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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지난해 가을 카이스트의 어떤 교수로부터 물리학적인 내용의 강의를 듣고, 잠시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물리학이라야 고등학교 때 기초적인 것 정도. 대학에서 이론 물리학 한 학기
배웠지만, 무슨 수리 공식만 몇 개 외우고 말았던 기억이 있을 뿐, 구체적 개념은 별무였다. 그런데 그 교수는
마치 공상 영화를 보듯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준다. 이를 테면 이러하다.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원자개념이다. 원자가 만일 한 알의 사과정도 크기라면, 전자는 얼마큼 떨어져
그 주위를 돌까. 10km정도나 된단다. 하면, 그 사이는 텅 비워져있는 공간이니, 우리 몸도 대부분을
빈공간이 차지하는 것 아닌가. 아니, 모든 물질이 실상 다 공(空)으로 채워진 것 아닌가.
우리의 시력이 원자를 볼 정도로(?) 아주 섬세한 시력을 가졌다고 치면, 움직이는 생물체의 조직은
물론 거대한 규모의 이 세상은 얼마나 신비롭게 보이겠나. 그런 상상이 들었다. 또 원자핵 둘레를 도는
전자의 성질에 대해서다. 전자가 입자이며, 파장이기도 하다는 소리는 대충 배워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게 동시적으로 그런 성질을 띠는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 전자는 파장이나 입자의 성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다. 곧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입자를 선택하고, 보지 않으면 언제나 파동을
선택한다는 것이 오래 전에 연구로 밝혀졌단다. 다시 말해, 관찰자가 없으면 전자는 잠재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누군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실재하는 세상에 입자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해서 많은 물리학자들은 모든 사물이 우리가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로 변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단다. 흥미롭지 않은가. 현실이 현실인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거나 보는
바에 따라, 그러니까 이리 보면 이게 현실이고, 저리 보면 저게 현실이 되는 거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좀 더 유추해 보면,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 의식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일반의 철학적 성찰이 양자 물리학의 소견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마이클 탤보트의
<홀로그램 우주>를 보면, 물리학자 닉 허버트는 자기 뒤의 사물들은 “형체 없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양자 스프”로 존재하다가, 재빨리 고개 돌려 쳐다보면, 순식간에 아무 이상 없는 물리적 실체로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실의 물리 세계에 대한 양자 물리학적 이해다.
놀라운 일은 또 있다. 물리학자들은 아(亞)원자 미립자 하나를 둘로 쪼개면, 절반짜리 미립자 두 개가 서로
반대쪽으로, 야구공처럼 돌면서 달아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데 절반짜리 미립자 중 하나를 가늘고 긴 구멍에
집어넣어 회전을 바꾸자,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절반짜리 쌍둥이 미립자가, 앞의 반쪽 소립자의 바뀐 회전
방향에 즉시 조응을 하여, 자신의 회전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가! 이 실험은 절반짜리 미립자 두 개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히 차단한 환경에서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은,
두 번째 절반짜리 미립자가 자신의 회전 방향을 바꾼 것은 첫 번째 것의 방향에 대한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고
나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그야말로 즉각적으로 자신의 회전 방향을 바꿨다.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의미인가? 이를테면 우리는 10만 광년 떨어진 어느 입자의 반쪽짜리 소식(회전의 변화)을
지금 지구에서 동시에 당장 볼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 아닌가.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1935년 앨버트 아인슈타인도 그의 논문에서 어떤 물질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증거는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수학적으로 입증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것은 역설이었다.
그래서 이 이론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패러독스’라 불린단다. 더 나아가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가설도
이젠 증명되었단다. 무슨 얘기인가? 만일 두 입자가 서로 몇 백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도, 같은 물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애초에(빅뱅 이후?) 쪼개졌던 입자의 두 요소 그대로여서, 이 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전혀 분리된 게 아니다. 따라서 둘 다가 한 전체의 부분들이어서 하나가 어떤 영향을 받으면 다른 하나도 동시에
같은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보어는 이를 ‘거리 초월 현상’이라 이름 붙였다. 시·공간은 어떤 우주 현실 속에
존재하는 물리 실체라기보다는 우주정신 안에 존재하는 관념과 흡사하다고 봄이다. 이게 양자 물리학의 기본
원리라 한다.
초미세의 이런 물리학적 현상은 우리 현실계에서 목격담으로도 알 수가 있다고 하는데, 예컨대 이런 거다.
1930년대 영국에서는 새 몇 마리가, 우유 배달부가 배달해 놓은 우유병에서 뚜껑 여는 법을 알아냈다. 그 직후
유럽 전역의 새들이 갑자기 우유병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이 전달된 속도를 생각하면, 새 한 마리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리란 가정은 전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들은 참새도 아니고,
체구도 참새보다 작아서 영국 해협을 건넜을 가능성이 전무 했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의 저자, 톰 하트만은
그의 책에서 루퍼트 쉘드레이크가 그 같은 동물들의 거리초월성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했다. 멀리 떨어진
지식을 즉시 공유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을 쉘드레이크는 형태 공명(Morphic Resonance)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역시 이는 인간도 아인슈타인이나 보어가 입자의 특성을 설명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러한 양자 물리학적 내용들을 여기에 다시 인용을 하는 것은 무엇을 새로이 느껴서인가?
