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이운순
지난 1월 말경이다. 더 나은 수필작품, 수필의 고급화를 위해 한 달에 두 번 도서관에 모여 함께 토론하고 공부해온지 햇수로 삼년 째다. 설 명절이 지나고 첫 모임을 도서관 근처 칼국수 집에서 만났다. 덕담이 오고가는 새해인사가 끝나자 유일한 50대가 먼저 보따리를 풀었다. 성당에서 꽃꽂이 봉사를 하는 틈틈이 짠, 알록달록 예쁜 색색의 원피스모양 수세미가 펼쳐졌다. 공산품이 아닌 정성과 손품 들어간 선물에 탄성이 터졌다.
막내 도발에 가장 연장문우님이 당신의 사랑보퉁이도 풀어내신다. 포장된 고급 핸드크림에 각각의 이름을 붙인 선물이다. 팔순을 지나시고도 수필열정만은 젊은 후배들의 추종을 불허하신다. 아우 같은 문우들에게 주려고 백화점을 돌며 향을 고르고 일일이 포장하고 이름을 적어가며 행복하셨을 문우님, 그 정성과 사랑에 감동은 배가된다. 이에 질 수 없다는 듯, 동아리 분위기메이커 또 다른 문우님이 패브릭으로 만든 코사지를 쏟아놓으신다. 평소 자연염색이며 옷 짓는 걸 좋아하는 재주 많은 문우님이 각각의 색감과 문양으로 개성 있게 만들어낸 코사지다. 어떤 색이 잘 어울리는 지 서로서로 가슴에 대보느라 시켜놓은 음식을 먹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포만감으로 가득 차다.
가슴 따듯한 사랑의 선물로 깊이가 다른 문우님들의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다. 수필동아리 생활을 여러 해 하면서 가슴 따듯한 분들을 참 많이 만났다. 예술 안에서의 문학, 그중에 정의 문학이라는 수필, 그래서인지 수필작가님들은 가슴이 참 따듯하다. 작은 마음을 내어 수세미를 짠 손길, 이향 저향 맡아가며 핸드크림을 고르던 문우님, 코사지를 만들며 누구에게 잘 어울릴까, 누군가를 떠올리며 매 만졌을 따듯한 그 정경이 너무 좋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따듯한 가슴을 전해보고 싶다. 작지만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마법 같은 선물을 나도 경험하고 싶었다. 우선 색색의 주방수세미를 짜고 머잖아 만날 고향친구들에게 동그라미모양 원피스모양의 수세미를 세트로 나누리라. 드디어 내게도 선물할 기회가 온 것이다.
여러 색깔의 실을 사놓고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뿌듯함으로 마음이 급해진다. 뜨개질이야 소싯적부터 해 왔으니 딱히 어려울 것도 없다. 일전에 선물 받았던 수세미를 이리보고 저리보고 어림짐작으로 머릿속 그림을 그려가며 한두 개를 성공하니 그 뒤는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기다리던 모임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식사시간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장단이다. 세월의 흐름 따라 친구들이 더 좋아지는 나이, 저마다 손주자랑이며 곧 맞게 될 며느리이야기, 사위이야기로 끝이 없다. 신종바이러스가 정식명칭도 얻기 전이었으니 나중에 닥칠 세균과의 전쟁은 상상도 못할 때였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다가 설거지를 하다 만난 이 난감함, 수세미 매듭부분이 풀려 너풀거리고 있었다. 같은 패턴으로 색을 맞추고 나름 신경을 쓴 수세미선물인데 낭패였다.
친구들도 혹시 같은 현상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매듭을 잘 짓지 않는 건 나만의 버릇이었다. 나는 매듭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엄지발톱에 작은 구멍을 메울 때도, 뒷굼치의 구멍을 꿰매도 나는 매듭을 짓지 않고 실 끝을 접어 감치는 방법으로 대신했다. 이 흔치않은 버릇의 시작은, 어릴적 어머니가 꿰매준 양말바닥의 굵은 매듭이 여린 발바닥신경을 거슬려서 일 것이다. 그때 이후 단추를 달 때나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매듭을 생략하게 되었던 것 같다. 더구나 손뜨개를 할 때는 나중에 풀 때를 감안해 느슨하게 마무리를 해왔었다. 모두 생활에서 비롯된 버릇인 셈이다. 이 상황을 친구들도 벌써 겪었을까, 창피함에 입도 벙긋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
초여름, 기다리던 2집이 나와 책 나눔을 하고 덕담이 오가던 얼마 전이다. 등단 이십여 년이 넘는 선배님과 동년배, 미등단 새내기작가님들이 건네는 애정 어린 응원 글이 단체 방에 길게 이어졌다. 안 그래도 들떠있던 마음이 애드벌룬처럼 붕 떠올랐지만 이내 나를 추스른다. 자칫 인격이 덜 여문 사람이 자만하게 될까 걱정이 앞서서다. 그 부분 어딘가에서 만난 고백과 같은 응원문구에 가슴이 울렁인다. ‘각을 많이 세웠던 내게 동그랗게 다가온 운순샘의 글맛은 선하고 온유합니다.’ 평소 솔직담백한 문우의 말이다. 언제 그녀가 내게 각을 세웠었나, 평소 미지근한 성격은 맞지만 둥글다는 평을 들을 만큼 내가 유하긴 한 걸까. 비교적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에 서툰 사람이라 맞서는 걸 못견뎌한다. 반면 파릇한 문우의 당찬 솔직함이 싫지 않았다. 내게 없는 성정이니 부럽기도 했으니까.
살아가면서 매듭을 잘 지어야할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의 매듭은 더욱 그러하리라. 신심이 돈독한 불자 친구가 인연법의 대해 조언을 해 준적이 있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인연을 짓기보다는 이미 맺은 인연에 최선을 다하라는 조언이었다. 엉킨 실타래가 아닌 함부로 풀리지 않는 견고한 매듭, 지금 내 곁에 있는 인연의 소중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
작가 프로필
이운순수필가, 문인 권익옹호위원/ 2008,계간『에세이 문예』수필등단
사)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에사모 이사/청향문학회 회원
제4회 청향문학상/15회 에세이 작가상 /제8회 본격수필 토론 작가
저서『비타민이 열리는 나무』2016 /『향기는 바람에 섞이지 않는다』2020 (경기문화재단 선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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