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인간의 본질 및 인간의 특수지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능이나 선택 능력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 ......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로운 것을 감각 충동, 본능, 연상적 기억, 지능, 선택 능력 등에 무엇인가가 보태지는 데서 찾는다 해도, 그것을 역시 심적 생명영역에 속하는 기능이나 능력을 본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본질이라 하더라도 심리학이나 생물학의 대상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새 원리는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새 단계가 아닐 뿐 아니라, 생명이나 심성이 현현(顯現)하는 단계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일반에 대립하는 원리요, 따라서 인간 내부의 생명에도 대립되는 원리다. 이 원리는 참으로 새로운 본질적 근원사태로서 자연적 생명의 진화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이스 사람들은 이미 이런 원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이성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오히려 이에 대해 하나의 포괄적인 단어, 즉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정신은 확실히 이성의 개념을 포함하지만, 이념의 사고와 함께 일종의 직관도 포함한다. 즉 근원 현상 혹은 본질적 내실(內實)에 관한 직관과 또 호의, 애호, 후회, 경탄, 행복, 절망, 자유, 결단 등과 같은 특정한 단계의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이 유한한 존재의 내부에서 드러나는 그 작용 중심을 인격이라고 부르며, 이를 모든 '기능적'인 생명 중심과 준별(峻別)한다.
(2) ...... 동서양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특성과 이성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의 철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이러한 두 성질을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특성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동물학적 특성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특성을 살려야만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견해는 다소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이성적 측면과 함께 생리적, 기본적 욕구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3) 사회 생물학은 현존하는 모든 생명 종(種)들이 진화의 산물이며, 생물학적 진화를 초래하는 것은 유전자 재조합,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 선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다. 사회 생물학은 행동 방식, 특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의 사회적 행동에 진화론적 사고를 적용한다. ...... 사회 생물학은 생존, 즉 번식의 성공이 최고의 원리임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도 번식을 위한 일이거나 생존 경쟁 속에서 자신의 최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다.
사회 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유전이론이다. 개별적 학습이 중요하다는 것과 외적인 영향에 의한 행동이 변화될 가능성은 당연히 인정된다. 그러나 입론의 근거가 되는 명제는 (사회적) 행동을 유전자가 조종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회 생물학은 생물체를 유전자에 의해서 조종되는 생존 기계로 본다.
인간도 사회 생활하는 생물이라는 명제를 발판으로, 사회 생물학은 진화 - 유전자적 모델을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적용시킨다. 여기에는 도덕적 행위도 포함된다. ...... 도덕도 진화의 산물로 해석된다.
(4) 베일에 가려졌던 인체의 신비가 벗겨지면서 생명 공학 분야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인간 유전자 완전 해독은 사람의 유전체에 어떤 유전 정보가 담겨 있는지를 밝혀낸 혁명적 사건이다. / 수십 억의 인류가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니는 이유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등 네 가지 염기서열로 구성된 DNA란 유전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유전자는 30억개 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 연구 결과 이들 염기가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밝혀진 것이다. / 전 세계가 인간 지놈 발표에 열광하는 이유는 염기서열을 이용해 인체의 신비가 완전히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즉 유전 정보를 통해 타고난 외모나 유전병은 물론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 질병에 대처하는 방식,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도 예측 가능한 시대가 온 것이다.
(5) 자기 인식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했다. 오늘날 그것은 시대적 소명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통찰이 종(種)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존립을 결정할 수 있을 듯하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이러한 자기 인식을 고양하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의무에 속한다. 단,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진화의 그 어느 것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들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른 종들처럼 그들 역시 얼마든지 멸종될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진화의 역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 과정을 스스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상(非常)한 것으로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결단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