새로운 양자 물리학은 요컨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의식이고, 이 의식은 거리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종지를
알게 돼서일 것이다. 이런 사실의 앎은 또 우리에게 요즘 발전을 더 하고 있는 뇌 과학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던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요즘 뇌 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마음은 뇌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고,
마음이란 감각, 지각 등 육체적 속성의 반영일 뿐이고, 의식이란 것도 인간에게 감각적 속성이 없다면 있기
어려웠을 거란 견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법 하다. 또한 의식이 있음으로 해서 심신의 통합적 기능이나
생명 유지가 가능해 짐은 자명하다할 것이다. 뇌의 부위별 기능, 여러 부위별 네트워크의 기능에 점차 과학적
규명을 더해감에 따라, 뇌질환이나 뇌기능의 미묘한 특성에 대해서도 이해가 한층 더 높아졌음 또한 잘 알려진
바다. 하나 앞으로 기능성 MRI, PET등 첨단 의료 장비가 더 발전된 형태로 개발된다하더라도, 이 ‘의식’의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될 전망이 아니란 생각이다. 형태 공명이나 거리 초월성의 문제, 의식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은 물론
우주의 본질적 속성에 까지 부합될 수 있을 만큼 설득을 가지려면, 다른 식의 이해나 접근이 앞으로 더욱 더
보완돼야 하지 않나 싶다.
예컨대 이런 생각의 상정에서다. 사람이 죽으면, 의학적으로 의식은 없어진다고 본다. 외형상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하나 과연 완전히 그 의식 자체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양자 물리학적 소견에 의하면, 의식은 죽은
뒤에도 소위 ‘우주 스프’안에 녹아들어 가는 것 아닌가. 일본의 선사 다이닌 가타기리는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은
영(零)이 됩니다. 침묵의 세계로 되돌아 갈 때, 모든 것은 비인간적(not-personal)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설명 같다. 또 우리의 개인적 의식 너머에, 우리의 본래 모습이 있는데, 불교에선 이것을 ‘우리의 부모가
태어나기에 앞서 있던 나(父母未生前本來面目)’ 또는 ‘한 생각도 생겨나기 이전의 나(一念未生之前本來面目)’
-이것들은 선가(禪家)에서의 공안(公案)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주 스프’와 선가에서 말하는,
보편적 ‘나’와는 같은 의미로 봐도 틀리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주스프는
우주의식의 다른 표현이라 볼 때 그렇다는 뜻이다. 가능한가? 이슬람교에서 신비주의 분파로 여겨지는
수피교에서는 불교에서처럼 환생을 받아들인단다.
여기서 어느 수사는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생각, 경험 등이 모두 우주의 스프 냄비 속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이
함께 섞이는 거대한 우주 잡탕’이 만들어 진단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면, ‘우주 요리사’가 국자를 들고, 이
스프 냄비에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충분히 채울 만큼의 국을 떠서, 새로 태어날 아기에게 부어넣는다고 설명한다.
보편적 의식(우주의식)이 개인적 의식으로 나누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적 개념을 적용시키면,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는 개념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상상의 비약인가?
비가시적인 일이지만 그럴 듯해 보인다. 뭐, 달리 생각해도 상관은 없을 터다.
다만 양자 물리학은 우리에게 최소한 이런 메시지만은 남기는 것 같다. 평소 우리가 하는 일상의 행동이나 사고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다른 인간들에게 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그리 보면 동서양의
오랜 지혜들, 말하자면 예부터 공자 왈, 맹자 왈, 수시로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소리나 부처님이 강조한
선행이나 자비실천, 생명존중의 사상, 예수의 사랑 실천 같은 것들이 의미 있는 소식으로 와 닿는 것이다. 기도도
효력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모두는 그 마음이 모든 실체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분명 이 세상을 바꾸는데 있어 얼마나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는지를, 양자 물리학은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힘의 영향은 물론 자신의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일 테고, 그로 인해 남에게도
동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요컨대 현대의 양자 물리학은 우리에게 사랑의 물리학을
가르쳐 준 셈이고,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하나’, 그 이유도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고 해석되는 바다.
<주역>에 이런 말이 있다,
"집안에 있으면서도 하는 말이 선하면 천리 밖 먼 곳에서도 뜻을 함께 한다.
하물며 가까운 곳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는 말이 선하지 못하면 천리 밖 먼 곳의 사람들도 떠난다.
하물며 가까운 곳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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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승철 | |
첫댓글 양자물리학을 요약해 보면,
세상은 자신의 생각에 의하여 정의가 이루워저 간다는 것
우리 모두 옳바르게 삶을 사는데 노력해야 겠네요..
사랑과 인연 좋은정보 고맙습니다, 가장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란 남은 인생 웃으면서 즐겁게 사는사람이랍니다. 사랑찾아 인생찾아 ,정도주고 사랑도 받고 평생동안 좋은 추억거리로 남게하세요, 오늘도 즐거운 생활로 행복하시기바랍니다.
진리는 어느 시대나 톨일되고 변함없는 지침이지요
야자물리학 케볼수록 흥미진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