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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8> 남도인들의 술독 빼는 비결을 공개한다
#1
아내가 어젯밤 말했다.
“오늘 이숙영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사연을 보내온 사람의 주소가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로 나와요. 그런데 진행자가 그러는 거에요. ‘죄송한 말씀인데요, 곡성 오곡 오지리라 하니 그곳이 뭔가 힘들게 산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해, 운전하다가 저도 따라 웃었어요.”
그 동네는 나의 고향, 그러니까 곡성군 고달면 고달리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 맞은 편 동네다. “곡소리 나게 고달픈 동네서 사연을 보냈다가는 뒤집어지겠네!” 아내가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내 고향 주소를 말하면, 십중팔구는 그런 뉘앙스를 받는다.
▶섬진강 중상류인 전남 곡성군 고달면 호곡리앞. 고향 마을에서 하류 방향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지금도 줄배가 남아 건넌다. 이곳에서 좀 더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알려진 압록이 나온다. 사진=김영훈
그 고향에서 나는 어렸을 적 겨울에 주로 무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무를 채 썰 듯 썰어 흰쌀 위에 올려 놓고 나무로 불을 지폈다. 흰밥과 무를 버무려 그릇에 담으면, 무는 얼핏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뜨겁고도 촉촉한 무밥의 촉감은 한 겨울 아침 웅크린 어깨를 펴주기에 충분했다. 그 때 먹었던 쌀은 통일벼. 소출이 많은 획기적인 개량종이었다.
“밥이 좀 질어. 찰진 맛이 없어 글킨 해도 양이 많아 얼매나 존가.”
1970년대 겨울 무밥과 무채국, 시레기국(시골에서는 씰가리국)을 주로 먹었다. 요즘 곰탕색깔과 같은 쌀뜨물에 얇고 길게 썬 무를 넣어 끓이면 무국이 된다. 김이 펄펄 나는 무국에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 흰밥을 말아 먹으면 아침 추위가 금새 물러갔었다. 시레기국은 무잎과 줄기를 말려 된장을 풀어 끓여낸 것인데, 거기에 흰밥을 말고, 어쩌다 참깨를 뿌려 먹었던 고소한 맛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전남 나주시 남평읍 무밭이다. 땅의 힘은 위대하다. 작은 씨앗으로 하여금 이렇게 크고 유익한 물산을 안겨준다. 사진=김영근
먹는 것이 풍족하지 못했던 그 시절, 그러나 보릿고개를 가까스로 넘겼던 때가 1970년대였다. ‘세끼 밥’ 먹는 문제가 비로소 풀렸던 ‘통일벼’ 시대였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내에게 무밥 얘기를 하면, “그런 밥이 있어요?”라고 되묻곤 한다. 나에게 무밥은 고향과 어머니이다.
“모든 음식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욕망이 한데 엉켜 있다”고 했던 안도현 시인의 ‘무밥’이란 시가 있다.
무밥 한 그릇이
소반 위에 놓여있다
소반이 적막하여서
송송 채를 썬
흰 무의 무른 살에 스민
뜨거움도 적막하여서
무밥 옆에 댕그라니 놓인
양념간장 한 종지도
옛적에 젊은 외삼촌이
여자를 만난 것처럼
가난하게 적막하여서
들척지근하고 삼삼한
이 한 저녁을
나는 달그락 달그락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를 담고 있는 나의 밥그릇엔 무밥과 무채국이 있다.
경북 예천 태생 안 시인이 ‘무밥’을 쓴 것을 보면 농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듯 하다. 무밥과 무채국뿐 아니라 보리밥과 보리국이 있었다.
보리밥이야 보리를 짓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먹었던 ‘민족음식’. 배가 부르게 되니 외면하다, 요즘 웰빙식이라며 다시 밥상으로 불러내고 있다. 보리와 된장을 끓인 보리국에 대한 남도의 시선, 특히 영산강권 사람들의 시선은 애틋하다.
