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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영남 남인 류정원의 관계 진출과 관직 생활
프로파일 류병훈 ・ 2020. 12. 11. 20:39
우인수(禹仁秀, 1958-)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iswo@knu.ac.kr
조장연(趙壯衍, 1968-)의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역학(易學)사상”을 읽고서 전설같은 이야기를 하나 쓴다는 것이 잊어버렸다. 이번 글 우인수의 논문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발견하여 읽으면서, 한 가지 적자.
내가 대학 1학년에 들어와서, 그것도 박정희의 시월유신으로 중간고사를 치지 않고 다음해 대학교가 문 여는 시절이었다. 머리를 깍고 고시 공부하듯이 하루 종일 처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랑방 할배와 지내면서 집에 오시는 손님상을 나르고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주섬주섬 들었지, 고등학교 까지 교과서 이외 책 한권을 다 읽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교가 거의 5개월 쉬는 동안에, 당시에는 교양과정부에 필수과목은 교과서라는 것이 8권정도 있었는데, 전부 노트하면서 통독을 했었다. - 이때 대학 국어교재에는 석주명의 ‘국화논쟁’이 실려 있었다. - 그리고 당시에 집안에 많은 책이 있었는데 이 교과서와 연관 있는 책들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얼어붙은 학교에서 수업은 거의 없고 데모로서 세월을 보냈다. 벗 용원을 만나서 서로 소통하는 시절이었다. 집에서는 사랑방 어른들의 이야기와 연관되는 책들을 서로 이야기 하고, 나대로 책을 완독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배 친구 분이 오셨다. 할배는 내가 고등 1학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사랑방을 묵어가시는 분들이 가끔 있었다. 그러면 밤중에 아버지와 긴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는데, 나는 듣는둥 마는둥 손님 자리 옆에 일찍이 이불을 덮어쓰고 자곤 했다. 보통 하루 지나서 떠나시는데 이 분은 며칠씩 머물곤 하였다. - 아버지 말씀은 예전에 종가에는 이른 분들이 많이 찾아왔고 김삿갓도 한해에 한두 번 찾아오는 손님들 중에 한 분이었다고 하시면서 – 이런 분들을 대접했다. 어머니는 며칠 묵으신 분들의 옷을 빨고 다듬이로 두드리고 다려서 사랑에 보내곤 하셨다. 내가 종가 형수님이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종가 형수님은 종가 형님이 서울 계시다가 집이라고 오면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많은 친구들과 같이 왔다고 했었다. 그 빨래, 사랑방 음식을 종가형수님이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머님 말씀, 참 너무하지, 여름에는 서울 동료와 여인들도 데리고 왔었다고 하셨다. 어머니 시집와서 본 광경이며, 전쟁 전의 일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전쟁 후 이래로, 혼자서 살다가 돌아가신 종가 형수님을 돌아가시기 전에 삼현의 종가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전히 키도 크고 미인이시며, 대청마루에 서서 지붕 너머를 쳐다보시는 그 자세에서, 박경리 토지의 “서희”보다 더 기품 있다고 생각했었다. - 종가 형수님에 대해들은 이야기는 나중에 쓸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표현 써도 되는지 모르지만 과부 아닌 과부로서 반평생을 새아지매(종가 형수님), 참 많이 고생하셨다.
그 이인(異人) 할배는 사랑방보다 따뜻한 향집 마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기억 중에 하나로, 박정희는 18년이면 끝난다고. 나는 철없이, 미국 타임지가 이렇게 검은 색칠해서 들어오는 유신시대이며, 박정희가 나이가 얼만데,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는 박정희는 장개석처럼 총통하면서 죽을 때까지 집권한다고 했었다. 그분은 또 옛날이야기로 숙종 때 참요, 영조 때 황지(노란종이) 등등을 이야기 하셨고, 기나긴 이야기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그때 어머니의 청으로 우리 형제들 호를 지어 주었다. 기어나는 것은, 형이 정암, 동생들은 성암, 면암, 진암 등으로 인데, 왜 나에게 돌림자를 넣지 않았느냐는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 대학가에서는 가명을 쓰는 시절이라, 나도 호라는 이름으로 가명을 쓰고 싶었는데, 하여튼 원곡(元谷)이라는 호[아이디]가 하나 생겼다. - 사실 나는 우리 집에 당시까지 족보가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랜 세월 황지 이래로 과거를 할 수 없어서, 예전에는 양반인줄 모르지만 이미 평민이 되었다고 여겼다. 아버지께서 4대에 걸쳐서 생원 진사도 나오지 않으면 그냥 농사꾼으로 평민으로 생각하여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집안(문중)에도 족보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대학원을 들어가고 나서였으니. 참, - 원곡을 한자로 쓰고 한글의 마ᄉᆞᆯ로 해서 ‘마을 또는 마실’을 몇몇 벗들과 썼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왔을 때, 혼자 사시는 어느 아지매가 점집에 가는데 혼자가기 머쓱하다고 나하고 같이 가자고 했다. 아지매가 점집에서 하는 하소연은 우리 집에서 어머니에게 하는 하소연과 다른, 달리 말하면 깊은 한이 있었다. 내가 좀 놀랐지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왜 어머니에게 못하는 이야기를 아무 연고도 없는 이에게 – 듣기에도 해서 안 될 이야기 같은 – 소상하게 하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 지금 나이면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점장이는 한자를 써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랑방 할배 친구 분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 아지매는 나를 데리고 와서 그냥 일어서기 미안하니까, 나를 한번 봐달고 부탁했다. 물론 복채 한 장을 더 보탰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점장이가 나에게 무엇하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철학 공부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사주팔자 공부하는 것으로 듣지는 않았을 것인데, 생년월일을 보다가, 그는 ‘철학하는데 더 말할 것이 없다’하고 얼버무렸다. 