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릉동(貞陵洞)은 행정동이 정릉 재1동부터 정릉 제4동까지 있는 넓은 이 지역은 북한산(北漢山) 남장대(南將臺) 일대에 위치한 곳으로 이성계(李成桂)의 계비(繼妃) 강씨(康氏)의 정릉이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원래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사을한리(沙乙閑里)를 한자음(漢字音)으로 줄여서 사아리(沙阿里)로 칭(稱)하기도 했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던 것은 정릉동 408번지 청수장(淸水莊) 유원지(遊園地) 입구에 성저오리(城底五里)(사적 제110호)가 세워져 있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지금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회낭(廻廊)에 옮겨져 있다) 조선말 고종 4년 (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동부 숭인방(성외) 정릉계로 나타나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소문외계의 소정릉(小貞陵) 청수동(淸水洞) 손가정(孫哥亭) 지역으로 칭했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 경성부 숭신면 대정릉동 소정릉동 청수동 손가정으로 칭하고 이어서 1914년 4월 1일(경기도령 제1호) 경기도에 속하여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로 되었다 그 후 1949년 8월 15일(대통렬령 제159호) 서울시 확장으로 성북구가 신설되므로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 성북구 정릉리로 편입되어 칭하게 되다가 이듬해 3월(시조례 제10호) 정릉동으로 고쳐졌다, 1975년 10월 1일(시조례 제981호) 정릉동 236의 482, 235번지의 동북쪽 지역을 동봉구(道峰區) 미아동에 편입하였다, 정릉동에는 이 동의 명칭이 된 정릉 외에도 많은 사적(史蹟)이 있다,
※ 정릉동의 지형
청수장 유원지로 가는 보국로(輔國路)는 북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인데 대성문, 보국문, 남장대를 지나 백운대(白雲臺)에 오르게 된다,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仁壽峰), 만경대(萬景臺)의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므로 혼이 삼각산(三角山)이라고 칭하며 서울의 주산으로 조종산(祖宗山)이라고도 하는데 숙종 37년(1711)에 수도 방어를 위해 20여리의 북한산성을 쌓았다,
정릉북쪽(정릉산 87-16)은 역사적인 가치뿐 아니라 구민들의 휴식처로서도 손색이 없다, 능을 뒤로 하고 등산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나무와 바위 물이 어우러진 산책로가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바위에서 떨어지는 약수가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른다, 건너편에는 환벽천(環壁泉)으로써 위장병과 피부병에 약효가 있다고 해서 유명한 정심약수(正心藥水)터가 있다 그 길 끝에는 대한궁도협회의 궁도장인 백운정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다, 언덕 위 백운정에는 김충현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북악산 능선을 따라 자아문에서 정릉 아리랑고개의 이르는 도로를 성북구는 자연경관이 수련한 이곳을 주민들이 이용하며 건강을 달련하고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로와 산을 따라 3,5km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산책로 곳곳에는 체력단련과 여유로운 휴식을 위한 팔각정, 운동시설 등을 마련했다, 주민들이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도록 가파르거나 계곡으로 이루어진 구간에는 나무로 된 안전 데크와 계단을 도로인접 구간에는 보행자 안전보조 시설을 설치했다,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북악산, 남산, 한강,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자연경관이 수련하다, 주민들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정릉 산 1-1번지 북한산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에 성북구민들의 평화와 안녕은 물론 국가의 발전도 함께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 손가정터와 청수장의 유래
정릉천변 맑은 물에 고풍스런 한옥 손가정터(孫哥亭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손가정터는 정릉동 333번지 주변에 위치한 아름드리 한 그루 나무로 예의 그 위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정릉동은 서울의 북쪽 북한산 연봉 밑에 위치한 물 좋기로 소문난 계곡으로 예로부터, 묵객(墨客) 한량(閑良)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주로 찾던 유원지이다, 전망 좋은 계곡에는 정자가 많았는데 특히 정릉동 333번지 주변은 왕(王)씨와 손(孫)씨가 많이 살던 세거지(世居地)로서 두 집안은 서로 세력 과시하는 등 가문의 명성을 높이려는 경쟁의식이 크고 작은 일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 시기에 이 부근에 고풍스런 한옥이 있었는데 이를 정자집이라 불렸다, 그러나 조선중기부터 왕씨가 번영(繁榮)하여 왕가정으로 손씨가 번성(繁盛)할 때면 손가정으로 바뀌어 불렸다, 몇 년 전만해도 주변(周邊)에 말처럼 생긴 말 바위에 손가정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고로 손가정터 란 손씨네 집안이 득세(得勢)하던 시절의 집터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수장(淸水莊)이란 정릉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맑아 청수동이란 마을 이름에서 붙여진 별장이다, 정릉유원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청수장은 삼각산 남록(南麓)의 깊은 계곡의 맑은 물과 부근의 산수가 조화를 이룬 곳에 위치한 청수장은 장안의 부호(富豪)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고 한다, 이는 