내가 자란 섬진강권인 전남 동부에서는 보리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 내 고향에선 벼(시골에선 나락)를 심었고, 보리도 심었다. 우리집도 그랬다. ‘국민학교’ 시절, 그 때 낫으로 보리를 벴고, 보릿단을 날라 탈곡하는 것도 도왔다. 어린애들 손도 아쉬울 정도로 ‘농사철에는 부지깽이도 바삐 날뛰기’ 때문.
이런 일을 할 때면 날씨 마저 더위지기 시작해 땀이 삐질 삐질 나오고 ‘까끌 까끌한’ 보릿가시는 몸 속으로 파고들며 ‘괴롭혔다’. ‘보리 가시랭이가 까다로우냐, 고양이 가시랭이가 까다로우냐’고 하듯, 보리까끄라기에 시달려 본 사람은 잘 안다. 그러면서도 보리국의 기억은 없다. 시레기국이 주였다.
이처럼 전남 서부와 영산강권인 전남 서부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읽혀진다. 동부에서는 ‘젬피’라 부르는 산에서 나는 향신료(산초)를 김치 담글 때 섞어 독특한 향을 즐긴다. 하지만 서부에서는 이 ‘젬피’를 모른다. 과거 홍어가 서부사람들의 것이었다면, 가오리는 동부의 것이었다. 이렇듯 보리국은 주로 서부의 것이었다. 지금도 서부사람들은 보리국을 즐겨 한다. 남도 음식문화도 들어가다보면 이렇듯 달리 보일 때가 있다.
#2
전남 강진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은 광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50대 초반 이전교씨는 보리국을 먹고 자랐다.
“3월 요즘이 보리국을 한참 먹을 땝니다.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에요.”
▶전남 함평군 대동면 임종순씨가 가뭄 끝에 내린 비를 맞으며 보리밭을 고르고 있다. 사진=김영근
‘보리 안패는 삼월 없다’고 했듯, 삼월은 보리순이 얍실얍실 연하면서도 푸르름이 짙어지는 시기이다. 그래도 그의 집은 마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 거의 대부분 마을 농가들이 ‘배고픈 시절’을 넘어야 할 때 들판에 파랗게 돋아난 보리잎을 뜯어 된장에 끓여낸 보리국으로 배를 채웠다고 했다. 이 보리국에 홍어의 애를 넣으면 홍어보리애국이다. 보리국과 보리애국은 담박에 그의 고향과 성장기를 추억하게 했다.
완도에서 태어났던 시인 김만옥은 보릿고개시절을
‘보리밭 속에서 꿈이 떠난다/꼬쭝배기에 구멍이 뚫린 검은 고무신의/그대 지게 막대기에 까투리 날듯/햇빛과 땀이 어울려 퇴비로 뿌려진/모든 들판에서 꿈이 떠난다//연기는 소멸되고 소는 운다/’(‘춘궁’)며
춘궁기의 고난을 꾹꾹 눌러썼다. ‘보릿고개가 태산(泰山)보다 높다’ ‘방귀길 나자 보리양식 떨어진다’고 했듯, 이제는 고인인 시인 김만옥 세대는 직접 경험세대이다. 그리고 앞에 나온 이전교씨만 해도 ‘보릿고개’의 마지막 세대다.
▶오랜만에 빗물을 머금은 보리잎이 생기를 되찾았다. 전남 함평군 대동면. 사진=김영근
전남 함평군 신광면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영헌씨는 쑥 처럼 머리가 희끗해서 중년미가 보이는 애년(艾年)이다.
광주에서 행정직 중견 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도 고향이 영산강권이어서 ‘보리국’과 ‘홍어보리애국’을 먹고 자랐다.
“보리잎에다 봄나물을 함께 넣어 된장에 끓인 보리국이나 여기에 홍어애를 넣거나, 또 어쩔 때는 삭힌 홍어의 여러 부위를 넣어 끓인 홍어국을 자주 먹었습니다. 특히 우리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어요.”