내가 할배 친구 분에게 들은 것이 생각나서 ‘원곡’이라는 호는 어떠냐고 물었다. 대뜸 그 점쟁이는 ‘맏이냐’고 물었다. 아지매는 둘째라고 대답했다. 그 성명작가는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다’면서 철학공부하면 잘 알 것이라고 해서, 없던 일로하고 그는 아지매가 내 밀었던 복채(한 장)를 되돌려주었다. - 다시 돌아가, 할배 친구 분이 나를 보면서, 이제 도학 배워서 명리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했었다. 나는 공자도 세시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사랑방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저는 이제 읽지 못했던 책을 좀 읽고 싶다고 했었다. 대학 일학년 전학기는 산악부에 들어가 거의 원 없이 산속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서울로 대학원에 들어와서,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일 이년 동안 학부 강의를 여러 과목을 청강했다. 대구에서 들을 수 없는 강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명현 선생님 수업에서 강의내용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 철학공부 소질이 있기는 한가? - 기억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있다. 이명현의 과학철학 강의 시간이었을 것인데, 전해에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朴正熙(박정희) 쓰고 – 할배들 이야기로 파자풀이 – 박(朴)자는 열십자 여덟팔에 점복이니 18년만에 점을 치니, 정(正)자는 한일에 그칠지라 한방에 끝난다, 희(熙)자는 그것도 자기 신하에게 총 네 방으로 칠판에 점을 내게 찍었다. 나는 오래전 잊었던 할배 친구를 떠올렸다. 이때는 이미 그 이인(異人)이 - 어머니께서는 할배 안계서도 찾아오시면 정성껏 대접하면서 부르는 이름이라 그분 성함을 모른다 – 안 계시지만, 그제서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즈음 내가 인하대 교수 이인성의 천문학과 책력에 관한 책, 파자풀이 예견서에 등과 남사고에 연관된 책과 이중환의 택리지 등등 천문지리에 관한 번역서들을 읽었던 것 같다. 이런 글을 보다가 당시 나름대로 이런 18년의 이야기는 결과를 원인에 맞춘 ‘사후약방문’ 정도로 느꼈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에 사후약방문과 비슷한 뜻으로, 벩송의 악순환(le cercel vicieux)이 들어있었는데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했었다(참 둔하기도, 뭐가 씌였는지, 몰랐기도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맞붙여 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 후 무려 20년쯤 지나서 프랑스에서 깡길렘의 논문을 읽으면서, 깡길렘이 벩송의 악순환(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을 진짜 잘 설명했고(그로부터 또 몇 년지나 – 철납 24년쯤 스피노자를 읽기 시작하면서 - 윌리엄 제임스의 편지를 읽고서 동양철학이나 서양철학이나 사고의 악순환은 같고, 같잖은 사유에서 시간 연결의 방식에서 다른 계열들이 있다고 느꼈다), 남사고적 사고에 대한 비판과 같은 계열이라는 것을 알고서 다시 떠올렸으니, 이 얼마나 머리가 둔하고 공부에 게으른지, 참 미진한 미물인지 하는 생각이 든다. - 마찬가지로 삼산의 주역에 관한 논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써보자고 했던 것도 잠깐 떠올렸다가 잊어버렸다가 이제 다시 떠올리니... 참 꿈뜨고 어리석고 우둔하다. 평생에 내가 임기응변이 없다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말이다.
참요에 대해서는 언급을 했으니, 이번에는 내가 들었던 황지(黃紙)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다. 황지, 요즘말로 불랙리스트이다. 할배들의 이야기로 항거하는데 선두에 서면 그 분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100년 이상 고생한다고 하였다. 블랙리스트라는 황지가 있기는 있을까? 왕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는 그 누른 종이가 있다한들, 승정원일기든 실록이든 역사를 기록하는 양이 많아지면 뭍혀지고, 게다가 영조의 탕평책이후로 정조 등의 정치적 성향이 바뀌면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까? -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뢰즈의 강조로 벩송의 “물질과 기억”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황지(黃紙), 내가 들었던 누른 종이란, 한지에 그 이름을 적어서 두 번 다시 이런 인간이 나올 수 없게 지워지지도 물에 빨아지지도 않게 기름을 맥여서 보관한다고 해서 누른 종이로 황지라고 사랑방 할배들은 이야기했었다. 그 황지의 정식 명칭이 황첨(黃籤)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이름이 류직(柳㮨)이다. 천여명을 대표(소두)해서 궁궐 앞에서 상소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실록에는 복합 상소 인원이 90명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황지 이야기는 아니지만, 집안은 나를 압력과 더불어 설득시키려했다. 긴급조치로 ‘헌’조차 말도 못하던 살벌했던 유신시대에, 그것도 대구에서 가두시위가 1978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부마항쟁으로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았다. 1948년 이래로, 대구가 말 못하는 사건들과 아직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978년 거센 저항의 의미도 잊혀졌다. 유독 박정희는 대구 경북에 대해 공포스럽게 심하게 다루었다. 서울 와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인혁당 민청 사건에서 서울은 사형에서 무기로 만들어 주면서 대구 경북, 경남은 사형 시켰지 않느냐고들 하면서, 그 인간이 문제다 라고 하였다. 형님이 세상을 뜨고 나서, 그 당시 집안 어른들은 누른 종이 같은 이야기를 나에게 많이도 했었다. 동지 권용원이 둘째에서 맏의 역할을 하도록 놓아주었다. 그리고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갔다.