일제시대 일본인의 별장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해방이 되면서 민간인에게 넘어가고 6, 25 전쟁 때는 특수부대 훈련을 위한 강의실 및 숙소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전 후 요정 청수장 으로 탈바꿈하였고, 여러 사람의 손을 겨쳐 변모를 거듭하다가 1974년 이후에는 일반 음식점 및 여관으로 바뀌어 운영되는 등 격동의 우리 근대사와 그 궤를 같이해온 뜻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1983년 북한산이 국립공원 제15호로 지정되면서 청수장, 도 국립공원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1998년 이 건물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평가되어 국가에서 취득하였고 2000년에야 건물의 외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지상 2층 규모로 개축에 착수하여 2001년 6월 30일 지금의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 탐방 안내소로 문을 열었다,
※ 정릉동 지역 인구집적추이(人口集積推移)
정릉지역의 인구 통계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1930년의 것이 있다, 역시 경성도시계회지역으로 편입을 위해 조사된 것인데 당시 인구는 1,391명으로 한가로운 농촌지역 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후 19년인 1949년에는 17,62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1953년에는 4,290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다, 9, 28 수복이후 계속적인 증가를 거듭 1961년에는 31,468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증가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1970년에는 86,303명으로 10년 동안에 배 이상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나타내더니 다소 증가세가 둔화, 1980년에는 88,711명으로 1990년에는 94,302명으로 안정적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으나 아직도 중가세에 있음을 역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기 때문이고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변두리 지역이기 때문인 것 같다,
※ 정릉(貞陵)의 유래
우선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이정릉2동에 있다, 미모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강씨가 태조 5년(1396)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너무 상심하여 슬퍼하다가, 능지를 친히 찾아 안암동에다 능기(陵基)를 개굴(開掘)하였는데 의외로 물이 나자 취현방(聚 賢坊) 북쪽언덕(지금의 중구 정동 4번지) 부근으로 정했다, 그 뒤 이곳으로 능을 이전한 것은 태조가 죽자 의정부에서 정릉이 유독 성내에 있어 미편(未便)하고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이 가까우니 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이듬해 태종 9년(1409) 2월에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사을한리(沙乙閑里) 현재의 정릉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후 정릉은 기억 속에 잊혀 져 있다가 170년이 지난 선조(宣祖) 14년 (1581년)에 그 위치를 찾게 되어 능침(陵寢)을 수봉(修封)하고 한식(寒食)에 제사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이어서 현종(顯宗) 10년(1669년 11월 1일) 신덕왕후를 종묘(宗廟)에 배향(配享)하고 능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260년 만에 예우(禮遇)를 갖추게 된 샘이다, 봉능설제(封陵設祭)하는 날 정릉 일대에 비가 흡족히 내리자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 200여년 동안 쌓인 한을 씨서 주는 비)라 하였다,
※ 사찰(寺刹)로는 정릉 북동쪽 산기슭에 높직이 동(東)을 바라보고 서있는 절 봉국사(奉國寺)(정릉2동 637번지)는 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 3년 1354년 나옹대사(懶翁大師)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조선 초에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당시 왕사였던 무학대사에 의해 창건된 호국 사찰인데 약사사(藥師寺)로 칭하다가 현종 10년에 정릉을 수봉(修封)하면서 이 절을 봉국사로 고치고 원찰(願刹)로 삼았다, 또한 봉국사의 북쪽 정릉천 옆 숲속에 자리 잡은 경국사(慶國寺)(정릉3동 753)는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로서 원래는 청암사(靑岩寺)였다, 역시 이절도 현종 때 정릉을 수봉하면서 원찰로 삼게 되었다,
보물급 유물을 많이 보유한 도심 속 사찰은 북악터널 위 북한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삼곡사(정릉3동 산 87-1)는 주택가에서 도보로 15분도 채 안 걸릴 정도로 대표적인 도심 속 ,사찰이다, 삼곡사 주변은 정릉지역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숲이 우거져 있을 만큼 불자들의 청정도량이었다, 이후 도시개발의 따라 주택가가 들어서고 도로가 생기면서 불교신자들이 좀더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사찰이 되었다, 특히 삼곡사 사이에는 마애 산신상을 비롯해 불상, 석각자 등 보물급 유물들이 많이 있어 불교 예술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정릉동 산 1번지에 오르면 산 속의 암자에 다다른다, 암자의 한쪽에 자리 잡은 좌선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시선을 산으로 향하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한 폭의 동양화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암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삼곡암(정릉3동 산 1번지)이다
