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옥산에서 아산청주고속도로로 갈아타면 서오창 IC가 나옵니다. 그 길로 조금 더 가면 앞쪽으로 정겨운 농촌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평화롭게 놓여있는 야트막한 동산, 반짝이는 비닐하우스,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옥들은 어릴 적 아무 근심 없이 뛰놀던 그 시절로 보내줍니다.
하지만 무언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 계속 눈에 띕니다. 그 옛날 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시골 동산도, 가로수도, 전봇대도 전부 무언가에 빈틈없이 뒤덮여 있어요. 이게 우리나라가 맞는 건가, 이국적인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만 특별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했지만 가좌리와 두릉리도 지나고 용두리까지도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집니다.
감아 올라갈 수 있는 건 죄다 뒤덮여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어디로 갔는지, 오직 그 덩굴 하나만 세상천지에 가득했어요. 그 덩굴 아래에는 어릴 적 꿀 빨아먹던 아까시 나무, 빙글빙글 씨앗을 던지며 놀던 단풍나무, 질겅질겅 씹던 솔잎 무성한 소나무가 모두 쥐 죽은 듯이 덮여 있었습니다. 햇빛을 못 받아서 그런지 다들 고사(枯死) 하기 일보 직전 같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이 엄청난 식물의 정체는 바로 ‘가시박’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죄다 덮어버리고 결국 자기 혼자만 살아남는 무시무시한 식물이었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자라던 종인데 1990년경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2009년에 생태계 유해종으로 지정된 상태라고 합니다.
바로 이 외래종으로 인해 우리의 산과 들이 가시밭길도 아닌 가시박길로 변해버린 상황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그동안 무관심한 사이에 세상천지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니 공연히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무서운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 밑에 깔린 아까시, 단풍, 소나무 잎사귀와 가지들은 어떤 느낌일까요? 식물에게 햇빛은 희망과 동의어일 텐데, 그 모든 희망이 차단당한 상태로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겁니다. 온몸이 옥죄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하고 그저 절망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 아무 희망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니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에게도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보통 우리는 역사책에서 위대한 영웅들의 화려한 삶만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업적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는 대부분의 역사는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인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순탄치 않은 그 삶, 그 옛날 우리네 평범했던 조상님들이 살았던 나날과 지금 우리의 풀들이, 나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산 정약용이 지은 시 <애절양(哀絶陽)> 속에는 가렴주구로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생생합니다. 돌아가신 시아비와 갓난아기까지 3대의 군적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양물을 잘라버린 남편을 두고 관문 앞으로 달려가 통곡하던 아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빼앗긴 나라에서 전쟁 공출로 더 이상 내줄 것도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밥해 먹을 솥단지와 숟가락 젓가락까지 앗아가는 그들을 보며 우리 조상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늘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며 살아오던 우리 나무들이 어느 날부터 목을 죄어오는 가시박에게 조금씩 조금씩 햇볕을 빼앗기다가, 마지막 남은 그 한줄기 빛마저 완전히 가려졌을 때 느꼈을 그 어둠.
부자집들은 일 년 내내 풍악 울리며 흥청망청하는 사이, 지아비는 스스로 아이 낳은 죄라며 부르짖으며 자해를 하는 애절양 속의 젊은 아낙이 관가 대문 앞에 주저앉아 올려다보던 그 하늘.
아들은 전쟁터로, 딸은 위안부로 끌려가고 마지막 남은 밥그릇까지 빼앗길 때의 우리의 선조가 바라보던 하늘은 서로 잇닿아 있습니다. 너무도 닮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죽지 않았습니다. 가시박에 뒤덮인 것 같은 세도정치도, 일제 36년도 모두 지나고 결국 우리는 빛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 덕분에 더 이상 우리를 옥죄는 그 무언가도 하나 없는 세상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생태계도 우리 민족처럼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언젠가 가시박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그 찬란한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