홍어 고기는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는다.
소나 돼지, 닭고기가 그러하듯. 버리는 것 없이 어떻게든 다 요리해서 먹어왔듯 홍어도 그렇다. 심지어, “만만한 게 홍어좆” 하면서 하찮게 버릴 것 같은 그 ‘거시기’도 실은 다 먹는다. 단지 환영을 못 받는다는 뜻이지 그것을 그냥 버리지는 않는다.
홍어 ‘거시기’도 썰어서 물렁뼈가 있는 대로 먹는다. 뭐, 개의 ‘거시기’도 ‘만년필’이라고 해서 단골손님만 몰래 주는 ‘서비스 품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홍어는 깊은 바다에서 노니는 고기다. 홍어애는 역시 심해어(深海魚)인 상어의 간유(肝油, 스쿠알렌)와 같은 성분이어서 피부미용, 관상동맥질환, 혈전증억제에 좋은 기능을 한다.
사진=권경안
▶빨간 선 안이 홍어애다. 생생한 애는 소금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얼렸다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사진=권경안
홍어의 부위 중에 ‘애’가 있다.
흔히 애간장을 녹인다고 한다. 그 애다. 홍어의 간이라 한다. 희부연 색깔이다. 이것을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고, 국에 넣어 끓이기도 한다. 젓가락으로 잘 집어지지 않을 정도로 흐물흐물하므로 입에서 바로 녹는 듯하다.
특히 뜨거운 국물에 익혀진 애는 아주 고소하다. 이 ‘애’ 맛을 못 잊는 사람들이 많다. 삭혀서 톡 쏘는 맛이 가장 세면서 애 보다는 좀 다져진 듯한 젤리와 같은 ‘코’를 특별하게 찾는 이들이 있듯이 그러하다.
1810년을 앞뒤로 한 시기, 흑산도에서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 “홍어국이 술기운(酒氣)를 뺀다”고 했듯, 홍어국 전승에는 이렇듯 역사가 있다. 남도술꾼들이 술 마신 이튿날 ‘홍어보리애국’을 찾는 것이 내력이 없다 할 수 없다. 음식에 스민 ‘남도의 역사’ 이다.
#3
광주에서 홍어보리애국을 끓여서 내는 곳이 많다.
홍애국, 홍애탕이라고도 한다. 그 중에 점심이고 저녁이고, 손님들로 북적이는 곳이 있다. 호남대 쌍촌캠퍼스 맞은 편에 있는 상무시장에 자리잡은 ‘홍애집’(경민수산)이다.
앞에서 말한 이전교씨의 친구 김통일씨가 운영한다. 보험회사에서 일하다 홍어를 다루는 형이 적극 권하자, 홍어 도소매와 음식을 함께 하는 식당을 냈다 한다.
▶홍애집에서 끓인 홍어애보리국. 뜨거운 김이 퍼지고 있어 희부연 색이 나왔다. 이 집에서는 홍어뼈로 국물을 낸 다음, 삭힌 홍어의 갖가지 부위를 넣어 보리잎과 배추를 넣어 끓인다. 맛이 강하다. '쏘는' 맛을 보면 여운이 길다. 옛부터 해왔던 홍어애국은 보리잎과 배추에 홍어애를 넣고 끓여내 고소하고 구수한 맛을 낸다. 사진=권경안
시사저널 기자로 활동하다 지금은 서울에서 월간 ‘Reader’의 운영위원에 이어 출판사에서 기획을 맡고 있는 나주 출신 나권일씨와 함께 갔다.
“아, 맛이 대단한데요.”
광주에 찾아오면 만나서 사는 얘기를 주고 받는 후배인데, 그가 홍어애국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도 홍어를 먹어온 이다. 보리에다 배추잎, 고소한 맛을 내는 애, 숟가락으로 떠야 하는 미끄러운 점액 껍질, 살과 함께 붙어 있는 연골이 된장과 함께 뚝배기가 뜨겁게 끓었다.
