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멋진 테마의 여행인가.
낭만에 목마른 4인의 로멘티스트들이 만추의 낭만을 찾아 떠나는 날.
한겨울 찜 쪄 먹을 추위와 바람이 깜깜한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도심의 포도 위를 휘몰아치고 있
었다. 날씨가 은근히 우리의 여행에 심술을 부리는 듯 했으나 아이 같은 어른들, 우리 4인은 추운
날씨에 몸은 비록 움츠렸으나 가슴만은 풍선처럼 부풀어 나의 늙은 애마에 몰을 싣고 왕복 500키
로의 대 장정에 올랐다.
안전 속도와 약간 헤맨 탓으로 예상보다 1시간 정도 늦은 10시 반경에야 진메마을 가는 어귀에
들어 설 수 있었다.
맨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국내 5대 강 중에 유일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강, 섬진강. 그 강의 중
상류에 속하는 강물이었다. 강이라 하기엔 수량이 다소 적고 냇물이라 하기엔 좀 큰 아담한 강물이
산 그림자를 품고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고 있으니 강물은 당연히 우리의 반대로 흐르리라 생각했는데 의외
로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어느 지점에선가 휘돌아 흐를 모양이다.
초겨울의 삭막한 주위 풍경 탓인지 강물은 너무 차고 쓸쓸해 보인다. 그런 만큼 맑고 투명해 보이
기는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고요히 머물러 있다. 사람도 물고기도 꽃의 향기도
물장구 치는 아이들의 웃음도 별과 달의 낭만도 김시인의 글 속에 그토록 아름답게 등장하는 징검
다리마저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건너편 수면 위에 유유히 떠 있는 한 무리의
청둥오리만이 그나마 살아있는 풍경으로 남아 있다.
흐름을 잠시 멈춘 듯 잔잔한 호수 같은 수면 위로 불쑥 불쑥 솟아있는 검은 바위들은 다도해의 축
소판 같다. 맑은 물, 검은 섬들, 청둥오리, 약간 흐름이 빨라진 곳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닮은 물소
리, 어른거리는 산 그림자. 이 정도의 풍경들만으로도 도심에 찌든 우리에겐 그야말로 선경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왼쪽 넓은 강변 풀밭에서 흑염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고 오른쪽으론 새로 지
은 듯한 다소 큰 건물과 그 주위로 폐가 같은 초라한 건물 몇 채가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언듯 보인
다. 흑염소를 보고 염소 불고기가 저기 있다고 하는 최선생의 조크에 웃느라고 예사로 지나쳤으나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그냥 지나쳐 버린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던 바로 그 동네가 우리가 찾아
가는 최종 목적지인 진메마을 인줄을.
한참을 더 달리자 왼편으로 <천담리 수련원>이라는 간판을 단 아담한 학교 건물 같은 것이 보인
다. 이곳이 김용택 시인이 폐교되기 전 2년 간 동화 같이 아름답고 애틋한 사연을 엮으며 아이들을
가르쳤던 천담 분교였다. 정문은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고 사람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담이
없는 정문 기둥 옆으로 돌아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이들의 함성으로 꽉 메어졌을 운동장
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말라빠진 낙엽들을 몰고 간다. 휑뎅그란 운동장 귀퉁이에 잎을 다 떨구어
버린 자귀나무 한 그루와 모과나무 두 그루가 서있었다. 연분홍 꽃을 구름처럼 이고 서 있었을 자귀
나무는 겨우 말라빠진 잎 몇 줄기만 달고 있었고 앙상한 모과나무 가지엔 노란 모과 몇 개가 차디찬
하늘을 배경으로 쓸쓸히 매달려 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푸른 함성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이곳이 우리가 찾아온 목적지의 한 곳이기에 되도록 많은 시간동안 김용택 시인의 글 속의 자취를
느끼고 싶었으나 너무 추운 날씨와 돌아갈 시간이 신경 쓰여 사진 몇 장만 찍고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한 구비 모룽이 돌아가자 김시인이 그토록 정취 고운 마을로 묘사한 천담 마을이 있었다.
