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광훈의 농민운동 이야기
<노태우 고추태우는 이야기 2>
어찌 해남, 진도 고추 뿐이랴!
노태우 고추 값이나 농민 고추값은 땅에 떨어질때로 떨어졌다.
올해는 전국 전 지역이 고추 풍년인데다가, 가정마다 커다란 푸대에 가득 쌓아둔
마른고추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어쩌면 그렇게 희나리 하나없이 때깔도
좋고 매콤한 맛 또한 일품이었다.
흉년떡도 많이 나오면 싸다고 아무리 비타민C가 많으면 어떻고 태양초 양근이면
어떻고 화근이면 어떠리.......
홍일일품, 마냔, 청양, 추레홍, 청송고추 맛이 으뜸이니 순창고추 맛이 왕품이니
영양, 안동, 음성, 영월, 진천, 괴산, 충주, 제천, 정선 고추가 좋은들 무엇하랴.
올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고추 주산지며 고추농사만으로 일년농사, 전 소득으로
살아가는 농민들에겐 씨앗값도 못 건지는 판! 이른 초봄부터 안방에서 씨앗을 틔어
상자에 옮겨 심고 전열판 연탄보일러가 깔린 온돌방같은 비닐멀칭속에서 아기
키우듯이 물을 주었다, 담요를 씌웠다 벗겼다. 옷 잎이 다섯개가 되면 뿌리가 잘
자라도록 옮겨심고 본답에 옮겨심은 다음 늦서리가 맞을까봐 멀칭비닐을 씌운 다음
농약도 한두번도 아닌 여러번. 그뿐인가 고추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 옆순 가지치기며
바람에 넘어지지 않도록 말뚝을 박아 지주를 세우고 지주끼리 줄을 이어가며 그
사이에 고추모를 매고 고추가 익을 때는 어찌 날은 그렇게도 무덥고, 하필이면
울레줄레 빨갛게 익어가는지. 농촌일중에서 가장 힘든일이 한여름 고추나무 사이를
기어가며 고추따기일 것이다.
이렇게 딴 고추를 자루에 담아 무거운 홍고추를 밭두렁으로 꺼내 경운기까지
짊어지고 어둠이 짙어서야 건조기에 넣거나 태양초 양근을 할 때 비가 나리면 말리지도
못하고 썩혀 버리는 양이 태반이다.
자식같이 키우고 말린 고추값이 한 근에 팔백원 밖에 안 된다니. 팔지 못해 마루, 헛간
, 창고, 안방에 까지 쌓아둔 고추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농민들의 분노로 바뀌어
질 수 밖에 없다.
고추값이 오르면 비축양으로 때려치고 그것도 부족하면 칠레 멕시코산 수입. 풍년들어
과잉되면 나 몰라라~. 농민이야 죽던 말던 걱정이야 있건 말건 시장만 가리키며
손가락질 하는 놈들. 어찌 이들이 농민의 적이 아니고 농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가.
농민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물론 농민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참는 것도
잘 견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어서일까? 그래서 농민이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일어서면 세상이
끝이라고 했던가, 천지개벽이라고 했던가.
말씨도 "그랬시유~ 저랬시유~", "그랬타카니 그놈의 자슥들 주기뿔라."
"뭐시기 요놈들 매운 고추맛을 보여주잔께잉"
"우리 영월농민도 가만이 있을 농민이 아이래요. 한번 붙어 볼끼래요."
"하모, 맞대 맞대이~ 한번 혼을 내 줄끼라."
지역이 다르고 말씨도 달라도 농민들의 마음은 한통속.
네트웍 인터넷이 없어도 소문에 소문으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전국 고추농가의 농민들은 농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네트웍
인터넷이 없어도 소문에 소문으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농민운동 새내기 초보자들. 진도 해남 "풋나락 물감자"라고 한 대명사처럼 불리던 해남
산이면 사람들도 서울 농협중앙회 회장실까지 점거해 담판을 짓고 전량을 제값에 다
팔아먹었는데 농민운동 꽤나 했다는 '까타리 농민회'(가톨릭 농민회)가 잘 된다는
지역에서 체면과 위신이 있지 그대로 있을 수 있을소냐. 각 군 농민회들마다 대책위를
조직 했었다.
고대위(고추대책위원회), 수대위(수세대책위원회), 쌀대위(쌀대책위원회), 골대위
(골프장), 핵대위(핵폐기장), 경대위(경지정리), 뻘대위(김양식), 풍대위(태풍),
냉대위(노풍냉해), 땅대위, 도대위(목도열병), 설대위(스노우대위, 눈피해), 배대위
(배추), 쓰레기대위, 마늘대위, 양파대위, 피대위(피망), 바이킹대위(완도선상투쟁),
대파대위, 통대위(통일벼), 콩대위, 맥대위(맥주맥), 하대위(춘천하우스농가), 땅대위
(고창땅콩), 감대위(오원춘감자씨), 고구마대위, 감대위(제주감귤), 의대위(의료보험통합)
, 젖대위(젖소)......... 등등 수많은 대책위가 많았으나 고대위 계급이 제일 높았다.
그래서 일까 , 전투 역시 무식할 정도로 우직하고 전술도 다양했다.(전경대 말씀)
농민들 투쟁현장은 전경대들도 진압대책이 안 통한다. 큰길 막으면 샛길, 논두렁 길로
빠져 나가기, 원천봉쇄하면 삼삼오오 장보러 빠져나가기, 청소차로 막으면 트렉타로
넘겨불기, 덤프차로 막으면 트렉타 후진기어 넣고 밀어불기, 방패로 막으면 땡겨서
빼앗기, 하이바 벗기기, 시내진압 막으면 기차길로 경운기 끌고 들어가기, 철로 레루에
엔진오일 폐유뿌리기, 멍석깔고 넘어가기, 헌타이어 불태워 굴리기, 전경 연행조 따돌리기
, 논두렁으로 유인하기, 양쪽에서 토끼몰이 하면 물논으로 들어가 뒤제비까기, 순찰차
패트릭카 쫓아오면 권총 빼앗기, 경찰서장 체포령 내리고 특진현상금 붙이기,
교회 미사가기, 부활절 메세지 유인물 나눠주기........
임실에서는 여의도 (이후는 다음에)
첫댓글 무안으로 온지 2달 좀 넘었는데여 깨달은게 있따면 시골에서 사시는 분들 너무 고생하신다는 거에여 서울에서는 잘 몰랐는데 이곳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 중에 안아프신 분이 없더라고요 가슴 아팠어여... 운동은 해본적도 없고 해볼 생각도 못해봤습니다. 작지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불러주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