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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백화산 탄금대, 임천석대( 林千石臺)에 관한 소고(小考)
머리말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 구수천을 따라 백화산 입구에서 약 4 km 가면 고려가 멸망하자 한 악인(樂人)이 거문고를 품고 내려와 고려가 망함을 한탄하며 거문고를 켜다 태조가 거듭 부르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간직하고자 거문고를 품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과 함께 임천석대라는 절벽이 있고, 최근 허경진 저자 ‘악인열전(樂人列傳)’에서 임천석(林千石)에 관한 간략한 소개 글이 있다.
“무릇 음악이 무엇이던가? 음악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예를 고려 말의 악공(樂工) 임천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고려가 기울 때 산에 들어가 높은 바위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늘 탄식했다. 이성계가 혁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 떨어져 죽었다.
'정조 실록'의 기록이다. 기록들은 오랜 것일수록 성겨 행간이 넓어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며 임천석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사이군의 충절과 탄금대로 알려진 임척석대(林千石臺)에 관한 상상력의 원천을 역사적인 사실과 선인들의 문헌을 통해 고찰해보고 충절과 역사 교육 및 관광 자원으로 재조명하고자한다.
들어가며
먼저 상주 백화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에
“七月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白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輿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 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言 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 與 軍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五萬應之王次今突城 ...... 十八日 義慈卒太子皮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즉 ‘신라가 백제를 침공함에 무열왕 7년(AD 660년) 태자 법민에게 명하여 대장군 김유신장군, 품일, 흠춘 장군과 더불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도록 하고 무열왕은 금돌성으로 행차하였으며 그 후 태자 법민이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 무열왕은 7월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천복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승전을 알렸다.’는 것이다. “는 기록과 ‘동사강목 제4상기유’에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년, 고구려 왕 장(藏) 8년, 백제 왕 의자(義慈) 9년‘에
“夏六月 新羅王出屯南川停 遺太子法敏及金庾信 會唐兵于德勿島 云云 七月十日…….又遣法敏與 庾信 及 將軍品日欽春 師精兵五萬應之 進次今堗城(今尙州白華山)
新羅王會蘇定方于泗沘城 遣使告捷于唐 王自南川進次突城(今未詳) 聞百濟降 自今突至泗沘
云云
하 6월 신라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 (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 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왕이 소정방과 사자성에서 회담하였고, 사신을 당에 보내어 승첩(勝捷)을 알렸다.
왕이 남천(南川)으로부터 금돌성(今突城)에 나와 있다가 백제의 항복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자성으로 와서 제감(第監) 천복(天福)을 보내 당에 노포(露布 전승을 알리는 포고문)하였다. 술을 차려 놓고 장사(將士)들을 위로할 적에 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는 당하에 앉혀 술잔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는 기록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명산이다.
또 경상북도 상주의 역사지인 ‘상산지(商山誌)’에 금돌성에 대하여 “백화산에 있는데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할 때 신라 무열왕이 태자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을 파견하여 6월에 금돌성에 이르렀다. 7월에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의 도성을 함락하니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였고 무열왕이 금돌성으로부터 백제로 가서 8월에 주연을 베풀고 소정방과 여러 장수를 치하하였다. ‘라고 하면서 ’백화산성은 백화산 위에 있고 보문성(普文城)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하였다.” 라고 했고,
고려시대에는 ’高麗史節要 卷之十七 高宗安孝大王 四 甲寅四十一年,蒙古 憲宗四年‘에
“車羅大攻忠州山城,風雨暴作,城中人抽精銳,奮擊之,車羅大解圍,遂南下。
冬十月,車羅大攻尙州山城,黃嶺寺僧洪之,射殺一官人,士卒死者過半,遂解圍而退。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몽고 헌종 4년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겨울 10월에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 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통일의 기백이 흐르는 호국명산(護國名山)으로 불러 손색이 없는 산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이전과 이준 형제가 머물던 향병소(鄕兵所)에 왜군이 들이닥쳤고,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60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는 “경북유형문화재 제217호 형제급란도”가 전하는 의병 활동의 주축이었고 이후 항일 운동의 거점지이였기에 오랜 세월 백화산이란 지명조차도 일제에 의하여 삭제되고 본래의 이름인 최고봉(933m) ‘한성봉’이 삼국통일의 기를 사로잡는다는 뜻에서 ‘포성봉’으로 변경되어 지내오다 지역민의 줄기 찬 바램으로 2007년 12월 26일자로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백화산’이란 지명이 새로 제정되고 원래의 ‘한성봉’으로 지명 변경이 고시된 우여 곡절이 많은 산이다.