꿈속의 계시에 의해 창건한 영불사(정릉3동 산1-1)는 국민대학교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는 사찰로 묘전 스님이 인왕산에서 꿈속에서 계시한 곳에 가면 석굴이 있다하여 이곳에 1959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산신기도로 염험을 얻는다는 영험바위와 석굴이 있고 불당 약사전 칠성각, 다보탑, 석가탑등이 있다,
정릉4동 산1번지에 오르면 영취사(정릉4동 산1번지)에 얽힌 설화가 나온다, 신라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목격한 일이다, 한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자 꿩은 날아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다가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렸는데 매는 나무 위에 앉아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물의 물이 마치 핏빛처럼 보이는 것이다, 꿩은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꿩을 측은하게 여겨서인지 감히 잡지 않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측은히 여긴 충원공은 감동하여 땅의 기운을 점쳐 보고 절을 세울만한 곳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말하여 그 곳에 절을 세웠는데 그곳이 지금의 영취사라는 것이다, 이곳에는 역사적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5층 석탑이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형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언뜻 봐도 거북이와 너무 닮아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설화에 많이 등장하는 거북바위를 들 수 있다,
내원사(정릉4동 산 1번지)의 창건 시기와 창건한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60년대 말 이재현 스님이 대웅전은 새로 지을 때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김정호가 제작한 수선전도를 보면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와 있다, 사찰에는 관음보살의 영혐과 신주를 새긴 백의대사불도 라는 목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목판을 조사해 보면 철종 때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수선전도나 백의대사불도 목판은 모두 1820년대에서 1859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 시기에 내원사가 불법과 맥을 잇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그 후 사찰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폐사되었으나 내원사의 범종루 동쪽에 있는 약수터 바위에 시주자의 이름과 1961년 9월에 석불암에서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한때 석불암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이재현 스님이 대웅전을 새로 짓고 내원사라 한 것이다,
※ 정릉의 한옥단지는 정릉1동과 정릉3동 (178 - 55 - 372 번지) 일 때 에서 한옥집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정릉1동 한옥단지는 조상들의 주거문화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난방을 위한 온돌과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마루가 균형 있게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다, 정릉3동의 한옥단지는 두 가지 장점을 잘 조화시켜 우리나라 주거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정릉3동 855-2번지 국민대학교 내에는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韓圭卨) 대감의 저택이 옛 풍모를 간직한 채 보존되어있다 원래 중구 장교동에 있던 저택을 1980년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189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저택은 조선후기 상류 계층 고관주택으로 신분과 남녀, 장유(長幼)를 구별해 공간을 배치된 규모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다른 동과 달리 정릉동은 학교가 많다, 국민대학교(정릉동 861-1)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광복 후 귀국한 신익희(申翼熙)가 민족의식 계몽과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창설된 광복 후 최초의 사립 대학이다, 설립을 위해 1946년 3월 국민대학 기성회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고문으로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명예회장에 김규식(金圭植), 조소앙(趙素昻)등 민족지도자들이 참여하였고 회장은 신익희가 맡았다,
1946년 9월에는 국민대학관 야간으로 개교하고 12월에 설립인가를 얻어 보인상업(輔仁商業學校) 건물을 사용하였고 학부와 전문부에 각각 법학과, 경제학과를 설치 초대 학장에 신익희가 취임하였다, 1948년 교사(校舍)를 종로구 창성동 117번지로 이전하고 같은 해 국민대학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정규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1959년 10월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이 재단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하여 재단과 대학을 새로이 정비하고 교사를 신축하는 등 그 면모를 일신(一新)하게 되었다, 1971년 9월 현재의 위치인 정릉동에 신축교사를 준공 이전하였다,