가끔 나는 왜 서양철학을 했느냐고 묻는 자에게, 중국에 덧 씌워진 2000년을 벗어나고, 일본에 지배받아 심어진 학문으로 독일철학도 싫고, 미국 제국의 영향과 다른 길을 찾으러 프랑스 철학을 선택했다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른 때에는 프랑스 혁명에 도화선이 된 루소를 하고 싶어서 동양철학이든 우리철학이든 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심성이 나약하고 건강한 몸을 갖지 못해서 인지 임기응변이 없어서 현장에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면서 동양철학을 하지 않은 것은 가문의 학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라고도 했다. 동철을 하지 않은 것, 철납 49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여곡절을 겪으며 목숨을 연명하며 소심하고 우둔하게 살아왔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굼뱅이처럼 49년을 나도 모르는 문제거리를 풀려고 무척이나 노력해보려 했었다. 아직은 해답을 찾지 못할 것 같지만, 벩송의 말대로 올바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남아, 벗을 떠나보내고도 지탱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글을 쓰면서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가슴 아리다. 라파르그의 나이가 이 나이였는데 말이다.
- 대간 할배의 서연과 경연에 남긴 글을 얼핏 보면서, 삼산 할배는 첨단 이었던 것 같다. 서양철학을 하면서 천재는 따로 있다고 여기는데, 프랑스에서 파리고등사법 출신이 한해에 한명이 세계철학자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고 있다. 요즘 표현으로 우리나라 한해 50만이 태어나는데 그 중에 1명 있을까 말까 한다는 생각이다. 삼산은 원전의 원문과 집주 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를 줄줄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것은 첨단일 것이다. 내가 벩송을 읽다가 들뢰즈를 읽으면서 앞으로 진도가 나가면 뒤를 잊는데, 누가 물으면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능력에 한숨과 안타까움만이 남기 때문이다. (4:09, 54MLI)(4:28, 54MLII)
Ⅰ. 머리말
Ⅱ. 가계와 학맥
Ⅲ. 출사 초반의 시련과 좌절
Ⅳ. 서연관의 역임과 당상관 승진
Ⅴ. 지방관으로서의 치적
Ⅵ. 맺음말
# 영조대 영남 남인 류정원의 관계 진출과 관직 생활 - 우인수(禹仁秀, 1958-)
Ⅰ. 머리말
영남지역의 남인은 중심인물이었던 갈암 이현일이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화를 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 그리고 영조 초년에 일어난 戊申亂(무신란[영남란])에 영남 남인 일부가 가담한 것으로 인해 영남지역의 남인은 재차 타격을 받게 되었다.
Ⅱ. 가계와 학맥
류정원의 직계는 류복기[유습9대손]– 우잠(友潛) – 숙(橚) – 익휘(益輝) – 상시(相時) – 석귀(錫龜)– 정원[유습 15대손]으로 내려오는 가계이다. 류정원의 직계 선조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배출되지 못하였으나, 방계친족에서는 문과급제자나 생원·진사가 대대마다 끊이지 않고 배출되고 있었다. 종고조인 직(㮨)은 진사로서 효종대에 성혼과 이이의 문묘종사에 반대하여 안동지역 유림상소를 이끈 소두(疏頭)로 활약한 인물이었고,...
당시 전주류씨 가문 전체는 퇴계 이황 학맥의 자장 속에 있었다. 류정원의 6대조인 류복기가 의성김씨가의 외손으로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상태에서 외가의 도움으로 성장하였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외숙인 학봉 김성일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권유로 안동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활약할 때부터 확정되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종고조인 류직(㮨)은 효종대에 성혼과 이이의 문묘종사 논의가 서인 중심으로 일어났을 때 영남의 남인 유생 90명이 서명하여 올린 반대 상소의 소두로 활동한 바 있다.11)
일찍이 류정원은 삶의 모범으로 삼은 인물이 두 명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한 명으로 류승현을 지목한 바 있다. 그는 류승현의 ‘사람을 진정시키는 도량과 담박한 생활을 좋아하는 지조는 옛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경지였으니, 우리가 그분이 남긴 규범을 따른다면 아마 허물이 적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상을 당한 뒤에는 석 달 동안 소식(素食)하였다.10) [본문 속에 없지만, 다른 한 사람은 북송의 사마광이라 한다. 삶의 터전에서 용와, 흐르는 역사의 변역 속에서는 사마광.]