1392년, 고려 멸망 300년 전후 조선시대 학자인 식산 이만부(李萬敷·1664-1732)가 쓴
‘白華洞㙜壁記’에 “自沙潭西下。白華,萬景。勢益壯。聱岈崛岉。呈怪不相讓。石焉苔蘚蝕。土焉蘿蔦封。水劃中如絲貫。屈折交絡。齧其涯。潦澤加則尤怒號。劈破崩崖震谷焉。左峙壁削開一面。色紺黝。覆壽藤。窈窕而深。益下無幾。有巖架起二層。㸦鐫刻。其趾黛蓄噴薄。流沫塗瀯。其巓老松翠層。落陰釀凉。有補虧平治之迹。塊石剝落。俗傳新羅亡。樂師林千石隱居于此。每於巖上彈琴。故尙稱林千石㙜云。余欲破石根疏磴道。抱三尺琴。臨其壁上其㙜。俯其流。彈一闋二闋。吊古人宣堙鬱而未能焉。再叟所表揭勝。滿十夥矣。惟是二者遺焉。故於是名其壁曰欄柯。名其㙜曰峩洋。息山翁云。
사담(沙潭) 서쪽 아래로 백화 만경(萬景)이다. 기세는 웅장함을 더하고 꾸불꾸불한 산세는 아득하고 험준하며 기괴함을 드러내면서도 서로 물러서지 않는다. 돌마다 이끼 자욱하고 흙더미에는 담쟁이덩굴 자리 잡고 있다. 물결이 갈라지는 곳에는 마치 실타래가 꿰어지는 것처럼 휘어 꺾이고 얽히고 설켜 그 물돌아가는 벼랑을 흠집 낸다.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더하여서 더더욱 울부짖고 벼랑을 가르며 부수고 무너뜨리며 골짜기를 뒤흔들며 왼쪽 들쭉날쭉한 절벽은 빛깔이 감색으로 거무스레하고 오래된 등나무로 덮여 그윽하며 깊숙하나 점차 아래로 내려가면 위태롭지 않고 바위가 (2층처럼) 시렁같이 층대를 이룬다. 거기에 그의 발자취를 새겨 넣다. 낮게 물이 솟아 진흙 사이로 졸졸 흘러가고 그 꼭대기 노송은 비취빛으로 층을 이루고 해가 저물어 서늘해지니 평화로운 자취를 더해주는데 흙더미와 돌덩이가 파인 듯 떨어진다. 항간에 신라가 망하고 악사 임천석이 여기에 숨어 살아 늘 바위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전해오기를 임천석대라 칭하였구나. 자신은 돌을 깨트려 돌비탈 길을 터서 삼척의 거문고를 안고 그 암벽 위 그 대에 다다라 흐르는 물을 굽어보고 한 곡조 두 곡조 타리라. 옛 사람을 조문하고 막히고 쌓인 것을 토로해보지만 다 할 수야 있겠는가? 늙은이가 겉으로 드러내어 감당할 바가 너무 많구나? 오직 두 가지만 여기 남긴다. 그러므로 전하기를 그 벼랑을 이름하여 ‘난가(欄柯)’라 하고 그 대를 이름하여 ’아양(峩洋) ‘이라 하였다. 식산옹이 이른다. “ 라고 글을 남겼는데 후세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를 신라라고 오칭한 것 같다.
