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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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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중세 국어의 문자 및 표기법
15세기 중반에 우리 겨레는 겨레 최고의 문화 유산인 훈민정음이라는 민족 고유의 글자를 창제하였다. 그 이전까지 우리 겨레는 중국에서 빌어온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든가, 한자 차자를 표기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한문은 우리말의 어법 체계에 맞지 않고 우리말의 말소리를 표기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지극히 배우고 쓰기 어려운 글말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글자를 갖지 못한 우리 겨레는 기원 전후부터 이 글자를 들여와 사용해 옴으로써, 15세기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 글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지식인의 보편적인 글말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글말이 이 한문으로 쓰여졌다. 한문과 더불어 사용되어 온 또한가지 표기 수단은 한자 차자였다. 한문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온 입겿[구결, 토], 그리고 한문을 우리말 어순에 따라 적절히 배열한 다음, 한자로 된 우리말 문법 형태소를 첨가한 이두, 그리고 차자로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한 향찰 등이 사용되어 왔다. 향찰은 향가를 표기하는 데 국한하여 사용해 오다 11세기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고, 입겿은 우리말의 문법 형태소를 적는 데 불과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두는 한문과 우리말의 튀기 글말로 우리말에 상당히 접근한 글말이었다. 그러나 이 이두도 한문․한자에 바탕을 둔 글말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되기 어려운 글말이었다. 그리고 한자를 빌어 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기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한문, 입겿, 이두문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문자 사용의 풍토 속에서 훈민정음이 탄생되었다. 따라서《훈민정음》‘정인지 서문’에 밝혀져 있듯이 이러한 한자 차자 표기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리 겨레의 지적인 역량이 모여 민족 문자인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것이다.
3.1 문자 - 훈민정음 체계
훈민정음은 《훈민정음》서문에 밝여져 있듯이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글자이다. “우리 나라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라고 한 이 훈민정음 어제 서문은 훈민정음을 만든 제1차적인 목적을 잘 밝혀 주고 있다. 훈민정음 제작의 또 다른 목적은 한자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 대왕은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문에 답하는 말로 ‘만약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못하면 누가 바로 잡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한자음 교정이 중요한 사업임을 밝힌 것이다. 이 한자음 교정은《동국정운》을 편찬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듬해인 1448년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표준 한자음 사전으로서 이 동국정운의 한자음은 세종, 세조대의 모든 문헌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자음의 표기 방법은 반절법을 사용해 왔으나 이는 한자로써 한자음을 표기하는 것으로 정확한 방법이 아니었다. 이 한자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언해본 《훈민정음》에 나와 있는 ‘한음 치성’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것과 《홍무정운 역훈》(1455년)을 편찬한 것을 보아 중국의 표준 한자음을 표기하고 하고자 한 것도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목적 즉, 백성들의 문자 생활(국어의 문자화)과 한자음의 표기 즉, 조선 표준 한자음과 중국 표준 한자음의 표기를 위하여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우리 겨레는 비로소 우리 겨레의 말소리를 온전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적을 수 있는 글자를 갖게 되었다.