홍어애국이 혓바닥 모든 세포들이 들고 일어나는 듯했다.
"아~!" "후~!"
옆자리, 앞자리에서 아저씨들이 ‘쏘주’나 막걸리를 따라가며 입에서 뜨거움을 삭히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어 보였다. 중년의 아줌마들도 서넛씩 앉아 ‘후~후’ 불면서 숟가락으로 국을 뜨고 있었다. 애국은 톡 쏘는 맛에다 뜨겁기 까지 하니 덩달아 몸도 뜨거워지면서 술기운이 땀으로 배어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남도의 들녘을 적셔주는 영산강. 남도인들에게는 화수분과 같은 정을 뿜어내는 강이다. 사진=김영근
영산강 유역은 짙은 황토색이다.
그만큼이나 이 곳 사람들의 기질 또한 짙고 깊다. 이 남도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내 속이 시방 홍애속이요” 라는 게 있다. 그 말 한마디로 심경을 100% 전달하고도 남는다. 음식과 언어에 담긴 ‘남도의 문화와 정서’다.
살다 보면 ‘홍애속’ 아닌 날들이 없을 것인가.
“강한 자가 살아 남는다”가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하수상한 세상이니 두말할 나위가 있으랴.
세상일에 마음을 썩히고, 애를 삭히다가 ‘홍애속’이 되고 만다. ‘시름’을 달래려는 한 잔술이 과하면 술꾼들의 속도 다름 아닌 ‘홍애속’이 되고 만다. 그 속을 다스리기 위해 홍애국을 찾아 나선다. 남도인들이 술독을 빼는 비결은 바로 이 홍애국에 있을진저.
남도의 시인 송수권이
“이른 봄 이른 봄 무논에 물 넘듯/
어, 칼칼한 황새 목에 술 들어가네/
아그들아, 술 체엔 약도 없단다/거, 조심들 하거라 잉!’
하며 홍탁의 별미를 읊었듯,
술꾼들은 뜨거운 홍애국을 들면서 또 다시 잔을 든다.
홍애국에 ‘남도의 강’은 오늘도 흐르고 있다.
다음 <9>편은 '홍어 못잡는 때가 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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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장으론 홍애국~!!아직 못 묵어봄..사진보니 해장으로 아녀도 아주 맛있겠구먼..구수한 고향말과 가끔 친구의 추억을 곁들여 주는 줄거리가 넘 재밌네..이른봄이면 어김없이 노상엔 여러 나물과 함께 보릿잎이 수북수북 쌓여있지만 난 눈길도 주지 않고 냉대를 하고 말지.."쩌~걸 먼맛으로 묵을까이~"라고하며 ㅎㅎ~
진아.... 홍애국이 얼마나 톡 쏘는지 숨이 막힐지경이다...
글고봉깨~쩌번에 산에 다녀오다 오산에서 태옥이랑 애자랑 홍어 묵으러 들어갔는데..국인지 찌갠지 나왔드만..고거이 고거인갑네..암만해도 깨림찍하고 자신없어 안묵엇드만 잘했다는 생각 ㅎㅎ~
'무국' 말을 하니 한가지 에피소드가..시집을 와 얼마 안될쯤 음식하는게 모든게 서툴고 어려웠던 때 용기를 내 쌀뜬물을 받어 준비하고 무우을 착착착착 삣어(엄마의 손놀림 모습을 흉내내며) 나름 정성을 들여 무국을 끓여 놨드만..한다는 소리가 "이거 뭐야~왜 무울 갖고 장난을 쳐 놨어~!!"하드라고...참말로~참고로 울 신랑 경북사람이라눈...ㅎㅎ 20년 가까이 되는 추억꺼리~
ㅎㅎㅎ이진아 정말 생각하니 우습다 ,,그사람들이 그리 말할때 너에 모습이 그려진다 ,,,,무우국은 그렇게 삐져너어야 맛이 난다고 울엄니들이 말했잔아 그치,,ㅎㅎㅎㅎㅎㅎㅎ
금매말여~ㅋㅋ
멋진 글 잘 보았네.....