류정원은 퇴계학맥에 속해있던 가문의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다고 하겠다. 평소 퇴계에 대해서는 ‘대현’ ‘노선생’ 으로 칭하면서 평생 우러러보는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시강원 관원으로 있을 때 세자가 공부한 「夙興夜寐箴」에 관심을 표한 영조가 제왕학과 관련지어 질문한 것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도 이황의성학십도를 근거로 삼아 당위성을 확보하였다.15) 그리고 서연관으로서 세자를 신칙할 때도 이황과 그 제자 사이의 일화를 제시함으로써 듣는 세자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들면서 본인 말의 타당성과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였다.16) 그리고 이황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인 도산서원의 원장도 역임한 바 있다.17)
Ⅲ. 출사 초반의 시련과 좌절
첫 관직 승문원: 남태온의 계문으로 좌절로 ... 류정원은 스스로도 자신의 가문에 대해 ‘嶺外微品[영외미품]’, ‘族冷而門微[족냉이문미]’라고 토로한 바 있다.26) [율곡 이이의 어느 글에선가 과거에 합격되면 선참에게 해야 하는 신고식의 폐단이 심했다고 했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라 한턱 쏠 줄 몰랐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族冷而門微[족냉이문미]”이라는 표현이 그러한 것 같다.]
[삼산은] 영조 13년에는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으며, 또한 동방급제한 후 승승장구하던 김성탁이 이현일의 신원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총공세 속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29) / 영남 남인의 중앙정계 진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현일의 증외손이던 이상정도 이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멀어졌으며,30) 류관현도 10년동안 관직에 제수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노론에 의해 영남 남인 배제 시기]
그는 1750년(영조 26) 8월의 도당록(都堂錄)에 권점 다섯 개를 받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 때 총 20명이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권점 여섯 개를 받은 인물이 2명이었고, 나머지 18명은 다섯 개였다. / 조숙과 채제공(蔡濟恭, 1720-1799)도 다섯 개로 함께 이름을 올렸다. 도당록 권점에 참여한 사람은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1690-1752),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1694-1753),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1692-1754), 좌참찬 권적(權𥛚, 1675-1755), 우참찬 원경하(元景夏, 1698-1761), 이조참판 조영국(趙榮國, 1698-1760), 이조참의 윤광의(尹光毅, 1695-미상)였다.32) 도당록에 이름을 올린 것은 전주류씨 수곡파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있는 경사였다.33)
그런데 또 다시 사헌부 관료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일이 일어났다. 사헌부 지평 서해조(徐海朝, 1689-1770)는 두 가지 이유를 들며 류정원을 도당록에서 뺄 것을 주장하였다. ... [서해조는] 당색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으나 노론계에 가까운 논의를 낸 경우가 많은 인물이었다.
Ⅳ. 서연관의 역임과 당상관 승진
류정원은 관직생활에서 필선으로서 서연에 참가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였던 듯 ‘서연강의’와 ‘춘방일록’을 남겨 스스로 기념하고 자부하였다. ... 서연은 세자에게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등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자리였다.
1월 9일은 마침 동짓날이어서 영조로부터 당력(唐曆) 한 권을 하사받았고, 세자로부터 겉장을 꾸민 책력 한 권과 전약(煎藥) 한 그릇을 하사받기도 하였다.53) [동지가 1월 9일이라! 뭔가 책력이 이상하네..]
그러나 대부분 세자는 크게 공부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던 듯하다. 서연관의 강독과 해설에 대해 간단한 대답으로 때워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류정원이 남긴 서연일기에도 세자가 단답형으로 간단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옳다.”, “이 말이 옳다.”, “참으로 옳다.”, “그렇다.”, “진달할 바가 좋다.”, “진달한 바가 참으로 절실하다.”, “진달한 것이 옳고도 간절하니, 유념하지 않겠는가.” 등 의례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 이에 류정원은 “혹시라도 저하께서 체득하는 공부가 아직 미진하여 의심이 생기지 않아 따져 물은 것이 없는지 두렵습니다.”라면서 걱정스러움을 표현한 적도 있었다.57) 논어 를 다 끝낸 날에도 “저하의 학문에 터득함이 있는지 여부는 신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세자의 공부 상태를 걱정하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였다.58) /사실 이즈음 사도세자는 이미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로부터 몇 달 뒤 기사에는 “요즘 세자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다.”라고 대신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59) 이미 치료가 필요한 단계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내가 정신분석학을 보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정신분석학의 사례를 만든다면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일부의 기록이 삼산에게도 있다. (54MLH)]
[영조는] 또 영남인은 이황(李滉, 1502-1571)과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존숭하는가를 하문하였고, 류정원은 두 사람 모두 존숭한다고 대답하였다.61) 영조가 류정원과 영남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과 관심을 피력한 것이었다.