이 훈민정음은 중국의 음운 이론(음절을 이분하여 성모와 운모로 분석한 이론)을 발전시킨 음절 3분법 이론의 바탕 위에 만들어졌다.(이 이론은 파스파 문자 제작의 이론적 바탕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초성과 중성에 해당하는 글자를 만들고, 종성은 초성과의 동일성을 확인하여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아니하였다{終聲復用初聲}. 초성은 중국의 성운학 이론을 바탕으로 중국의 36자모 체계에서 23자모 체계를 확립한 다음 17자의 글자를 만들었다. 즉 훈민정음의 23자모 체계는 중국 성모 체계 속에 있는 설두음과 설상음, 순중음과 순경음, 치두음과 정치음을 합한 것이다. 그리하여 23 자모 체계를 만든 다음 전탁음 계열은 전청음 계열의 소리가 엉긴[凝] 소리이기 때문에 전청음 글자를 겹쳐 쓰면 된다고 보아 따로 문자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17 글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의 23 자모 체계는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의 23자모표
아음 |
설음 |
순음 |
치음 |
후음 |
반설음 |
반치음 | |
전청 |
群 ㄱ |
斗 ㄷ |
彆 ㅂ |
卽 ㅈ |
挹 ㆆ |
||
차청 |
快 ㅋ |
呑 ㅌ |
漂 ㅍ |
侵 ㅊ |
虛 ㅎ |
||
전탁 |
叫 ㄲ |
覃 ㄸ |
步 ㅃ |
慈 ㅉ |
洪 |
||
불청불탁 |
業 |
那 ㄴ |
彌 ㅁ |
欲 ㅇ |
閭 ㄹ |
穰 | |
전청 |
戌 ㅅ |
||||||
전탁 |
邪 ㅆ |
중성은 성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에 해당하는 기본 글자를 만든 다음 이들을 결합하여 11개의 글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훈민정음》 제자해(制字解]에 잘 설명되어 있다. “정음 28자는 각기 그 모양을 상형하여 만들었다[正音二十八字 各象形而製之].”고 하고 있는데, 이는 곧 초성의 기본자 5자는 발음기관의 움직임이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고 나머지 글자들은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하거나 이를 변형하여 만든 것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28자 전체가 모두 발음 기관이나 그 움직임을 상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으며[ㄱ象舌根閉喉之形], 설음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ㄴ象舌附上顎之形], 순음 ㅁ은 입모양을[ㅁ象口形], 치음 ㅅ은 이모양을[象齒形], 후음 ㅇ은 목구멍 모양을[象喉形] 각각 본떠서 만들었다. 그리고 ㅋ은 ㄱ에, ㄷ은 ㄴ에, ㅌ은 ㄷ에, ㅂ은 ㅁ에, ㅍ은 ㅂ에, ㅈ은 ㅅ에, ㅊ은 ㅈ에, ㆆ은 ㅇ에, ㅎ은 ㆆ에 각각 가획하여 만들었으며, , ㄹ, 만은 가획하지 않고 이체로 만들었다. 이 홑글자들을 병서, 또는 연서하여 많은 글자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각자병서로 ㄲ, ㄸ, ㅃ, ㅆ, ㅉ, , ㆀ, ㅥ 자가 있으며, 합용병서로는 ㅅ계 합용병서로 , , , ㅻ이, ㅂ계합용병서로 , , , ㅷ 이, 계 합용병서로 ㅴ, ㅵ이 있었으며, 특이하게 여진어 표기에 ᅒ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서로는 순경음으로 ㅱ, , ㆄ, ㅹ을 만들었으며, 설경음으로 ᄛ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중성은 하늘은 본떠서 를, 땅을 본떠서 ㅡ를, 사람을 본떠서 ㅣ를 만들어 기본자로 삼은 다음, 초출자로 ㅗ, ㅏ, ㅜ, ㅓ 네자, 재출자로 ㅛ, ㅑ, ㅠ, ㅕ 네자를 만들어 모두 홑글자 11자를 만들었다. 또 이 홑글자들을 병서하여 많은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2자합용으로는 ㅘ, ㆇ, ㅝ, 네 자 외에, ㅣ와 합해진 것으로 , ㅢ, ㅚ, ㅐ, ㅟ, ㅔ, ㅚ ,ㅒ, , ㅖ 열 자가 더 있었으며, 3자합용으로는 ㅣ와 합해진 ㅙ, ㅞ, ㆈ, ㆋ 네 자가 있었다.
