 모르는 인간이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면 뭐하겠는가. 나는 그것을 실제로 경험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디로 간 데 없고 내 모습만 보였다.
그런데 그때 ‘나는 피조물이구나. 성경이 말하는 피조물이 나구나.’라고 알았다. 그 전에도 이론으로는 알았지만 그때 진짜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알았다. 그렇게 알고 나니까 ‘하나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나를 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라고 묻게 되었다. 그 전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그 신세가 되니까 “하나님, 나는 지금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나를 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라고 묻게 되었다.
그러고 있을 때 다른 판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 판에 가 보니 돈 문제는 어디로 간 데 없었다. 돈 문제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공부해라. 공부” 하는 것만 남았다. 거기 가니 공부만 잘하면 되는 판이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 그러니 누워서 떡 먹기였다. 나는 돈 버는 세계에서는 꼴찌였는데 판을 옮기니까 내가 일등이 되었다. 마치 달려가다가 “뒤로 돌아 가” 하면 꼴찌가 일등이 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내가 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판이 바뀌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 판에서는 이 판을 말할 수 없다. “왜 저러냐, 왜 저렇게 버릇없느냐.”라는 소리를 할 수 없다. 버릇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짚신을 모릅니다.”라는 뜻이다. 나이키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짚신을 꼭 알아야 하겠는가, 고무신을 꼭 알아야 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좋은 신발이 나왔으니까 신으면 된다.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듣기 싫어한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저 얘기를 또 한다.’ 하며 듣기 싫어한다. 그런 말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고로 “너희가 얼마나 부유한지 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 질 것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하지만 아이들은 듣기 싫어한다.
우리 세대는 일제, 해방, 6‧25, 4‧19, 5․16을 다 경험한 세대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우리는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알게 될 줄 알지만 아이들은 싫어한다. 두 번 말하면 더 싫어하고 세 번 말하면 아예 안들으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이 날뛰는 것은 그런 뜻이다. 잘 보시기 바란다. 그 아이들이 형님, 누나, 삼촌을 모르겠는가. 다 안다. 거기서 버릇없이 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삼촌 누나 형님들이 겪은 일을 모릅니다. 그것을 다 겪으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은 우리 시대입니다. 우리는 MZ세대입니다. 우리밖에 모릅니다.”라는 뜻이다.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늘밖에 모른다. 그런데 순수하다. 깨끗하고 순수하고 희망이 있다. 나는 80이 넘었는데 이들은 30대다. 50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젊어지는 것 같다.
여러분도 자세히 보시기 바란다. 저절로 젊어진다. 무슨 수로 내가 젊어지겠는가. 젊음을 보니 젊어지는 것이다. 여러분도 젊게 살려면 요즘 팔팔 나는 아이들을 보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젊어진다.
무엇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있지 않은가! 신발 가게에 가면 살 수 있는 것이 나이키다. 어디든지 다 있다. 오성진 형제가 말한 것을 자세히 들어보면 ‘나이가 몇이나 먹었다고 저것을 다 알겠는가. 평생 살아도 안될 텐데 아직 잉크도 안마른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이키밖에 몰라도 된다. 나무 게다. 짚신, 고무신, 운동화는 몰라도 된다. 우리가 그렇게 겪어서 나이키가 나왔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때 그때가 제일 좋았다. 짚신을 신다가 고무신을 신으니 얼마나 좋았던가. 양말도 옛날에는 손으로 짜서 신었다. 양말 한 켤레를 짜려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게 만들어도 고무신을 하루만 신으면 뒤축이 빵꾸가 나 버렸다. 그러면 밤에 꿰메야 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그렇다고 아이들 보고 너희도 이렇게 살라고 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평생 가도 저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자기 추억이나 생각하고 옛날 것이나 생각하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미래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 이럴 것이다.’라며 기대한다. 그러나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시면 끝나 버린다. 알고 보면 내일도 없는 것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있는 것은 오늘뿐이다. 오늘을 잘 알고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못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어제 때문에 오늘을 못사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어제도 내 것이 아니고 내일도 내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뿐이다. 지금 이 시간뿐이다.
