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선생은 회창(會昌)년간에 실의(失意)하여 강주(江州)를 유랑하다가 여산(廬山)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갈선공(葛仙公)의 제자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났다.
진인은 성씨가 정(鄭)이고 이름이 사원(思遠)이었다. 도호(道號)는 소축융(小祝融)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신의(神醫)라고 하였다.질병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부적을 그리고 주문을 외워
축융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병이 사라지게 하였다.
상고(上古)시대의 축융씨와 같은 부류이나 예전의 축융씨는 형산(衡山)에서
화덕천군(火德天君)으로 화룡(火龍)이라는 호(號)는 쓰지 않았다.
화룡진인이 여조의 골상을 보고는 맑고 신령(淸靈)스러워 속세의 밖에서 노니는구나.
곧 내단(內丹)의 몸을 단련하는 비결과 천령검(天靈劒)을 만들어 전수하엿다.
이른바 이 검법이 천둔검법(天遁劒法)이다
아울러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만리 안에 요사스러움 번갯불 검광으로 주살 함이(만리주요전광요(萬里誅妖電光繞))
흰 룡 한마리 허공을 날으는 것 같네.(백룡일편공중교(白龍一片空中矯))
예전에 이 칼로 삿 된 마를 베었으니(석지차검 참사마(昔持此劒斬邪魔))
지금 너의 집에 왕성한 번뇌를 끊어 버려라.(금증군가단번뇌(今贈君家斷煩惱)
그리고 이별 할 즈음에 당부하여 말 하기를 제자는 이 산에 머물러서 완전한 옥(玉)을
다듬어 만들어라 뒷날에 종(鍾)소리 들리는 곳에서 금단(金丹)을 단련하는 비결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가버렸다. 이는 선감(仙鑑)에서 먼저 종리노조를 만나고 뒤에
화룡진인을 만났다는 말은 맞지 않음을 알 수있다.
오직 본전(本傳)의기록이 이와 같음을 알 수있다.
또 징이록(徵異錄)에 이르기를 회창(會昌)때에 두번의 과거 진사 시험에 낙제하고
여산을 노닐다가 화룡진인을 만나 천둔검법(天遁劒法)을 전수 받고 뒤에 종리 조사에게
금단대도(金丹大道)를 전수 받았다는 차례가 정연(井然)하게 맞다.
이 때에 나이 오십이 되어 강주(江州) 망강정(望江亭)에서 일기(自記)에 이르기를
세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강호를 두루 유람하다 오십에 비로소 도를 이루었다.
혹은 말하기를 과거를 두번 보았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세번 보았다는 말이 비슷하다.
회창(會昌)때에 말 하기를 오십에 비로소 도를 이루었다.하나 이어서 대중원년(大中元年)에
비로소 도를 이루었으니 처음에 얻은 것은 적게 이룬(小成)것이다.
오십이세 이 때에 초당자기(草堂自記)에 이르기를 오십이세때에 내단(內丹)을 닦아
얻은 바 있었고 마음이 통하는 선비의 집에 의탁하여 정원 생활을 하였다.
세속 사람과 함께 거주 하였다. 또한 여산에도 자주 노닐었다.
본전(本傳)에는 속인과 섞여서 먹을 팔아서 재물을 만들어 이웃을 도와주었다.하였다
본전(本傳)에 이르기를 오십삼세에 여산(廬山)으로 돌아갔다. 귀종(歸宗)이라 함은 선종(仙宗)
에 귀의함이다.장차 대도를 여산에서 닦고자 함이다.선종(仙宗)은 현종(玄宗)이라 칭한다.
범인(凡)을 벗어나 성인(聖)에 들어가고 성인을 벗어나 신(神)으로 변화 하는 일이다.
초당일기(草堂自記)에 54세부터 59세에 이르기까지 여산(廬山)에 몸을 의탁하고
고요함을 수양하고(養靜) 부모가 계신 성(省)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구름과 노을 위에 누워(出臥煙霞)유불선 삼교(三敎)의 책을 읽었다.
호로병 하나 차고 산천을 구경 하였으나 몸은 가볍고 건강 하였다.
바야흐로 도의 형체가 완전 해져가고 바른 마음을 정립한 것이 이 시기이다.
라부산(羅浮山)에 노닐고 있을 때 라부도사(羅浮道士) 가 시(詩)를 주었다.
강목대중십일년(綱目大中十一年)상반기에 신선을 좋아하여 도사 헌원집(道士 軒轅集)이
라부산(羅浮山)에서 사람을 보내어 맞이 하였다.
대중십일년(大中十一年)에 여조께서 라부산(羅浮山)에 신선 헌원집(軒轅集)을 방문 하였다.
집(集)은 라부도사(羅浮道士)이다 동군(桐君)의 수련법을 얻어 라부산에서 수 백년을
지냈으나 얼굴이 노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조께서 방문 하였을 적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들어 가고 없어 홀로 반환산(盤桓山)안에서
홀연히 마(馬)선인이 와서 노닐고 있으므로 만나게 되었다.
서로 마음이 심히 기뻐 하였다. 마(馬)씨의 이름은 상(湘) 자(字)는 자연(自然)
항주(杭州)의 염관인(鹽官人)이다. 위백양(魏伯陽)으로부터 대도(大道)를 전수 받아
대중십일년(大中十一년)에 대지팡이를 빌려 대지팡이로 변화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대중십일년 봄에 가래나무 작대기를 타고 백주 대 낮에 신으로 변화하여 라부산에 올라
여조의 얼굴을 대하고 말하기를 대선백(大仙伯)이다.하였다.
헌원(軒轅)이 산으로 돌아와 돌다리(石橋)를 지나 돌 누각(石樓)에 두 사람이 있다가 내려와
맞이하니 한 사람은 마자연(馬自然)으로 대 지팡이 죽장(竹杖)에 표주박 술 병을 걸고 있었다.
리청건(裏靑巾)을 쓰고 노란 적삼(黃衫)을 입었고 삼으로 만든 신발(麻鞋)을 신었다.
허리에는 검은 비단띠(早條?)와 등에는 검을 메었고 손에는 먼지털이(拂子)를 잡았다.
공조(功曹)의 관리 같았다. 헌원집(軒轅集)이 물으니 마자연(馬自然)이 말하기를 우리
여선생은 속세를 초출하는 뜻을 세워 세상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집(集)이 깜짝 놀라면서 자연(自然)에게 말하기를 우리 어찌 이렇게 늦게야 만나 봅니까?
셋이 머리를 모아 마음을 말하고 떠날 때쯤 작별의 시를 주고 헌원집은 갔다.
여조께서 이 때에는 종리(鍾離)노조를 만나지 못한 때이다.
마자연(馬自然)이란 사람이 둘이 있는데 하나의 계보는 대중(大中)때의 사람으로
그 자(字)가 자연(自然)이다. 또 하나의 계보는 유해섬(劉海蟾)의 제자중에 한 사람으로
자연(自然)이 그의 이름이다.도가(道歌)에 보면 다섯번 나오는데 유해섬의 제자이다.
뒤에 사람들이 한사람으로 혼동한 것이다.유해섬의 숨은 자취를 알지 못한 것이다.
연(燕)나라 왕 유수광(劉守光)이 자칭 황제라 일컬을 때 도를 득도(得道)하였다.
후당(後唐)과의 사이가 떨어짐이 대중(大中)70년이 넘는데 어찌 유해섬이 여조를
만나지 못하고 유해섬을 따르는 손자 뻘 되는 사람에게 먼저 도를 이루게 하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