종성을 표기하기 위하여 따로 문자를 만들지는 않았으나 ‘8종성으로만 표기해도 족하다’는 규정을 만들어 종성으로는 ‘ㄱㄷㅁㄴㅂㅅㄹ’ 8글자만 사용하도록 제한하였다. 그러나 8종성 외에 실제로는 글자를 종성으로 널리 사용하였으며, 더러 ㅌ, ㅍ, ㅈ, ㅊ 등이 쓰이기도 하였다. 종성 합용병서로는 , , , , , , 등이 사용되었으며, 사이시옷을 더한 세 자 합용 글자들도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15, 16세기에 사용된 글자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초성 글자
기본 글자 : ㄱ ㄴ ㅁ ㅅ ㅇ
가획자 : ㅋ ㄷ ㅌ ㅂ ㅍ ㅈ ㅊ (ㆆ) ㅎ
이체자 : ㄹ
각자병서 : ㄲ ㄸ ㅃ ㅉ ㅆ ㆀ ㅥ
연서 : (ㅱ ㆄ ㅹ)
ㅅ계 합용병서 : ㅻ
ㅂ계 합용병서 : ㅷ
계 합용병서 : ㅴ ㅵ
가타 합용병서 : (ᅒ)
중성 글자
기본 글자 : ㅡ ㅣ
초출자 :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2자 합용병서 : ㅘ (ㆇ) ㅝ ()
ㅢ ㅚ ㅐ ㅟ ㅔ ㆉ ㅒ ㆌ ㅖ
3자 합용병서 : ㅙ ㅞ ( ㆈ ㆋ )
종성 글자
8종성 : ㄱ ㄷ ㄴ ㅂ ㅁ ㅅ ㄹ
8종성 외 홑글자 : ㅈ ㅊ ㅌ ㅍ ㅇ
2자 합용병서 : ㅮ
3자 합용병서 :
이와 같이 많은 글자들이 문자 제정 초기에 사용되었으나, 16세기에 들어와 간소화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오면 중성 글자는 변화가 없으나, 초성과 종성 글자들을 다음 글자들로 통일되어 갔다. 즉 홑글자는 자음 글자에 ‘ , ㆆ’ 글자는 쓰이지 않고, ‘’ 글자도 거의 쓰이지 않음에 따라 14글자 체계가 되어 갔다. 모음 글자는 ‘’글자가 음가는 소실되어 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어 홑글자 11자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사용되고 있었던 한글 체계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초성 글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ㅉ
ㅆ ᄻ
종성글자(홑글자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훈민정음 체계 속에는 성조를 표기하기 위한 방점이 포함되어 있다. 평성에는 무점, 거성은 1점, 상성은 2점을 글자의 왼쪽에 찍어 표시하도록 하였으며, 입성은 촉급한 소리이므로 따로 방점을 만들지 않고 평성, 상성, 거성과 같이 표시하도록 하였다.
3.2 표기법
훈민정음은 중국의 성운학 이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음소문자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실제로 표기할 때는 음절문자처럼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규정이 합자법이다. 즉 초성은 중성의 위나, 중성의 왼쪽에 두도록 하였으며, 중성 중 둥근자 세로글자는 초성의 아래에, 가로글자는 초성의 오른쪽에 두도록 하였고, 종성은 초중성 아래에 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표기 방식을 모아쓰기라고 부른다. 훈민정음은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를 하기 때문에 가로쓰기를 하나 세로쓰기를 하나 표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20세기 이전까지는 한문 표기에서와 같이 세로쓰기만으로 일관해 왔다.
후기 중세국어는 표음적 표기법(음소적 표기법)을 택하였다. 다시 말해 소리나는 대로 표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예컨대, 받(밭), 놉고(높고), 곳(곶), 노고(놓고)와 같이 표기하였다. 15세기 표기법의 두 번째 원리는 실사와 허사를 분리하여 적지 않고 이어적는 음절적 표기법을 택한 것이다. 예컨대 매(애), 미(이), 기픈(깊은), 그츨(긏을)와 같이 표기하였다.