며칠 전 영조는 경연에서 여러 조신들과 학문을 토론할 때 서로 의견이 상충하여 해결하지 못한 의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컨대 역경을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복희(伏羲)는 단지 8괘만 그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8괘를 겹쳐 그린 것도 역시 복희가 그렸다.” 하였으며, 시경 「관저」편을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잠 못 이루어 뒤척이고, 가까이 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궁인(宮人)이 스스로 한 말이다.” 하고 어떤 사람은 “궁인이 문왕의 일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며, ‘꿈속에 지각이 있는가’에 대해 논하면서 어떤 사람은 있다하고 어떤 사람은 없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지각(知覺)을 체(體)와 용(用)으로 나누어 말한 사람도 있었다./ .. / 마지막에는 “그대는 어찌하여 옥당의 일을 맡지 않는가? 춘방에 두어 이렇게 만나보니 구차스럽다. 내가 나이 들고 늙어 잠이 없어서 유신(儒臣)에게 문의(文義)를 강설하게 하여 듣고자 하니, 그대는 옥당(玉堂)에서 일하도록 하라.”라고 까지 하면서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사실 세자시강원보다 홍문관에 두어 가까이 하고 싶다는 영조의 이 말은 류정원의 실력을 칭찬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토록 훌륭한 실력을 가진 최고 능력자라면 자식 교육을 계속해서 맡기는 것이 보통 아버지의 바람일진데, 이미 약간 틀어진 부자관계의 일면이 내비친 것 같기도 하다. [엉뚱하게도 지각의 체와 용을 스피노자의 신체에서 감동과 감응으로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 벩송이 말하듯이 사고가 아니라 깊이 사유하는 철학자들 사이에는 공통적인 면이 있다. 용어가 다를 뿐이지. (54MLI)]
... 사실 당시 세자는 이미 이런 정도의 충언으로 해결될 상태가 아니었지만,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때 서연관을 지낸 사람으로서 모른 체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생을 마무리하는 즈음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세자를 위한 마지막 충심을 올렸다.69)
신은 진실로 감히 言責을 자임할 수 없으나, 오직 걱정하고 아끼는 구구한 심정에 스스로 마지 못하는 것이 있기에 이에 감히 피력하고 덧붙여 아뢰니, 삼가 저하께서 굽어 살피소서. …… 예로부터 허물이 있으면 뉘우칠 줄 아는 자는 많으나 끝내 허물을 고치는 자는 드물었으니, 실로 인심은 지극히 위태하여 들어왔다가도 금방 나가고, 선(善)의 단서는 지키기 어려워 이어졌다가도 문득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뉘우치고 고친다’고 하지만,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앞뒤로 가리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구차하게 꾸미고 전과 다름없이 해이해지는 자가 있습니다. ……
저하께서 지난번에 신료들의 면계(勉戒)에 답하면서 으레 깊이 유념하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뒤를 고찰해 보면 일찍이 한 가지 일이라도 펴거나 시행하여 행동에 이른 것이 없었으니, 이는 ‘깊이 유념하겠다’는 글자가 단지 응답하는 좋은 제목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소를 올리고 삼산은 세상을 떴으며, 사도세자는 다음해 참혹한 생을 마감한다. - 이 소로 인하여 나중에 채제공은 사도세자 신원의 만인소를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 이런 이야도 들은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
Ⅴ. 지방관으로서의 치적
류정원은 세 차례에 걸쳐 지방 수령을 역임하였다. 자인현감 약 2년 반, 통천군수 약 1년, 춘천현감 약 반년으로 도합 4년 정도 지방관으로 재임하였다.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선정의 사례로 인용된 것이 무려 12회에 이른다.우리나라 관료 중에서는 저자인 정약용 본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인용된 인물이다. 그 다음으로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이 10회,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정언황(丁彦璜, 1597-1672)이 각 9회, 이익(李瀷, 1579-1624) 8회, 민여검(閔汝儉, 1564-1627) 7회, 이이 6회, 류중영·남구만·안정복이 각 5회 인용되고 있다.77) [이이, 동명이인이 있어서 율곡인가?]
Ⅵ. 맺음말
류정원을 통해 영남이라는 지방에 거주하는 크게 현달하지 않은 가문 출신의 남인이 관계 진출 과정에서 겪은 견제와 시련, 그리고 관직 생활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남인 차별, 지방 차별, 가문 차별의 삼중고 속에서 영남의 한 관료가 겪은 구체적인 모습을 살핀 것이다. 여기서 보인 모습은 류정원 개인의 한 특수한 사례가 아니고 당시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이 겪었던 일반적인 모습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그가 보인 능력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당상관에 올랐으니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거기까지도 도달하지 못하고 끝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류정원에 대한 본 연구는 영남 남인 계열의 한 출중한 인물을 한국사학계에 소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아울러 영조대 탕평정국과 벌열정치 하에서 지방인 영남지역의 비집권세력인 남인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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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 가계
1500 류윤선(柳潤善. 1500-1557), 전주류씨 수곡파(全州柳氏 水谷派, 무실)의 파시조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은 전주류씨 시조 장령공 류습(柳濕)의 7세손이다. 제학공( ...
1533 류성(柳城, 1533-1560): 전주류씨의 시조 류습(柳濕)의 8세손 류성(柳城, 1533-1560)이 1550년경 안동 무실(현 임동면 수곡리)에 정착.
1555 류복기(柳復起, 1555-1617) 무실, 자는 성서(聖瑞), 호는 기봉(岐峯). [족보상으로 습(濕)을 1대로 치면] 임란의 의병장은 유습의 9세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로 이어질 것이다. 류우잠(柳友潛), 류득잠(柳得潛), 류지잠(柳知潛), 류수잠(柳守潛), 류의잠(柳宜潛), 류희잠(柳希潛) 등 6형제를 두었다. 이들의 후손이 임동면 수곡리를 근거지로 임동면 박곡리·마령리·고천리와 예안면 삼산리 등지에 취락을 이루고 세거하게 되면서부터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이어졌다. / 첫째 1592년 음력 6월 1일에 안동에서 가장 빨리 배용길(裵龍吉), 김용(金湧), 류복기(柳復起)는 거의(擧義)할 것을 공모(共謀)하고, 곽재우와 협력하여 진주성에서 싸우다.