이어서 ‘林千石臺’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남겼는데,
“疊石枕碧泓。 파란 소를 베고 첩첩이 쌓인 바위
云是林子㙜。 이곳이 이른바 임천석대라네
知是武陽倫。 내 아노니 아마도 그는 무양의 은인같이
抱器避地來。 큰 그릇 가슴에 품고도 세상 피해 살던 분
人去雲埋壑。 사람은 가고 없는데 구름은 구릉을 메우고
㙜存巖蝕苔。 대는 남아 바위는 이끼가 덮었네.
松籟晩不齊。 날 저무는 솔밭에 바람은 거친데
擬聽律呂哀。 옛 거문고 가락 슬픈 듯 들리네. “ 라 했다.
또 조선 후기의 학자인 경현재(警弦齋) 강세진(姜世晋, 1717 ~ 1786)은 ‘林千石臺歌’에서
“由自玉洞 沿溪而下 行數里 有蒼巖 削立於溪上 高可數十丈上可坐十許人 故老謂之林天錫(一作石)臺 天錫 麗末伶官也 以善鼓琴名 見麗王無道 携家遠遁 隱迹於商之中牟縣 壽峯村 每日上此臺 鳴琴作兩三曲 其聲悽惋 及麗亡 太祖 聞其名 使人召之 天錫曰 我麗臣也 義不可屈 不赴召 上又使人迫之 天錫 抱琴自投於臺下而死 後人 遂名其臺曰 林天錫臺 嗚呼 當麗運之訖 能守義而不臣于聖朝者 惟吉注書 徐掌令數公而止耳 其名跡 光于簡冊如林君 以一伶官 節義之卓 亦何鈊少遜於二公 然 泯滅不章 只留於村翁野老之口 其可悲也己 余逐詩之曰
옥동(玉洞)에서 시냇가를 따라 數里를 내려가면 시내위에 푸른 암벽이 깎아 세워져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위에는 십여 명이 앉을 만하니 촌로들이 임천석대라 하였다. 임천석은 고려 말의 악사이며 북과 거문고를 잘 치고 타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고려왕이 무도한 것을 보고 가족을 데리고 상주의 중모현 수봉촌(壽峯村)에 숨어 살면서 매일 이 대에 올라 거문고를 타고 두서넛 곡조를 울리니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처로웠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임금 태조가 그 명성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니 임천석은 ‘나는 고려의 신하이다. 의리로 다른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며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태조가 다시 사람을 시켜 부르며 협박하니 임천석은 거문고를 안고 대 아래로 뛰어내려 죽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때부터 이 대의 이름을 임천석대라 한다. 슬프도다. 고려의 운이 다할 때를 당하여 능히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오직 冶隱과 서중보 장령 등 몇몇 뿐이라 그 이름과 자취가 청사에 빛나고 있다. 임천석은 비록 악사이지만 절의의 높음이 이와 같으니 또한 위의 두 사람과 뒤진다하랴! 그러나 묻혀서 빛나지 못하고 다만 구전에 머물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내가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시를 쓴다. “라며 詩를 남겼다.
“水瀰瀰石崔崔 물은 세차고 깊게 흐르고 바위는 높디높으니
人說林君千錫之故臺 사람들이 일컬어 임천석대라고 한다.
林君麗季時伶官 임천석은 고려 말의 악사였는데
桐絲一鷗 동강에 낚시하며 갈매기 한 마리
能令鳳凰爲徘徊 능히 봉황으로 배회하게 했다.
麗王淫戱自勦絶 고려의 왕 음란을 즐기며 스스로 지쳐 파멸하니
鵠嶺伯氣寒於灰 鵠嶺의 흰 기운이 재 같이 싸늘했다. “ 고 했다.
