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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삶과 경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소박한 자연주의적 삶의 의미를 향기롭고 감칠 맛나게 이야기하는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가벼운 에피소드와 유머러스한 등장인물을 통해 마치 커피 한잔을 건네듯 쉽게 전달함으로써 읽기 편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우화로 완성된 소설이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단절에 익숙해지고 무감각에 승복하는 우리 사회 젊은이를 대표하는 주인공 '나'는 어느 날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를 발견한다. 그곳은 축음기와 LP레코드, 가정용 오븐과 구식 커피기구들, 재즈와 화분, 오래된 책과 잊혀진 가제 손수건까지. 잡스럽고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분명 1970년대를 알지 못하는데도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의 주인과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해 인간은 행복한 인생의 맛에 대한 근본적인 향수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암시한다. 주인은 구겨지고 추한 현대의 기성세대와 망가진 자본주의를 조용히 비난하며 그들이 망치고 있는 젊은 세대를 위로한다.
2006년 『런치브레이크 스토리』를 필두로, 『싱가포르에서 아침을』, 『올드미스자유열전』등 톡톡 튀는 문장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세대적 감성이 돋보이는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최근 첫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를 펴내 네티즌을 중심으로 열렬한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룬 『루스, 발렌타인 그리고 홀리』를 펴냈다.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미와 확실한 주제의식으로 각 소설마다 색깔이 다르면서도 그 만의 확실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다음 순간 내 앞에는 브리오슈 두 개가 담긴 접시와 참기 힘든 향을 퍼뜨리는 커피 한잔이 놓여있었다. 갈색 빵은 부풀어 터질 것만 같고 커피는 뜨겁다. 비둘기모양의 도자기 그릇에 담긴 크림, 갈색 설탕에 꽂힌 스푼. 모든 것이 예쁘다. 나는 설탕의 실존을 증명하는 은색 스푼의 손잡이를 몇 초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크림과 설탕을 검고 투명한 액체 속에 차례로 넣고 천천히 저은 다음 한 모금 마셨다. --- p.23
“〈리플리〉라는 영화 봤어?”
“아뇨.”
“거기 보면, 주드 로가 에스프레소 기계를 가지고 법석을 떠는 장면이 나와. 디키는 나폴리의 시골에서 빈둥거리는 부잣집 건달인데, 레몬나무가 자라는 하얀 석회암 건물 테라스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여자친구랑 에스프레소 기계를 샀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있는 리플리는 그딴 기계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남부러울 게 없는 부잣집 도련님은 에스프레소 한 잔에 좋아라하지만, 가난한 리플리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지. 간단하고 섬세한 방법으로 인생의 아이러니 같은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난 어쩐지 그 장면이 좋아. 그 장면만 수십 번 돌려 봤지.” --- p.54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 여행 책을 읽는 것. 먼지 나는 도시, 지저분한 숙소는 생략하고, 4륜 구동 지프차를 직접 운전하며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어느새 바로 옆에서 표범이 함께 달린다. 표범은 얼룩말을 뒤쫓는다. 놀란 가젤과 누우도 달리고, 코끼리도 덩달아 달린다. 어디선가 둥둥 북소리가 들린다. 의식이 시작된 것이다.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사자 떼가 나타난다. 사자가 나와 지프차를 앞지른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 동물들은 생존본능 때문에 달리지만,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달린다.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해방감을 맛보며, 모래바람을 들이마신다. 그들의 아름다운 생존본능에 갈채를 보내면서. --- p.132
주인은 바질 잎을 여섯 개 따서 연어조각 위에 놓았다. 그 위에 타르타르소스를 뿌린 뒤, 얇게 썬 토마토와 식초에 절여둔 양파, 신선한 양상추를 넣고, 나머지 빵으로 덮은 다음 누름 기계로 꾹 눌러 접시에 담았다. 오늘은 사이펀으로 커피를 만들었다. 부부손님이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나갔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손님은 오지 않았다. 주인은 내게도 연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샌드위치는 이 세상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맛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먹기가 미안했다. 너무 귀한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는데도 손님이 단 두 명뿐이라니. 그래도 주인은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 p.101
그러나 주인은 요리를 할 때보다, 케이크를 먹을 때보다 더 무감각하게 말했다. 얼른 가봐.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한다고, 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인생이 언제나 똑같이 끝나고, 똑같이 시작됨을 느낀다. 끝나기 위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일 어떤 음식을 먹게 될지, 오늘은 잘 몰라.출판사리뷰
소박한 삶의 의미와 자연주의의 조용한 힘,
아날로그 시대에 우리가 두고 온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는 이야기.
신선하고 풋풋한 감각과 본격 성장소설의 감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잔잔한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출간!
우리는 바로 이런 커피하우스를 원한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에는
그윽한 커피향기, 맛있는 레시피와 함께
우화같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축음기와 LP레코드, 가정용 오븐과 구식 커피기구들, 재즈와 화분, 오래된 책과 잊혀진 가제 손수건까지. 잡스럽고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한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신비로운 주인여자,
오늘의 젊은이인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
현대인의 전형인 다양한 손님들.