다음 시간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가 몇번 죽었다 깨 보니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다. 혼수상태에 빠지면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버린다. 인공호흡을 시켜서 억지로 살려 놓았는데 그대로 놔두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나는 세 번인가 네 번을 죽었다 깼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많다. 언제 그것을 다 알겠는가. 내가 유일한 복음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복음이 유일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유일해도 더 있을 수 있으니까 유일하다고 하면 안된다고 한다. “더 있을지도 모르니 유일하다고 단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유일신이라 했다. 여호와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세상에는 신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신이 많을지라도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은 그 신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상천하지에 우리 하나님 같은 분이 누가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이 유일하다는 뜻이다. 유일하신 우리 신이 있어야 되지 다른 신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블레셋 사람의 신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그 신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 신을 놓고 시골에서 올라온 30대 청년이 자기 아버지라고 했으니 안죽고 살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에도 뻥긋하지 못하던 그 신이다.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유일하기 때문에 감히 입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음만 써놓고 모음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붙어야 말이 되는데 자음만 써놓아서 지금도 그 글자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학자들이 연구한 끝에 여호와, 혹은 야훼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거기 다른 모음을 붙이면 다른 말이 되어 버린다. 유일하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내일이 있으면 내일이 또 하루다. 그러므로 항상 유일한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유일한 것이 없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유일한 것이 없다. 그러니 언제 유일한 것이 생기겠는가. 그 사람은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이다.
왜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하는가, 왜 이런 사상이 왔는가? 오늘날 자본주의 교육 방향이 그러하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이 나오면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히틀러 같은 것이 나온다. 그래서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절대적인 것을 반대한다. 어떤 경우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한다. 세상 판이니까 그렇다.
하나님 판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절대적이다. 하나님이 여럿이라면 뭐하러 하나님을 믿겠는가. 오늘은 이 하나님을 믿고 내일은 저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판이 다르니까 개념이 다른 것이다.
물 속에 있는 판과 육지에 있는 판은 다르다. 물 속에 있을 때와 육지에 있을 때는 생각 자체가 달라진다. 돈이 없으면 절대로 안되는 세계에서 판이 바뀌니까 돈은 어디로 가고 없고 “공부 공부”만 남았다. 신기했다.
여러분도 이 복음을 알아보면 신기할 것이다. 전엣 것이 다 날아간다.
새 것이 있다. 전에 모르던 것이 있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 오늘 이 말을 하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너무나 중요한 구절이니 외우시기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옛 피조물이다. 옛 피조물은 옛 피조물의 특성이 있다. 거기서는 이것이 중요하고 저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새 피조물에게는 이 개념이 바뀐다. 그러면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미국에 가면 영어를 못해서 항상 두려운 생각이 있었다. 혹시 누가 나에게 접근해서 말을 걸면 어쩔까 해서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한국 오는 비행기를 타면, 더구나 KAL기를 타면 두려운 생각이 싹 없어진다. 다른 비행기에 비해서 KAL기가 비싸도 한국 사람들은 KAL기를 탄다. KAL기를 타면 말을 하느라고 왁자지껄하다. 그래서 돈을 더 주고도 국적기를 타는 것이다.
외국 비행기를 타면 값은 싼데 15시간 동안 말 한 마디도 못한다. 따뜻한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가 애를 먹었다. 나는 찬물을 못먹기 때문에 따뜻한 물을 달라고 아무리 웜 워터라고 해도 못알아들었다. 할 수 없어서 “쿨 앤 핫” 하고 가운데를 가리켰더니 알아듣고 따뜻한 물을 갖다 주었다. 쿨 핫도 몰랐으면 물도 못얻어먹을뻔했다.
판이 얼마나 다른지, 이 판에서 하는 말은 저 판에서는 못알아듣고 저 판에서 하는 말은 이 판에서는 못알아듣는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오셨다. 어떤 단계가 오면 판을 바꾸셨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세계에서 마지막은 영 안이 밝아지는 것이다. 야곱은 영 안이 밝아져서 먼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내려니 영 안이 밝은 것 갖고는 안되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서 신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차이가 많은지 모른다. 영 안이 아무리 밝아봤자 인간밖에 안된다. 바로를 굴복시킬 수 없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려면 신이 아니면 안된다. 그래서 갑자기 판을 바꾸신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넘어갔으니 그렇지 그때 당시로 보면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판이다. 어떻게 사람이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을 끄집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지금 온 인류를 한 자리에 모으려면,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면 특이한 판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기독교가 이천 년을 했지만 자기들끼리도 하나가 안된다. 장로교회가 많고 대표적으로 자유주의, 중도, 보수가 있어도 셋이 전혀 대화가 안된다. 앞으로 이천 년이 지나도 안된다. 판이 그래서 불가능하다. 노력을 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판이 그래서 안되는 것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적응하려고 아무리 해도 시간이 지나면 삼투압 현상이 일어나서 못살고 죽는다. 수영을 아무리 잘해도 안된다. 사람은 오랜 시간 물속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물고기는 평생 물속에 산다. 판이 다르니까 물고기는 물속에 살아야 되지 사람은 아무리 해도 못사는 곳이 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면, 자기 나라를 세우시려면 예수 안으로 사람을 다 모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인간이 예수 안으로 모여야 한다. 언제 그렇게 되겠는가. 종교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종교적으로는 만년이 가도 불가능하다.