이 글에서 ‘임천석은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을 데리고 중모현 수봉촌(壽峯村)에 살았고, 조선의 태조가 두 번에 걸쳐 협박까지 하며 조정으로 불렀으며 임천석은 거문고뿐만 아니라 이름이 날 정도로 북도 잘 두드렸다는 것이고 임천석대는 십여 명이 앉을 정도의 대(臺)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正祖 46卷, 21年( 1797 丁巳 (嘉慶) 2年) 2月 13日 甲申 “前持平金光遇上疏曰
昔宣川知印金鐵賢, 從忠武公金應河, 到深河, 及兵潰矢盡。 應河謂鐵賢曰: ‘汝其去矣。’ 鐵賢曰: ‘小人何敢去? 請伏劍, 以明不去之心。’ 遂與應河, 同時殉節。 其後立應河之祠於義州, 以鐵賢配之廡下, 至丙子之難, 祠亦焚焉。 高麗樂工林千石, 麗末抱琴入尙州之華山, 日上層巖, 援琴北望而長唏, 聞革命之報, 遂捨琴自投巖下, 至今傳林千石臺。 此兩人所成就樹立, 炳烺字宙, 而旣無名位, 莫能褒揚, 宜使本官, 伐石記事, 以彰其烈。”
命廟堂稟處。
정조 21년 정사(1797, 가경 2) 2월 13일(갑신)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華山-白華山의 별칭) “ 라고 정조 실록에 기록되며 정조가 묘당에 품처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임천석에 관한 비(碑)를 새겨 남겼을 가능성도 많다고 보여진다.
또,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 1760년-1839년)는
“林千石琴師也。知麗運將訖。抱琴入嶺南商山白華山。皷琴不出。聞麗亡號慟投臺下水死。
時林鳥悲鳴。山谷慘憺。至今山中人相傳林氏臺。
임천석은 거문고를 타는 악사인데 고려가 다함을 알자 미래를 구걸하며 연명하지 않고 영남 상산-상주 백화산에 거문고를 품고 들어가 거문고를 타며 두문불출하였다. 고려가 망함을 듣고 대(임천석대) 아래 물에 떨어져 죽으니 수풀 사이로 새들이 슬피 울고 산하가 참담하였다. 백화산 중에 임천석대라고 지금까지 전해온다.“고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58의 羅麗遺民傳’에서 新羅王子 興光부터 44명의 신라, 고려 말 인물들의 행적을 올렸는데 '임천석'에 관한 기록을 남겨 오직 승리한 자의 역사만이 남는 가혹한 현실에서 비록 나라는 망해 없어졌지만 그 아름다운 행장을 역사에 남기고자하는 선인들의 지혜와 슬기가 전설 속에 남을 '임천석'을 다시 조명하는 작은 단초가 된다.
또, 장원(藏園) 황원선(黃源善) (1798年-1873年)은 ‘林千石臺’
“疊石層支小作臺 첩첩 층층이 돌 쌓아 작은 대(臺) 만들었으니
藏園處士百年來 장원처사가 생전 처음 예 왔다.
野人尙說殉身事 촌로들이 임천석의 순사한 일 말하니
碧血知應化錄苔 푸른 피가 아마도 푸른 이끼로 변했나보다. “며 지역 주민들이 전설로 여기며 전하는 속설을 기록으로 남기고,
조선 시대 학자 立齊 鄭宗魯 (1738~1816)는 ‘林千石臺’
麗運無那聖運開。 고려의 운, 어찌 할 수 없어 조선이 개국하니
忠臣來死此荒臺。 충신이 이 거친 대에 와서 죽었도다.
英靈不與寒波逝。 넋이 한파와 더불어 가지 않았으니
應抱孤琴故國廻。 아마도 거문고 안고 고국에 돌아오리.“라며 충절을 되새기며
金崔曄 (1753-1804)도 ‘林千石臺’
“千石石爲臺 임천석으로 하여 석대가 되었으니
矢心齊石臺 맹세한 마음은 석대와 한 가지일세
人投臺下死 사람은 대 아래로 투신해 죽었으나
高節又高臺 높은 절의는 또 높은 대로 남았네. “라고 높은 절의를 칭송한다.
