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품
------------------------------------------------------------------------------------------
2001.3.16(JDTS 강의) 최래원 선교사(YWAM)
정리 : 김상수목사
1. 인간의 내면적인 많은 문제들은 그의 내면에 있는 성품에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성품을 변화시켜서 많은 은혜를 체험하게 한다.
2. '바라봄의 법칙'
1) 바라봄의 법칙
우리들에게 특권이 있다면, 이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묵상의 유익도 하나님과 친밀감을 나누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람봄'의 법칙이다. 즉 내가 끊임없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내면의 모습들이 변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배우고,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2) 초대교회 성도들의 주님을 닮아가려는 모습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삶 속에서 모델이 되신다. 특히 요한일서에서 사도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섬기고, 느낄 수 있는 분임을 말한다. 이처럼 요한이 말한 이유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야고보등 사도들을 통해서 좀 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꾸어지기를 원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내가 좀 더 가까이 주님을 닮아가기 원하는 마음'이 넘쳐야 한다. 이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많을 때 세상이 변화한다. 주님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3.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들(3단계)
1) 기초적인 관계 : 사회 속에서 맺는 일반적인 정보들에 의존한 관계
2) 인격적인 관계 : 조금 더 깊이 있게 그 사람을 아는 것(그의 배경, 장단점, 내면의 고민 등)
3) 친밀한 친구관계(요15장) : 그의 삶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헌신의 관계(히브리서는 이것을 언약의 관계로 표현) 이것은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도 적용되는 관계이다(나와의 관계가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
4. 인간의 구성(영, 혼, 육)
성품의 영역은 이중에서 혼(魂)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의 혼적인 영역에는 우리 스스로를 묶고 있는 부분이 있다(낮은 자존감, 모토 등). 이것이 우리를 붙잡고 자유함 속에서 살 수 없게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이 혼적인 묶여있는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성령께서 나의 혼적인 부분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의 혼적인 마음의 부분을 새롭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로마서12:1-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혼적인 부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내 속에 있는 포기되지 않은 혼적인 부분들(자존감, 나의 영역, 성품, 기질 등)이 내가 하나님 앞에 제물되어지지 못하게 한다. 혼적인 영역이 변화될 때 육체적인 부분도 변화된다. 왜냐하면 행동은 마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5.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주님을 뵈옵기를 간절히 바라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이 목표이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표현은 "야다"(안다)이다. 이것은 서로의 내적인 영역을 알고, 거리낌이 없이 관계를 맺는 것이다. 벽이 없는 관계이다. 이것이 친밀한 관계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힘이 없기를 바라신다. 나의 마음 속에서 중간중간에 존재하는 많은 장애물들이 없어지기를 바란신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듯한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면, 기쁨과 소망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연인을 사모하듯이 주님과의 관계를 갖아야 한다. 예컨데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에 대한 노래의 내용들이나,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이나 하나님을 기다리던 심정이 바로 이런 마음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모하며 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신다.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우리가 주님과 날마다 친밀감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남으로 이것이 잘 유지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새벽 미명부터, 또는 저녁에 한적한 곳에서 오직 '아버지의 얼굴을 뵙게 위해서' 그곳에 가셨다. 그리고 주님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뵈옵기를 기다렸다.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나아가고, 기다리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닮아가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동행(同行)하기를 갈망하고, 갈증을 가져야 한다. 예컨데 이성봉 목사는 주님의 손목을 잡고 다녔다. 최래원 선교사는 군대 시절에 문열고, 닫을 때도, 주님이 먼저 나가시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친밀감을 나누었다. 그는 그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존중해 주고, 인격적으로 높여드리기 원했다.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주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대화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 나를 존중해 주심을 발견했다. 과연 우리들이 정말로 주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가? 내가 주님을 멸시하는 만큼 주님은 사단에게 멸시를 당하신다. 반대로 내가 주를 존경하고, 존대하면 주님은 그만큼 이 세상에서 존중히 여김을 받으신다.
우리가 성품을 배운다는 것,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다(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 주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직분으로서 만나지 않는다. 우리의 본래의 모습으로 만나기 원하신다. 주님도 자신의 직분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셨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이렇게 되어가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신문이나, TV 드라마 보다도 주님 만나기를 더 원하신다.
6.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삶(벧후1:2-4)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특히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설 때, 우리는 또 다시 전반기 동안 범했던 실수들을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한다(축구경기의 전후반과 중간휴식시간).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갖을 수 있는 방(房, 장소)를 가져야 한다. 이것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과 동행할 수 있다. 식당에서도, 운전 중에도.....
(1) 벧후1:2-4을 보자. 주님은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2-4)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삶)"(4), 이것이 주님의 목표이자, 우리의 목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3)"이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방법(약속)이다. 주님은 이러한 높은 차원(목표가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특히 "은혜와 평강"(2)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이르도록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2) "은혜"에 대한 나눔
1) 은혜와 고난(벧전 5:10)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은혜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출발이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며", "견고케 하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고난이 주는 유익(有益)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붙이심으로 나를 발견하게 하신다. 나를 훈련시키신다.
하나님은 다윗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울왕이라는 고난을 주셨다. 즉 사울을 통해서 다윗 안에 있는 사울적인 요소를 변화시키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바로 나를 봐야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 우리 속에 있는 다윗속에 있던 사울 요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다. 이것이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녀들 속에 내적인 나의 사울적 요소가 생긴다. 마치 압살롬 속에 다윗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매일 매일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광야에서도 샘이 솟아날 수 있다.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불안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는 있는 이유는 우리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나를 굳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주님에 대한 신뢰). 우리가 현실을 붙잡아야 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하겠는가? 현실을 붙잡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온다. 그러나 주님을 붙잡으로 평강(平康)이 온다.