1602 백졸암 류직(柳稷, 1602-1662), 자(字)는 정견(庭堅), 호는 백졸암(百拙菴), 기봉의 손자. 전주 류씨 수곡파 11세 류 직(柳 직) / 인조11년(1635)황해도 유생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문묘에 배향하려는 논의를 일으키자, 일부 조신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함께 배향하기를 소청하였는데 효종 초에 성균관에서 또한 거기에 찬동함에 내외가 호용하여 선비의 여론이 모아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남선비들이 이를 반대하여 상소를 올릴 때 공을 영수(領袖)로 추대하므로 천여명의 선비를 거느려 예궐하여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저지시켰기 때문에 반대편의 미움을 사게 되어 공은 황첨(黃籤)에 붙여서 유적(儒籍)에서 빠지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잃게 되자 향리에 서채를 지어 백졸암이라고 하고 학문에 전심(專心)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바쳤다.
1666 류경시(柳敬時, 1666-1737) 본관: 전주(全州) 자: 흠약(欽若) 호: 함벽당(涵碧堂), 삼산의 三從祖. 『함벽당 선생 문집』
1673 류석구/귀(柳錫龜, 1673~1737) 삼산의 부친 참판공
1680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삼산의 재종숙부. 용와의 문하에 들어가다.
1692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삼산의 재종숙부.
1703 유정원(柳正源[1703(숙종 29)~1761(영조 37)] 그리고 삼산문중의 삼산 유정원은 유습의 15세손이다. [나, 삼산의 9대손이니 유습(柳濕)의 24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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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 이언적(李彦迪, 1491-1553) 본관은 여주(驪州)(혹은 여강(驪江)),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성리학자,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02 이황(李滉, 1502-1571)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1535 성혼(成渾, 1535-1598)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조선 좌찬성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1537 이이(李珥, 1537/1536-1584)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1538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주리론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다. 진주성에서 병사.
1542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43 정구(鄭逑, 1543-1620) 삼산은 풍계서원(楓溪書院)의 중수를 기획하였다. 풍계서원은 통천군의 풍계리(楓溪里)에 있는 서원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위패를 배향한 공간이다.
1547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564 민여검(閔汝儉, 1564-1627)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 또는 운곡(雲谷). 승문원정자, 전적, 곽산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1579 이익(李瀷, 1579-1624)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옥포(玉浦). 조선시대 지평, 장령, 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1595 조극선(趙克善, 1595-165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제(有諸), 호는 야곡(冶谷). 조선후기 사헌부지평, 선공감첨정,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1597 정언황(丁彦璜, 1597-1672)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휘(仲徽) 또는 위수(渭叟), 호는 묵공옹(默拱翁). 조선후기 제주목사, 우부승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1627 이현일(李玄逸, 1627-1704) 갈암, 조선후기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두로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산림(山林).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대하였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가 1699년 방귀전리되었고, 죽을 때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저서『갈암집』편서『홍범연의』. / 이현일의 문인록에 전주류씨로는 류하시·류맹휘·류경휘·류두휘·류경시·류석두·류승현·류관현 등이 등재.
1675 권적(權𥛚, 1675-1755) 조선후기 판서, 판의금부사, 우빈객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남애(南厓)·계형(繼亨).
1676 김정윤(金廷潤, 1676-미상)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중(君重). 조선후기 헌납,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1679 권상일(權相一, 1679-175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菴里)에서 출생 대사간,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1680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삼산의 재종 숙부. 삼산이 용와의 문하에 들어가다. 삼산이 사표로 삼다.
1682 김재로(金在魯, 1682-1759)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 또는 허주자(虛舟子). 조선후기 병조판서, 판중추부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684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 스승 이현일의 신원을 청하다가 유배가다. / 삼산과 동방급제
1684 정희신(丁喜愼, 1684년(숙종 10)~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사구(士瞿)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마도 근기남인. 삼산의 둘째 도당에 오르도록 상소 는데
1689 서해조(徐海朝. 1689-177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산(連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구구재(九九齋). 삼산의 도당에 오름을 좌절시킴.
1690 조현명(趙顯命, 1690-1752)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녹옹(鹿翁)이다. 좌의정 조문명의 동생이다. 영조 때 영의정. 소론이었지만, 영조를 보호했으며, 노론 대신들과도 원만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1691 남태온(南泰溫, 1691-1775)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화(稚和). 조선후기 오위도총부부총관, 안변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북인 가문
1691 박문수(朴文秀, 1691-1756) 조선 후기의 문신, 호조판서. 자(字)는 성보(成甫)이고 아호(雅號)는 기은(耆隱)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어사 박문수이다. 그가 영조에게 삼산의 억울함을 직보하였다고 한다.
1692 정우량(鄭羽良, 1692-1754) 조선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휘(子翬), 호는 학남(鶴南)이다.
1692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삼산의 재종숙.
1694 정옥(鄭玉, 1894-1760)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좌승지,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1694 김약로(金若魯, 1694-1753) 조선의 문신. 본관은 청풍. 자는 이민(而敏, 而民), 호는 만휴암(晩休庵). 노론의 핵심 거두였다.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영의정 김상로의 형이다.
1695 윤광의(尹光毅, 1695-미상) 조선후기 대사간, 이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홍(士弘).
1698 이천보(李天輔, 1698-176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 조선후기 병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698 원경하(元景夏, 1698-1761) 조선후기 예문관제학, 청풍부사,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비와(肥窩).