또한 서경대학교(정릉동 16-1)는 사립 종합대학교로 국내 유일의 4년제 야간대학이다, 서경대학교는 1947년 10월 재단법인 한국학원에서 설립한 한국대학으로 출발하였다, 당시 교사는 중구 장충동 2가에 소재하고 있었으며 초대 학장에는 재단법인 이사장인 한간섭(韓觀燮)이 취임하였다, 1955년 3월에는 재단법인 국제학원에서 한국대학을 인수하여 성동구 신당동 교사에서 국제대학으로 새롭게 개교하였다, 1960년 4월에 교사를 서대문구 충정로 2가로 신축 이전하게 되었다, 1980년 2월에는 경영대학원이 폐지되는 등 학교경영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 11월에는 학교법인 삼문학원에서 인수 3월에는 마포구 공덕동의 마포교사를 병용하게 되었다,
1948년 2월 에는 또다시 학교법인 명지학원에서 인수하여 다음해 3월 교사를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이전 하였다, 1987년 4월에는 학교법인 성한학원(聖韓學院)에서 인수하여 이듬해 3월 교사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89년 11월 법인명칭을 학교법인 국제학원으로 바꾸고 하교운영을 정비하여 새롭게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92년 4월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 1992년 9월에 교명을 서경대학교(西京大學校)로 바꾸었다,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전문대학(高麗大學 倂設 保健專門大學)(정릉동 산 1-2)은 사립 전문대학으로서, 보건전문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서울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전문대학은 1963년 1월 수도의과대학(首都醫科大學) 병설(倂設) 의학기술초급대학으로 종로구 명륜동2가에서 설립되었다, 이는 임상의학을 뒷받침하고 지원해야 할 의학기술교육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이며 유일한 초급대학 과정의 의학기술교육기관으로 발족한 것이며 의료기사 및 보건위생요원을 정규 교육하게 된 것이다, 설립 당시에는 임상병실과 등 6개 학과로 편제되었고 초대학장에 주인호(朱仁鎬)가 취임하였다,
이어 1966년 12월에는 학교법인 우석학원(又石學園)과의 병합으로 교명을 우석대학교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으로 변경하였고 1970년에는 치기공과가 신설되었으며, 1971년 12월에는 다시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병합되어 교명을 고려대학교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교사(校舍)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학교 발전의 기틀을 다잡았다, 1979년 3월에는 교육법 개정에 따라 교명을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전문대학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중 고등학교는 정릉동 산 1-2번지에 위치한 사립 일반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67년 12월에 학교법인 우석학원에서 우석사업고등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이듬해 3월 개교하였다, 1971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학교법인 우석학원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 병합됨에 따라 고려중앙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이어 1973년 11월에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개편되고 교명을 고려고등학교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2000년에는 제30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정릉여자상업고등학교는 정릉동 산 17-6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사립 실업계 여자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81년 3월 대일고등학교의(대일고등학교는 정릉동 16-1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전하였다,) 2부에서 여자상과 6학급을 편성한 것으로 출발하였다, 이어 1982년 12월에는 정릉여자고등학교로 정식 설립되었고 1987년 3월에는 2부가 신설되었다,
대일외국어고등학교는 성북구 정릉동4동 산 17-18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일반계(특수목적-외국어) 남녀공학 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학교법인 대일학원(大一學園)이 급변하는 국제시대에 대비하여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 양성을 위해 1983년 12월 대일외국어학교의 설립 인가를 받아 1984년 3월에 개교하였다, 당시 대일외국어학교는 각종학교로 설립되었으며, 한국 최초로 고등학교 과정의 외국어학교로 출발하여 불어, 독어, 서반아어, 일본어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1987년 2월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80년 12월 27일에 설립한 은주여자중학교(정릉동산 17)가 있고 1984년 1월 30일에 설립한 북악중학교(정릉동 640-3) 남녀공학이 있고, 고려중학교는 고려고등학교와 같이 있고 초등학교로는 1945년 5월 14일에 설립한 숭덕초등학교(정릉 87-1), 1985년 7월 10일에 설립한 정릉초등학교, 1986년 1월 17일에 설립한 정수초등학교(정릉동 431-61), 1967년 11월 30일에 설립한 창덕초등학교(정릉동 산 1-69)가 있다,
⑫ 정릉1동은 정릉동으 동쪽 편, 즉 아리랑고개와 숭덕초등학교 동쪽 일대의 정릉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지역 명칭이다, 정릉동은 1948년 8월 13일 서울시의 편입된 후 정릉제1동회 제2동회로 구분되어 행정을 담당했다, 1955년 4월 18일(시조례 제66호)에 정해진 정릉제1동사무소의 관할구역은 정릉동중 정릉천 지유 소하천(支流 小河川)을 경계로 하는 서남방의 지역으로 했다, 이어서 1970년 5월 18일(시조례 제613)에 정릉동이 4개 동사무소로 나뉘어질 때 정릉제1동은 정릉동 중 아리랑 고갯길 동측지역과 숭덕초등학교 동측도로 이동 지역으로 정해져 현재에 이르렀다, 이 동 남서쪽으로는 아리랑고개길이 지니고 동서로는 정릉천을 복개해서 확장된 정릉길(북악터널 - 길음역 - 월암교)이 있어서 북악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