모든 것이 준비된 것이 은혜가 아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이 은혜를 더욱 풍성히 주신다.
2) 은혜와 양육(딛 2:11-13)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양육(養育)(12)'이다. 하나님은 나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 정욕을 버리고, 근신과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과 타협하는 순간에 끝난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한 순간이다. 그래서 그 은혜를 체험함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변화되게 된다.
(3) 평강(平康)에 대한 나눔(히13:21)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1) 주님은 그의 평강의 성품을 통해서 우리 속에 놀라운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의 평강은 낙심을 변화시켜서, 영적인 부흥을 주시는 성품이다.
2) 우리에게 평강이 필요한 이유
하나님의 뜻을 명백히 알기 위해서 평강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는 평강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반대로 평강이 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온 뜻은 아무리 상황이 준비되었다해도, 평강이 없다.
평강(平康)은 마치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마치 쓸모없는 밭 속에 감추인 보물과 같다.
하나님은 이 평강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성품 속에서 참여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평강은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을 대변한다. (우리는 날마다 묵상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가는가? 아니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나아가는가?)
7.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성품
(1) 두 종류의 크리스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Knowledge about God)이다. 이는 명목상 그리스도인, 성장고 자람이 없는 영역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둘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Knowledge of God)이다.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말한다. 믿음의 사람, 날마다 영적인 성숙을 가져오는 사람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장). 하나님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알아가시기를 원하다.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 가운데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성품(눅15장)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반응하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셨다.
또한 성령은 계시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우리의 아버지이신지를 알게 하신다. 눅15장의 탕자 이야기의 핵심주장은 '아버지'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갈 때, 특히 아버지로서의 성품을 알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시내산 아래에서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기 자신들의 하나님은 못되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관하여' 알 뿐이였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친히 가졌다.
마7:22-23을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이 말씀에서 주님이 능력을 행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책망했던 이유는 그들이 인격적(人格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는 알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관계는 없었다.
우리들의 모든 능력있는 사역의 기반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關係)이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인정하여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가? 렘9:22-23을 보라.
"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3-24)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 속에 나타내는 삶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며, 용맹한 백성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가장 용감하고, 강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아는 겸손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강함과 용맹이 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강함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사가 되신다.
8.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알아가야 하는가?
(1)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모양)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에(창1:26-27).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틀 안에서 지으셨다. 그래서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정의(知情意)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두려움은 감정이 아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뒤에 온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제외한 모든 감정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감정(感情)을 주심으로 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윤택하게 하셨다.
에덴동산은 정서적으로 완전(完全)한 곳이었다. 아담은 이러한 지정의를 가지고 에덴을 다스렸다. 보통 아담의 IQ를 3000정도로 추정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러한 아름다운 지정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했다. 사단이 이러한 꼴을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다.
(2) 성품을 표현하지 않으면, 큰 위기가 올 수 있기때문에(창4;1-8)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1-8)
표현되는 성품의 감정 : 가인은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분노함.
그런데 하나님은 '왜'분노를 내는지 질문 하셨다. 이것은 분노의 감정을 싫어하지 않은 것. 즉 하나님은 가인의 분노를 받아들이셨다.
비(非)표현된 성품의 감정
상대의 분노를 받아주지 않으면, 그 분노가 그 사람의 내면(內面) 속으로 잠수해 버린다. 가인은 하나님이 분노에 대해서 나누기를 원할 때,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 속 '비표현의 감정 영역'에 저장해 버렸다. 이렇게 될 때 심각한 상황이 생긴다. 속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살인하기도 한다. 가인이 죽인 것은 동생이였지만, 정말 가인이 죽이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이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사단이 이 비표현된 정서적 영역을 붙잡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사단은 이러한 잘못된 메시지(정보)들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심각하게 부추킨다. 그래서 신앙에서 떠나가게 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성품이 표현되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을 미워할 때,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 화살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매우 위기가 온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 모든 우리들의 감정과 모든 것들을 마음껏 표현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十字架)이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처리했을 때, 그 미운 사람을 다시 만날 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주일날 그 미운 사람을 보았을 때,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피해 다니다가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9. 하나님의 성품의 3영역
1) 이미 닮은 성품 : 지정의
2) 닮을 수 없는 성품 : 전지전능, 창조자, 지존 등 등
3) 닮아가야 하는 성품 : 사랑, 긍휼, 자비, 공의, 절제 등등
이중에서 3번째 영역이 우리가 공부하고, 알아가야 할 영역이 된다.
10. 성품성경공부 작성(별지 참조)
11. 성품을 공부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들
(1)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가져온다.
요한일서에 보면 영적성숙단계를 말한다. 영적인 성숙의 단계는 '갓난아이, 아이, 청년,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단계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단계를 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된다.
(3) 나의 성품의 변화가 일어난다.
(4) 풍성한 내적인 생활을 누리게 된다.
(5) 우리 안에 정서적인 불안감이 사라진다.
(6) 다른 사람과 더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부부관계에서 더욱 그렇다.
12.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려 할 때 가질 중요한 태도들
(1) 겸손함
나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
(2) 성실함(시37편)
성실을 밥먹듯이 행해야 한다. 시78:72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성실하심을 보고 그를 택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72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78:72)
시간을 정하고, 날마다 겸손과 성실함으로 나아가라.
(3) 갈망함
"당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굶주려해 보았는가?"(죠지 바우어)
시11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함으로 마음이 아플 정도로 갈망한 것을 고백하고 있다(아픔이 있는 사랑). 다윗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교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가 어떻게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굶주려 하고, 갈망하고, 목말라하며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는다. 우물을 주신다. 목말라 나오는 사슴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뱀이나 돌을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보여주신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늘 굶주려 있어야 하나님을 사모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요, 심령이 굶주려 있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때문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