15세기의 모든 문자는 제 음가대로 사용되었으나 사잇소리를 표기하는 문자만은 예외였다. (1) 이들은 합성어표지나, 관형격조사, 또는 관형절 표지로서 선행어의 끝소리를 저지시키고 후행어의 첫소리를 된소리로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2) 이 사잇소리를 표기하기 위하여 훈민정음 언해와 용비어천가에는 특수한 표기법을 택하였다. 선행어의 끝소리가 불청불탁인 경우 그것과 같은 위치의 전청자로서 표기하였다. 穰ㄱ字, 君군ㄷ字, 侵침ㅂ字, 斗字, 慈ㆆ字[훈민 언해] 등. 그리고 선행어의 끝소리가 ㄹ이고 후행어 첫소리가 인 경우에는 ㆆ( 하 들 [용가 86장], 絶ㆆ字)을 표기하였고, 선행어의 끝소리가 유성음이고 후행어의 첫소리도 유성음인 경우에는 (後날[용가 26장], 님, 오나래[용가 16])을 표기하였다. 이 밖에도 선행어의 말음이 모음이고 후행어가 자(字)인 경우에는 ㅈ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 可ㅈ字[법화 2:29) 兎ㅈ字[구급 상16] 등. 이 밖의 경우에는 ㅅ이 사용되었으며, 또한 위의 여러 경우를 초월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ㅅ이었다. 世間엣들[석보 6:2], 나랏말[훈민 언해], 狄人ㅅ서리[용가 4장] 등. 이 ㅅ을 사이시옷이라 부른다. 이 사이시옷은 향찰 표기에서 ‘叱’ 자로 표기되던 것인데,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특이한 표기법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의도적인 표기법은 곧 사라지고 사이시옷으로 통일되어 갔다. (3) 이 사이시옷은 종성으로 표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온소리[훈민 언해], 픐닙[능엄 1:87], (酉時)[훈민] 등. 그러나 후행어의 첫소리가 ㅅ음일 경우에는 합용하여 표기하기도 하였다. 니쏘리[훈민언해]. 또 선행어가 한자어인 경우에는 따로 표기되었다. 眞實ㅅ매[몽상 1], 高麗ㅅ사[노걸대 상2] 등.
중세국어에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말 표기에서 띄어쓰기는 19세기 말에 와서 시작되었는데, 그 최초의 문헌은 1896에 창간된 독립신문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처음은 한자음을 표기할 때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택하였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1) 초성에 ㄲ, ㄸ, ㅃ, ㅆ, ㅉ, 과 , , , ㆆ을 재구하여 표기하였으며, (2) 모든 한자음에 초성, 중성, 종성의 3성을 갖추어 표기하였고( 世솅, 斗 등), (3) ㄹ말음을 가진 한자에 ㆆ을 보충하여 표기하는(以影補來, 達, 彆 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한자음은 당시의 우리 나라 현실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을 절충한 이상적 한자음이어서 세조대에까지는 모든 문헌에 사용되었으나, 성종대에 와서는 일부 불경 언해에 사용된 후 폐지되었다. 《불정심경언해(佛頂心經諺解)》와 《영험략초(靈驗略抄)》는 성종 16년(1485)에 간행된 것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보여 주는 최후의 문헌이다.
우리 나라의 현실 한자음, 즉 동음(東音)이 최초로 한글로 표기된 것은 훈몽자회에 인용되어 있는 《초학자회(初學字會》 세조 4년(1458) 편찬)로서 이 표기법이 세조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전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연산군 때의 일이다. 연산군 2년(1496)에 간행된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와 《시식권공언해(施食勸供諺解)》가 대표적인 문헌이다. 《훈몽자회》는 이 표기법으로 된 최초의 한자 사전이다.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15세기의 문헌들은 모두 한글-한자섞어쓰기의 표기 방식을 택하였다. 《용비어천가》는 국한문혼용의 최초의 문헌이다. 《용비어천가》와 《두시언해》는 한글과 한자를 같은 크기의 글자로 섞어썼으며 한자에는 음을 달지 않았다. 《석보상절》은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되 한자어는 작은 글자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기하였다. 이에 비해 《월인천강지곡》에는 배달말이나 한자어 모두 한글로 크게 쓰여 있으며 한자어의 경우는 아래쪽에 작은 글자로 한자가 쓰여 있다. 그 밖의 언해 문헌들을 대체로 한글과 한자를 같은 크기로 섞어썼으며 한자음도 같은 크기로 한자 바로 아래에 표기하였다. 한자 표기에 위와 같이 네 가지 방식이 쓰였는데 이 중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네 번째 방식이다. 이러한 국한문혼용 표기는 근대국어로 내려가면서 점차로 한글만 쓰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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