산이 가파르게 강으로 흘러내린 허리춤에 30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었다. 아이들이
타박타박 걸어다녔을 황토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있었고 마을 아래 징검다리가 놓였을 자리엔
콩크리트 다리가 놓였다. 인적마저 끊긴 듯 조용한 마을길에서 짧은 간짓대를 들고 감 따러 간다는
아이 넷과 만났다. 젊은이들과 아이들은 다 떠나고 없을 줄 알았던 동네에서 꼬마들을 만나니 반갑
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사람 사는 마을에 당연히 있어야할 아이들을 보고도 신기해하는 세태
가 되었다.
마침 어느 집 대문 안에서 무를 다듬고 있는 노부부가 있어 무 팔 것 있느냐고 하니까 대처에 나가
있는 자식들 줄 것뿐이라고 하면서 예닐곱 뿌리를 나누어주며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인심도 좋으
시지. 내가 5천원짜리 한 장을 할머니 자켓 주머니에 찔러 넣어 드리며 5천원 어치만 주세요 하니
까 큰 비닐 봉투 2개에 들기도 힘들만큼 잔뜩 넣어 주신다. 시골 인심은 아직도 넉넉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집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처마 밑이나 뒤란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곶감들
만 보인다. 가까운 한 집에서 얼핏 할아버지 한 분이 보여 곶감 팔지 않겠느냐고 최선생이 물었으나
아무 말 없이 닫힌 방안의 할머니를 불러낸다. "할아버지가 여든 둘인데 귀가 잘 안들려, 곶감은 우
리애기들 줄 것 뿐이여, 감 딸 사람이 없어 팔 곶감은 못 만들어" 한다. 최선생이 "만원 어치만 주세
요."하니 "우리애기들 줄 것 뿐인디."하면서도 걸려있던 곶감 몇 줄을 잘라준다. 사 가지고 차로 돌
아왔던 최선생이 우리아저씨가 곶감을 워낙 좋아한다고 하면서 만원 어치를 더 사야겠다고 하길레
가격이 싼 겁니까 하니까 한참 싼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나도 만원 어치를 달라고 하
니 "우리애기들 줄 것 뿐이여."하면서도 또 몇 줄을 잘라준다. 최선생과 내 몫으로 잘라내고 나니
처마 밑이 헐빈하다.
우리애기들 줄 것뿐이라고 하면서도 파는 걸보고는 "들도 논도 없는 이곳 사람들은 뭘 해서 먹고
살지."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시던 선생님 얘기가 생각나면서 눈에 보이는 현금과 아들 손자 간식
거리 사이에서 고민했을 할머니의 심정이 짐작이 가 마음이 짠하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없는 집이 없고 감나무마다 높은 가지에는 빨간 감들이 붉은 전구알 같이 점점
이 매달려 있다. "저 감들 우리가 따 가면 안돼요." 하니까 "그려." 하면서 그물 망이 달린 긴 간짓
대까지 내어준다. 소박한 인심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그물 간짓대를 가지고 감 따기를 시도했으
나 그것이 만만치 않았다. 한참을 용을 써도 한 개도 따지 못했다. 아하, 이렇게 어려우니 젊은이 없
는 동네에서 높이 달린 감들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구나 싶다.
골짜기 끝자락 구담 마을까지 찾아 들었으나 <꿈꾸는 섬진강>이란 사진첩에서 보았던 화사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찾아 볼 수 없고 초겨울의 횡덩그레 쓸쓸하기 짝이 없는 마을만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 눈에 이럴진대 옛 정취를 다 잃어 가는 고향 마을을 가까이서 보아야 하는 김용택 시인의 마음
은 오죽할까 싶다. 날씨마저 춥고 음산하여 가뜩이나 쓸쓸한 마을 풍경을 더욱 스산하게 하였다. 그
나마 최소한의 화사한 시골 풍경이라도 보려면 새봄에나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모두들 떠나가고 주
위의 풍경들은 예 같지 못해도 맑디맑은 섬진강은 변함 없이 산 그림자를 안고 저 멀리 아득히 휘돌
아 흐르고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강물은 방향을 바꾸어 휘돌아 흐를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냥
지나쳤던 진메마을을 찾았다.