예수의 이 자리, 이 마지막 자리, 우리가 지극히 싫어하는 이 자리에서 만유가 하나가 된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날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어디까지가 ‘그리스도 안’인지 알 수 없었다. 바울 서신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리스도 안에(In Christ)’가 키워드다. ‘그리스도 안에’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 바울 서신이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15권이 바울이 쓴 것이다. 그러니까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를 모르고는 바울 서신을 모르는 것이다. In Christ가 없으면 기독교를 모르는 것이다. Anyone In Christ,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New Creation, 새 피조물이다.
무슨 수로,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단련하고 훈련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겠는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안된다.
그런데 이 예수, 십자가에 죽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예수, 이 안에서는 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다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너도 나도 차별이 없다. 차별이 없으니 자유로와진다. 그래서 세계가 넓어진다.
옛날에 소유를 가지고 구별할 때는 아무리 해도 차별이 있었다. 어찌하든지 차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러 갔는데 그 집이 으리으리해서 입도 못벌리고 왔다고 한다. 복음이 없으면 그런 데서 입을 못벌린다. 이 복음이 아니고는 입을 벌릴 수 없다.
아무리 으리으리하게 살아도 그것은 새 피조물이 아니라 소유다. 소유는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소유가 없어지면 그 사람의 존재도 없어진다.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비참한 것이다. ‘나는 없고 소유만’, 얼마나 비참한가. 이것이 비참한 줄 알아야 한다. 나에게 있는 것이 나인 줄로 하는 것은 아주 불행하고 비참한 일이다.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New Creation, 새 피조물이다. 이제 보니 새 피조물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있으면 사람이 다 새 피조물이 된다. The Old has gone, 옛 것은 다 가버렸다. 어제까지는 다 가버렸다. 바로 전까지는 다 가버렸다. 그리고 New is here, 새 것은 지금 현재다.
우리가 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은 대박 중의 대박이다. 어디 이런 공짜가 있겠는가. 이것이 밭에 묻힌 보화다.
여러분에게 금년 선물이 밭에 묻힌 보화다. 이 예수가 밭에 묻힌 보화다. 신기한 사람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신기한 사람이다. 그가 도사라서인가, 위대해서인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전혀 반대가 되는 것이다.
완전한 반석이다. 집을 짓기 위한 완전한 반석이고 새 생명을 위한 유일한 터다. 이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지 여기는 사탄이 틈탈 데가 없다. 곰팡이도 슬 데 슬지 아무 데나 스는 것이 아니다.
미국 어느 동굴에 가 보니 얼마나 큰지 우리나라의 동굴과는 비교가 안되게 컸다. 사람이 수십 명씩 왔다갔다 하니까 어둡다고 전등을 켜놓았는데 전등 빛이 있는 데는 파랗게 이끼가 끼어 있었다. 동굴 속에서도 빛만 있으면 이끼가 낀다. 곰팡이가 왜 스는가? 햇빛이 안들기 때문이다.
사탄은 왜 사람에게 붙어서 안떨어지는가?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붙어 있으라고 해도 안붙어 있는다. 판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전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하게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영어 번역이 여러가지인데 이 번역이 제일 쉽고 편하다. 그래서 한 구절 외웠다. “Behold, the old has gone.” has gone이지 had gone이 아니다. 지금까지 있던 것, 방금 있던 것까지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 것이 앞으로 오는가? 그렇지 않다. The New is here, 새것은 지금 여기 있다. 이 번역이 쉽고도 멋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들으면 다 알 것이다. 영어 못하는 사람도 외우기 쉽다. The New is here. 새 것이 내일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다.
금년 새해는 복 있는 시대, 복 있는 시간이다. 여러분은 다 복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복 있는 것 아닌가.
