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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재혼인 어머니는 전(前) 엘라 반 힘스트라 남작부인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귀족이었다. 그녀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스코트랜드 메리 여왕의 남편이며 보스웰 공작인 제임스 헵번의 후손이다. 영화배우 캐서린 헵번과도 먼 친척인 셈이다. 아무튼 아버지는 영국의 한 보험회사 일을 하고있어서 브뤼셀과 영국, 네덜란드 지역을 옮겨다녔다. 1935년 양친이 이혼하고 부친은 가족을 떠났다.
헵번에게는 평생에 있어 가장 상처가 된 일이었지만, 후일 그를 찾아내어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줬다. 1939년 어머니는 헵번과 이복형제 둘을 데리고 외할아버지의 고향인 네덜란드 안헴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는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은 네덜란드를 삼켰다. 1939년부터 헵번은 안헴 컨서버토리에서 정식 학교교육과 함께 발레를 배웠다. 1944년이 되자 그녀는 숙련된 발레리나가 됐고, 네덜란드 저항군들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비밀리에 무대에 서기도 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생활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안헴 지역은 연합군의 마켓가든 작전으로 파괴되어갔다. 1944년 겨울이 되자 독일은 배급물자까지 징발에 나섰고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들로 넘쳤다. 헵번의 삼촌과 외사촌은 레지스탕스 활동 혐의로 헵번이 보는 앞에서 총살됐다. 의붓오빠도 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영양부족으로 인해 헵번은 빈혈과 호흡기 장애, 부종 등에 시달렸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소녀 헵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후일 그녀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봉사활동에 몸 바친 것도 이런 아픈 경험이 큰 자극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발레와 연기공부를 병행했다. 1948년 런던으로 가 훗날 영국 발레에 큰 영향을 끼친 마리 램버트와 함께 댄싱 교습을 받으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녀와 함께 패션사진 모델 일을 했는데, 뛰어난 미모로 인해 큰 인기를 얻었다. 헵번은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정해야 했다. 랩버트는 그녀가 발레리나로 대성할 것이라고 격려했지만, 헵번은 영양실조로 인해 크고 깡마른 체격으로 인해 연기 쪽으로 승부를 걸겠다고 결심했다.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엑스트라 일이라도 얻기 위해 영화사의 캐스팅 사무실을 두드렸다.
몇 편의 영화에 작은 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한 그녀는 1951년작 '몬테 칼로 베이비(Monte Carlo Baby)'에서 비교적 큰 역할을 맡았고,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주역으로 발탁되어 6개월동안 219회의 공연을 치렀다. 이 데뷔 공연으로 그녀는 씨어터 월드 상을 받았다.
그녀가 최초로 영화에서 주요역을 맡은 것은 1952년 'Secret People'. 그녀는 이 영화에서 천재 발레리나 역을 잘 소화해냈다. 그런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로마의 휴일'에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다. 프로듀서측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원했고, 와일러 감독은 진 시몬즈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감독은 스크린 테스트에서 헵번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 위엄있고 절제된 공주 연기를 마치고 감독이 '컷'을 외쳤지만, 카메라맨의 실수로 촬영기는 계속 돌고 있었다. 필름 속에는 쾌할하게 감독과 재잘거리는 헵번의 생기넘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확인한 와일러 감독은 '헵번은 매력적이고 천진하며 재능을 두루 갖췄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여배우다'라고 흥분했다.
영화촬영이 끝나자 상대역 그레고리 펙은 그녀가 아카데미상을 탈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타이틀 위에 올리는 것이 좋을거라고 프로듀서측에 권했다. 애초에 게리 그란트를 염두에 두고 대본이 작업되었으나, 헵번이 사랑을 느끼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사했었다.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게리 그란트가 지배하던 코메디 영화출연을 노리고 있던 그레고리 펙은 고작 새파란 여배우를 받쳐주는 역할 때문에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의 공주가 공식 외국순방에 나섰다. 그러나, 타이트하고 의례적인 일정에 싫증이 나버린 그녀는 혼자 살짜기 로마 거리 탐험에 나섰다가 의사가 처방해준 수면제의 효과로 거리에서 잠이 들어버린다. 그녀를 우연히 발견하고 집을 나온 철없는 처녀겠거니 생각한 미국인 기자와 상큼한 로맨스를 쌓아가는 천진난만한 공주 역을 맡은 헵번의 모습에 전세계 영화팬들은 홀라당 반하고 말았다. 영화 속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과 숏커트 머리는 전세계적인 유행이 되어 번졌고, 헵번은 타임지 표지에까지 얼굴이 실리게 되었다. 2008년 AFI(American Film Institute)는 '미국영화 탑 10' 중 '로마의 휴일'을 4위에 선정했다.
파라마운드 사는 그녀에게 7편의 영화 출연과 영화촬영 사이에 각 1년간의 무대공연을 위한 시간을 보장하는 후한 계약을 제시한 것은 물론, 헵번이 영화 속에서 사용한 의상과 모든 소품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그녀는 제임스 핸슨과 약혼중이었으나, 결혼계획은 곧 취소되었다.
이듬해 험프리 보가트, 윌리엄 홀덴과 '사브리나'를 찍었는데, 의상을 준비시키기 위해 영화사는 그녀를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에게 보냈다. '헵번'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방시는 '캐서린 헵번'이 오겠거니 했지만, 자신의 패션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그녀에게 홀딱 반해버렸고,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았지만, 헵번은 대부분의 의상을 지방시의 디자인 컬렉션 중에서 골랐다. 이후 그녀는 최고의 여배우 뿐 아니라 막강한 패션 리더로 우뚝 서게된 계기가 되었다.