앉으나 서나, 마루에 누워서나, 방에서 밥을 먹을 때나, 어느 누구네 집에서나 문밖만 내다보면 강
물이 보인다는 마을. 앞산이 길어서 긴 메(산) 마을이라고 한 것이 발음하기 쉽게 진메마을이 되었
다는 김용택 시인의 고향 마을. 시간에 쫓기어 마을에 들 생각은 못하고 먼발치에서 아득히 바라만
본다. 흑염소가 풀을 뜯는 넓은 강변 건너 좁은 밭 두어 배미 지나 산이 막 경사를 이루는 허리춤에
강을 내려다보고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러나 길에서 비스듬이 올려다 보이는 집들의
상당수는 폐가처럼 보였고 인적 또한 묘연하다. 마을 앞으로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의 수호신
처럼 우람하게 버티고 서 마을의 유유한 역사를 일러 주는 듯하다. 나무 주위엔 수석처럼 잘 생긴
검고 윤기가 흐르는 큰 바위들이 나무를 에워싸고 있었다. 동네 뒤로 멀리 양봉용 벌집들이 하얀 보
온 모자들을 눌러쓰고 총총히 앉은 모습과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들이 이곳도 사람 사는 동네라고
말해 줄 뿐, 마을은 적막 속에 묻혔다.
아! 진메마을.
과연 이곳이 어느 시인의 가슴속에 옹달샘처럼 새록새록 솟아나는 고운 시심에 불을 질렀던 그 마
을이란 말인가. 아이들 함성 잦아 진 골목길엔 야윈 낙엽만 찬바람에 아우성이고 밥 짓는 연기 한
올 오르지 않는 집들이 퇴락한 고독만 이고 앉았다. 처마 끝에 주인 닮은 곶감들이 무료하게 매달려
있고 인적 잃은 강물만 약해 빠진 허리로 웅크린 산 그림자만 쓸어안고 흐르고 있구나. 아름다웠던
옛날의 추억만 간직한 채. 그래도 저 강물 속내엔 지나간 시절 고운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봄날 아지랑이 속으로 민들레, 자운영, 복사꽃이 다투어 피던 강변. 바위 틈 물고기들과 숨바꼭질
하며 물장구 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오색 단풍이 바람을 타고 나비처럼 내리던 가을 해질 녁. 짝
사랑의 하소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운명을 안고 무작정 강물 속으로 뛰어 들던 하얀 눈송이들.
유리알 같이 얼어버린 강 위로 눈가루 날리며 노루 토끼 뛰어 건너던 강심. 내 유년과 닮은 기억들
을 저 강물 또한 고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을.
돌아오는 길에 삼밭에서 예쁜 새들을 보았다. 삼색의 아름다운 깃을 가진 비둘기보다는 약간 작은
이름 모를 새였다. 빽빽한 삼나무 가지 사이로 인기척에 놀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그들을 카메라
에 담아보려 애를 썼으나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날아 가버려 나중엔 무턱대고 셔터를 눌러 댔는데
다행히 나중에 컴에 사진을 띄워보니 희미하게나마 사진에 잡힌 모습이 있었다. 이곳 자연을 닮아
서 그런지 예쁘기도 하다. 무슨 샌지 윤무부 박사에게 물어 볼까나.
무 밭, 배추 밭, 1자를 빽빽이 세워놓은 듯한 삼나무 밭, 시멘트 길바닥에 널어놓은 콩대 깻대, 풀
을 뜯고 있는 흑염소, 모이를 쪼고 있는 토종 닭, 감나무, 간짓대, 자귀나무, 모과나무. 탱자나무 울
타리에서 텃밭 아래로 낙엽처럼 우수수 내려 않던 참새 때들. 어릴 적 추억들이 오롯이 베어있는 풍
경들에 그런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최선생과 나는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듯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신이 났고 정선생님과 김선생은 낮선 농촌 풍경에 신기해하면서도 추위에 움츠려 좀은 뜨악한 표정
이다.
순창에서 다소 늦은 점심을 먹고 서둘러 돌아오는 차안에서 이번 주 시 강의 수업을 받았다. "달리
는 차안에서 강의 들으며 수업하는 경우는 우리뿐일 거야."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의 문학강의라는
기상천외한 미증유의 경험을 하며 못다 채운 낭만에 대한 아쉬움을 달랜다. 그래도 모처럼 자연에
머물렀다온 만족감에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다. 오는 길은 다소 속력을 낸 덕분에 예상보다 다소 빠
른 5시 50분에 출발지 서면에 도착.
추웠던 날씨와 쇠락해 버린 마을 풍경들로 인해 다소 아쉬움은 있었으나 그래도 오늘의 여정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