1698 조영국(趙榮國, 1698-1760) 조선후기 강화부유수, 예조판서, 수어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1701 학음(鶴陰) 김경필(金景泌, 1701-1748) 삼산과 동방급제
1702 김상로(金尙魯, 1702-)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 또는 만하(晩霞). 조선후기 병조판서, 예조참판,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703 柳正源[1703(숙종 29)~1761(영조 37), 첫 관직 승문원: 남태온의 계문으로 좌절]
1703 신만(申晩, 1703-1765) 조선의 문신. 자는 여성(汝成)·성백(成伯), 시호는 효정(孝正),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영조 조에 영의정(정1품)에 이르렀다. 사도세자 폐세자를 주장한 정승이며, 김상로, 김재로, 홍봉한, 유척기, 김상복, 한익모, 신회, 김치인 등과 노론 탕평당 세력 중에 한 명이었다.
1708 이이장(李彛章, 1708-1764) 조선후기 부승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군칙(君則), 호는 수남(水南). 동래부사,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1711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퇴계 문인. 삼산과 함께 동방급제
1711 민백상(閔百祥, 1711-1761)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이지(履之),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본관은 여흥이다. 우의정.
1720 채제공(蔡濟恭, 1720-1799)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조선후기 강화유수,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721 원인손(元仁孫, 1721-1774)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靜). 조선후기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724 홍명한(洪名漢, 1724-1774)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평(君平). 조선후기 형조참판, 도승지,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1727 조숙(趙肅, 1727-?) 삼산이 통천군수 보임시에 조숙은 흡곡 현령에 보임. 호는 계온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계창(季昌)’(1727-졸 미정)이라 한다. 기록상으로 계창도 영조의 패찰을 어겼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인물일 것 같다.
1777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 삼산의 역해참고 서문쓰다.
**연구자
1946 정만조(鄭萬祚, 1946-), 서울대학석박. 국민대 국사학 교수, 「조선후기 전주류씨 수곡파의 문화사적 의의」(전주류씨 수곡파 자료로 본 조선후기양반가의 생활상, 한국국학진흥원, 2004).
1960 권오영(權五榮, 1960-),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최한기 전공?, <[미등재], 1994>, 「전주류씨 수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전주류씨 수곡파 자료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 2004);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 무실 마을 –문헌의 향기로 남다-(예문서원, 2008);
1969 주광호(朱光鎬, 1969-) 고려대 학석사. 동덕여대 부교수, <주희 태극관 연구: <태극도설해>를 중심으로, 北京大學, 2005, 朱伯崑.> 「柳正源 易解參攷의 성리학적 해석 특징과 의리역학(2014)」, 동양철학 42(한국동양철학회, 2014).
1969 류영수(柳榮洙, 1969-) 경북대 한문학과, 「전주류씨 수곡파 가학의 형성과 전개」(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1982 김지은(金知恩, 1982), 경북대 학석박, <19세기 定齋 柳致明의 현실인식과 경세론, 경북대, 2017. 우인수>
안유정(s.d.), 「18·19세기 동성마을의 형성과정 –안동 전주류씨 삼산마을의 경우-」(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12:30, 54MLI)(13:28, 54MLII)
# 참조 1: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성학십도』[1568년 경연에서 유학 강의를 한 것이다, 1681년 출간되었다]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
조선전기 학자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송나라 진백(陳栢, ?-?)의 「숙흥야매잠」을 분장하고 해석하여 1568년에 간행한 주석서.
이 책은 『노소재시강록(盧穌齋侍講錄)』과 함께 저자가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지은 것이다. 책을 처음 완성한 것은 1554년(명종 9)경으로 그 초본을 이황(李滉)과 김인후(金麟厚)에게 보내 질정을 청하였고, 1560년에 다시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의견 교환을 통해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완성한 것이다. 그 뒤 1568년(선조 1) 저자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상소문과 함께 올렸던 것을 왕명에 의해 교서관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간행본은 없어지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1634년(인조 12) 승려인 두섬(杜暹)이 사재로 옥천암(玉泉庵)에서 중간하였다. 다시 1746년(영조 22) 왕명에 의해 황경원(黃景源)이 쓴 영조의 어제 서문과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가운데 제10도인 「숙흥야매잠도」를 첨부하여 세 번째로 간행하였다.
- 내용
‘숙흥야매(夙興夜寐)’라는 말은 『시경』 소아(小雅) 소완편(小宛篇)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진백의 잠(箴)은 그 구절을 인용해 아침에 닭이 울어 일어날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부지런히 힘써야 할 일과 마음가짐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진백의 이 잠은 성리학에 있어서 내적인 인간 수양을 염두에 두고 이룩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심학(心學)의 입장에서 전체 26구절을 8장으로 나누고, 각 장마다 먼저 훈고(訓詁)를 곁들인 주석을 달고, 다시 그 장의 주요한 의미를 해설하고 있다. 저자는 이 잠을 일관하는 요체를 ‘한결같음(一)’으로 파악하고, 주돈이(周敦頤)의 『통서』 성가학장(聖可學章)의 일(一)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 저술보다 약간 뒤에 이루어진 이황의 주저인 『성학십도』의 「숙흥야매잠도」는 이 책과 약간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이 책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뒤에 장복추(張福樞)가 이 두 책을 참조해 『숙흥야매잠집』을 저술하였다.