원래 험프리 보가트 역에 게리 그란트가 물망에 올랐지만, 윌리엄 홀덴이 그와의 공연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험프리 보가트는 출연료로 30만 달러, 홀덴은 15만 달러, 헵번은 고작 1만5천 달러를 받았다. '사브리나' 촬영 도중 그녀는 기혼자였던 윌리엄 홀덴과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갖기를 열렬히 원했지만, 홀덴이 이미 정관수술을 받은 사실을 알고는 관계를 끊었다. 1954년 헵번은 무대로 돌아와 '온딘(Ondine)'에서 공연한 멜 화라와 그해 말 결혼했다. 그녀는 이 연극으로 그해 토니상을 받았는데, 아카데미상과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같은 해에 받은 세번 째 여배우가 되었다.
1959년의 '파계'에서 그녀는 사랑에 상처입고 귀의한 수녀의 역을 맡았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교에 헌신한, 정갈한 수녀의 이미지는 그녀의 기품이 넘치고 성스럽기까지한 용모와 잘 들어맞는 캐릭터였다. 그녀 스스로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영화가 되었고, '그녀를 배우로서보다 소녀적 여성으로서의 상징성에 주목하던 관객을 침묵하게 만든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는 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미국영화의 아이콘으로까지 끌어올린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과 지방시가 디자인한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의상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2006년, 이 영화를 위해 디자인된 그녀의 의상 세 벌 중 한벌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예상가의 7배나 되는 94만 7천 달러에 낙찰됐다.
내성적인 성격의 스스로에게 '가장 도전적인 역할'이라고 평가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를 불러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은 헨리 맨시니에게 주제가상까지 거푸 안겼다. 원래 영화사 측에서는 이 노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빼버리기를 원했다. 애초 상대역으로 조지 페퍼드 대신 스티브 맥퀸이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다른 영화 계약에 묶여 불발됐다. 우리같은 영화팬들로서는 젊은 스티브 맥퀸의 확장된 필모그래피를 놓친 셈이다.
1964년 게리 그란트(그는 애초 '로마의 휴일'과 '사브리나' 출연을 거절한 적이 있다)와 '샤레이드'를 찍은 후, 이듬해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했다. 헐리우드는 '마이 페어 레이디'를 두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가장 기대되는 영화라며 기대에 들떴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역할을 맡았던 줄리 앤드류스 대신 캐스팅된 헵번은 처음에는 이 역이 별로 내키지 않아 줄리 앤드류스에게 줘버리라고 했다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이 역을 탐내고 있다는 말에 출연을 결심했다. 줄리 앤드류스는 '메리 포핀스'에 출연해 이듬해 이 영화와 함께 개봉됐다.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헵번은 직접 노래를 불렀으나 나중에 모든 노래가 더빙된 것을 알고는 세트장을 뛰쳐나왔다가 다음날 돌아와 자신의 경솔한 행동에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의 노래가 녹음된 촬영본이 남아있어 일부 다큐멘터리와 DVD 부록에 수록되고 있다. 노래의 더빙문제를 떠나 헵번의 연기에 수많은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는데, 이듬해 아카데미상에서 '메리 포핀스'의 줄리 앤드류스가 후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헵번이 빠진 것을 놓고 큰 논란이 일었다. 결국 줄리는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1967년의 '어두워질 때까지'는 헵번이 아주 어려운 시기에 찍었다. 프로듀서로 나선 멜 화라와 이혼 직전에 촬영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스트레스로 8킬로나 빠져가면서 살해위기에 처한 눈먼 여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원래 그녀는 1952년에 약혼을 했었다. 서로 첫눈에 반한 제임스 핸슨이라는 사람과 결혼식에 쓸 드레스를 맞추고 날짜를 잡는 과정에서 헵번의 바쁜 일정이 장애물이 되어 결혼이 무산되었다. 이후 그레고리 펙이 주최한 파티에서 멜 화라를 만났고, 그가 연극 '온딘'의 대본을 보내면서 관계가 시작됐다. 1954년초에 결혼한 둘은,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가십들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1959년 존 휴스턴 감독, 버트 랭카스터 출연의 '언포기븐(The Unforgiven)' 촬영중 낙마사고로 등을 다친 후유증으로 두번 째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1969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 후 두번 째 아들 '루카'를 가졌을 때는 그간의 잦은 유산을 우려해 아예 일을 접고 몇 개월을 쉬었다.
멜 화라와의 첫번째 결혼생활은 14년을 지속했다. 1968년 멜 화라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이 도는 한편, 헵번은 '언제나 둘이서(Two For the Road)'에서 공연한 연하의 알버트 피니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다. 1968년 이혼후 그리스 유적으로 크루즈 여행중 그녀는 이탈리아인 안드레아 도티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후일 남편이 젊은 여자들과 바람이 났지만, 아이들을 위해 1982년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멜 화라와는 이혼후 모든 접촉을 끊었지만, 도티와는 죽을 때까지 연락을 이어나갔다.
마지막 영화 출연 후 그녀는 유니세프(국제아동기금)의 친선대사를 맡아 고통받고 굶주리는 전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하고 스위스로 돌아온 헵번은 복부통증을 느꼈고 LA여행중 다시 검사를 받았다. 복강경 검사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수술을 했지만, 곧 장폐색이 왔고 2차 수술에 들어갔지만 암이 너무 빨리 퍼져버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디자이너 지방시는 그녀를 위해 꽃을 가득 채운 자가용 제트비행기를 동원해 스위스 자택으로 그녀를 옮겼다. 이듬해 1월 20일 헵번은 6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고, 스위스에 묻혔다. '로마의 휴일'을 비롯해 고작 스무편 남짓한 소규모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세계 영화팬들로부터 가장 기억에 남는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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