그리고 그윽한 커피 향과 맛있는 음식들로 둘러싸인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는 마치 물위의 섬처럼, 혹은 바닷가 등대처럼, 오늘도 맛있는 커피와 맛있는 레시피 속에 ‘단지 주어진 오늘을 살라’는 조용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에는 잃어버린 오늘이 있다.
‘남들보다 앞서나가야만 잘 살 수 있다’거나, ‘남이 하는 것은 뭐든 따라하고 본다.’는 자본주의적 삶과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 오늘도 힘든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박한 자연주의적 삶의 의미를 향기롭고 감칠 맛나게 이야기하는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작가는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피로감에 지친 사람들이 한순간이라도 편안한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우화적인 성장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커피하우스의 주인과 ‘나’의 만남 사이에는 수많은 상징이 숨겨져 있다.
요즘의 젊은이인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는, 생...소박한 삶의 의미와 자연주의의 조용한 힘,
아날로그 시대에 우리가 두고 온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려주는 이야기.
신선하고 풋풋한 감각과 본격 성장소설의 감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잔잔한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출간!
우리는 바로 이런 커피하우스를 원한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에는
그윽한 커피향기, 맛있는 레시피와 함께
우화같은 이야기와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축음기와 LP레코드, 가정용 오븐과 구식 커피기구들, 재즈와 화분, 오래된 책과 잊혀진 가제 손수건까지. 잡스럽고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한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나이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신비로운 주인여자,
오늘의 젊은이인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
현대인의 전형인 다양한 손님들.
그리고 그윽한 커피 향과 맛있는 음식들로 둘러싸인 잔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는 마치 물위의 섬처럼, 혹은 바닷가 등대처럼, 오늘도 맛있는 커피와 맛있는 레시피 속에 ‘단지 주어진 오늘을 살라’는 조용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에는 잃어버린 오늘이 있다.
‘남들보다 앞서나가야만 잘 살 수 있다’거나, ‘남이 하는 것은 뭐든 따라하고 본다.’는 자본주의적 삶과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 오늘도 힘든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소박한 자연주의적 삶의 의미를 향기롭고 감칠 맛나게 이야기하는 소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작가는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만큼 가벼우면서도, 피로감에 지친 사람들이 한순간이라도 편안한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우화적인 성장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커피하우스의 주인과 ‘나’의 만남 사이에는 수많은 상징이 숨겨져 있다.
요즘의 젊은이인 주인공이자 작중 화자인 ‘나’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단절에 익숙해지고 무감각에 승복하는 우리 사회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나타낸다. ‘나’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아빠의 존재도 이제 곧 과거 속으로 묻힐 것이며 ‘나’는 결국 철저한 고독 속에 고립되고 말 것이다. 아빠는 마지막 유언조차 감동적으로 남기지 못하는 시대적 오류의 산물인 기성세대를 상징한다. ‘나’는 불안하고 헛된 현실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죽어가는 영혼임을 스스로 인지하며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그런 ‘나’ 앞에 어느 날 『수요일의 커피하우스』가 등장한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주인여자는 구식양옥집에 살며 아버지가 물려준 축음기와 LP레코드, 가정용 오븐과 구식 커피기구들, 재즈와 화분, 플레어스커트와 앞치마, 다락과 서재, 심지어 잊혀진 가제 손수건 따위의 잡스럽고 오래된 물건들에 둘러싸인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물과 행위는 과거 속에 묻힌 진실한 인생의 의미를 상징한다. 그녀는 흐르는 시간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위대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인물이며, 복잡한 허위의 세계를 사는 오늘의 지친 젊은이들에게 세상에 만연한 집단 망상에서 벗어날 것을 조용히 알려주는 생활의 인지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끊어진 고리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분명 1970년대를 알지 못하는데도 주인과 비슷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해 인간은 행복한 인생의 맛에 대한 근본적인 향수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의 이름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에는, 독자 자신이 ‘나’이기를 느끼고 ‘나’의 감정 속에 녹아들어 주인의 따스한 인간애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주인은 구겨지고 추한 현대의 기성세대와 망가진 자본주의를 조용히 비난하며 그들이 망치고 있는 젊은 세대를 위로한다. 그녀의 방식은 까다로운 커피나무에 물을 주듯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자신의 철학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천일의 커피와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은 우리 시대의 힘들고 지친 젊은 영혼을 감싸 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주인의 태도 때문에 ‘나’는 안식을 얻고 시간과 사회의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이처럼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가벼운 에피소드와 유머러스한 등장인물을 통해 마치 커피 한잔을 건네듯 쉽게 전달함으로써 읽기 편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우화로 완성되었다. 블로거 작가라고는 믿기 힘든 플롯의 완성도와 복선 사용의 능란함, 그리고 신인작가의 풋풋함을 고루 갖춘 이 소설에서 독자는 편안한 재미와 함께 짙은 휴머니즘을 느끼게 될 것이다. 커피 한잔의 여운처럼,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는 척박한 시대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향기를 선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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