이런 기회를 보고도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신학교 교수들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것을 비판하고 있는 사람은 신학교 교수들다. 우리 교회에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되지도 않을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될 것을 해야 한다. 되지도 못할 것을 나불거리지 말고 할 것을 하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쉬운 것을 하면 된다.
일부러 어려운 것을 찾는 사람이 있다. 왜 일부러 어려운 것을 찾는가. 힘이 있어서 그렇지 나는 힘이 없어서 어려운 것을 못한다. 나는 어려운 것은 조금 해 보고 금방 포기한다. 피똥을 싸면서까지 고민하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원래부터 몸이 약해서 한두 번 해 보고 못할 것 같으면 금방 포기한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해 보려고 했다면 이 몸으로 지금까지 살았겠는가. 어디 가서 체크해 보니 스트레스 제로라고 했다. 스트레스에 싸여있을 이유가 없다. 못할 것은 못하고 할 것은 하면 된다.
나에게 제일 어려운 사람이 말을 바로 안하고 빙 돌려서 눈치나 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렵다. ‘저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하고 연구하려면 피곤하다. 혹시 나에게 오려거든 바로 말하기 바란다. 빙 돌려서 말하면 못알아들으니까 쉬운 말로 하기 바란다. 눈치 보고 말 것도 없다.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해야 되지 눈치를 보고 말하면 안된다. 내가 힘이 있으면 그렇게 말해도 연구해 보겠는데 힘이 없어서 연구도 못한다. 사람이 쉽게 살수도 있지만 어렵게 살려면 끝이 없다.
오늘 오성진 형제가 아주 단순한 말을 했다.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이가 얼마인데 해 보지도 않고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험이다. 시험 수준은 고등학교 졸업수준이라서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권이라야 되지 대학을 나와도 합격하기 어렵다. 대학 나온 사람을 뽑는 시험이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을 뽑는 시험이니까 고등학교 성적이 좋아야 되지 대학 성적이 좋아도 별 도움이 안된다. 여러분이 시험을 보려면 그 시험이 누구를 표준으로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무조건 공부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포인트를 잡아서 할 공부를 해야 한다. 안그러면 헛일이다. 다른 공부만 많이 한다고 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도 똑같다. 내가 할 자리, 내가 살 자리, 인생이 있을 자리를 알아야 되지 주제넘게 아무것이나 하면 되는 줄 알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아직도 나는 젊어, 시간이 있어’ 하며 남 비판이나 하면 안된다.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 말을 할 것이 없다. 잘하니 못하니 할 일이 없다. 그러면 안된다. 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이 복음만 살기도 바쁜데 언제 남의 말을 하겠는가. 일 없는 사람들이 할 짓이니까 절대로 그런 일에 가담하면 안된다. 누가 하든지 그런 일을 하면 안된다. 내 살기 바쁜데 언제 남을 판단할 일이 있겠는가.
나는 항상 오성진이 말한 대로 나 때문에 이렇게 살았다.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내가 살아야 될 것 아닌가. 그래서 교회 중심으로 하면 안된다고 한 것이다. 나도 이 교회밖에 없다. 내 평생 얻은 것이 교회밖에 없는데 교회가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살아야 되지 내가 못사는 것을 교회에 주면 되겠는가. 내가 살면 다른 사람도 산다. 그러나 내가 못살면 다른 사람도 못산다.
그리스도가 먼저 있고 교회가 있지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을 수 없다.
교회에 그리스도를 맞추려고 하면 참 그리스도가 아니다. 교회에 맞추려고 하면 만들어진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비위를 맞추려면 예수를 그렇게 가꾸고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리스도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클럽이고 기독교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지 교회가 아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들은 기독교 문화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산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고 연말연시가 되면 난리다. 거리마다 화려하게 해 놓고 한달 내내 징글벨 징글벨 축제를 벌인다.
우리가 그런 문화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이 판으로 올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금년 새해 선물은 그리스도다.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In Christ 새 피조물이다, New creation. 우리는 이제 새 피조물의 판에 왔다.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옛 피조물의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옛 피조물의 기준으로 이러니 저러니 하는 사람은 시대를 착각한 사람이다. 모르니까 자기가 아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앞으로 가기도 바쁜데 언제 뒤돌아보고 언제 옆 사람을 보고 있겠는가. 가기도 바쁘다. 날마다 새로워진다. 살아보면 날마다 새로워진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