어린 시절 네 얼굴 생각난다..
언제든 한번 만나면 꼭 묻고 싶은게 있었는데 여기서 물어봐도 되는지
네가 4학년때 우리 옆반이었는데 나를 무척 괴롭힌거 생각나는지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꼭 어디선가 나타나서 내 다리 걸고 한대 치고....
내가 그케 미웠냐
홍어 좋아하냐
난 좋아하지는 않지만 한 점씩 먹을 때마다 막힌 코가 뚜러펑으로 뻥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친구...
반갑다.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보고, 이후엔 보지 못했는데...
청문회 보면 '기억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그런 심정이네.
3학년 1반이었을 때 중앙현관과 바로 붙어 있던 교실이었어.
그 때 현옥이와 인숙이가 단짝으로 현관을 오르내리던 모습이 아주 선명해. 둘 다 내겐 아주 예쁘게 보였지.
4학년때 그랬다면 아마 내가 좋아했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늦게나마 사과함다....
나, 홍어 좋아하지.
삭히지 않은 차지고 쫄깃한 걸 즐겨해.
곰곰 생각해보니
4학년때의 일은 기억에 없지만
국민학교 시절 아리따운(?) 여학생들을 많이 괴롭혔어....
지난번 창환이와 통화할 때 소식을 물었어.
그래서 도교육청홈피에 이름을 입력....학교 홈피도 들어가 근황을 볼 수 있었어. 반가워....
나도 무우국은 먹엇지만 보리는 안먹엇던걸로 기억이 나네 ,,,,그렇지만 정말 어릴적 살아온 날들이 새록 새록 생각이 나게하네 친구야 구수한 이야기 정말 고맙다
애자도 오랜만이다. 성남에 살고 있나? 둘째 동생도 성남에서 살고 있지.
그간 잘 살았을 것으로....반가워.
난 울 엄마가 무밥 할려구 도마질 시작함과 동시에 울기 시작했는디....무밥 안먹는다고...그땐 속이 없었지?...다 이유가 있었을텐데...
썰껑거리며 씹히는 맛이 기분 참 거시기혔지~ㅎㅎ
어쩌다 겨울이 되면 마누라한테 무밥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해달라고 하는데...서울내기 마누란 "그런 밥도 있어요?"라며 웃기만 한다오...
저위 보리밭에 삽질하는 아저씨(임종순)가 처외삼촌 뻘인데...
함평군 대동면 백호리가 처가인지라~~~
암튼 어렷을 적에 무우밥 안 먹어본 사람이 몇 안됬으리라...
겨울이면 저녁쯤 방 윗목에 무우가 서너개 아침을 하기 위하여
어머니가 갔다 놓곤했지 새벽녘애 채써는 소리에 잠을 깻던 시절도~~~
채썰어 다지고 남는 것은 약간의 양념에 무우채를 많이 먹었지롱
언젠가 부터 아마 어렷을때 아버지가 시장에 다녀오면서
사가지고 오신게 가오린지 암튼 비닐에 싸서 두엄속에 2~3일간
삭혀서 먹은 기억이~~~ 아마도 지금에 홍어가 아닌 모양이다.
함평으로 장가를 들고 나서는 매년 설날무렵에는 한번도 거르지않고 먹고있네.
그쪽 지방에서는 대사를 치르면 반드시 홍어 삼합이 올라오곤 하지
몇 해 전인가 처남이 국정원장접대하고 남는 것이라며 진짜 흑산도 홍어를
먹어 본 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남쪽에도 칠레산이 대세라~
너무 말이 길다 홍어에 탁백이 한잔이 그립네......
사진으로도 인연이 이어지니 세상은 넓고도 좁은 모양
홍어에다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싶어지네...다음에는 좋은 막걸리도 안내해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