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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로 향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523년(중종 17)에 신월(信月)이 창건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흥덕대군(興德大君)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고,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대지 2,970m2의 경내에 당우(堂宇)로는 초기 건물인 팔작지붕 다포계(多包系)의 대웅전 외에 명부전(冥府殿) ·삼성각(三聖閣)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범종각 ·보화루 ·학서루(鶴棲樓) 등이 있다.
대적광전
1991년에 주지 정수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포 4층 건물이다.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 3층은 대적광전 법당, 4층은 국제선원 선방으로 사용한다. 법당안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노사나, 삼존불을 본존으로 하고 관음, 대세지, 보현, 문수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삼존불의 뒷면에는 각각의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그 위로는 닫집을 마련하였다. 그 외에 지장 보살상과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범종각
범종각에는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에서 옮겨온 대종과 목어, 북이 있다.
범종각은 1972년에 건립된 2층 육각의 건물이다.
범종
동종
서울 화계사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思印) 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광무 2년(1898)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喜方寺)에서 화계사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범종각 안에 놓여져 있다. 삼각산 아래에 자리한 화계사는 중종 17년(1523) 신월(信月)이 창건한 사찰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고종 3년(1866)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우선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보물11-1)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동종(보물11-6)은 팔괘(八卦)를 문양으로 새기고 보통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범종으로는 안성 청룡사동종(보물11-4)과 강화 동종(보물11-8)이 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동종과 의왕 청계사동종(보물11-7), 그리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한 문경 김룡사동종(보물11-2)과 홍천 수타사동종(보물11-3) 등이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고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상부는 음통(音筒) 없이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龍鈕)만 표현되었는데, 천판(天板) 위에 당당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 아래 종의 어깨 부분에 있는 상대(上帶)는 2단으로 처리하여 '六字大明王眞言'과 破地獄眞言'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
상대 아래에는 유곽(遊廓) 4좌가 있는데, 각각 사각형이며 6엽(葉)의 연화좌를 마련하고 여기에 유두(乳頭)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위패(位牌) 4좌를 새기고 그 안에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안성 청룡사동종에도 이와 똑같은 글씨가 있다.
종신(鐘身)은 어깨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그스름하게 내려오다 종복(鐘腹) 부분에서 종구(鐘口)에 이르기까지 수직선을 이루며 내려온다. 이처럼 종구 부분이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선을 보이는 것은 중국 원(元) 동종의 특징으로, 조선시대에서 17세기 이후에 보편화된 형식이었다. 그리고 종신 아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넝쿨 사이로 활짝 핀 꽃무늬가 어우러져 있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종신 표면에는 보살상 등 그 밖의 다른 문양 장식은 없고, 명문을 양각으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명문은 전부 200자 가까이 되며 동종의 제작 시기, 봉안 사찰, 무게 등과 더불어 동종 제작에 참여했던 시주자와 장인(匠人)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康熙二十二年癸亥四月日 慶尙道豊基地西面小伯山喜方寺大鐘重三百斤鑄成也 供養大施主…緣化秩 通政大夫畵員思印 湛衍 雪玉 淸允 祖信 厚英 別座勝旭 供養主 惠熙 惠海 化主 淸信居士 道善'
목어
목어는 원래 고려때 창건된 보턱암에 있던 것이라고 전하는데 만지기만 하여도 나무 부스러기사 떨어질 듯 심하게 풍화되어 범종각 2층에 지붕천장에 매달려 있다.
운판
법고
1500성전
불보살상
대웅전
화계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봉안한 화계사의 중심 건물이다. 화계사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줄곧 명맥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화계사가 창건된 때로부터 대웅전은 있었을 것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시주로 조선 고종 3년(1866)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화계사는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信月)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삼각산화계사약지(三角山華溪寺略誌)》에 전해온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원래는 고려 광종 때 법인(法印) 대사 탄문(坦文)이 지금의 화계사 인근인 부허동(浮虛洞)에 창건한 보덕암(普德庵)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를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즉, 1522년에 보덕암의 신월스님이 서평군(西平君) 이공(李公)과 협의하여 보덕암이 있던 부허동에서 남쪽의 화계동으로 법당와 요사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화계사는 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인하여 불전과 요사가 모두 전소되었으나, 도월(道月) 선사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창불사를 하여 1619년에 복구되었다.
그로부터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건물이 퇴락 하여 고종 3년(1866)에는 용선 도해(龍船渡海)와 범운 취견(梵雲就堅)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불전(佛殿)과 승방건물들을 중수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지어진 것이 현재의 대웅전과 큰방이다. 1870년에 환공 야조(幻空冶兆)가 지은 <화계사대웅보전중건기문>에 의하면 석수(石手) 30명, 목공(木工) 100명이 불과 수개월만에 완성했다고 하였으니, 흥선대원군의 시주가 대단히 큰 힘을 발휘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다. 화계사 대웅전은 내부 천장의 장식이나 기타 다른 건축부재의 장식들이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목조 건축물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며, 원래 대웅전에 있던 불상은 훼손이 심하여 따로 보관하고 있다. 후불탱화는 1875년(고종 12)에 화산(華山)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대웅전의 편액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인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의 필체로 단정하며, 주련(柱聯)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수제자인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대웅전안에는 스님과 신도들이 기도중이어서 안에 사진을 찍지 못했다.
명부전
명부전은 죽은 뒤 명부세계의 주인공인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도명존자, 무독괴왕, 그리고 염라계의 십대왕과 사자들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맞은 배지붕의 익공계 건물로 1878년(고종 15)에 초암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도움으로 중건하였다.
이 명부전은 원래 황해도 백천군 강서사(江西寺)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1877년에 옮겨와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당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화계사에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사에 있던 이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절에 봉안되게 되었다.
지장보살 후불탱화는 1815년에 그려졌고 시왕각부탱화는 1878년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봉안한 후에 새로 그려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전한다. 과연 추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어 무궁한 변화와 회화적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자학(字學)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문자향(文字香)이 나타나 있다.
2001년 윤사월에 주지 성광스님이 명부전 내부 보수불사와 기와불사를 하였으며 지장보살 개금불사와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십대왕상을 비롯 판관 수문장상 등을 보수불사하였다.
삼성각
고종 22년 서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산신각을 고쳐지었다. 건물이 쇄락하여 이를 헐고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1975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건물에 동기와를 올린 것이 현존한다.
안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그리고 산신탱화를 모셨다.
고봉스님부도탑
고봉 대선사는 1890년 9월 29일 경북 대구에서 태어 나셨다.
정혜사, 백운사, 건봉암 조실로 전법을 지도 하던 중 숭산행원선사를 법제자로 삼으셨다.
6.25 동란시 공주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를 열어 선자를 거양하시고 이어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로 계셨다.
1961년 8월 19일 세수 72세 법랍 51세에 삼각산 화계사에서 입적하셨다.
앞마당에는 석가탄신일 행사에 쓰여졌던 탑과 용의 모습이 보였다.
앞마당에는 많은 신도들이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