## 참조2: 안동 세거 전주유씨문중
안동 지역의 전주류씨는 무실류씨로도 불리며 전주류씨의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공의 7세손 류윤선(柳潤善)공이 한양에서 분가하여 영주에서 거주하다가 공의 아들인 류성(柳城, 1533~1560) 공이 청계 김진 공의 사위가 되어 안동 무실에 정착하고 후손들이 크게 문호를 넓혀 세거해 온 가문이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의 대가가 배출되고 행실과 문학으로 이름 있는 선비가 끊이지 않아 이 지역의 손꼽히는 명문으로 성장하여, 문과 출신이 10여명, 생원·진사가 30여명, 문집 출간이 100여명에 이른다.
나주목사를 지낸 류정휘(柳挺輝), 경주부윤을 지낸 괴애(乖厓) 류지(柳榰), 청백리에 오른 함벽당(涵碧堂) 류경시(柳敬時), 이인좌의 난에 안동의병장 공조참의에 오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 대사헌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 1702~1761) 형조참의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의정부사록 류지원 병조참판 류치명 사헌부장령 류치호등은 밝은 치적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백졸암(百拙庵) 류직(柳稷, 1602-1662),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대야(大埜) 류건휴(柳健休), 노애(蘆厓) 류도원(柳道原),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 1773-1827), 수정재(守靜齋) 류정문(柳鼎文) 등은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또 『상변통고(常變通攷)』 22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과 50여 권의 문집을 남긴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은 영남 유학의 거봉으로 퇴계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류시연(柳時淵, 1782-1914), 개화기 선구자로 협동학교를 창설하고 신교육과 사회 개혁에 매진하면서 자주적 민족사관으로 저술한 새로운 역사책 『대동사(大東史)』 10권을 남긴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의거의 주역이었던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구국 활동에 생애를 바친 단주(旦洲) 류림(柳林) 등 근대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다.
<<이 글을 수정하다가, 백기완 선생의 노재 행렬이 대학로에서 종로로 가고 있다고 하면서 광화문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수정하다가 접어두고 광화문으로 나갔더니, 종로 교보쪽에서 ‘노나네기 세상’ 큰 걸개그림과 만장이 네거리를 돌아서 시청 쪽으로 가고, 그 뒤에 운동단체들의 깃발이 따르고 있었다. 그 깃발 뒤에 행열이 있을 것으로 기다렸는데 깃발 뒤에 행열은 없었다. 시청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풍물패, 탈춤패, 노나메기 세상, 상여, 유족, 만장의 순으로 입장하였다. 외곽에는 각 단체의 깃발이 나부낀다. 그 중에서 붉은 깃발은 노동당, 노동해방, 사회변혁 노동자당, 데모당 전국 사무금융서비스 노동조합의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노래로 시작하여, 약력소개, 부축을 받고 올라온 문정현 신부님은 4.9제에서처럼 가슴저미는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또는 세상을 박차고 나갈 함성처럼 연설하듯이 추도사를 했다. 그 중에 87킬로 체중의 백선생님이 안기부(보안사?)에 끌려가 고문받고 나올 때 37킬로가 되었을 때를 상기하셨다. 굴하지 않고 항상 노동자들 곁에 있었고 그 자리 옆에 문규현이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어제 강의에서 이제 세상은 우리말로 우리글로 새로운 창안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했었다. 나로서는 앞으로도 30년 이후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코로나로 상위 7개국에서 우리가 배울 것보다 우리가 창안할 것이 더 많다는 시대이라는 것이다. 탈식민지의 시대가 자주와 자치에 올것이라고 했는데, 코로나가 매끈한 면을 만들면서 우리가 균열과 탈주선을 먼저 만들 것 같았다. 우리가 미국의 하수인 일본으로 배워야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창안하고 개념을 생성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다.
그 우리라는 노력에서 훈민정음 이래로 심층으로 침잠해 있다가, 주시경이래로 북의 김두봉, 남의 최현배를 거쳤다. 그리고 실록을 번역하고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을 완역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할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는 세대에 이오덕, 권정생, 백기완이 있고 더불어 윤구병이 있다고 여긴다. 우리가 우리되기 하는 것도 같잖은 되기이며, 새로운 창안일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문정현 신부는 우리말쓰기에 백기완선생님이 있다고 쩌렁쩌렁하게 말씀하셨다. (54MLI)
첫댓글 문규현 신부님의 하늘을 울리는 목소리로, 백기완 선생님의 우리말 쓰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든지, - 우리나라 자장가가 세계에서 가장 생태와 맞는 자장가라는 이야기듣지, 포르투칼의 관점에서 스피노자를 읽는 브라질학자에서 탈식민지가 표면위로 질주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소련의 우리나라 백신에 글고 일본이 주사기에 신뢰를 보낸다는 점에서. -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하자는 윤구병의 구호: 평화통일영세중립코리아, 이 말이 코로나로 바뀐 세계에서 생태문화를 지닌 우리가 매끄러운 공간을 소걸음으로 또는 질주 탈주처럼 달릴 것 같은 감응이 심층에서 솟아난다. - 파리 8대학이 탈식민지를 주제삼았던 것은 1990(?)년 벩송과 정치로 박사학위한 슐레즈 교수였는데 들뢰즈가 그때 함께 했었다. 철납19년 시절에 철없어서 몰랐는데, 30년이 지난 철납49년에 감동의 결이 인다. 즉 벩송의 공감과 들뢰즈의 공명이 감화로 퍼져 온결을 넓혀 가는 것 같다.(54M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