동 시대의 白下 黃磻老도
“高麗山色夕陽臺 고려의 산색이 빛나는 석양의 대에서
烈士前塵問刼灰 열사의 지난 날 죽음을 물어본다.
夢八朱絃彈不盡 꿈마다 거문고 타서 다하지 않고
江深白馬去無來 강이 깊으니 백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네.
雷鳴急峽蛟龍鬪 우뢰 우는 가파른 골짝에 교룡이 싸우고
春到空林杜宇哀 봄이 오는 빈숲에는 두견이 슬피 우네.
怊悵東風誰灑麥 슬프도다. 봄바람에 누가 원한을 씻을 고
空敎石面但崔嵬。 공연히 바위가 명성 높도록 만 가르쳤네. “라며
열사(烈士)라는 칭호로 임천석을 극찬한다.
맺는 말
실록과 시문(詩文) 속에 살아있는 임천석대(林千石臺)는 2008년 6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 현장 답사에서 벼랑 옆을 기어 올라가는 고투 끝에 밑을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약 3층 높이의 절벽 위에 장원(藏園) 황원선(黃源善)의 林千石臺에서 ‘疊石層支小作臺 첩첩 층층이 돌 쌓아 작은 대(臺) 만들었으니’라고 하고 또, 경현재(警弦齋) 강세진(姜世晋, 1717 ~ 1786)의 ‘林千石臺歌’에서 ‘有蒼巖 削立於溪上 高可數十丈上可坐十許人 故老謂之林天錫(一作石)臺시내위에 푸른 암벽이 깎아 세워져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위에는 십여 명이 앉을 만하니 촌로들이 임천석대라 한다.’라는 글과 같은 십여 명이 앉을 편편한 대(臺)가 밑에는 큰 돌로 석축을 쌓아 올려 져 있음을 발견했다.
이와 같이 기록과 일치하는 점과 몇 백 년을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구전되어 온 지역민들의 말을 토대로 전설로 전한 허구가 아님을 증명한다할 것이다.
영남의 동강으로 불리는 “구수천(중모천, 석천) 팔탄”을 배경으로 충주의 탄금대에 비교하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까지 가미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부각되어도 손색이 없는 유래 깊은 비경이다.
임천석대(林千石臺)가 훼손되지 않도록 인근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안내도를 설치하며 어딘가 망실되지 않고 있을 지도 모르는 비문(碑文)을 찾는 일도 함께 병행해야 될 것이다.
또 최근 성황리에 개최된 ‘백화산 학술세미나’에서 조명된 우리나라에 가장 긴 산성인 금돌산성을 복원하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선조들의 기상을 되살리고 천년 옛길이라 불러 손색없을 영남의 동강 ‘구수천 팔탄’을 따라 편도 6km (구수천 양안 왕복 12km) 산책로를 조성하여 역사의 향기를 남겨야한다고 사료된다.
‘구수천 팔탄’을 가면 폭 3-4m의 길이 신라 때 쌓은 금돌산성과 축조 방법이 비슷하게 백화산 입구에서 충북 황간 반야사(경북 모동면 수봉리에서 옮긴 기록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자료에 보임.)까지 내를 따라 조성된 점을 보아 ‘천년 옛길’ 산책로라 불리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는 최근 수집한 1918년 일제 때 작성한 지도에서 이와 같은 도로가 명시되어 있음으로 복원에 해당될 것이다.
없는 역사적인 사실도 유추하여 확대 해석하며 관광 자원화 하는 현실에서 엄연한 기록들이 존재하고 기록과 부합된 현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임천석대(林千石臺)는 그 긴 잠재된 시공의 문을 열고 거문고를 켜며 임천석(林千石)이 현실에 재현되어 충절과 문화의 북을 그 시절처럼 두드리며 나와야한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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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